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31.

올브라이트의 브로치,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그리고 김정숙의 까르띠에

현대사에서 브로치로 가장 유명한 여성을 꼽으라면 지난 3월 22일에 작고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체코의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었던 그녀는 미소 대립이 첨예하던 70년대부터 세계 외교사의 거두였던 브레진스키 밑에서 일했으며 민주당 대선후보들의 외교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고 유엔 대사로 임명되는 등 국제정치, 특히 동유럽과 소련 문제에 가장 정통한 미국인 중 하나였기에 여자였던 그녀가 클린턴 행정부의 국무부 장관으로 거론되었을 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푸틴이나 김정은 같은 독재자 앞에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았던, 미국판 철의 여인과도 같았던 그녀는 동시에 수려한 패션 감각으로도 유명했다. 단순히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의상을 세련되게 소화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외교적 메시지를 브로치로 암시하곤 했다. 푸틴을 견제하기 위한 자리에 그녀는 미사일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였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그녀를 독사 같은 여자라고 비난하자 그녀는 이라크를 방문할 때 뱀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평화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엔 나비나 꽃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하기도 하고 2000년 평화 프로세스를 구축하기 위해 김정일을 만날 때에는 미국이 진심으로 북한과 협정을 맺기를 원한다는 신호로 심장 모양의 브로치를 착용했다. 결국 그녀는 적대 관계 종식, 평화 보장 체제 수립, 미국 국무장관 방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미 공동코뮈니케 발표를 이끌어냈다. 나의 브로치를 읽어라, 라는 문장은 그녀의 외교술을 상징하는 말이자 자서전의 제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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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신구로 유명한 또 한 명의 여성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들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던 공주였지만 이윽고 닥쳐올 험악한 시대는 교양과 우아함이 아닌 그녀의 피와 살을 탐하고 있었다. 어머니 테레지아 여제는 프러시아의 압박이 거세지자 가까운 협력자를 찾기 위해 오랜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혼인동맹을 맺기로 결정했고 그 적임자로 앙투아네트를 꼽았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시작부터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투른 프랑스어를 구사했던데다 오랜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탓에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를 싫어했고 일부는 그녀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앙뚜아네트가 사실은 동성애자라든지, 혹은 시동생과 불륜 관계라든지 등등. 그런 대부분의 가십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대중들에게 그런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렇게 민중의 불만이 무르익어가던 시기, 그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사건이 터졌다. 루이 15세는 자신의 애첩에게 줄 선물로 무려 200만 리브르에 달하는 고가의 목걸이를 주문했고 보석상 샤를르 뵈이머는 전 세계에서 540개의 다이아몬드를 모아 이 화려한 목걸이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 때 갑작스럽게 루이 15세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난데없이 고가의 물건을 떠안게 된 보석상은 새 왕비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넘기려고 했지만 재정이 빠듯했던 왕실은 이를 거절했다. 그때 사기꾼들이 보석상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왕비가 목걸이를 사도록 중재하겠다고 꼬드겼고 절박했던 보석상은 그만 속아넘어가 목걸이를 넘기고 만다. 무려 200만 리브르 짜리 보이스 피싱에 성공한 그 일당은 목걸이를 분해해 540개의 다이아들은 전 유럽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돈 떼인 채권자마냥 하염없이 대금 지급을 기다리던 보석상은 결국 왕비를 찾아가 잔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고 눈이 휘둥그래진 앙투아네트가 진상조사를 명령하며 이 목걸이 사건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비 앙뚜아네트는 이 스캔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대중들은 타락한 귀족들의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충격을 받았고 그 분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에게 향했다. 이후 이 소식을 들은 괴테는 목걸이 사건을 두고 프랑스 혁명의 서곡이라고 표현하며 이후 불어닥칠 피바람을 예고했고 사형을 선고한 혁명 정부의 앙투아네트 재판에도 이 목걸이 사건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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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한민국에는 김정숙이 있다. 지난 5년간 김정숙은 약 48회의 해외순방에 나섰는데 이는 이전 영부인들의 해외순방이 약 20여 회에 그쳤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놀라운 실적이다. 게다가 코로나로 1년 7개월 동안 해외순방이 중지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그녀는 매달 1번씩 해외여행에 나선 셈이다. 무엇보다 과거 영부인들이 해외순방에서 주로 교민들을 위로하거나 현지의 문화행사를 이끈데 반해 김정숙은 주로 관광지를 중심으로 순방에 나섰으며 교민 행사에 참여한 것은 고작 3회에 불과했다. 더욱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그녀가 순방에서 자랑한 막대한 양의 의상과 장신구들이었다. 샤넬, 막스마라, 에르메스, 루이비똥, 까르띠에 등 갤러리아 명품관을 1층부터 샅샅이 털어도 모자랄 만큼의 의상과 악세사리들이 화려한 조명과 함께 영부인의 온몸을 감쌌고 특히 런던 G20 정상회의에서 김정숙은 하루에 4벌의 다른 옷과 장신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사실 영부인이 명품 좀 입은 것이 뭐 대수랴. 그리고 단언컨대 못생기고 살찐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정치인들과 배우자들의 씀씀이에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이들은 당신네들 아니었던가. 게다가 대중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청와대가 어떤 돈으로 그 명품들을 구매했는지 속시원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수백만 원의 누비 옷을 판매한 한 장인은 보좌관이 5만 원짜리 현금다발로 결제했다고 증언했고 청와대는 영부인의 의상비 등 특별활동비 내역은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는 일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청와대는 계속해서 김정숙의 명품 사랑은 그저 내돈내산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국가행사를 관광기회로 삼고 공직자들을 여행가이드로 쓰는 영부인이 국고와 사비를 엄격하게 구분했을까? 무엇보다 공직자 재산 공개를 보면 문재인의 재산은 약 21억 9천만 원이고 그의 연봉은 약 2억 5천만 원인데 그리고 그는 그 돈으로 새 집도 짓고 명품도 사고 심지어 이혼한 딸의 생활비까지 대고 있다. 소득 편차가 매우 큰 여의도와 금융권에서 나는 문재인보다 자산과 소득이 몇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을 다수 보았지만 그 어떤 욜로족들도 저런 생활 수준을 누리지는 않았다.

