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6.

샐리와 앤 실험, 그리고 사회적 자폐아들

 


-공을 가지고 놀던 샐리가 공을 바구니에 넣고 방을 떠나 산책을 나갔다. 

-그 사이 앤은 그 공을 꺼내 상자에 넣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공을 찾는 샐리는 바구니와 상자 중 어디를 열어볼까?


이 간단한 질문은 자폐증을 진단하는데 쓰이는 테스트 중 하나인데 자폐아들은 대개 샐리가 바구니가 아닌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방을 떠나 있던 샐리가 공이 이동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폐아들은 공이 상자 안에 있으므로 샐리 역시 상자를 열어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자폐아들만이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발달단계 초기에 있는 5세 이하의 아동들도 때때로 샐리-앤 실험에서 잘못된 답을 고르곤 하는데 아직 자아개념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자폐아나 5세 이하의 아동뿐 아니라 성인에게서도 흔히 나타난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삼촌들이 왜 그토록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로 삼촌들은 왜 조카들이 민주당에 반대하는지 헤아리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의 좌절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내가 일반 대중이 왜 금리 인상을 저토록 바라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의 철수와 영희뿐 아니라 북미의 샐리와 앤에게서도 발생하고 있다. 어째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을까.

나는 점점 파편화되는 사회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더 이상 나란히 앉아 TV를 보지 않으며 가족의 범위 역시 점점 좁아져 삼촌과 조카는 예전처럼 대화를 오래 나누지 않는다. 전라도 광주에 사는 큰고모와 대구 수성구에 사는 막냇삼촌이 대전에 모여 함께 명절을 쇠는 집도 줄어들고 있으며 한 자녀 가정의 비율이 늘어나 딸에게는 오빠가 없고 아들에겐 누나가 없다. 그렇게 나와는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기회마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동물인 그들은 외로움을 피해 커뮤니티를 찾아다니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매우 동질적인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온라인 사이트든 페친 목록이든 유튜브 채널이든 정당이든 간에. 

그렇게 우리는 타 집단을 이해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샐리는 샐리와만 어울리며 앤은 앤들만 만난다. 그래서 바구니에 손을 넣은 샐리는 늘 화가 나 있고 상자 앞에 선 앤은 샐리를 조롱하기 바쁘다. 하지만 사회적 자폐아로 점차 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매우 닮았다. 코로나로 사회활동이 극도로 제약된 지 어느덧 1년 반이 지났고 그 결과 자산 가격과 소득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더욱 극으로 치닫고 있다. 생물학적인 바이러스에 대항하여 백신을 개발하고 항체를 형성한 우리는 조만간 집단면역에 도달하겠지만 개인과 개인이, 그리고 집단과 집단이 자발적으로 자가격리에 나선 가운데 코로나처럼 번지는 사회적 자폐증은 어떻게 극복할까.


하기야 그 흔한 sns조차도 하지 않는, 할 줄 모르는 나야말로 가장 고립된 이 아닌가.

2021. 8. 16.

통계로 보는 이준석의 속마음

  • 지난 한달동안 이준석 당 대표의 페이스북에는 총 89개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 그 중 여당을 비판하거나 여당의 비판에 대응한 것은 총 14개(15.7%)
  • 반면 당내 특정 후보나 일부 당원들에 대한 공격은 총 30개(33.7%)
  • 범여권에 속하는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향한 공격은 총 13개(14.6%)
  • 당 행사 홍보와 개인신변잡기에 대한 내용은 30개(33.7%)였고 정의당을 향한 공격도 2개(2.2%)를 차지했다*
숫자는 그 사람의 속내를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의 전체 포스팅 중 약 절반인 43개(48.3%)가 당내 대선주자, 혹은 잠재적 동반자인 국민의당을 향한 것인데 이는 그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집계대상을 최근 일주일로 좁히면 이 비율은 65%로 급증한다. 이준석을 대표로 뽑은 대중과 당원들의 소망은 국민의힘이 중도층을 흡수하길 바라는 것인데 정작 이 당대표는 바로 이 중도 후보들과 싸우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으니 지지자들과 이준석의 간극이 날카롭게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준석은 자신이 당내 수구 세력과 낡은 정치와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공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이 아니었거나 단 한 번도 보수당에 속한 적이 없던 사람들이다. 그는 이렇게 해야 당의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가장 확장성이 높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중도우파로 분류되는 바른미래당 출신인데 이들은 한때 박근혜 탄핵에 찬성했던 사람들이라 당내에서의 입지가 탄탄하지 못하다. 하지만 태극기 부대로 대표되는 자유한국당 출신들에 비해 중도 확장성이 높은 계층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보다 확장성이 높은 정치 세력을 제거하고 나면 자신들이 당 내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43 대 14. 이준석의 페이스북이 여당보다 범야권을 공격하는데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말로 속이긴 쉽지만 숫자로 거짓을 꾸며내긴 어렵다. 



