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31.

사회주의 정부의 좋은 예

각 재화의 가격을 시장이 아닌 정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하려고 드는 것이 사회주의가 아니면 무엇이 사회주의인가. 시장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깽판치는게 도대체 정부가 할 일인가.

트레이더나 운용역들은 대개 성격이 더럽다. 회사 내에서도 그들이 성질부리는 것을 다소간 용인해 줄 정도로. 그리고 그들이 성질부리는 것은 대부분 시장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샀는데 내리고, 팔았는데 오르고. 기다리는데 안오고. 나도 뭐 때때로 성질부리곤 하긴 하지만, 뭐 시장이 내 마음대로 되는게 정상인가. 그래야 할 이유가 뭐 하나라도 있나. 최대한 감정을 죽이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지.

현재 정부는 무능한 트레이더들의 모습을 똑 닮았다. 강남의 아파트는 평당 얼마여야 한다는 자기 혼자만의 괴상한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에 반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데 그 구성원들조차도 퇴근 뒤 강남복덕방으로 달려가지 않나. 자신의 욕망 하나도 통제 못하는 인간들이 남의 욕망을 통제하겠답시고 칼춤을 추고 있다.

그 마무리가 어찌 좋겠나.

2019. 10. 30.

탕탕절과 중력절

우리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고인모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이순신장군을 두고 "최고 지휘관이 최전선에서 총맞아 죽는게 과연 올바른 리더쉽인가"라고 평가한다고 이눔새끼! 나라를 위해 몸바친 분에게 예끼!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공과 과를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박정희와 노무현 둘 다 당신들의 친구나 선배가 아닌 역사적 인물이고 따라서 그들에 대한 공과 과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누군가에게 그들은 친구나 선배일 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그들을 평가할 때 고인모독이란 죄명을 들이대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일개 필부로 격하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독재하며 자기 수하들을 경쟁시키다 경쟁에서 밀려난 김재규에게 총 맞아 죽었다. 노무현은 깨끗한 정치인 흉내를 냈지만 자기 형 아내 딸이 모두 돈 받은게 드러나자 자책하며 자살했다. 그들의 죽음의 원인은 각자의 비리에 있었지, 좌빨간첩들이나 수꼴보수신문이 죽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들은 자신들이 마치 박정희와 형님동생 하던 사이인 마냥, 혹은 노무현의 싸이 일촌이라도 되는 것 처럼 행동한다.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은 날을 탕탕절이라고 부르거나, 노무현이 투신한 날을 중력절이라고 부르면 갑자기 노발대발하며 인륜과 도덕을 들이민다. 그렇게 치면 모든 위인들은 다 죽고 없는데 뭐 고인모독에 안걸릴게 뭐가 있나. 누군가는 독재자가 암살당한 날을 기념할 수도 있는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돈 받은 형을 보호하기 위해 남을 자살로 몰아간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자살한 것을 업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극성 지지자들은 이를 고인모독이라며 핏대를 올리며 비난하지만, 그 고인은 당신의 절친이나 가족이 아니라 역사적 위인들이다. 그들에 대한 평가의 자격은 국민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 당신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내 주변 누군가가 탕탕절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중력절을 기념하는 것 모두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존중한다.

학창시절 유행했던 YS 지우개
마찬가지로 나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종교에 대한 모독을 제외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는 것이 건전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노태우가 자신을 보통사람이라고 지칭했던 것이나, YS가 자기를 희화화한 캐릭터 문구용품을 허용한 것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들이 스트레스 받으면 대통령 욕도 할수 있고 그런거지 뭘! 이라며 일갈했을때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아 노태우시절엔 박수를 보내기엔 너무 어렸구나.)마찬가지로 표창원 의원이 국회에 박근혜를 희화화하는 더러운 잠을 걸었을 때, 나는 그를 지지했다. 패러디의 수준이 너무나 1차원적이고 유치하다는 점을 비판했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웃을 만한 짓을 한 정치인들은 언제나 비웃음을 당하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놀랍게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던 무리들이 갑자기 엄숙주의에 빠져서 권위를 내세우는 기행을 마주하고 있다. 탕탕절은 괜찮지만 중력절은 인간쓰레기들이나 쓰는 용어고, 여자대통령의 누드를 전시하는 것은 패러디지만 남자대통령이 애니매이션에서 상의를 벗고 있는 것은 패륜이라는 그 이중잣대는 적잖이 당황스럽다. 아래의 두 예시를 보자, 한국 정치를 모르는 이들에게 1번은 표현의 자유로 보장받아야 하지만 2번은 절대 허용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들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우물거릴것이다.