이 논란의 정점에는 까르띠에 브로치가 있다. 탁현민은 이 브로치가 호랑이를 표현한 것이며 이는 인도와의 외교를 위한 것이었고 수 억짜리 정식 까르띠에 제품은 아니라고 둘러대고 있다. 하지만 누가 저걸 호랑이로 보는가, 또 누가 이게 까르띠에와 무관한 디자인이라고 하겠는가. 청와대는 애써 김정숙을 올브라이트나 앙투아네트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그녀는 외교 천재도, 속아넘어간 왕비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김정숙일 뿐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임기중 가장 많은 해외관광지를 다녀온, 동시에 가장 적은 교민행사에 참석한 영부인. 그리고 그 가운데 그녀의 남편이 우리에게 약속한 특활비의 투명한 공개나 국민세금을 아껴 쓰겠다는 말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다른 많은 공약들이 그러했듯이.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영부인이 세금을 들여 수 억짜리 브로치를 구매한 것인지 아니면 공식 행사에 짝퉁을 차고 나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슬프게도 둘 중 하나는 진실이다. 왜 창피함은 우리의 몫인가. 

김정은 동지가 주신 풍산개는 버릴지언정 표범 브로치는 꼭 챙겨가겠다는 김정숙 여사님

2022. 3. 20.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어느 학교에서나 수학여행을 떠나면 맨 뒷좌석은 일진들의 몫이다. 이 다섯 개의 좌석은 모든 일진들이 탐내는 명당으로 그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왕좌의 게임도 불사한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줄은 그들을 따르는 부하들의 자리이다. 당신의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라, 그렇지 않은가. 전국의 일진들이 어디엔가 모여 이런 규칙을 정하고 대대로 이 전통을 전해주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진들은 항상 뒷좌석에 앉을까? 