*이는 수기로 집계한 것으로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역사, 그 생존의 교과서

국토가 길게 늘어진 탓일까, 일본에서는 시대가 바뀔 때마다 주요 세력이 둘로 나뉘어 큰 전투를 벌이곤 했다. 그 대표적 사건이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누어 붙었던 세키가하라 전쟁인데 전 일본의 주요 다이묘와 무장들이 대부분 출전하여 싸웠던, 그야말로 그 시대의 빅 매치였던 셈이다. 이 전투에서 패하는 진영에 줄을 잘못 서게 되면 영지를 삭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하면 몰수, 혹은 가문이 모두 처형당하는 혹독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각 다이묘들은 신중히 진영을 택했다. 그리고 그런 전국시대 말기에 인상 깊은 족적을 남긴 두 가문이 있다. 바로 사나다와 시마즈가. 그들의 행보를 짧게 돌아보자. 


#사나다 가문

가장 복잡한 상황에 처한 다이묘들 중 하나가 바로 사나다 마사유키였다. 본래 다케다 가문을 섬기던 그는 주인이 몰락하자 살아날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오다 노부가나에게, 그가 죽고 난 뒤 호조 가문에, 뒤이어 도쿠가와에게 복속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지를 양도하라고 명하자 그는 명을 거부하고 전쟁에 나선다. 분노한 이에야스가 토벌대를 보내지만 전략가인 마사유키는 우에다 성에서 토벌군을 섬멸한다. 하지만 이 작은 다이묘가 일본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도쿠가와에게 언제까지 저항할 수는 없는 법. 그는 둘째 아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어 중재를 부탁하고, 히데요시는 마사유키의 장남과 도쿠가와의 가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화해를 주선한다.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 제안이었지만 전투에서도 이기고 도요토미도 등에 업은 사나다 마사유키는 호기롭게 반발하며 나도 다이묘이고 저쪽도 다이묘인데 어째서 내가 급이 낮은 도쿠가와의 가신과 사돈을 맺겠느냐며 항의한다. 결국 이에야스는 신부를 자신의 양녀로 삼아 혼인을 맺는 것으로 이 석연찮은 중재안을 받아들인다.

그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동군을 이끌고 천하를 벌이는 전투를 벌인다고 하니 사나다 가문의 고민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동군의 수장과 사이가 껄끄러우니 서군에 참가하기엔 가문의 존속과 미래가 달린 일 아닌가.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도쿠가와 측과 사돈인 큰아들을 동군에 참가시키고 자신은 도요토미의 인질이었던 둘째 아들을 데리고 서군에 참가하기로. 어느 편이 이기든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분산투자지만, 자칫하면 한솥 밥을 먹던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가문의 중신들이 전장에서 서로를 죽고 죽여야 했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동군이 승리했지만 사나다 마사유키는 불과 소수의 병사로 이에야스의 아들이 이끄는 3만 8천 명의 군대의 발목을 잡아 그들이 세키가하라에 참전하는 것을 막는다. 동군 총 병력의 약 1/3에 달하는 이들이 전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동군은 서군에 비해 수적 열세에서 싸워야 했고 화가 단단히 난 이에야스는 마사유키를 죽이려고 했지만 동군에서 싸운 사나다의 장남, 노부유키의 간청으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유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사나다 가문은 살아남았다. 도쿠가와의 삼엄한 감시에도 큰아들 노부유키는 유폐된 아버지와 동생에게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그들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나다 가문은 우에다와 마쓰시로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폐번 이후에도 메이지 정부에서 현의 지사를 지냈고 세이난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작의 지위에 올랐다. 


