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0.

재벌로 태어나서, 그리고 개고기로 태어나서.

재벌로 태어나서

다음은 실제로 대한민국의 상장사들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1 A 회사는 오너의 자녀들에게 승계를 진행하던 기간에 아무런 신제품이나 사업전략을 내놓지 않았다. 같은 기간 해당 산업은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고 있었는데, 그 중요한 시점에 A사는 5년 여가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전략을 발표하지 않았고, 당연히 기업의 실적과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해당 회사가 정상적 영업을 재개한 것은 공교롭게도 승계가 마무리된 다음이었고 이후 A사는 공격적인 마케팅과 신제품 출시를 통해 이전의 실적과 주가를 회복했다.

#2 B 회사의 여러 사업 부문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B' 사업부문 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회사는 해당 부문의 영업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회사 전체 실적도 크게 감소했다. 심지어 업계에는 B사가 이 분야의 사업을 접을 계획이라는 루머가 돌았지만 B사는 그 루머를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았을뿐더러 세간의 의혹을 증폭시킬 만큼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후 B사는 2세의 승계에서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었고 승계 이후 정상적인 영업을 재개하였다.

#3 C 회사는 불가피한 사건으로 충당금을 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에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충당금을 발표하여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해당 분기에 실적이 크게 개선되었을 거라는 시장의 기대는 여지없이 배신당했고 보수적인 관점을 적용할 때 향후 충당금을 추가적으로 쌓아야 할 수도 있다는 사측의 발표로 인해 주가는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실제 발행한 비용은 그보다 훨씬 작았고 그 사이 승계에 유리한 결정들이 일어났으며 이후 주가는 다시 손실을 회복했다.  

위의 회사들이 어떤 회사들인지 굳이 알아내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각각의 사례는 한 회사들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적게는 두셋, 많게는 네다섯 회사들에서 각각 벌어졌던 유사한 사건을 하나로 합친 것이니까. 되려 이런 사례들이 손꼽힐 만큼 드물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한국 시장을 잘 모르는 것이다. 가업승계에 직면한 한국 회사에 투자할 때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은 기초 상식에 가깝다. 기업들의 지배 구조에 가장 정통하고 그 내막을 속속들이 파악하여 수익을 내는 사모펀드나 행동주의 펀드의 리더들이 한  목소리로 상속세 개편을 지적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다. 

나는 코리안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바로 잘못된 재벌 시스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취지의 글을 작성한 지 거의 10년이 지났지만(링크) 시장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재벌들은 소수의 지분 만으로 회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툭하면 배임과 횡령 혐의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는 재벌들이 죽어야 주가가 오르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재벌들에게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지만, 그 해결책을 논의하는 것은 조금 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속세율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데 여러 유럽 국가들이 직계존속에게 가업을 상속할 경우 상당 폭의 세제감면 혜택을 주거나, 미국 등에 트러스트나 재단을 통해 절감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에는 그런 제도가 사실상 전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늘 승계 시즌만 되면 재벌들은 무리해서 배임과 비리를 저지르거나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주가를 뺄 강한 유인동기가 생긴다. 그 과정 속에서 기업의 지배 구조는 더욱 왜곡되고 재벌들의 이해관계와 회사의 이해는 더욱 벌어지게 되기에, 다음 세대에서도 오너들은 더 강한 비위를 저지를 인센티브를 가진다.

이 시스템을 고치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위의 상속세 개편을 당근이라면, 채찍은 이사회가 소액주주들을 포함한 주주들의 이익를 보호하도록 상법을 개정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다. 채찍만 만들고 당근이 없다면 재벌들은 편법 상속의 이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강한 형량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비위를 저지를 것이며*, 채찍이 없다면 재벌들은 기존의 편법도 누리고 당근도 사각사각 챙겨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투자자들은 이념으로 나뉘어 둘 중 한 쪽만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속세가 이론적으로 주가에 영향을 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실례들을 애써 무시하고 있고, 또 상법 개정보다 상속세 개편이 중요하다고 믿는 쪽은 상대를 좌파 빨갱이로 몰아가며 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나는 빨갱이도 아니며, 상속받을 회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몇몇 한국 주식을 보유한 소액주주의 한 사람으로서 상속세와 상법 개정 둘 다 추진하는 것이 내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할 뿐. 