그 이유는 버스의 구조 때문이다. 한국 대형승합차의 맨 뒷좌석은 대개 다른 좌석들보다 조금 높게 설계되어 맨 뒷좌석에 앉은 승객들은 다른 승객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게다가 맨 앞좌석에는 대개 인솔자인 담임선생님이 앉기 때문에 기존 권력에 반항하는 학생일수록 선생님과 거리가 먼 뒷좌석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기성체제에 순응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별다른 권력을 가지지 못한 모범생들은 담임선생님과 가까운 앞자리에 앉고 반항적이면서 또래들 사이에서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일진들은 선생님과 멀면서 또 학우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맨 뒷좌석에 앉는다. (반면 선생님들이 동승하지 않고 뒷좌석이 솟아있지 않은 미국의 통학버스에서는 일진들이 대개 앞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이런 공간과 권력의 구조는 비단 수학여행 버스에 그치지 않는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의 자리가 신하들이나 피지배계급보다 낮은 문화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통치자의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의 물리적 자리도 높아진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펜트하우스는 가장 높은 층에 짓지 않는가. 1층에 펜트하우스를 설치하는 시공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정에서도 가장 큰 권위를 가진 판사는 피고나 원고, 혹은 배심원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고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의 자리는 일반 의원들보다 높다. 건축 양식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딕 양식과 전체주의 건축은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집단의 주도로 탄생했지만 둘 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고 축소하고자 했고, 그와 같은 의도는 장대하고 획일적인 건물양식으로 실현되었다. 현재에도 그 앞에 선 이들은 움츠러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처럼 공간의 구조는 인간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그래서 정치구조의 변화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그 권력이 머무는 공간도 변화시키려고 시도했다. 영국의 아서 왕이 봉건제도를 확립하며 자신의 기사들을 원탁에 배치했던 일이나 주변 경쟁 국가를 모두 물리치고 신바빌로니아의 절대 지배체제를 완성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전례 없이 높은 건축물인 바벨탑을 지은 것, 그리고 가깝게는 조선왕조의 왕권을 부흥시키려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이 그 예이다. 왜냐하면 공간의 구조는 단순히 권력지형의 부산물이 아니라, 반대로 공간 자체가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시작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청와대의 이전 명칭은 경무대라고 불렸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궁 뒤편의 자그마한 언덕에 붙인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경무대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제 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는 바로 이 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조선의 법궁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바로 조선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마치 버스 맨 뒷자리의 일진들마냥. 

이후 경무대는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한 권력자들의 안방으로 쭉 자리 잡았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주한미군 사령관이, 뒤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삼으며 이곳은 마치 과거의 왕궁처럼 아무나 접근할 수도 없고 함부로 다가설 수도 없는 곳으로 남아있었다. 심지어는 여당의 대표나 행정부의 장관들까지도 함부로 청와대에 들어설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의 구조와 위치가 과거 국가를 무력으로 지배하던 이들의 목적에 맞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설계사상부터가 반민주적인 공간에 들어선 인간이 민주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후에 집권한 모든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비슷한 비극을 맞이했다. 그중에는 도덕적이라고 여겨진 독립운동가나 명문대를 나온 민주화운동가, 유능한 사업가, 서민 출신의 인간적인 정치인 혹은 신실한 종교인도 있었지만 모두 하나같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그 힘으로 축재를 하다 들통나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헌법이 여섯 차례에 걸쳐 고쳐 쓰이는 동안 모든 헌정 위기는 하나같이 청와대에서 발생했고 그 과정이 동일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의 비극이 지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과거의 한 글(링크)에서 나는 박근혜의 비극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반드시 되풀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당시 분노하던 모두가 다음 권력을 누가 잡을지만 쳐다보고 있었지 이를 70년간 되풀이되던 권력의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도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않으면 이번 정부 역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

지난 70년간 청와대는 마치 블랙홀같이 현대 한국의 지도자들을 빨아들였다, 깊은 비극의 수렁으로. 마치 절대반지를 낀 스미골처럼 아무리 영민해 보이던 지도자들도 그 푸른 기와의 집에 한번 발을 들이고 나면 좀처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탐욕과 어리석음에 시나브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일부 사람들이 풍수를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미신이 아닌 인지과학의 영역이다. 셰익스피어도 고개를 떨구고 주눅 들게 만드는 이 K-비극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권력구조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마땅히 대통령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집무실이라는 공간 역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그 원인이 청와대의 구조 하나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유권자들의 미흡한 시민의식이 더 큰 문제라고 할 것이다. 허나 청와대라는 블랙홀에 빠진 것이 어찌 지도자들 뿐이랴.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공화제를 선택했지만 구 왕조의 일가였던 전주 이씨 출신의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도자로 선택했고 그들을 전하라는 이름 대신 각하라고 불렀지 않나. 그것이 경무대가 옛 경복궁 내에 자리 잡은 것과 아주 무관한 일일까. 놀랍게도 시민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신민으로 종복하는 모습은 21세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무식하게 쌈박질하는 영화만 찍어내는 한 감독이 민주당 대선후보를 두고 "진정으로 백성 아픔 어루만져 줄 후보”라고 일컫는 것을 보라. 스스로 백성을 자처하는 우리의 의식 역시 청와대라는 공간에 지배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청와대의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의 문제점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통령의 비극이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구조와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통령의 집무실을 이전하는 것은 정치구조 개편이나 개헌에 비해서는 극히 쉽고 간단한, 그저 당선인의 의지만 있다면 실현될 수 있는 첫 출발이지 않은가. 그러니 장담하건대 지금 청와대 이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구조 개편과 개헌에도 반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아래에 쉽게 쓰인 좋은 글이 한 편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지금의 청와대 터는 조선 왕궁인 경복궁의 일부이자 뒤뜰이 있던 자리입니다. 자랑스런 문화유산의 일부입니다. 일제가 경복궁 일부 건물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관사를 지었던 곳입니다.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터입니다.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에서 이어진 청와대는,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 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의 상징이었습니다. 대통령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조차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차를 타고 가야하는 권위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넓은 청와대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을 위한 공간이고, 극히 적은 일부를 수백명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의 업무공간으로 사용하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은 대통령 비서실 직원들과도 철저히 격리돼있는 실정입니다.