#시마즈 가문

임진왜란에서 활약하여 우리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시마즈지만 군공만으로 평가한다면 그들은 세키가하라에서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시마즈 가문은 사나다와는 반대로 도요토미 가문과 껄끄러운 관계여서 처음엔 동군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영지가 서쪽 끝 규슈에 있었고 도요토미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에 시마즈의 인질들이 잡혀있던데다 병사를 이끌고 이동하던 도중 서군의 대장,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어쩔수 없이 서군에 합류한다.

이때 시마즈 본가는 형인 요시히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동생 요시히로는 전공을 세우기 위해 형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요시히사는 단칼에 거절했고 그 결과 요시히로는 약 2천이 안되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투 내내 그는 거의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참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미쓰나리가 직접 찾아와 출격을 부탁했을 때에도 딴소리를 하며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망부석처럼 서있던 시마즈의 용사들이 전장에서 활약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투의 승패가 갈린 이후였다. 2시간여의 전투에서 서군이 패주하게 되고 시마즈의 본대도 포위당하게 되자 후방이 막힌 시마즈군은 불과 천오백의 병력으로 전방의 팔만이 넘는 동군의 본진을 돌파하기로 결정한다.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이 작전은 놀랍게도 성공한다. 혼다 타다카츠나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쟁쟁한 명장들이 그들을 저지했지만 되려 부상을 입고 물러나고 요시히로는 본진을 뚫고 오사카에 들러 인질들을 구출해 영지로 돌아갔다. 생환한 인원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하고 조카 토요히사와 다수의 중신들이 전사했지만 대장 요시히로를 무사히 탈주시킨다는 전략적 목적을 달성했고, 또 패주한 소수의 군대가 승리한 대군의 정면을 뚫어 후퇴한 이 놀라운 사건은 시마즈 퇴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동군의 정면을 돌파한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의 본진을 지나치면서 이에야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원치 않는 싸움을 시작했다 본국 사츠마로 돌아가지만 제 본심에 대해 훗날 바로 말씀드리겠다고. 요시히로는 살아서 영지로 돌아갔지만 형 요시히사는 조카를 포함한 가문의 누구도 그를 환대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동시에 도쿠가와 측과 협상을 시작한다. 요시히사는 동생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 소수의 병력만이 참전했고 전투에서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피해는 동군이 무리하게 시마즈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화의를 청한다. 이에야스는 후환을 끊어놓고자 시마즈가 다스리는 사쓰마를 평정하고 싶었고 실제로 토벌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불과 천오백에 불과한 시마즈군의 활약을 목도한 터라 시마즈의 근거지로 쳐들어가는 것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불과 일주일 만에 자신이 내린 토벌령을 철회한다. 그래서 시마즈 가문은 요시히로가 근신하는 것 외에 다른 처벌을 면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시마즈 가문은 사쓰마 번을 지배하며 막부 말기까지 번성하였는데 막말 사쓰마-죠슈동맹을 이끌며 도막파의 수장이 되어 결국 도쿠가와 막부를 몰아낸다. 시마즈의 놀라운 활약을 목도한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죽으면서도 그들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신의 시신을 사쓰마를 향해 묻어달라고 하였는데 그의 염려는 265년이 지나 결국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현대를 비추는 거울일 뿐 아니라 현대인의 의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번 정부에서 유난히 두드러지지만 과거에도 한국 정부가 납득할 수 없는 1차원적 외교를 펼쳐 국익을 갉아먹은 사건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나는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책임은 우리나라의 편협한 역사교육에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교과서가, 그리고 그 교과서로 배운 대중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은 큰 틀에서 명분을 따지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나 편협하고 감정적이며 또한 비현실적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입만 산 병신외교로 이어진다.(링크)