*               *               *


개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담은 노동 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에서 닭, 돼지, 개와 같은 가축들의 사육, 도축, 유통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수평아리들을 가득 담은 바구니들은 10단 높이로 쌓았다. 마구잡이로 쌓았기 /때문에 바구니의 층과 층 사이에 끼어 눈이나 내장이 튀어나온 채 죽어있는 병아리들이 즐비했다. 병아리의 눈알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에 크기가 손톱만 한데 꼭 눈구멍에 블루베리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놔두면 깔린 병아리들은 압착기로 모양을 낸 것처럼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병아리가 있어서 살덩어리 속 어딘가에서 약하게 삐약대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바구니를 뒤집으면 거대한 살덩어리가 마치 스팸 한 캔을 통째로 빼낸 것 같은 모양으로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구역질 나는 광경이었다. 바닥에는 병아리 한두 마리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녀석들은 껌처럼 납작하게 찌부러져서 피부를 통해 몸속 장기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작가는 돈육 농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비명에도 차이가 있었다. 사람이 잡아들 땐 비명이라기보다는 여유롭게 도움을 청하는 느낌으로 운다. 꼬리를 자를 때에는 이보다 강렬하지만 잠깐 운다. 자돈들이 가청 주파수의 한계치에 다다를 만큼 소리를 지를 때는 거세할 때다. 거세를 하는 이유는 카스트라토 합창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웅취라고 부르는 수컷 특유의 비린내를 줄이고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다. 꼬리나 이빨 자르는 돼지를 위해서 필요할 수 있다고 항변해 볼 여지가 조금은 있지만 거세는 오직 고기의 맛을 좋게 하려고 실시한다....수컷은 뒷다리를 옆구리에 붙도록 바싹 당겨 잡으면 항문 아래가 불록 튀어나온다. 작업을 쉽게 하려면 고환이 선명하게 튀어나오도록 손에 힘을 줘야 하는데 이때 힘 조절을 못 하면 거세에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너무 꽉 누르면 안 돼. 그러면 내장 튀어나와. 내장 튀어나오면 끝이야." 팀장은 튀어나온 부위를 11자로 자른 다음 과환을 잡아 뜯어냈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섞인 이 작은 살덩이는 피자 치즈처럼 길게 늘어났는데 돼지의 비명 소리가 최고조에 이를 때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자돈은 호두만 한 입을 쩍쩍 벌리고 돈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를 질러댔다. 거세를 마친 자돈은 소독약을 바른 다음 해부학적으로 한결 더 가까워진 자매들 곁으로 돌려보냈다.

다소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가득 찬 그의 에세이는 고기로 태어나 도축되고 가공되어 우리 밥상 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을 덮은 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곧장 황금올리브나 족발(대)를 주문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다른 사람들이 BBQ에 전화를 거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을까. 얼마 전 국회가 통과시킨 개고기 특별법이 위험한 이유는 그 논지를 사실상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경험에 따르면 개 농장과 닭/돼지 농장의 운영방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돼지는 개만큼이나 지능이 높다, 닭을 도축하는 것은 개를 도축하는 것만큼이나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들이 모든 고기 특별법을 발의한다면 어떤 근거로 반대할 것인가.

동물주의자들은 개고기를 금지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타당한 정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많은 사례들을 보면 주로 유목 민족의 전통을 가진 사회가 개고기를 터부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몇몇 문화 인류학자들은 사냥과 목축이 생활의 기반이었던 유목민들에게 개는 필수 자산이었기에 그런 터부가 생긴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흥미롭게도 중국에서도 개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한 시기는 약 6세기로 북방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남하한 이후이고 만주족이나 몽골인들 역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인구밀도가 높고 주기적으로 기근에 시달렸던 농경민족의 경우 개고기를 먹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유럽 역시 인도 아대륙이나 중국, 아메리카 대륙 등에 비해 목축의 비중이 높았기에 자연스럽게 개고기를 꺼리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 아닌지 추측해 본다.

반대의 경우로 우유가 있다. 유목 민족들은 소나 양의 젖을 먹는 문화에 매우 익숙하지만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짐승의 젖을 먹는 것을 매우 역겨운 일로 치부했다. 흥미롭게도 이런 경향은 유전적으로도 발현되는데 전통사회에서 개고기를 먹었던 나라들의 경우 대체로 유당불내증을 가진 성인들의 비율이 높은 경우가 많다. 일례로 한국인의 경우 약 75%의 성인은 우유를 마시면 탈이 나곤 한다. 그렇다면 실리적으로, 또 상식적으로도 인간이 짐승의 젖을 빨아먹는 일부터 금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결국 개고기 논쟁은 옳고 그름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닌 유권자들의 호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몇몇 문화권은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고 그 대상은 문화권에 따라 돼지고기나 소고기, 혹은 생선이나 말이 되기도 한다. 보편적 공감대 아래 특정 생활양식을 금지하는 것은 어디서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개고기 금지법이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는가. 아니다, 이 특별법에 찬성하는 여론은 불과 57%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를 악법이라고 생각한다. 