이전에 따른 불편함도 있을 것입니다. 경호, 의전과 같은 실무적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호와 의전까지도 탈권위주의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합니다. 잘못된 대통령 문화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대통령 문화를 열겠습니다. 기꺼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대통령의 권위라고 믿습니다.

지금의 청와대는 개방해서 국민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때때로 국가적인 의전 행사가 열리면 국민들께 좋은 구경이 될 것입니다.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면, 북악산까지 완전 개방이 가능해집니다.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휴식의 명소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라는 이름을 대신할 것입니다. 청와대는 더 이상 높은 권부를 상징하는 용어가 아니라, 서울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을 뜻하는 용어가 될 것입니다.

이로써 특권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늘 국민과 함께 하는 새 시대 첫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3월 문재인 드림

2022. 3. 17.

동물 할당제도 해주세요

 


존경하는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들과 박지현 위원장님께,

건국 이래 최초로 재집권에 실패하신데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얼마나 다급하셨기에 성범죄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그리고 충남지사 자리를 잃은 정당에서 바로 이어 치러진 대선에 불륜 의혹과 여성에 대한 모멸적 욕설을 내뱉은 후보를 대선에 내보내셨을까요. 그 깊은 뜻을 한낱 범인에 불과한 저 같은 유권자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고 사람을 죽일 정도로 뾰족한 송곳은 주머니를 콱 찢고 나오는 법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런 귀 당에 무궁한 발전과 영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대선의 패인을 분석하며 비대위원과 위원장님께서 내로남불이 문제라는 지적에 저는 백번 공감합니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없애겠다고 약속하곤 5년간 거기서 잘 먹고 잘 살다 이제와서 청와대를 왜 없애냐 던 문, 아니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그분. 꼬리곰탕은 부자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비난하며 소박하게 조선호텔 점심 스시 도시락을 즐겨 드시는 대변인님. 그리고 평생 반미를 외치시면서 딸은 미국에 유학 보낸, 아 한 두분이 아니시군요. 국회의원님들. 그리고 부동산은 끝났다며 과천자이 재건축으로 크게 한탕 잡수신 김수현 사회수석님까지. 내로남불이 민주당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오해나 우연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오명을 씻어낼 대응책으로 아무런 경험도 경력도 없고 입당한지 불과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26살의 미숙아를 비상대책위원장에 앉힌 것은 매우 놀라운 결정이었습니다. 사실 여성폭력을 근절시키겠다는 젊은 인재가 두 여성에게 폭언과 협박을 일삼은 분을 지지한다는 사실보다 놀랍진 않았지만요. 물론 거기에 민주적 절차 따위는 없었지요. 그게 더불어민주당이니까요. 이준석 당 대표처럼 정치경력을 쌓고 이력을 인정받아 당원투표에 의해 감투를 차지하는 것은 미제 자본주의자들의 구습일 뿐입니다. 네, 진정한 권력은 결코 선출되지 않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의 얼굴 위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를 부르는 김정은과 시진핑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6월의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 이상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귀 당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릴까 합니다. 바로 동물 할당제 입니다. 지구상에는 약 20,000,000,000,000,000,000마리의 동물이 존재합니다. 이 중 대다수의 동물들은 인간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니 더불어민주당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지내는 애완동물과 가축만 세기로 합시다. 그 수는 약 300억 마리이니 인구비례로 치면 한국에는 약 20억 마리의 가축이 존재합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40배가 되는군요. 개개인의 노력이나 성취를 무시하고 태생적 배경만을 가지고 쿼터를 할당한다면 이 가축들에게 약 97.5%의 공천권을 주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부디 이번 지방선거를 위한 공천심사에서 이 점을 반드시 고려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미 귀 당에 돼지와 닭대가리는 상당수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중 한 분은 이미 동물들과 소통에 나서셨더군요. 보통 사람으로서는 저 혈연정치를 깨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97.5%의 비례율을 맞추기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사오니 부디 숙고하시고 신중하게 인재, 아니 축재를 선발하여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위 사진과 본문의 내용은 아무런 연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귀 당의 훌륭하고 공정한 경선을 기대하며, HHMM드림