사람마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지 그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기준은 진영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다이다이 맞짱을 뜨면서 맨주먹만 쓸지, 연장도 허용할 지, 아니면 총이나 바주카포 같은 걸 써도 되는지 그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길다란 일본도를 들고 나왔다면 적어도 상대가 품 속에서 자그마한 회칼을 꺼내는 것을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우스꽝스럽게도 이러한 내로남불이 헌법으로 자리잡은 나라가 있다. 바로 조선인민공화국. 그 괴상한 나라에서는 체고존엄 자국 지도자의 사진을 집집마다 걸어놓고 액자에 먼지가 앉아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심심할 때마다 남의 나라 대통령들 사진을 인형에 붙이고 불태우고 칼로 베고 뭐 그런다. 자신과 상대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높은 도덕의 문제인 동시에 지능의 문제이기도 하다. 뭐 머리나쁜 사람들에게 이런 애기를 백날 하면 뭐하나, 재는 나쁘니까 당해도 싸고 우리편은 착하니까 그러면 안된다며 유아들의 니편내편 놀이 말곤 할줄 아는게 없는데.
 

2019. 10. 27.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의 공존

먼저 나는 AI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그 분야에 종사하지도 않는 비전문가임을 밝힌다. 하지만 내연기관을 설계/제작하지 않아도 그 특성을 이해한다면 운송업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듯 나 역시 AI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뭐, 틀리면 할수없고.

최소한 생명체의 진화과정을 이해한다면 AI가 인간의 뇌와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뇌 역시 복잡하게 연결된 수억 개, 어쩌면 그 이상의 논리회로에 따라 학습하고 판단하고 창조한다. 일반적인 유아가 학습하는 방식은 머신러닝과 아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독자적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창조성 역시 조만간 AI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적어도 두가지 측면에서 AI보다 열등하다.* 바로 망각이 이루어진다는 점과 감정, 편향 등으로 인해 논리적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 둘은 수억 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우리의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다. 망각은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정보를 메모리에서 삭제하는 것과 같고, 감정이나 편향은 특정 조건 아래서 우리가 뇌의 특정 기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분노하거나 흥분할 경우 발생하는 아드레날린은 근육에 산소와 포도당의 공급을 늘리고 통증을 덜 느끼게 한다. 우리의 뇌는 한정된 에너지와 용량을 가지고도 최대한의 성능을 발휘하도록 진화되었다.

따라서 우리 뇌의 가장 큰 강점은 효율성이다. 예전에 언급했듯이(링크)  인간을 꺾은 바둑머신 알파고를 개발하는데 수천 억을 썼고 유지하는데도 연 수백 억의 비용이 들지만 바둑 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반면 커제나 이세돌은 바둑 뿐 아니라 어우 짜증나 라고 옆사람에게 말하기도 하고 직접 운전해서 귀가하는데다 노래하고 글쓰고 스타크래프트도 할 수 있지만 그에 들어가는 에너지라곤 고작 몇백g의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 그리고 몇몇 무기물과 비타민 뿐이다. 물론 알파고에 이런 모든 기능을 추가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수백 명의 전문기술자를 고용해야 하고 데이터 저장용량을 확장해야 하며 전력공급을 대폭 늘려야 한다. 애초에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진 기관과 분자 수준에서 재조합된 생명체의 에너지효율은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인간 뇌의 효율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저학력 노동자들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이렇게 비싼 돈과 운영비를 들여 개발한 인공지능은 저학력자들을 대체하는것 보다 고학력자들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그 실마리는 과거의 사례로부터 찾을 수 있다. 영국의 엔지니어들이 증기나 전력을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기계의 발명하자, 최고 숙련공 인간 노동자들과 기계 간의 대결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마치 우리가 오늘날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지켜보던 것 처럼. 기계는 인간의 몸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었고 얼마 안가 노동시장에서는 우수한 신체능력에 대한 값어치가 폭락했다. 남들보다 두배의 힘을 가진 육체 노동자가 남들보다 크게 대접받을 곳이라곤 이제 UFC경기장이나 올림픽 투포환 경기장 뿐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두려움과는 달리 난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량실업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업혁명기의 노팅엄이나 요크셔의 공장들을 떠올려 보라. 기계들과 컨베이어벨트가 도입되자 러다이트를 필두로 대다수의 저숙련 인간 노동자를은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집어 삼켜 모두 굶어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도끼와 망치를 꺼내 기계들을 부수고 다녔지만,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지금, 실업률은 되려 낮아지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어마어마하게 개선되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공장에는 특정 업무에 특화된 기계를 도입하는 것 보다 그냥 인간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저렴한 공정들이 널렸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AI에게 밥그릇을 뺏기는 것은 십수년 간 공부해서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직들이지 인공지능의 개발/운영비용 본전도 안나올 다수의 저숙련 직무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다소간 형태야 바뀌겠지만.