상당 기간 국회에서 공전하던 이 법안은 김건희 여사가 해당 법안을 지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당이 전향적 태도를 보이며 통과되었다고 한다. 근래 영부인 중에서 가장 젊고 가장 활동적인 커리어를 가진 영부인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는 곧 추락했다. 물론 본인의 여러 실책도 한몫했겠지만 정상적인 사회라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악의적 루머가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그녀에게 비리나 문제가 있다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이전 유력자들을 탈탈 털어 복수하는 한국 정치의 특성 상 그 진실은 몇 년 뒤에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난 그것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당과 협의해 상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개고기 특별법을 통과시킨 일이 더 시급했던가. 또 고작 국민의 57%의 찬성 만으로 온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만약 그것이 옳다면 유권자들에게 개고기보다 부정평가가 더 높은 현 정부는 무엇이 되는가. 또 과반의 지지 만으로 오천만 유권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옳다면, 부정평가가 60%나 달하는 영부인 한 사람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자고 주장한다면 그때 그들은 무슨 명목으로 반대할 것인가.  




*특히 회사의 경영에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는 오너의 입장에서는 현행법을 우회하여 회사의 값어치를 떨어뜨릴 무궁무진한 방법들이 있다. 애초에 신의를 다한 무능과, 영악하지만 사악한 행동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러나 대통령은 상법 개정보다 상속세 개정을 설명하는데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에 논쟁을 촉발했다. 

2023. 10. 2.

두 번의 세계대전, 그리고 오늘날 우리

양차 세계대전은 정확하게 반대의 이유로 발발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은 외교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100여 년간 예외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물론 크리미아 전쟁이나 보불전쟁 같은 군사적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이전의 유럽의 전쟁들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국지적인, 작은 전쟁에 불과했다. 오랜 평화를 누린 유권자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잊었고 그래서 자국의 지도자들이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 그들은 마치 축구 경기라도 시작되는 것처럼 웃는 얼굴로 열광하며 황제와 왕에게 키스를 보냈다. 축축한 참호, 피와 화약 냄새가 가득 배긴 흙 내음,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포격의 굉음으로 대변되는 이 지옥의 서막은 바로 거기서 갈려나갈 사람들의 환호로 시작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빌헬름 2세가 개전 선언을 하자 모자를 벗어 환호하는 독일인들

반대로 2차 세계대전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1938년 독일은 체코 내에서 독일인 거주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주데텐란트를 병합하겠다며 대규모의 군대를 체코의 접경에 배치했다. 또다시 독일과의 전면전을 벌일까 봐 전전긍긍 했던 프랑스와 영국은 무솔리니에게 부탁해 히틀러가 협상장에 나오도록 설득했고, 체코 영토의 30%와 500만의 인구를 독일에 넘기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독일인들이 히틀러와 나치의 공세적 대외노선이 옳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로써 히틀러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어 전쟁의 불씨를 키우는 꼴이 되었다. 몇몇 사학자들은 만약 연합군이 히틀러가 집권 초기에 벌였던 여러 도발에 과감하게 맞대응했더라면 그와 나치는 실각했거나 군부의 반발로 2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왔다며 히틀러와의 합의문을 꺼내든 체임벌린,
그리고 이로부터 불과 11달 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그것 하나뿐일까.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을 결정한 각 주요국들의 왕족들은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영국 국왕은 하노버 왕가의 핏줄이었던 조지 5세였는데 그는 영국에 적대적인 정책을 고수하다 전쟁을 선포한 빌헬름 2세의 사촌이었다. 또 반대편 전선에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선언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7촌 사촌이었으니 1차 세계대전은 다름 아닌 바로 혈연 간의 전쟁이었다.* 반면 2차 세계대전은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전쟁을 선포하고 학살을 벌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의 폭압적인 정치에 반발하여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반겼지만 아리아인들은 슬라브 계열의 민족들을 진정한 동맹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나치가 벌인 만행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이 차라리 스탈린이 낫다며 돌아서게 만들었고 동유럽 각지에서 파르티잔들의 테러가 이어졌으며 그 결과 안 그래도 어려웠던 동부전선의 보급과 병력 수급에 차질을 주었다. 게다가 나치는 당장 전쟁에 투입할 물자와 병력이 모자란 순간에도 유대인을 절멸시키는데 철도와 인력을 우선 배정하였으니, 적어도 동부전선에서는 핏줄은 전장의 헤게모니를 온전히 지배했다. 