2022. 3. 13.

윤석열의 당선, 이준석의 승리

20대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했다. 그 공은 후보 본인을 제외한다면 마땅히 이준석 대표에게 먼저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약 선거에서 졌더라면 그는 두 번째로 큰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었으니 당연히 승리의 축배는 그에게 쥐어져야 한다. 반대로 민주당의 송영길 대표는 역대 민주당 대선후보들 중 가장 질이 떨어지는 후보를 업고도 박빙의 선거를 치렀지만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났다. 심지어 다리 힘줄이 끊어지고 머리가 깨지는 부상투혼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로 이야기하는 정치판에서 이긴 것은 이긴 것이고 공은 공이다. 이준석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선거전략을 평가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그가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이 그의 공로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강점과 단점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또 어떻게 그의 강점과 단점을 정밀하게 계량해서 수치화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의 선거전략을 되돌아보기에 앞서 한 가지에 동의하고 시작하는 것이 옳다. 그는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사람이다, 그러니 이긴 장수는 승장으로 대우해야지 대선에서 이긴 당 대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먼저 그의 공 부터 되돌아보자. 그는 선거 과정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시대 트렌드에 걸맞게 대선후보의 공약을 짧은 쇼츠 영상으로 제작해서 sns에 올렸고 또 AI 윤석열이라는 컨셉을 도입하여 대선후보나 정당 관계자들이 가볍게 언급하기 어려운 말들을 자유롭게 올리며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또 당내에 젊은 스피커들을 대거 등용하여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상대 민주당이 인적 쇄신이라며 등용한 젊은 인재들과 한번 비교해 보라. 박빙으로 치뤄진 선거에서 이런 공로가 없었다면 과연 승리를 담보할 수 있었을까?

반면 그의 전략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젋은남성에게 집중하느라 여성표를 끌어오지 못했고 또 선거캠프의 역량과 시간을 호남에 집중하는 바람에 충청과 경기도의 격전지에서 충분한 표를 끌어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투표 당일까지 8% 이상의 대승을 자신하는 바람에 야당 지지층의 투표율이 상대 유권자들보다 낮았고 지속적으로 단일화 무용론을 주장해 하마터면 패배할뻔했다고 비판한다.* 모두 타당한 지적이다. 

무엇보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자신의 지지층들의 의지를 과신했다는 데에 있다.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후보는 이재명 후보보다 약 3-6% 앞서 있었지만 실제 집단별 투표율을 반영하면 윤석열 측이 패배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세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철수 후보 측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받아보았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준석은 윤석열의 승리를 그렇게 장담했을까? 데이터를 이리저리 조합해 보면 나는 그가 세 가지를 오판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호남에서의 여당 결집을 과소평가했고, 20-30대 남성들의 투표율을 과대평가했으며 상대적으로 시간과 공을 덜 들인 경기/충청의 접전지역에서의 우위를 과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호남에서의 보수표는 여론조사만큼 나오지 못했고, 여전히 20-30 남성들의 투표율은 낮았으며 여전히 접전지역에서의 표는 각 후보들이 공 들인 만큼 나왔다. 모든 수리통계 모델은 설계자의 편향에 따라 오류를 내곤 한다. 자신을 선거덕후라고 부르던 이준석은 아마 모델을 만들면서도 자신이 과거의 경향성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편향을 모델에 반영해 8% 이상의 승리를 자신했다. 하지만 그런 이변은 없었다. 개표함을 열고 튀어나온 결과는 8%가 아닌 0,8%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석은 이 0.8%의 승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그의 공과 과가 모여 나온 결과는 결국 대선승리 아닌가. 또 이제껏 실수 없이 선거를 치룬 사례가 어디 있었던가. 그런 그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그의 전략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와 지지자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결함과 실수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지선을 불과 3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이긴 당 대표에게 책임론을 묻는 것은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권교체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 개선장군에게 박수를 쳐주고 샴페인을 뻥하고 터뜨리며 축하한 뒤에 보완점을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독일의 전격전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인 하인츠 구데리안은 프랑스 전선과 독소전쟁 초기 동부전에서 크나큰 활약을 펼쳤다. 한번은 그의 전차들이 지원부대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적 영토 깊숙이 내달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지휘본부는 여러 차례 돌진을 멈출 것을 명령했지만 그는 예하부대의 통신을 모두 끄고 명령을 받지 못했다며 그대로 전차부대를 전속력으로 돌격시켰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결코 남성호르몬을 아무렇게나 뿜어내며 함부로 돌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소련의 수십 개 대대를 분쇄하며 돌진하는 도중에도 그는 노획한 적의 전차를 분석해 소련 전차가 자신들의 전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도 했으며 이때의 경험을 정리해 독일군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는데 반영하기도 했다. 모든 유능한 지휘관들은 전투 후 자신의 전략을 평가하고 개량하기 마련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준석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전략이 완벽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담보하는 것 역시 아니다. 

