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3.

투머치정치

1.

애초에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은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내 자유로운 생각들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 만약 공개하고 싶은 글이 있을때는 타 게시판에 따로 올리곤 했다. (지금은 거의 다 지웠지만) 아무도 안 보던 블로그에 갑자기 관심이 늘고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며 한편으론 너무 반갑고 고맙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피드백이 내 글과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근에 나를 흔든 것은 내 정치적 편향에 대한 의문이다. 한 독자가 알려준 덕에 내 글이 몇몇 극우사이트에 올라온 것을 보았고 특정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응원하는 것을 지켜보며 진보와 보수, 양 측의 가치를 모두 중시한다던 나의 인식이 혹시 어리석은 착각은 아닐까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몇번을 다시 생각해도 현재 내가 가장 분노해야할 대상은 운동권 세대의 폭력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세상에 중립인 사람은 없다. 김어준도 자기가 중도진보라고 하지 않는가. 조선로동당의 눈으로 보면 남한의 정의당도 미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반역자로 보일 것이고 우리공화당의 눈으로 보면 김무성도 박근혜를 배신한 가짜 우파가 된다.  모두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중도라고 믿는다. 따라서 세상에 중도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타인들의 정치적 신념을 재단하는 일은 내 신념을 평가하는 것 만큼이나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리고 이런 단계를 거치고 나서도 나는 저 운동권의 비루한 정치를 끝장내는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세가지의 가치를 믿는다. 사람들마다 저들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둘 보다 중요할 것이기에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저 가치들을 모두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정치는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셋을 완벽하게 배신하는 정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내 편향은 그 최악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물어뜯는 것, 그것 하나 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생각이 바뀌기도 하고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행동에도 나서지 않은 채 주저앉는다면 그것이 바로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시험에서 오답의 가능성이 있다고 답안지를 백지로 내면 완벽하게 빵점을 받는 것처럼, 우리가 주저앉아 선택을 거부할 때 그 공백을 비집고 들어오는 악당들과 협잡꾼들은 정치를 오염시킨다. 따라서 이전에도 몇번이나 언급했듯이 광우병 시위든 촛불 시위든 뭐든 간에, 나는 모든종류의 시민운동을 지지했고 나 역시 그에 따라 행동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저 운동권세대는 내가 믿는 세가지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본주의를 파괴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외치던 민주주의를 뿌리서부터 부정하고 있다. 나를 지지하면 민주주의고, 나를 반대하면 내란선동이라는 저 인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썩어있는가.  젊은 대학생들이 마스크를 쓰는 것을 비판하던 유시민(만 60세, 뇌썩남)의 사고는 박근혜 행정부의 복면금지법과 맞닿아 있으며 가짜뉴스 방지법을 도입하겠던 여당의 마인드는 테러방지법을 발의하던 새누리당과 일치한다. 운동권은 더이상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그 단어는 특정세대와 편향을 가진 이익집단, 혹은 카르텔을 의미한다.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저들을 보라. 그것은 조폭의 의리지, 정의가 아니다. 사시미 칼과 각목 대신 펜과 마이크를 든 이 깡패들은 군사정권과 교련복, 그리고 나팔바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잔재일 뿐이다.


2.

돌이켜보면 보수 유권자들이 박근혜를 탄핵한 것은 그녀의 행정부와 청와대가 도덕적으로 더 썩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까지 대한민국에서 비선실세가 돈을 안 받아먹은 정부가 있다면 한번 대보라. 이는 건국이래 항상 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층이 분노했던 것은 박근혜가 리더쉽을 갖춘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의 중졸 친구에게 의지하고 국정을 맡기는, 그런 무기력한 모습을 노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언론들이 보수대통령을 공격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고 그녀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무능한 보수만큼 쓸모 없는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부패한 진보일 것이다. 우리가 박근혜를 탄핵하고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은 그에게 더 나은 능력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도덕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망가져도, 부동산을 망쳐도, 그리고 외교가 엉망이 되어도 나는 담당자를 바꾸라고 주문했지, 그들의 정치를 통째로 싸잡아 비난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오른팔이 우병우나 최경환은 물론이고 심지어 순실이 아줌마보다도 무능하겠지만, 적어도 그들보다 [더] 부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믿음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시절이었다면 청문회 일정도 잡지 못했을 모리배들이 줄을 이어 내각에 입각하는 것을 보았고, 최순실에게 버금가는 손혜원 같은 악당이 당당하게 언론을 윽박지르는 것을 참았으며, 사상 최악의 공직후보 조국은 그 사태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명박과 최순실과 우병우를 다 섞어놓은 것 보다도 더 끔찍한 이 권력형 범죄보다도 나를 더 분노케 하는 것은 썩은 정치인들을 보호하는 저 (자칭)진보 유권자들이다. 세상 천지 어디에 범법자를 보호하는 진보이념이 어디에 있는가. 불법을 용인하는 정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마치 신도를 강간한 사이비 교주를 두둔하는 추종자들 만큼이나 썩은 저 운동권의 도덕은 진보 시인이 여제자들 앞에서 꺼내 흔들던 고추 만큼이나 역겹고 더럽다.