두 세계대전의 차이는 그뿐이 아니다. 전쟁 발발의 이유가 비교적 명확한 2차에 비해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은 불분명하다. 사라예보 사건이 그 단초를 제공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도에서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할 보스니아의 한 도시에서 세르비아인 암살자가 저무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일이 어떻게 유럽의 반대쪽에서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와 싸우게 만들었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을 연구한 케임브리지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이를 설명하는데 697페이지나 할애하면서도 여전히 아리송했던지 이 책의 제목을 몽유병자들(sleep walkers)이라고 지었다. 연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마치 전 유럽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전쟁으로 걸어들어갔다고.     

이처럼 인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두 전쟁은 전혀 다른 이유로, 전혀 다른 배경으로, 또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너무 평화로워서, 혹은 너무 불안정해서 전쟁을 벌였고, 핏줄이 다르기 때문에, 혹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벌였다. 지도자의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때로는 두려움이 지나쳐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통합을 위해서, 또 다른 경우에는 분열을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래도 싸우고 저래도 죽이는 것이 인류인가. 마치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는 개구리를 쏘아 자기 자신마저도 죽고 마는 전갈처럼 전쟁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튀어나오는 인류 집단의 본능적 행위와도 같다.   

그리고 오늘을 돌아보자. 당신과 나는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으며 전쟁을 겪었던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민족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 그리고 맹목적인 광신도들이 채우고 있다. 젊은 세대부터 중장년까지 역사에 무지하며 이념에 가득 차, 상대가 역사에 무지하고 이념만 따진다며 비난하고 있다. 갈등은 늘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의 폭은 점점 줄어가며 계급 간의 대립은 너무나 첨예하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몇몇 낙관주의자들은 세계가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 되어 있기 때문에 전쟁을 벌일 유인동기가 약하다고 주장하지만, 20세기 초 유럽인들 역시 정확하게 같은 주장을 펴며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그리고 다시금 묻는다. 당신과 내가 죽기 전에 우리는 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확신한다. 다만 그 전쟁의 포성이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자신하지 못할 뿐.



*대조를 위해 생략했지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를 이끈 원동력은 민족주의였다. 

2023. 9. 29.

서울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왜 우리는 서울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다른 세계 주요 대도시와 비교하면 서울의 이상한 특징 하나가 두드러진다. 바로 선진 도시 중에서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도시의 평균 용적률이 매우 낮다는 것. 이런 공간구조를 가진 다른 도시들은 대개 후진국인 동남아시아나 인도, 혹은 파키스탄에 있으니 서울과는 산업구조나 그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 가장 잘 사는 도시이면서도 그 구조는 못 사는 도시들과 비슷하다니, 조금 극단적인 비유를 들자면 이는 마치 삼성이나 테슬라의 본사가 구로공단 공구상가에 입점한 것이나 포르쉐를 모는 의사가 후암동 반지하에 사는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다. 분명 서울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이런 기형적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는 사회가 도시계획을 어떻게 정할지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또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마스터플랜이 등장하고 이전의 계획은 곧장 폐기된다. 정책의 방향성이 없고 일관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에는 아직도 군사정권 시절에 지은 성냥갑 아파트들이 아직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많은 지역의 개발계획이 20년 가까이 공전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어떤 도시를 만들어갈지 합의하지 못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논의의 대부분을 도시계획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비전문가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중 많은 이들이 서울이라는 도시의 발전을 억제하고 더 나아가 해체하고 싶어 한다. 박원순 시장으로 대표되는 진보 진영은 1970년대의 후진적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서울의 개발을 억눌러왔고, 지방에 적을 가진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쇠락하는 자기 지역구의 인위적 부흥을 위해 강제로 서울의 기능을 떼어 지방으로 보내고 있다. 일부 젊은 세대는 서울이 너무 과밀화되어 집값이 비싸기 때문에 서울을 해체해야 한다고 믿으며 어떤 사람들은 서울만 발전하는 것은 불공평하기 때문에 서울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주장들은 한데 모여 국토균형 발전이라는 슬로건으로 예쁘게 포장되었고 이제는 그 자체가 정의가 되었다. 어떤 정책을 당위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성숙한 논의는 사라지고 순환 논리의 오류만 남는다. 서울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왜? 서울은 확장되면 안되니까. 하지만 역사적 사례들을 종합해서 보면 서울의 기능을 축소하고 해체하는 것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초래하면서도 경제성장을 막고 우리들의 생활수준을 퇴보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자신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예찬했다. 실제로 인류 문명의 거의 모든 발견과 진보, 그리고 문화적 성취는 도시에서 이루어졌지 않은가. 인류 문명의 태동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로부터 출발하였고 서구문명의 근간 역시 에게해 인근의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했다. 중세와 근대에도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며 서로의 견해와 아이디어를 교류하면서 혁신과 발전을 촉진했고 이런 추세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세계의 헤게모니를 주도하는 미국의 테크 산업과 금융은 실리콘 밸리와 뉴욕으로 대표되는데 이 두 도시는 미국 전역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물론 도시가 인류 발전을 주도하게 된 요인에는 이런 단순히 인구수뿐 아니라 교육시스템, 거주 인프라,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적 배경 등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유무형의 인프라가 도시와 무관할까. 신과 왕의 권위에 짓눌리던 중세 유럽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고.