만약 우리의 역사교육이 세키가하라의 두 인물들을 평가한다면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아마도 사나다 가문은 붕당에 휩쓸려 아비와 아들, 형과 동생이 총부리를 겨눈 비극의 동족상잔을 벌인 막장 집안으로, 시마즈는 유유부단하게 움직여 서군의 패배에 일조한 기회주의자들로 보지 않았을까. 실제로 우리의 역사교육은 명분만 강조하고, 또 그에 따른 별 역사적 의미도 없던 소규모의 항쟁만 조명한다. 그래서 고려든 조선이든 나라가 몰락하거나 위험한 시기를 배울 때면 어김없이 명분론과 항쟁이 교과서를 수놓는다. 물론 그중에는 임진왜란의 의병처럼 의미있는 무력투쟁도 있었지만 무신정권 몰락 후 삼별초의 항쟁이나 1930년대 이후 만주의 소규모 독립군 활동처럼 실제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사건들조차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애써 의의를 부여하고 명분을 입혀 포장한다. 하지만 고려가 자주국으로 남을 수 있던 것은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가 왕위 계승 경쟁에서 이기는데 크게 기여한 외교술 덕이고* 전후 한국이 독립할 수 있던 것은 일본의 힘을 꺾어놓고 싶은 미국과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었던 중국 측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나다와 시마즈의 역사를 배운 일본인과 삼별초와 조선의용대의 역사를 배운 한국인들이 국가적 위기를 마주했을 때 각각의 전략적 대응은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은 마사유키나 요시히사처럼 자존심을 버리더라도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투쟁과 협상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겠지만 한국인들은 무지성으로 투쟁만 하면 된다고 믿는다. 불굴의 의지로 반항하고 대들고 싸우고 죽고 살해당하고 그래도 대들고, 그렇게 줄기차게 투쟁에 나서면 궁극적으로 소년만화와도 같은 승리가 알아서 찾아올 거라 믿는다. 그 의지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명분과 혹독한 정신교육뿐이지 타협은 매국노 배신자들이나 꺼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병신외교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바로 절름발이 정신승리로 점철된 역사교육을 통해서.   

오늘은 광복절이다. 우리는 독립의 기쁨과 의의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살아남았는지 실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유럽 대륙만 해도 몇천 개가 넘던 정치세력들은 불과 두 세기 만에 두 자릿수의 국가들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독립국가로 존속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생존을 위해 절박하게 투쟁한 역사이고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과 더불어 지정학적 여건 덕에, 또 한 강대국의 전폭적 지원 덕에 격동의 세기에도 살아남아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은 머지않아 끝날 가능성이 크다. 지정학 전략가인 피터 자이한은 늘어나는 재정적자와 셰일가스의 발견,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국제사회에 이전처럼 깊숙이 개입할 이유가 사라졌으며 먼로주의로의 회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미국은 세계 시장의 개방, 자유무역, 항행의 자유, 그리고 군사적 안정을 보장하였고 그 결과 대다수의 약소국들이 사실상 정치에서 지정학적 요소를 고려할 이유를 없앴다. 오늘날 그 어떤 정치인도 자국의 안정적인 석유 수입을 위하 말라카 해협에 해상 군사력을 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소비시장의 확보를 위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는 미국의 세계의 경찰 역할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미국이 석유 때문에 중동문제에 개입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미국이 수십 년간 수입해온 석유 중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물량은 1/5이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절반은 사우디가 동맹국 미국에 비축한 분량이었다. 미국이 중동을 지키는 것은 동아시아 동맹국의 에너지 수급 때문이었는데 미국에 안보를 가장 의존하는 한국인들 조차도 미국의 중동 침공을 줄기차게 미 패권주의라며 비난했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점점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세계의 경찰놀이에 자신의 세금과 재정을 낭비하는 것을 꺼릴 것이며 그러기 시작하면 나머지 세계가 태어나 누려온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지금 내 세대는 죽기 전에 그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다시금 지정학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오를 것이며 전략적인 외교를 펴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운명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광복을 기념하던 바로 그날,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서 미국의 한 동맹국이 멸망했다. 휴전 직후 남한의 상황을 떠올리면 과연 우리가 아프가니스탄과 아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국제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도덕 책이 아니라 피와 철과 돈이지만 우리는 그를 잊고 있다. 지금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복병은 경제도, 북한도, 사회정치나 지역 대립, 성별 갈등도 아닌, 심지어 출산율도 아닌 바로 이 지지리도 못난 병신외교라고 생각한다. 역사 교육을 처음부터 재고해 볼 때이다. 