게다가 인공지능의 또다른 한계는 그 엔드유저 역시 인간이라 비합리적이라는 데에 있다. 오늘도 전 세계에서는 불완전한 인간 운전자들이 매일 수만 건의 교통사고를 내며 매일 약 3천 명을 죽이고 있지만, 대중은 자율주행 차가 옆 차를 긁은 사건에 더욱 경악한다. 인간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공포영화를 보면서 동공이 수축되고 근육이 경직되는 공포를 느끼면서 인류 역사상 수백만 명을 넘어져 죽게 만든 길거리의 돌뿌리를 보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사용자인 인간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인공지능의 효용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앤드류 양이라는 대만계 후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에서 큰 돌풍을 가져오고 있다. 그는 미국의 대형 IT기업들이 AI와 자동화로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대량실업에 직면할 것이니 그들에게 세금을 걷어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주장했다. 뭐 각자 생각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난 대량실업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계를 되돌려 1875년 코네티컷의 한 농장을 상상해 보자. 앤드류라는 한 마부가 주장하길, 자동차라는 놈은 말과는 달리 지치지도 않고 수백 마일을 달리고 발굽을 갈고 접종을 할 필요도 없으니, 이 기계가 도입되고 나면 마부 뿐 아니라 대장장이, 건초판매업자, 등등이 모두 실직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윽고 포드 T형이 1500만 대나 생산될 동안 미국의 실업자는 되려 줄어들었다. 마부와 대장장이들은 채찍과 모루를 버리고 포드의 공장에 재취업했고 건초를 팔던 사람은 이제 타이어를 팔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부의 아들은 코네티컷 주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아버지와는 달리 휴가철마다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캘리포니아부터 시카고까지 마음껏 다닐수 있었다. 기계는 결국 우리의 자유를 확대했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확장하는 사건이었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두뇌를 넘어서는 사건이고 이는 대량 실업은 커녕, 일반 노동자들의 삶을 크게 개선할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당연히 연산속도도 차이가 나는 것 처럼 보인다. 47,964.61^988,17.554와 같은 수학연산은 AI는 커녕, 간이계산기조차 인간의 뇌 보다 빠르니까. 하지만 사칙연산이 아닌 다른 다양한 정보처리에서도 과연 그럴까. 예를들어 아이유와 신봉선의 사진을 보여주며 누가 더 아름다운 얼굴인지 판별하는데 딥러닝으로 학습한 AI가 과연 인간의 뇌보다 빠를까? 기본적으로 뇌에서의 정보처리 역시 전기신호로 이루어지는데. 여전히 AI가 더 빠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는 바가 없어 잘 모르겠다.

지독한 대중의 지독한 오류

사람들은 좌파의 내로남불을 비난하지만, 그들 역시 지극히 이중적이다. 영리한 이들은 조국처럼 그 간극을 파고 들어 이익을 취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그런 대중의 특성을 잘 활용해서 공공의 선을 이룩하겠지만 내 재주는 그 이중성을 꼬집어내서 조롱하는 것, 딱 그 선에 멈춰있다. 그리고 이는 내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일 것이다. 자 이제 또 이 고약한 취미를 풀어볼까.