이 관점에서 서울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살펴보자. 한국의 1인당 GDP는 이미 3만 5천 달러에 달해 중진국의 함정을 벗어났고  한국의 여러 산업과 기업들은 이제 세계무대에서 다국적 회사들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구조는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산업에서 벗어나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모바일 등 고부가가치 제조업에서부터 문화 예술을 포함한 서비스 산업으로 확장되었다. 이들 산업에 가장 중요한 자원은 자본도 천연광물도 에너지도 아닌 바로 사람이다. 우리의 미래는 이들을 모으고 연결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분산하고 흩뿌리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오로지 서울만이 그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다. 

반대로 도시를 쪼개 분산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의 증가와 인프라의 쇠퇴를 가져온다. 도로, 철도, 문화시설, 그리고 민간 상업시설들의 비용 대비 편익은 인구가 감소할 때 지수적으로 감소한다. 인구 천만의 도시에 지하철 노선을 10개 설치하는 것과 인구 백만의 도시 10개에 지하철 노선을 각각 하나씩 설치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라. 인구 천만의 도시에는 대형 공연과 전시가 수백 회씩 열리지만 인구가 반 토막으로 줄면 문화행사는 반이 아니라 1/10로 줄어든다. 더욱이 인구가 줄어들 것이 매우 확실한 상황에서 멀쩡히 기능하는 대도시의 기능을 억제하겠다고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산간 오지에 막대한 예산을 퍼붓는 것은 가장 확실하게 국가예산을 낭비하면서도 사회의 비효율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이미 우리는 지방분산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행정부를 비롯하여 국민연금, 한국전력, 도로공사, 한국거래소와 같은 공사들을 각 지방으로 이전한 결과 무엇이 나아졌는가. 십수 년간 수십 조원의 예산을 투입했지만 행정은 훨씬 더 비효율적으로 변했고 재직자들의 만족도 역시 크게 떨어졌다. 세종시와 지방의 공사 본부의 고위직들은 하나같이 대면회의를 금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잡으려고 실무자들을 닦달질하고 있고 그렇게 시달리던 직원들은 매주 금요일 KTX 플랫폼에서 서울을 오가느라 무의미하게 몇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비용과 비효율을 감내하여 얻은 것이라곤 시골 토호들의 늘어난 재산과 쓸데없이 늘어난 교통량뿐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서울의 과밀을 해소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아마도 서울의 주택 공급의 부족이 출산율의 감소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 집이 모자라면 집을 더 지으면 될 일이다. 서울의 평균 용적률은 고작 1.5-1.7배로 최대 5-10배에 이르는 다른 경쟁 도시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 구체적으로 보면 싱가포르의 경우 도심의 용적률을 25베, 맨하탄과 홍콩은 15배, 런던 도심은 5.5배까지 허용한 데에 비해 서울은 주거용 건축물에  그 반의 반도 안되는 1.5-2배라는 매우 낮은 용적률을 적용하고 있다.(법적으로 3배까지 허용되지만 그렇게 허가가 난 주거건물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대지를 세분화하여 엄격하게 용도를 지정하는 제도는 일제시대였던 1930년에 처음 도입되어 현재와 같은 개념은 1970년대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졌다. 이후 약간의 변경은 있었지만 큰 틀은 그대로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울의 도시계획은 지난 세기의 낙후된 건축기술에 기반하여 짜였는데, 우리는 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규제들은 서울의 주거환경을 크게 악화시켰다. 서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인구당 주택 수는 꼴찌이고 노후 주택의 수나, (일반 대중들이 선호하지 않는) 연립 및 다세대 주택의 비율도, 그리고 노후 아파트의 비율도 단연코 1등이다. 현재의 규제와 정책은 마치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를 가장 살고 싶지 않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도시의 주거환경이 선진국의 대도시들 보다 인도나 베트남의 도시들을 닮은 이유는 우리가 인도나 베트남 만큼 못 뒤떨어졌던 시절에 만든 규제와 제도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인도나 베트남만큼 후진적인 인식을 지닌 유권자들이 있다. 그들은 기껏 돈을 써가며 홍콩이나 싱가포르, 런던과 뉴욕의 마천루들을 돌아보며 멋지다며 인스타에 올릴 인증샷을 박고 나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마닐라의 다세대 주택만도 못한 노후주택들의 개발을 규제하는 정치인을 찍는다. 