*               *               *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일부 젊은 세대들까지도 이런 명분에 치우친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이준석에 대한 논란에 대해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을 찬찬히 읽은 결과 몇몇 사람들은 이준석 사태에 대한 해답으로 젊은 남성들이 더욱 단결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당 대표를 더 강하게 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전 연령층에서 가장 소수인 세대가, 그리고 투표율이 가장 낮은 세대가, 심지어 세대 내에서도 남녀로 갈라진 집단이 일치단결해서 시마즈처럼 나머지 인구 장벽을 돌파하겠다는 발상은 무모함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요시히로가 전방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한 것은 서군이 패주하며 동군 병력의 상당수가 이미 전진하여 생각보다 본진의 방어가 느슨할테니 전방을 지키는 병력이 적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에 기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마즈 군은 거의 전멸했으며 다수가 살아남기 위해 두셋으로 구성된 자살조를 끝도 없이 투입해야 했다. 지금 젊은 남성들 역시 전방 돌파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에 나서는 이유는 이것이 실현 가능한 작전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옳고 이준석 대표가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안하지만 세상은 그런 명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양분되어 있으며 이제부터 펼쳐질 선거는 세키가하라 전투처럼 양 당의 총력전이 될 것이다. 거기에서 실현 가능성을 계산해보지도 않은 작전은 자살작전이 아닌, 그냥 자살일 뿐이다.



*고려는 후계자 경쟁이 벌어지던 두 후보 중에서 쿠빌라이측을 찾아가 협상을 벌였고 이를 바탕으로 쿠빌라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알릴수 있었다. 이후 원나라는 고려 원종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 고려에서 몽골의 군대와 다루가치를 철수하였고 고려인들이 국호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을 허가했다. 게다가 자신의 막내딸을 원종의 아들과 혼인시켰는데 그의 사위 중 비 몽골인 출신은 충렬왕 단 하나였고 제국 내 그의 서열은 7위였다.

**대만과 조선은 태평양 전쟁 발발 시점 이전에 일본의 영토로 병합되었고 심지어 조선이 병합되던 당시의 일본은 서방의 동맹국이었다. 

2021. 8. 13.

완장 찬 준초딩과 반장선거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화를 학습하는 곳이다. 그리고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도 반장선거를 여는 이유는 어린아이들에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 그리고 마땅한 권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은 이 점을 구분하지 못한다. 반장은 학우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자리이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학우들을 지배하는 왕좌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내가 반장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고집 센 아이들이 있다. 어느 학급이든 반장이 언제 환경미화를 할지, 어떤 방식으로 주번을 정할지, 그리고 급훈을 무엇으로 정할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반장은 그저 회의를 주재하여 급우들의 의견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아무리 늦어도 초등학교 4,5학년만 되어도 이 사실을 알지 않는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만이 이 사실을 모른다. 이 대표는 윤석열 캠프와는 물론이고 최재형, 원희룡 당사자들과 공개적으로 충돌했으며 윤희숙, 홍준표 등, 심지어는 아군인 유승민과도 마찰을 빚었다. 대선을 불과 반년 앞두고 모든 대선주자들과 충돌하는 당 대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모두 그가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지난 7월 여당 대표인 송영길과 만난 자리에서 이준석이 당의 공식적 입장을 정면으로 거슬러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독단적으로 합의한 사건은 그가 당론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당내 주요 후보들과의 마찰도 당사자들과 협의되지 않은 일정이나 행사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그와 지지자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것이나 토론회를 여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그가 전례 없이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혁신이 아닌 철저한 퇴보다. 박근혜가 당 로고를 빨간색으로 바꾸고 미래통합당이 파격적인 핑크색 로고를 동원하는 것이 혁신과 무관한 일이었듯 수십여 회의 토론회를 열고 토론배틀을 여는 것이 당의 혁신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저 철없이 신난 당 대표의 장기자랑 대회에 불과한 것이지. 게다가 지난 두번의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가장 형편없는 토론자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나. 

당을 장악하고 선거에서 이긴 대통령조차도 이런 독선적인 결정을 내리면 당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는데 처음으로 이겨본 선거가 내부의 당 대표 경선인 30대 중고 신인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마당에 어떻게 마찰이 없겠나, 충돌이 없기를 기대한다면 멍청한 것이고 일부러 그랬다면 사악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당의 이미지 쇄신과 외연 확장을 기대하는 당원들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국민들과 당원들은 이제 그의 입과 페북에 따라 사분오열하여 네 탓 내 탓을 다투고 있는데 책임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대선이 불과 반년 남은 시점에서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을 보면 나는 그를 무능한 당대표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그의 미흡한 리더쉽은 성적으로 드러난다. 당내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와 쌈박질을 벌이는 돈키호테 같은 당 대표의 달갑지 않은 지원 덕분에 범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은 하락세에 있으며 여야 1위 후보의 양자대결 결과는 뒤집혔다. 이준석 대표의 말과 페북 포스팅이 20대 남성에겐 카타르시스를 주었을지 몰라도 그들보다 수가 몇 배나 많은 중도/무당층은 그에게서 반감과 피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아니 준초딩은 20대들의 홍카콜라에 불과하다.* 그리고 과거 박사모들의 청량한 홍씨 탄산음료가 어떻게 중도층을 쫓아냈는지 기억하자. 