1. 최저임금과 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또래들 중 최저임금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들은 대부분 IT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댓글로 경제학자들의 기고나 외신의 논평을 붙여줘도 그들과의 논쟁은 늘 "사람의 노동력에 그정도 값을 못 주냐"며 경제학이 차지해야할 영역에 도덕을 쑤셔넣으며 끝나곤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택시업계가 타다와 분쟁을 시작하자 돌연 태도를 바꾸어 뒤쳐진 노동자들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이 가슴 따듯한 그 인본주의자들을 냉철한 신자유주의자들로 탈바꿈시켰나.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나는 우리나라 택시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교통 시스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1인당 GNI 대비 택시값을 고려하면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할 뿐더러 택시 요금 체계는 수요가 많은 시간에 빙빙 돌지 않도록 설계되어있다. 물론 나 역시 늦은 밤 연달아 승차를 거부당하거나 괴팍한 택시기사와 논쟁이 붙을 때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주먹을 불끈 쥔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택시는 완벽하지 않아도 상당히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2호선을 제외하고 죄다 적자인 지하철을 생각해보라) 당신이 택시를 거지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사실 당신이 거지같은 요금을 내기 때문이다. 당신이 봉천동에서 신사역까지 10만 원씩 내고 택시를 부른다면 그대를 모시기 위해 집 앞에 택시가 줄을 설 것이며 기사는 흰색 장갑에 턱시도를 입고 하차하는 당신의 문까지 열어줄 지 모른다. 서비스는 가격에 비레하니까. 못믿겠다면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강남역 사거리에서 오만원짜리 네장을 꺼내고 봉천동 이십만원! 을 외쳐보라, 대한민국에 당신을 거부할 택시는 없다.

이미 가격 대비 극한의 효율을 보이는 택시업계에 타다가 뛰어들자 운수노조는 크게 반발했다. 대중과 언론은 그들을 자기 밥그릇을 위해 시대에 역행하는 악당으로 묘사하지만, 도대체 타다가 무슨 시대적 변화나 혁신을 가져왔는가. 그냥 돈 많은 IT업계 자본가가 목돈 뚜드려 박아 적자를 메우고 여객운수법을 우회하기 위해 디젤 SUV를 동원한 것을 제외하면 기존의 택시와 다를 바가 하나 없다. 타다의 서비스에 비해 요금이 저렴한 것은 대주주가 남의 돈을 끌어다 신명나게 손실을 내는 덕분이지 혁신 때문이 아니다. 게다가 나 역시 타다를 애용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기존 택시들의 효율성에 대해 더욱 감탄하게 된다. 먼 거리를 갈 수록, 바쁜 시간대일 수록 타다는 항상 기존 택시보다 느리다. 어떻게 아무런 인센티브가 없는 월급제 기사들이 목구멍이 검찰총장인 기사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길을 찾고 운전하겠나. 쿠팡의 손실이 매출에 비례해서 늘어나듯, 타다의 손실 역시 그리할 것이다. 대주주들이 무엇인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대중은 돈많은 부자가 택시기사들을 죽음의 경쟁으로 내모는 것을 보며 도태된 노동자들은 망해야 한다고 외치고, 운수노조가 택시요금을 인상하라고 주장할 때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당신들이 매년 두자릿 수로 최저임금을 옹호한다면 왜 5년에 한번 택시요금이 인상하는 것에 그리 야박하게 구는가. 택시기사들도 노동자 아닌가. 셔츠 위에 니트를 입고 sns에 아름다운 글빨로 최저임금을 예찬하던 좌파 IT 종사자들이 갑자기 신자유주의자가 되어 운수노조를 씹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기 돈이 나가니까. 남의 돈으로 올리는 최저임금은 정의로운 것이고 내 돈 나가는 택시요금은 동결되어야 한다는 주장엔 논리도 지능도 정당성도 없다. 그냥 멋있어 보이고 싶으면서도 빈티나는 구두쇠 멍청이가 한명 있을 뿐.


2. 분양원가 공개와 노동원가.
집값이 오를 때마다 현대교육을 덜 받은 멍청이들이 늘상 외치는 단어가 있다. 분양원가 공개. 지금 집값이 오르는 이유는 (정부가 멍청한 정책을 써서 그런것이 아니라) 건설사들이 원가를 뻥튀기해서 턱없이 높은 분양가를 매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사비 지출 내역을 상세하게 공개하고 나면 분양가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쓰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이런 멍청한 주장을 펼치는 똥멍청이들에겐 매가 답이다. 하지만 무식한데 용감하면 위험하다고, sns를 둘러보다 보면 그런 똥멍청이들의 주장에 넘어가는 또다른 똥멍청이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달려있다.