나는 트레이더이자 투자자이지, 정치평론가가 아니기에 한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의 입장을 평가하는 글을 쓰는 일은 지양하려고 한다.(사실 자주 어기지만) 하지만 과거 몇 번이고 그의 행보를 비판했던 터이니 그를 옹호할 때도 마땅히 글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지루한 정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있듯 그는 2030대 남성들을 대변하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가 더욱 성숙한 태도로 자신의 지지층들을 대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부 사람들은 안철수와의 단일화가 여권의 결집을 가져와 실제로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계량화되지 못한 데이터로 이준석을 비난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수치화되지 않는 가정에 기반하여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또 부당하다.



P.S.

흥미롭게도 이 글의 첫 두 댓글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한 분은 이준석의 완전오류설을 믿는듯 하고 다른 한 분은 그의 완전무오류설을 믿는듯 하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히 옳거나 완전히 틀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준석의 어떤 행동은 잘못되었고 어떤 행동은 맞다고 믿을 뿐. 

점점 대중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회색분자들과 중도층의 소멸은 필연적으로 날카로운 충돌을 예고하고 우리는 점점 임계점에 가까워지고 있다.

마치 샐리와 앤으로만 구성된 나라처럼.
 

2022. 3. 10.

살인자들의 선거법

사전투표를 앞두고 아버지와 식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정부의 국정철학은 스탈린이 다스리던 소비에트 연방에 가깝다고. 제1공화국에서 태어나 정치가 폭력과 너무나도 가깝게 맞닿아있던 시기를 살아오신 아버지는 그런 험한 말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며 나를 나무라셨지만 나는 이들의 행태를 다른 순화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국민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들을 달리 뭐라고 부르겠는가. 

 