어쩌면 일부 지지자들과 이준석 본인은 당과 후보들이 대표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면 이런 마찰이 없었을 것이라고 옹호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으면서도 위험한 발상이다. 대표가 당심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게다가 당 대표란 자리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자리인데 이준석이 그런 노력을 조금이라도 보였던가. 태어나 처음으로 완장을 차 본 코흘리개 아이처럼 제멋대로 지시하고 자신의 지시를 무시한다며 역정을 내는 것은 성숙한 민주주의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이준석 대표가 당을 통솔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무능하고 독단적이기 때문이지 결코 어려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정치경력과 상관없이 그런 리더는 실패했다. 게다가 자신의 무능으로 인한 실패의 원인을 타인과 사회에게 돌리는 것이야말로 여성우월주의에 적대적인 그대들이 가장 혐오하는 태도 아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을 납득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젊은 꼰대들이여, 그렇다면 초등학교 앞에 서서 열 살짜리 아이에게 묻길 바란다, 내가 반장이니 내 마음대로 장기자랑도 하고 소풍지도 정하고 참가자들을 채점하고 상벌을 내리려고 하는데 학우들이 말을 안듣는다고. 인생 최대의 관심사가 초통령 유튜버의 근황인 그 어린아이들도 당신들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저씨 그러시면 왕따 돼요" 



*이 블로그를 시작한 이래 토론으로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글이 바로 이전에 포스팅한 이대남과 테스토스테론의 저주(링크)라는 사실과, 이 블로그의 주 방문자층이 젊은 남성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준석이 모든 20대들에게 청량감을 주는 지도 심히 의문이다.

2021. 8. 7.

이대남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의 저주

때때로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존재가 아닌 부재를 살펴보아야 할 때가 있다. 세월호 사건을 추모하는 것은 인류애지만 그가 동시에 천안함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그것은 정치인 것처럼. 최근 붉어진 한 양궁 선수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20대 남성들은 안산 선수가 sns에서 사용한 몇몇 단어들 때문에 분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화를 내는 진짜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사회가, 그리고 주류 언론이 그들에게 엄격한 자가검열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이중잣대였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낸 한 선수는 자신의 팬들에게 "노무노무 고맙습니다"라는 포스팅을 올렸다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고 한 유명 유튜버 역시 해당 문구를 자신의 영상에 삽입했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나를 포함하여 저들의 인터넷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윗세대들이 보기에 오조오억이나 웅앵웅이 뭐가 문제냐며 젊은 남성들을 타박하겠지만 그렇다면 노무노무는 왜 문제가 되었나, 그리고 왜 우리는 그때 침묵했던가. 이대남들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자신들의 말과 입이 억압당하고 검열당할 때 주류언론과 윗세대들이 소극적으로, 때때로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표면의 웅앵웅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부재를 보아야 한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에 무관심했던, 우리 여론과 관심의 부재를.

그리고 지금 이 젊은 남성들은 우리가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 역시 표면의 현상에 집착하느라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다시 정치적 오판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 실수는 자신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               *               *

공권력의 성추행을 고발하여 명성을 얻은 박원순 시장이 공권력으로 성추행을 저지르다 들통나서 자살하는 바람에 열린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후보는 여당 후보를 57.5%대 39.2%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누르며 시장직에 복귀했다. 불과 1년 전에 서울 시민들이 여당에 지배적인 의석수를 안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분명 이는 엄청난 변화였고 그 배경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그중 20대 남성들의 해석은 다분히 이색적이었는데, 오세훈 후보가 성평등 관련 질문들에 답변을 거부했는데 이런 반 페미니즘 선언이 유권자들의 전폭적 지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독특한 세계관은 젊은 이준석이 제1야당의 당 대표가 되며 더욱 강화되었다. 반 페미니즘을 외치는 젊은 남성이 구체제의 인사들을 제치고 당의 얼굴이 되는 것을 보며, 집을 마련하는 것도 취직도 여의치 않았던 20대 남성들은 최초의 정치적 승리를 맛보았다. 하지만 인류사에서 가장 커다란 패배는 모두 작은 승리로부터 출발했다. 이 두 사건으로 이십 대 젊은 남성들은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졌다. 마치 그들이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당 대표의 페르소나가 된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어야 한다.