그 저변에는 모든 물건은 제 값을 주고 팔아야지,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서 제 값 이상의 가격을 매기는 것은 사악하다는 믿음이 끼어 있다. 현대사회가 시민들에게 교육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원시시대와 별반 차이 없는 뇌를 학습시켜 현대사회에 걸맞는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함인데, 저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분명히 교육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니 감방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같은 논리를 그들의 노동시장에 적용해 보자. 4인 가구가 하루에 필요로 하는 칼로리는 약 8,000Kcal이고 수분은 대략 7-8L 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에 몇몇 무기질과 비타민을 더하면 대충 한 끼 식비는 교도소나 학교의 식비보다 쌀 것이다. 어차피 모든 공교육은 무료니 빼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최소 거주공간 등등을 계산하면 그들의 제공하는 노동력의 원가를 산출할 수 있다.(대충 계산해보면 한달에 75만원이 채 안된다.) 이런 노동원가의 수준으로 삶을 꾸리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노동의 원가는 설국열차에서 프로틴 바나 처먹는 식생활 기준으로 계산되어야 하고, 그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 우리 모두는 사치와 허영의 삶을 사는 것인가? 만약 사측이 저런 노동원가를 제시하면서 당신의 월급을 깎겠다고 하면 그게 깎아 지겠는가. 하지만 토지정의연대 같은 조직에는 이런 머리 나쁜 미친놈들이 가득하다. 저들이 노동을 팔고 주택을 사는 입장이라 다행이지 이 인간들이 만약 주택을 팔고 노동을 사는 건설사 사장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겠는가.


3. 기회주의자들의 평등
사회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평등의 추구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여러 심리학 실험에서도 증명된다. 심지어 인간 뿐 아니라 긴꼬리원숭이조차도 분배와 평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그 평등의 영역을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평등을 외치는 모든 사람들은 "나보다 잘 사는 사람과의 평등"을 외치지 그 반대를 외치진 않는다. 진보성향을 지닌 노원구나 일산 덕양구의 주민들 역시 지구촌 상위 10%안에 드는 부유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가난하고 못사는 동남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과 평등을 외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세계시민정신을 배반한 트럼프는 가열차게 깐다) 물론 청담동이나 대치동 주민들도 이건희 앞에서는 평등을 외칠 것이다.

결국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사람들을 삥 뜯는 달건이들이나 다름없다. 재산을 n등분 하는 바운더리를 교묘하게 설정해서 자기들에게 더 많은 몫이 돌아가도록 설계하는 그 기회주의자들이야 말로 현대판 타짜다. 그들의 그럴싸 한 sns포스팅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호구를 찾아 화투를 챡챡챡 섞는 고니의 싸다구를 짝짝짝 후려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는다. 평등을 외치는 목소리가 강할수록 탐욕적인 속물들이라고. 평등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강남에 등기치고 싶어하고 렉서스나 벤츠를 몰고 싶어하며 자녀들은 미국의 명문사립에 보내고 싶어하는 가장 지독한 속물들이다. 내가 우러러 볼 평등이란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의 것을 나누는 이들 뿐인데 그런 사람들은 죄다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나머지 잔챙이들은 죄다 냄새나는 꾀죄죄한 기회주의자들일 뿐.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런 멍청이들을 보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비웃는 데에 큰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니 뭐 어쩌겠는가. 계속 이렇게 낄낄거리고 웃다 화내다 울어야지. 뭐.










2019. 10. 26.

결핍



그 어떤 인간도 절대로 돈이나 물질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심리적, 감각적 보상을 원하고 있을 뿐이다. 마세라티의 고객들은 그 빠른 속도감과 배기구의 소음을 통한 남성적 우월감이나 아름다운 여성의 시선을 갈망하고 여성들은 알렉산더 맥퀸의 드레스로부터 자기 만족을 위한 아름다움이나 애정의 충족을 기대하며, 특별히 이도 저도 소비하지 않는 이는 저축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가 가져다 주는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찾고 있는 것이다.