우리나라가 처한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21세기에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에 집중하겠다면 서울이라는 고밀화 된 도시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차라리 인구를 공단 주변으로 고르게 분배하고 노동자들의 수를 늘리는데 나라의 모든 역량을 투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박통 시대의 구닥다리 산업 모델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방식으로 현재의 경제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출산은 분명 한국 경제에 장애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발전을 가로막는 후진적이고 미개한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다. 세계에는 인구증가율이 극히 낮거나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와 도시들이 여럿 있지만, 자국의 도시를 해체하고 인프라를 망가뜨리면서 성장하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던 나라였던 한국은 사실상 인적자원 하나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규모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콩고와 비슷했지만 현재는 이탈리아 캐나다와 비슷하고 한국의 기업들은 대만 일본 독일 등과 경쟁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택할 것인가. 인구가 줄어들더라도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을 지속하는 네덜린드나 벨기에 혹은 여타 도시국가들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인구밀도만 높고 도시의 인프라는 형편없는 후진국형 모델을 지향할 것인가.  

한때 대학가에는 대기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주장하던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나라에 반도체나 배터리, 전기차를 만드는 회사가 없었더라면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서울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서울의 기능과 조직들을 해체하고 분해해서 전국에 흩뿌려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자신들이 지방으로 밀려날 차례가 되면 곧장 머리에 띠를 두르고 길거리로 뛰쳐나오곤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단순한 노동자들의 수 보다 우수한 인적 자원들을 어떻게 모으고 연결시킬지에 달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도시가, 특히 서울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기 위해선 서울의 발전을 억누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집중해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다면 더더욱.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해체해야 할 것은 서울이 아니라, 바로 저들의 후진적인 인식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통신기술을 발달로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치 한 곳에 모여있는 것처럼 교류할 수 있기에 굳이 도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직접적으로 마주치고 교류하기를 원한다. 줌이 발달했으니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기울이는 대신 각자 앱을 열고 마시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메타버스가 발달했으니 클럽이나 바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AR고글을 끼고 불금을 보내는 사람도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히키코모리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젋은이들이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찾아서, 중장년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노인들이 편리한 인프라와 의료시설을 위해 도시를 선호하듯 현재의 과학기술은 결코 도시를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댓글에 쓴 내용을 본문에 추가: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의 주 원인 중 하나는 학력과잉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불균형입니다. 모두들 대학을 졸업해서 폼나는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싶어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고용의 대부분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용이 유지되는 지속일자리의 80% 이상은 제조업이 차지고 있는데 그 중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입니다. 그래서 해당 산업들은 구인난을 겪지 않나요? 일자리가 없는게 아니라 구직자들의 눈높이와 현실이 안 맞는겁니다.

청년층의 실업률을 낮추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젋은층이 현실을 직시하고 공장 가서 볼트와 너트를 조이거나 좋좋소에 취직하거나, 혹은 혁신과 경쟁이 계속되어 새로운 세계적 기업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후자를 위해서는 도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공장에 가는 것보다 새로 탄생할 뉴 삼성, 뉴 네이버에 다니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도시에 집중해야 한다고 믿고요.