다른 나라들의 확진자 증가 추이는 이미 1월 초중순에 정점을 찍었지만 한국의 코로나 환자는 아직도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사이에 매일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코로나로 사망하고 있다. 갑자기 한국에서 코로나가 악화된 주된 이유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방역을 완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해외의 사례들을 보면 바이러스 확산세가 정점을 찍기 전에 방역조치를 완화할 경우 확진자들의 수가 지수적으로 폭증했고 이런 패턴은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방역을 거듭 완화한 이 조치는 그간 정부가 밝혀온 가이드라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부는 확진자 증가 추이가 꺾일 경우, 혹은 치명률이 현격하게 낮고 병상이 충분히 확보되어 있어 사망자의 숫자가 낮게 유지될 경우 방역조치를 완화하겠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1월 16일 확진자의 숫자가 사상 최대치를 넘어 5천 명에 근접하는데도 정부는 첫 번째 완화조치를 내놓았으며 약 한 달 뒤 확진자의 숫자가 20배가 늘어나 10만 명을 돌파했는데도 두 번째 방역완화에 나섰고 그로부터 3주도 안되어 확진자가 30만에 달하는데도 다시 한번 방역지침을 대폭 완화했다. 심지어 세 번째 방역 완화는 역대 최대 사망자를 기록한 날 발표되었다, 그것도 본디 3월 13일까지 예정되어 있던 방역지침을 전례 없이 앞당겨서. 하필이면 선거가 불과 1주일 남은 그 시점에.  
지난 세 달간 정부가 급박하게 갈아치운 방역정책 덕에 코로나 환자는 세계 1위로 폭증했고 전체 세계 인구 중 불과 0.7%에 불과한 나라에서 확진자 수는 세계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위드 코로나에 따른 자연스러운 조치라고? 위중증/사망자의 수도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고 이대로라면 인구의 0.1%가 매달 죽어나갈 텐데 위드 코로나의 목표가 이런 것인가? 아 자랑스러운 K-ill 방역. 즉 명백하게 방역정책의 목적은 코로나 관리에 있지 않았다. 되려 확진자 수를 황급히 늘리기 위해 취하는 조치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어째서인지 정부가 내놓은 모든 방역지침들은 선거에서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사망자가 폭증하는데도 방역지침을 완화한 것은 자영업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선거를 불과 2주 앞두고 그들에게 몇백만 원의 지원금을 살포하기도 했다. 게다가 선거 당일 기준 약 185만 명의 확진자들이 격리되어 투표권이 일부 제한되었는데 사전투표를 꺼리던 야당 성향의 유권자들의 투표율 역시 자연스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사망률이 높은 노인층, 다시 말해 야권 성향이 가장 강한 유권자들이 인구밀도가 높은 투표소를 오가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다. 살인자의 선거법. 스탈린스러운 이들의 선거전략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노영민 비서실장은 재작년 여름 시민들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시 집회 주동자들을 두고 살인자들이라며 소리 높여 비난했다. 하지만 당시 일일 사망자는 최대 6명을 넘지 않았고 확진자들의 수는 고작 300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지금 정부의 적극적인 방역조치 완화로 일일 확진자 수는 천 배나 많은 3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의 수 역시 2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정부가 방역조치를 완화한 1월 16일이래 코로나로 사망한 환자들은 무려 3336명에 달한다. 작년 같은 기간 코로나 사망자 412명의 약 8배에 달하는 숫자이다. 이제 노영민과 기모란을 비롯한 청와대 인사들과 선거를 주도한 너희들의 면상에 이렇게 소리치겠다. 너는 살인자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한 살인자들이다. 그래, 너희는 나치나 스탈린 같은 살인자들이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은 이에 따른 응당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2022. 3. 6.

문재인이 쏘아올린 선거참사

친여당 성향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성

여론이 불타고 있다. 지난 토요일 확진자들의 사전투표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의 투표지를 직접 투표함에 넣지 못했고 일부 투표지들이 적절하게 관리되지 않아 다른 유권자들에게 건네지거나 방치되었으며 심지어는 분실되기도 했다. 이는 1987년 직선제가 시작된 이래 단 한번도 발생한 적 없던 유례없는 대참사이다.   

조직관리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대형사고가 발생한 이유는 자명하다, 문재인의 편향된 인사 때문이지. 능력보다 친분이나 이념 혹은 특정 정치인의 편의를 봐준 사람들로 구성된 인사는 조직의 올바른 운영과 성과보다 다른 목적을 중시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조직이 파행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치하게 된다. 아니라고? 그 징후는 지난 총선부터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여러 유권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선관위의 일부 조직은 선거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소수의 야권 지지자들이 결과를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관위는 해당 주장에 대해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했으며 일부 핵심 자료를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그 음모론에 살을 덧붙이고 뼈를 입혀 키운 것은 일부 극우 유튜버들이나 편집증 환자들이 아닌 바로 선관위 자기 자신이었다.  

그뿐인가. 작년 4월 보궐선거에서도 선관위는 친여 성향의 TBS의 ‘일(1)합시다’ 캠페인은 문제 삼지 않았지만, 야당이 제시한 ‘보궐선거 왜 하죠?’ ‘내로남불’ ‘우리는 성 평등에 투표한다’ 등의 문구는 못 쓰게 하였고 심지어 오세훈 후보의 아내가 신고액보다 세금을 30만 2천 원을 더(그렇다, 덜이 아닌 더) 냈다는 사실을 선거 당일 투표장 앞에 정정내역 공고문으로 배치했다. 과연 후보의 배우자가 세금을 30만 원 더 냈다는 사실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줄 사안이라 긴급하게 알릴 소식인가. 