돈은 단지 그 모든 감각적 문제들을 수량화시켜 시장으로 질질 끌고 나오는 매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 보니 가끔 인간은 미련하게도 자신이 진정 돈과 물질 그 자체를 원한다고 믿게 되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물질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소비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 남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따라 산다. 예컨대 쓸데없이 큰 배기량의 자동차나 발음하다 혀가 꼬일것 같은 이름의 시계 등) 그들은 자신이 어떤 감각을 원하는지, 어떠한 심리적 보상을 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돈을 경시하거나 돈을 숭배하거나, 혹은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자기가 갈망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은 사람들에게 남겨진 것은 탄탈로스의 지독한 갈증 뿐이다. 이들에게 가난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충분한 부와 풍요를 손에 넣고서도 허탈함과 상실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심리적 상실감의 원인이 아직도 "돈과 물질의 부족"에 있다고 믿기를 원하며,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권장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어떠한 물질적 풍요의 조건 아래에서도 결여와 부족의 상태를 창조해내는 동시에, 다시 그 결핍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하는 역설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모순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만 이들은 자신의 모순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절실하게 결핍을 갈구할 수 밖에 없으며, 끊임없는 노동으로 인한 피로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할 여유를 앗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넓은 광야 위를 나침판이나 지도도 없이, 심지어는 목적지도 없이 그저 앞만 보며 걸어가는 난민의 무리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때때로 잠들기 전 몽롱한 상태에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라며 자신조차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던지면서도.
       
 
 
 
2009.3.1작성
2011.7 .2수정
2019.10.25수정

paint by Andy Warhol
 

2019. 10. 23.

우리가 공수처 설치를 반대해야하는 이유

어느 분야든 언제든 개혁이 필요하다. 비단 검찰 뿐이 아니라, 국회, 재경부, 금융, 교회, 대학, 축구협회 심지어는 동네 부녀회들조차 개혁을 필요로한다. 개혁을 필요로하지 않는 집단이 존재한다면 단 하나만 대보라. 인간이 모여 만든 조직이라면 늘 타성에 젖다 부패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기필코 개혁을 필요로한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조직을 동시에 개혁하겠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죽고 다시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일진대. 따라서 개혁의 대상은 모든 집단중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문제가 많은 조직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따라서 검찰개혁을 외치는 이들은 그 일환으로 공수처를 설치하는 일이 그 상식에 부합하는지 따져봐야 한다.

우리가 1948년 삼권분립을 기초로 한 헌법을 제정한 이래 가장 부패한 권력은 바로 행정부의 수장 대통령이 아니었나.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으로 종신집권을 꿈꾸다 하야했고 제 2공화국은 총리와 대통령이 권력싸움을 하다 나라가 개판이 되어 군인들에게 쫒겨났다. 박정희는 여대생과 심수봉과 치바스 리갈을 마시다 총에 맞았고, 광주에서 국민들에게 총질하던 카우보이 전두환은 뒤돌아 소갈머리를 빛내며 백담사로 사려졌다. 보통사람을 자처하던 노태우는 보통 범죄자처럼 깜방에 갔으며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은 황태자로 군림하며 돈받고 돌아다니다 그 애비가 대국민 사과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같은 일이 김대중때에도 반복되었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정치적으로 적이었지만, 그 형들은 똑같이 상왕으로 불리며 뇌물을 받아먹었고 부패할 친인척이 없던 박근혜는 친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한민국의 헌정사의 위기는 입법부나 사법부로부터 오지 않았다. 늘 행정부의 수장인 청와대로부터 오지 않았나.

어째서 청와대는 늘 부패의 중심에 있었는가. 그 이유는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인류 역사에 그 예외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따라서 청와대에 절대권력을 쥐어준 것이 그들이 부패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따라서 개혁의 우선순위는 청와대의 권한을 입법부와 사법부로 분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수처는 이에 정확하게 역행한다. 공수처장은 사실상 대통령과 여당이 임명하게 되고 그들은 타 공직자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는데, 수사권과 기소권 뿐 아니라 도감청까지 허용하는 이런 막강한 조직은 심지어 군사정권 시절 중정조차도 가지지 못했던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권력을 사실상 행정부에 위임하는 것은 이 나라의 부패를 가속화시킬 것이다.

쉽게 예시를 들어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대국민 담화에서 만약 공수처가 있었더라면 국정농단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만약 그랬다면 박근혜 행정부의 공수처장은 우병우나 김기춘이 되었을 것이고 문재인과 조국 유시민은 대선후보는 커녕 감방에 갖혀 모범수 후보에도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제도는 아무리 더럽고 사악한 인간이 권력을 잡더라도 타락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공수처의 설치를 찬성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이 싫어하는 우병우(혹은 조국이)가 공수처장에 오르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나쁜 제도이다.

