우리나라에는 통화정책만 존재하지 환율정책이란 괴상한 정책수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금융을 교과서로만 배운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에는 그 괴상한 환율정책이 존재한다. 하지만 물가의 안정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삼는 통화정책과는 달리 환율정책에는 별다른 원칙도, 철학도 없으며 따라서 비용은 명확한데 반해 실익은 매우 불투명하다. 이런 정책을 미개하다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연초만 해도 1200을 하회하던 환율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상승세를 거듭했고 이에 정부는 대량의 달러를 풀어 환율을 낮추려 했다. 1분기 말부터 2분기 말까지 우리나라의 외화보유고는 약 300억 달러가 급감했는데 이 중 거의 대부분이 1200원 초반 수준에 달러를 매도하는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1400원이 넘는 환율을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무려 15%나 낮은 수준에 외화보유고를 풀기로 결정한 사람은 국회에 불려가지도 않았고 책임을 지지도 않았으며 국민들에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시장의 향방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장기적인 적정 수준의 가격이 얼마인지 추정할 수는 있다. 연초의 경제지표들을 보면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당시의 환율 수준이 균형가격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투자금은 계속해서 대한민국을 떠났고 무역수지는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으며 다른 주요국 통화들 역시 약세를 지속했다. 하지만 정부는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에 터무니없이 많은 외환보유고를 푸는 터무니없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그런 개입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국제수지 및 국내의 불균형을 악화시켜 경제 전반에도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왜 이런 미개한 정책을 펴다 외화보유고를 털어먹었을까*. 이는 그들이 무능하면서도 오만하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원자재 가격과 금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급변했고 한국을 둘러싼 경제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무능한 정책결정자들은 그런 거시환경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이런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든 일 아닌가) 그저 원숭이처럼 재작년에도 그 이전에도 환율의 상단이 1200원이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하겠거니 하며 멍청하고 게으른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게다가 무역수지와 자본수지가 모두 적자를 찍는 나라의 통화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루나를 풀어 테라의 값어치를 달러에 페그하겠다는 권도형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만한 액수를 풀다니,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이 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었나 보다. 게으르고 멍청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내린 판단이 어떻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겠나. 권도형이 여러 개미들의 가상자산을 깨끗하게 지워버린것처럼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며 유지해 온 외환보유고의 상당액이 몇 주 몇 달 만에 대한민국의 계좌에서 빠져나갔다.
지난 목요일, 일본 중앙은행은 엔 약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대대적 개입을 단행했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미국의 빠른 금리 인상으로 자국 통화가 달러 대비 절하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연초부터 지속적으로 외화보유고를 소진한 것에 반해 일본은 환율이 25% 상승한 후 대대적인 개입에 나섰다. 둘 중 어느 쪽이 한정된 외화자산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했는지, 둘 중 어느 나라의 경제가 균형점에 더 빨리 도달할지 굳이 분석해 볼 필요가 있을까. 한국의 대중문화는 이미 일본을 넘어섰는데 한국의 관료들은 어찌 딴따라만도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까.
작년 정부는 한국 시장을 MSCI 선진국 지수에 포함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한국의 주식시장이 작아서도, 거래량이 모자라서도, 안보환경이 불안정해서도 아니었다. 바로 국제표준에 맞지 않는 후진적인 제도 때문이었다. 이처럼 많은 경우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미개한 관료들 덕이다. 세계 1위의 반도체 회사를 만든 사람이 괜히 한국의 관료들을 3류라고 지칭했겠는가.
문제는 그 관료들의 어리석은 짓이 가져온 비용들은 늘 우리 일반 국민들에게 청구된다는 점이다.
* * *
하지만 모든 관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제껏 여러 차례 한국은행의 줏대도 없고 원칙도 없는 통화정책을 비난했지만 이창용 총재가 이끄는 한국은행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전의 글에서 밝힌 대로(링크) 현재의 환경이 과거와 다르다면 중앙은행은 성장과 일자리를 희생시키더라도 인플레를 먼저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정책결정권자 입장에서 매우 어렵고도 고통스러우면서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이창용 총재는 이에 대해 명확한 시그널을 내놓았다.
중앙은행이 언변을 모호하게 할 때와 명확해야 할 때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모호해야 할 때 명확하고 명확해야 할 때 모호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좌고우면하던 전임자들과는 사뭇 달리 이창용 총재는 시장과 대중들에게 현 상황에서 통화정책의 우선순위가 무엇이고,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노련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설명했다. 자산 시장은 그의 명쾌한 발언들을 꺼릴지 모르나 정책결정자가 올바른 데이터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자신감 있게 정책을 설명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워낙 불확실한 시대인지라, 미래에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 가장 훌륭한 중앙은행장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올해 소진한 외환보유고는 전체 외환보유고의 10% 미만으로 외환위기를 촉발할 수준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하지만 당국자들이 이런 멍청한 판단을 계속한다면 먼 미래에도 안전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