지방으로 인구를 분산한다고 전체 일자리가 늘어날 지는 심히 의문이지만(전 아니라고 봅니다)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저임금의 일자리들은 과잉학력으로 인한 불균형에 직면한 젊은세대의 목마름을 채워주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요.  

2023. 9. 26.

허생전 2023 (feat.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

(생략)변 씨는 본래 원희룡 장관과 잘 아는 사이였다. 원희룡이 당시 국토부 장관이 되어 변 씨에게 주택수급 문제를 해결할 인재가 없는가를 물었다. 변 씨가 허생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원 장관은 깜짝 놀라면서 "그인 이인이야. 자네와 같이 가 보세"라고 답했다. 밤에 원 장관은 보좌관들도 다 물리치고 변 씨만 데리고 걸어서 허생을 찾아갔다. 변 씨는 원 장관을 문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먼저 들어가서, 허생을 보고 원 장관이 몸소 찾아온 연유를 이야기했다. 허생은 못 들은 체하고 "당신 차고 온 소주나 어서 이리 내놓으시오" 했다. 변 씨는 원 장관을 밖에 오래 서있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자주 말하였으나, 허생은 대꾸도 않다가 야심해서 비로소 손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원 장관이 방에 들어와도 허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원 장관은 몸 둘 곳을 몰라 하며 나라에서 주택 공급 방안을 마련코자 하는 뜻을 설명하자 허생은 손을 저으며 막았다.


“밤은 짧은데 말이 길어서 듣기에 지루하다. 너는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느냐?”

“국토부 장관이오.”

“그렇다면 너는 대통령의 신임 받는 각료로군. 내가 인허가 절차를 막는 규제들을 선별하면, 네가 의회에 아뢰어 일괄적으로 폐지할 수 있겠느냐?”

원 장관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 제 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나는 원래 ‘제 이’라는 것은 모른다.”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원 장관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타 OCED국가들과는 달리 조선은 대규모 자본과 법인이 거주용 부동산 산업이나 리츠에 진출하기가 어려워 민간 임대시장에서 규모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는 조정에 청하여 대형 리츠회사들이 주거용 부동산을 공급할 수 있게 허용해 줄 수 있겠느냐?"

원 장관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했지만 평균 용적률이 고작 160%에 불과해 500-1500%의 용적률을 가진 다른 국제도시에 비하면 도시계획의 효율성이 턱없이 낮다. 이로 인해 직주근접이 가능한 주택의 수가 크게 모자라 핵심지의 주택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시간씩 걸쳐 출퇴근 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비효율이 이어진다. 서울 핵심지를 고층으로 개발하면 양질의 주택 수를 공급할 수 있는 동시에 교통량은 줄고, 또 활용할 수 있는 대지의 면적은 되려 넓어져 공원과 도로와 같은 인프라를 갖출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비합리적인 층수 규제와 용적률 제한을 과감하게 풀고 성냥갑 시멘트 아파트를 재건축하도록 더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제도와 규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정부 예산을 쓰기는커녕 인허가 과정에서 세수 수입은 되려 증가할 것이고 더욱이 이명박 정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남을 비롯한 핵심지의 주택공급이 크게 늘어나 상급지부터 주택 가격이 장기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원 장관은 힘없이 말했다.

“안 그래도 부자감세라고 욕을 먹는데 재건축까지 대거 풀어주면 토건족이라는 비난을 누가 감당하려 하겠습니까"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부자감세가 무엇이란 말이냐? 상속세율과 소득세율이 OECD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데다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 면세자 비율은 40%가 넘어 주요 국가 중 가장 높은데 무엇이 부자감세인가. 그렇게 걷은 세금을 가지고 아무런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아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권 변두리의 맹지에 갑자기 수만 세대의 집을 짓겠다는 계획이 더 큰 재정의 낭비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지자체와 행정부가 인허가권을 무기로 삼아 이미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의 민간 주택 공급은 틀어막아놓고,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공기업 LH에게 사업을 맡겨 설계도 엉망인데다 철근도 숭숭 빠진 공공 주택을 건설하는 짓을 과연 주택 공급 활성화 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진정 토건족스러운 짓 아닌가. 게다가 현재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PF 사업장은 인기가 없어 사업성이 나오지 않는 것인데 그런 엉망인 사업들을, 게다가 거주용 부동산도 아닌 PF들을 일괄적으로 구제해 주겠다는 것을 딴에 주택 공급 활성화 방안이라고 한단 말이냐? 내가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는데, 너는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한다면서 그래도 신임 받는 국토부 장관이라 하겠는가? 너 같은 자는 칼로 목을 잘라야 할 것이다.”