특히 여당 지지자들이여, 당신들이야말로 공수처의 설치를 반대해야 한다. 당신들은 공수처가 통과되면 정의로운 문프♡에게 더 많은 권한이 몰리니 좋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문재인은 공수처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돌이켜보면 정치사에서 독재의 기반을 닦은 사람들은 독재자가 되지 못했다.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넘고 의회를 없애며 독재자가 될 준비를 마쳤지만 정작 본인은 브루투스의 칼에 죽지 않았는가. 정작 독재자가 된 것은 그 다음 세대의 옥타비아누스였다. 프랑스 대혁명 뒤 당통과 지롱드파들을 숙청하며 독재 준비를 마친 것은 로베스피에르였지만 그는 자신들이 수많은 정적을 세웠던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고, 정작 황제가 된 것은 당시 포병장교에 불과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만약 역사가 그대로 반복된다면 문재인은 독선적 대통령제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은가.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모든 인간들은 악하게 태어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따라서 악인이 악인을 견제하는 것 보다 더 나은 사회시스템은 없다고 믿기에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모든 제도에 반대한다. 그리고 공수처는 삼권분립의 근간을 뒤흔드는 악법중의 악법이라고 생각한다.

2019. 10. 13.

투머치정치

1.

애초에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은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내 자유로운 생각들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 만약 공개하고 싶은 글이 있을때는 타 게시판에 따로 올리곤 했다. (지금은 거의 다 지웠지만) 아무도 안 보던 블로그에 갑자기 관심이 늘고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며 한편으론 너무 반갑고 고맙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피드백이 내 글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근에 나를 흔든 것은 내 정치적 편향에 대한 의문이다. 한 독자가 알려준 덕에 내 글이 몇몇 극우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보았고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응원하는 것을 지켜보며 진보와 보수, 양 측의 가치를 모두 중시한다던 나의 인식이 혹시 어리석은 착각은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몇번을 다시 생각해도 현재 내가 가장 분노해야할 대상은 운동권 세대의 폭력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세상에 중립인 사람은 없다. 김어준도 자기가 중도진보라고 하지 않는가. 조선로동당의 눈으로 보면 남한의 정의당도 미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반역자로 보일 것이고 우리공화당의 눈으로 보면 김무성도 박근혜를 배신한 가짜 우파가 된다.  모두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중도라고 믿는다. 따라서 세상에 중도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타인들의 정치적 신념을 재단하는 일은 내 신념을 평가하는 것 만큼이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리고 이런 단계를 거치고 나서도 나는 저 운동권의 비루한 정치를 끝장내는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세가지의 가치를 믿는다. 사람들마다 저들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둘 보다 중요할 것이기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저 가치들을 모두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정치는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셋을 완벽하게 배신하는 정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내 편향은 그 최악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물어뜯는 것, 그것 하나 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행동에도 나서지 않은 채 주저앉는다면 그것이 바로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시험에서 오답의 가능성이 있다고 답안지를 백지로 내면 완벽하게 빵점을 받는 것처럼, 우리가 주저앉아 선택을 거부할 때 그 공백을 비집고 들어오는 악당들과 협잡꾼들은 정치를 오염시킨다. 따라서 이전에도 몇번이나 언급했듯이 광우병 시위든 촛불 시위든 뭐든 간에, 나는 모든종류의 시민운동을 지지했고 나 역시 그에 따라 행동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저 운동권세대는 내가 믿는 세가지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본주의를 파괴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외치던 민주주의를 뿌리서부터 부정하고 있다. 나를 지지하면 민주주의고, 나를 반대하면 내란선동이라는 저 인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썩어있는가.  젊은 대학생들이 마스크를 쓰는 것을 비판하던 유시민(만 60세, 뇌썩남)의 사고는 박근혜 행정부의 복면금지법과 맞닿아 있으며 가짜뉴스 방지법을 도입하겠던 여당의 마인드는 테러방지법을 발의하던 새누리당과 일치한다. 운동권은 더이상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그 단어는 특정세대와 편향을 가진 이익집단, 혹은 카르텔을 의미한다.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저들을 보라. 그것은 조폭의 의리지, 정의가 아니다. 사시미 칼과 각목 대신 펜과 마이크를 든 이 깡패들은 군사정권과 교련복, 그리고 나팔바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잔재일 뿐이다.


2.