하지만 선관위는 이 모든 논란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바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막강한 친여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관위의 파행적 운영을 비판하는 보고서는 윗선으로 전달될 때마다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을 것이고 이 조직을 감시할 여당은 그들을 옹호하기 바빳으며 청와대는 그 조직을 개편하기는 커녕 조해주 상임위원의 임기를 연장하는 꼼수를 부렸다. 다시 묻겠다, 이 대참사가 왜 발생했냐고? 문재인의 인사 때문이다. 외교가, 부동산이, 소주성 정책이 마찬가지로 대참사를 일으킨 것처럼.

흔히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란 한 국가의 운영이 최대 다수의 의지와 신념을 반영하는 시스템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그 핵심이 바로 선거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절차적 정당성은 민주주의의 알파요 오메가나 다름없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민주주의의 역사는 모두 이 선거권을 가지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런 선거가 전례없는 파국을 맞이했다.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민주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오늘 선관위는 부정행위는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선거법을 어긴 것이 부정이 아니라면 무엇이 부정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내에게 거짓말을 들킨 남편이 모텔방에서 후배 여직원과 나오다 적발된 상황에서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그런 되도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권자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과거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는 동쪽의 소련을 치기로 결심한다. 유럽 제 1의 인구와 자원 그리고 방대한 영토를 가진 바로 그 소련을. 하지만 전쟁 초 소련의 군대는 너무나 허약하게 붕괴했다. 개전한지 불과 3개월 만에 붉은 군대는 약 2백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서부전선의 거의 모든 사단이 붕괴했다. 이렇게 커다란 피해를 낸 데에는 독일군의 우수한 작전수행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스탈린의 군부 숙청이 큰 기여를 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스탈린은 대숙청을 실시했고 이는 군 수뇌부 조차도 피할 수 없었다. 소련군 내에서 전차의 유용성을 알아차린 미하엘 투하쳅스키 원수는 물론이고 셀 수 없이 많은 장성/영관급 장교들이 시베리아 형벌지로 쫒겨나야 했다. 심지어 독소전의 영웅 주코프 원수까지도 이때 숙청의 위기를 맞기도 했으니 평범한 장교들은 어떠했겠는가. 거기에 소련군에는 정치장교라는 독특한 보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군사경험은 부족하지만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사람들로 채워졌고 이 때문에 일선 부대들은 혼란에 빠지기 일수였다. 개전 초기 키예프와 하르코프를 비롯한 많은 도시가 불타고 약 400개 사단이 분쇄된 데에는 스탈린이 저지른 인사참사가 상당부분 공헌을 한 것이다.   
   
이 정부는 이념 뿐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도 스탈린과 매우 흡사하다. 그가 실시한 파행적 인사는 경제, 주거, 외교, 금융, 방역을 짓밟다 이제는 민주주의의 꽃마저 꺾어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비위중 하나는 바로 대통령의 친구를 울산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사건이다. 자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문재인의 선관위를 불태울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불타도록 방치할 것인가.



2022. 3. 3.

사전투표하세요

 

지난 총선 이후 나는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유권자와 후보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고, 또 그런 행동을 비난하는 것은 타인의 마땅한 권리를 억압하는,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타인의 권리를 함부로 윽박지르며 억압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결과가 정치공학적으로 불리할지라도.

하지만 나는 사전투표에 나서는 것이 마땅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여론조사를 보면 약 80% 이상의 유권자들이 반드시 투표에 나가겠다고 답하지만 실제 투표율은 그보다 늘 10%가량 낮다. 인간은 늘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니까.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실천할 수 있었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쯤 멋진 전문직에 몸짱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코로나가 크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의지를 선거 당일의 당신이 배신할 가능성이 더더욱 크다. 산술적으로도 매일 20만 명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린다면 선거 당일 약 115만 명의 유권자들이 자가격리 중일 것이고 그중 실제로 투표에 나설 생각이었던 85만 명의 유권자들의 마음은 지금과 사뭇 다를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오랜 시간 트레이딩을 해오는 동안 내 전망은 수도 없이 틀렸으며 때때로 손절하고자 했던 자산이나 포지션을 제때 버리지 못했고 트레이딩의 원칙을 너무나도 많이 어겼다. 따라서 나는 3월 9일의 나 자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나는 사전투표에 나설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전투표를 꺼리는 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권했다. 정부를 심판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보다 야당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여러 야당 지도부의 분노가 더 크다고. 그리고 선거에서 질 경우 우리가 겪을 후폭풍보다 그들이 겪을 고난이 더 클 것이다. 그런 그들이 사전투표를 택하지 않았는가.  

사전투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