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원희룡 장관은 놀라서 일어나 급히 뒷문으로 뛰쳐나가 도망쳐서 관저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집이 텅 비어 있고, 허생은 간곳이 없었다.




2023. 8. 10.

노무현의 뇌물보다 무서운 가출

2023년 8월 10일, 법원은 정진석 의원이 과거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허위사실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징역 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이는  검찰의 구형이 벌금 500만 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판결이었는데, 이러한 판결을 내린 배경에 대해 법원은 "정진석 의원의 글 내용은 악의적이거나 매우 경솔한 공격에 해당하고, 그 맥락이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도 없다"라고 부연했다." 이어 "유력 정치인인 정 의원은 구체적 근거 없이 거칠고 단정적인 표현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밝혔다.


문제가 되었던 정진석 의원의 발언은 아래와 같다.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 씨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금품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부부 싸움 끝에 권 씨는 가출하고 혼자 남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것이 이명박 때문이란 말인가. 


논란이 되었던 위의 발언에서 사실로 인정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로부터 금품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드러남
  • 그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음
  •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아 허위사실로 여기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부부 싸움
  • 권 씨의 가출
  • 노 대통령이 밤에 혼자 남음

그리고 이로 인해 정진석 의원은 명예훼손으로는 아주 이례적으로 실형 6개월의 형을 받았다. 그리고 법조인이 아닌 나로서는 법원이 정진석 의원에게 실형을 선고한 것이 합당한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군사독재자들의 피붙이들과 다름없이 부당한 뇌물을 받은 그 가족들과, 부부 싸움과 가출을 주장한 정 의원 중에서 누가 노무현의 명예를 더 많이 실추시켰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그렸던 정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               *

지난 2018년 경기지사 TV 토론에서 당시 이재명 후보는 "친형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고 했느냐"라는 질문에 "그런 일이 없다"라고 답했지만 이후 그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형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20년 7월 대법원은 "돌발적 질문에 대해 자기방어적으로 답변한 것은 적극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는 논리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했고 이런 판결이 나오는 과정에서 김만배와 가까운 사이로 차후 화천대유의 고문으로 활동한 권순일 대법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링크)  

게다가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우리는 몇몇 정치인들과 일부 방송인들이 자신의 정적이나 반대 진영 인사들에 대해 매우 모욕적인 루머를 퍼뜨린 사실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중에는 유력 대선후보의 아내가 술집 작부 출신이라는 주장이나 여자 정치인의 섹스 비디오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 거짓말이 거짓말이 아니게 되고, 똑같은 허위사실도 무죄가 되던 마당에 느닷없이 정진석에게 실형이 선고되었으니, 여당이 법원이 감정적이고 편향적이라며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을 믿으려 한다. 그러니 법원이 이제부터라도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흐리는 거짓 주장에 단호히 대처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일관성을 엄정하게 유지하기를 바란다. 또다시 권순일이 주장한 것처럼 소극적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그리고 뇌물보다 가출이 더 무겁다는, 그런 궤변을 듣는 괴로운 일은 없기를 바란다.

2023. 7. 6.

아직 쓰이지 않은 글

시장에 대해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시장이나 경제에 대한 내 전망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 외의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순전히 내 게으름 때문이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맴돌기만 할 뿐 아직 쓰이지 않은 글들은 하나둘씩 늘어만 가는데 곰곰이 돌이켜보니 나 자신마저도 뭘 쓰려고 했는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 그래서 노트와 기억을 더듬어 언제고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글들의 제목이라도 적어두련다.  



에세이(가제)
20세기 뮬란과 21세기 페미니즘
교포, 자이니치 그리고 조선족
달과 6펜스, 그리고 이건희 콜렉션
AI와 현대미술
저출산과 배부른 캥거루들
대한제국을 몰락시킨 고종, 그리고 대한민국의 관료들
조커와 투페이스, 그리고 이재명과 윤석열 
성난사람들, 그리고 양극화 된 정치
투자에 실패한 이들을 위하여
서글픈 레트로의 시대
전쟁사의 가장 기발한 전투들
용서하지 않는 사회


감상문
건축학개론
헤어질결심
D.P

(2023.7.6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