돌이켜보면 보수 유권자들이 박근혜를 탄핵한 것은 그녀의 행정부와 청와대가 도덕적으로 더 썩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까지 대한민국에서 비선실세가 돈을 안 받아먹은 정부가 있다면 한번 대보라. 이는 건국이래 항상 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층이 분노했던 것은 박근혜가 리더쉽을 갖춘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의 중졸 친구에게 의지하고 국정을 맡기는, 그런 무기력한 모습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언론들이 보수대통령을 공격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무능한 보수만큼 쓸모 없는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부패한 진보일 것이다. 우리가 박근혜를 탄핵하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은 그에게 더 나은 능력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도덕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망가져도, 부동산을 망쳐도, 그리고 외교가 엉망이 되어도 나는 담당자를 바꾸라고 주문했지, 그들의 정치를 통째로 싸잡아 비난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오른팔이 우병우나 최경환은 물론이고 심지어 순실이 아줌마보다도 무능하겠지만, 적어도 그들보다 [더] 부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믿음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시절이었다면 청문회 일정도 잡지 못했을 모리배들이 줄을 이어 내각에 입각하는 것을 보았고, 최순실에게 버금가는 손혜원 같은 악당이 당당하게 언론을 윽박지르는 것을 참았으며, 사상 최악의 공직후보 조국은 그 사태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명박과 최순실과 우병우를 다 섞어놓은 것 보다도 더 끔찍한 이 권력형 범죄보다도 나를 더 분노케 하는 것은 썩은 정치인들을 보호하는 저 (자칭)진보 유권자들이다. 세상 천지 어디에 범법자를 보호하는 진보이념이 어디에 있는가. 불법을 용인하는 정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마치 신도를 강간한 사이비 교주를 두둔하는 추종자들 만큼이나 썩은 저 운동권의 도덕은 진보 시인이 여제자들 앞에서 꺼내 흔들던 고추 만큼이나 역겹고 더럽다.


죄가 있으면 깜방에 가고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다면 욕을 처먹는 것, 그것은 상식이지 정치가 결코 아니다. 불법을 저질렀는데도 불법을 논하지 말라는 저들의 윽박이 바로 정치다. 저들은 마치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선 예수처럼, 혹은 그 지지자들처럼 자신의 모습을 왜곡해서 미화시키고 있지만 그들은 그저 썩은 정치를 응원하는 썩은 유권자일 뿐이다.


3.

내 고교시절 사회과목 선생님은 학창시절 시위하다 전경들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다니다 구속되셨던, 그 시절의 진성 빨갱이었지만 교사가 되어서는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청소년인 우리들에게 시장경제를 가르치고 심지어 모의 주식투자대회까지 열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교련 선생님은 전직 군인출신으로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사람이었는데, 맨날 졸던 그의 수업중에도 한 일화만큼은 또렷히 기억난다. (그가 아직 군인이었던 시절)아내가 자신에게 정치적 사안에 대해 묻자, 그는 "여보 군인이 정치에 대해 생각을 하면 나라가 망해!"라고 대답했다고. 그는 그렇게 12.12사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표현했다. 나는 그 둘이 대한민국의 평범한 진보와 보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범인들의 진보란 시장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와 평등에 좀 더 많은 가중치를 둘 뿐이고, 보수라고 해서 무조건 광주 5.18은 폭동이다, 전두환 가카 만세!를 외치는 극단주의자들이 아니라 그저 그 시대에 실존했던 북한의 위헙에 조금 더 민감했던것 뿐이었다고. 아마 2012년 대선에서 여전히 사회선생님은 2번을 찍고 교련선생님은 1번을 찍으셨겠지만 돈을 받고, 서류를 조작하고, 거짓말을 하고, 갑질을 하는 것이 옳은 그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평범한 국민들의 인식이다.

수학여행을 가면 보통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가방을 검사해서 몰래 가져온 술을 압수해다가 자기네들이 밤에 마시고 그러지 않나. 우리학교도 그랬다. 그리고 숙소를 탈출해 옆 숙소 여학생들을 만나려 가려던 우리들은 얼큰하게 취한 선생님들을 이따금 씩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들은 우리의 작은 탈선을 눈감아주시곤 했고, 우리도 그들의 (근무시간외) 음주를 눈감아주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사회선생님도 교련선생님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때 그 술자리에서 어떤 애기를 주고받았을까?  알 수는 없지만 결코 "너 혹시 빨갱이 운동권새끼 아니냐" 혹은 "뭐 이 살인정권 부역자 새끼가"와 같은 날카로운 말 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던 우리를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눈 것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