죄가 있으면 깜방에 가고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다면 욕을 처먹는 것, 그것은 상식이지 정치가 결코 아니다. 불법을 저질렀는데도 불법을 논하지 말라는 저들의 윽박이 바로 정치다. 저들은 마치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선 예수처럼, 혹은 그 지지자들처럼 자신의 모습을 왜곡해서 미화시키고 있지만 그들은 그저 썩은 정치를 응원하는 썩은 유권자일 뿐이다.


3.

내 고교시절 사회과목 선생님은 학창시절 시위하다 전경들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다니다 구속되셨던, 그 시절의 진성 빨갱이었지만 교사가 되어서는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청소년인 우리들에게 시장경제를 가르치고 심지어 모의 주식투자대회까지 열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교련 선생님은 전직 군인출신으로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사람이었는데, 맨날 졸던 그의 수업중에도 한 일화만큼은 또렷히 기억난다. (그가 아직 군인이었던 시절)아내가 자신에게 정치적 사안에 대해 묻자, 그는 "여보 군인이 정치에 대해 생각을 하면 나라가 망해!"라고 대답했다고. 그는 그렇게 12.12사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표현했다. 나는 그 둘이 대한민국의 평범한 진보와 보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범인들의 진보란 시장질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와 평등에 좀 더 많은 가중치를 둘 뿐이고, 보수라고 해서 무조건 광주 5.18은 폭동이다, 전두환 가카 만세!를 외치는 극단주의자들이 아니라 그저 그 시대에 실존했던 북한의 위헙에 조금 더 민감했던것 뿐이었다고. 아마 2012년 대선에서 여전히 사회선생님은 2번을 찍고 교련선생님은 1번을 찍으셨겠지만 돈을 받고, 서류를 조작하고, 거짓말을 하고, 갑질을 하는 것이 옳은 그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평범한 국민들의 인식이다.

수학여행을 가면 보통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가방을 검사해서 몰래 가져온 술을 압수해다가 자기네들이 밤에 마시고 그러지 않나. 우리학교도 그랬다. 그리고 숙소를 탈출해 옆 숙소 여학생들을 만나려 가려던 우리들은 얼큰하게 취한 선생님들을 이따금 씩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들은 우리의 작은 탈선을 눈감아주시곤 했고, 우리도 그들의 (근무시간외) 음주를 눈감아주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사회선생님도 교련선생님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때 그 술자리에서 어떤 애기를 주고받았을까?  알 수는 없지만 결코 "너 혹시 빨갱이 운동권새끼 아니냐" 혹은 "뭐 이 살인정권 부역자 새끼가"와 같은 날카로운 말 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던 우리를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눈 것은 과연 무엇일까.

댓글 8개:

  1. 무효표보단 차악이 낫다는 생각으로 차악을 뽑았더니 최악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어쩔지 모르겠어요... 이런 현실에도 내 한표를 행사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요즘은 진짜 정답은 대한민국 밖에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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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구를 찍으셨던 간에 그 소중하신 한표를 행사하시지 않았다면 악당들과 협잡꾼들은 더 거리낌없이 활개치고 다녔겠죠. 투표하신 글쓴님 덕에 그나마 이정도라도 되는 겁니다. 투표율이 99%라면 정치인들은 유권자를 훨씬 더 무서워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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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극우 사이트라면 어떤 사이트를 말씀하시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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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굳이 사이트 이름을 명시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제 글들이 한쪽 진영 사람들에게 큰 지지를 받는다면, 제가 정치적 편향이 없다고 할순 없지않은가. 그게 제 고민이었거든요.

      참고로 통진당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소수의 예를 들어 전체 집단을 매도하고 입막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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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님의 글이 본 의도와 맞지 않게 마음대로 재단되어 해석되는 것을 지켜보기가 힘드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몽주니어와 나향욱이 무심결에 설파한 대중개돼지론이 떠오릅니다.
    두 갈래로 나뉜 집회를 보니, 상대를 극좌,극우라 치부하며 자신의 정의로움을 재확인하려는 이념적 편협함에 염증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정치가 정의롭기를 기대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라도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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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차원적인 진영간의 편가르기 논리가 지겹네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라도 바랄 뿐이라는 그 말 백번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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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정치(가)야 말로 가장 유연하면서도 세속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현실은 가장 경직되고 종교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한국 정치는 언제나 선악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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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좌-우, 진보-보수가 아니라 개혁-수구로 나눠야 합니다.( 고 김기원 교수)
    그게 더 liberal-conservative와 의미와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개혁할 수 있다면 진보-보수가 큰 차이없고 수구한다면 둘 다 꼴통이지요.
    문재인에게 은근히 노무현 시즌2 (업그레이드된)를 기대했었습니다.
    박근혜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문재인이 박근혜와 동급으로 보입니다.(지능과 국정운영)
    문재인은 박근혜의 좌파버젼 이란성 쌍동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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