19년 대선 총 투표수 (연령별/성별)

지난 대선은 20대 남성들의 투표율이 가장 높았던 선거였지만 그들의 정치참여도는 여전히 처참하다. 지난 대선에서 20대 남성은 고작 228만 표를 행사했는데 이 숫자는 그들이 주적으로 여기는 40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하고 심지어 동년배 여성보다도 50만 표나 더 적다. 산술적으로 보면 20대 남성의 정치적 영향력은 인천광역시의 투표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구월동의 한 주민이 선거 직후 우리 인천이 승리의 주역이라고 외친다면 그들의 현실 인식엔 크나큰 결함이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착각은 야당의 당 대표 선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국민의 힘에 당비를 내는 책임당원은 약 28만 명이고 그중 50대 이상이 72.8%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20대는 고작 3.9%, 30대는 7.7%에 불과한데 그런데도 이준석 대표는 43.8%의 득표로 2위 나경원 후보(37.1%)를 큰 표 차로 이겼다. 젊은 남성들은 젊은 당 대표라는 표면을 보고 있지만, 이 승리의 진짜 함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50대 이상의 보수층이 정권교체를 위해 전략적으로 30대 당대표를 밀어 줬다는 데에 있다. 즉 이준석의 승리는 20대의 지지가 아닌 중년/노년층의 양보 덕이다. 게다가 책임당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핵심 보수층이 탄핵에 찬성한 바른미래당 인사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원들이 얼마나 절실하게, 또 전략적으로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젊은 남성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50-70대들의 양보와 협력을 자신들의 승리, 즉 그들의 패배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준석 대표는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내 주요 대선주자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합당 과정에서 안철수와도 파열음을 내고 있다. 당내에서 다수인 80%는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양보를 하는데, 소수인 20%는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다. 각자의 옳고 그름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선택은 대단히 위험하다. 정치적 소수가 다수를 무시하며 대립하기 시작하면 다음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고 그럼 소수집단인 2030대 남성들은 당내에서는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고립될 것이다.

이런 징조는 최근 안산 선수의 페미니즘 논쟁에서 드러난다. 웅앵웅과 오조오억이 젊은 남성들에게는 중요한 주제지만 그 위 세대들에겐 정말이지 생소한 문제다. 나 역시 당신들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그러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나보다 더 윗세대인 중년 노년층이 그를 어찌 알겠는가. 당신들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당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중도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언론이 젊은 남성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를 지지하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네들을 제외한 다른 세대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고립된 소수집단이 극단적 주장을 펴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프리퀼에 불과하다.  


젊은 남성들이 정치적으로 실수를 저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때 그들은 40대 민주화 세대와 연합하여 보수정권을 몰아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이 오른 주택 가격과 줄어든 일자리, 그리고 교육을 잘 못 받았다는 조롱과 모욕뿐이었다. 불과 4년 전 20대 학생들은 그 어느 계층보다도 충성스럽게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지만 오늘날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특히 20대/남성/학생의 지지율은 4년 전 90%대에서 20%대 초반으로 주저앉았는데 이런 급격한 변화는 한국 정치 역사상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다. 처음 정치판에 뛰어든 그들은 아무런 정치적 경험도, 식견도, 배경도, 지식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고 대개 그러한 오만은 패배를 부른다. 2017년 그들의 선택이 그러했듯이.

나는 진심으로 20대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길 바라며 그들의 목소리가 나라정책에 더욱 반영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더욱 영리해져야 하고 좀 더 성숙해야 한다. 국민의힘 당의 책임당원들 상당수는 탄핵에 반대했던 이들이며 아직도 그들은 바른미래당 인사들을 배신자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박근혜 특검수사를 담당한 윤석열을 대선 후보로 지지하고 있고 바른미래당 출신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뽑았다. 반대로 젊은 남성들은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홍준표를 대선후보로 뽑고 나경원을 지지할 수 있을까. 전략적으로 유연한 계층은 과연 누구일까, 파릇파릇한 20대 청년들이 골다공증으로 골골대는 노년층보다도 더 완고하고 고집 센 이 현상을 뭐라고 설명할까?

작년 주식시장에서 20대 남성의 수익률은 평균 3.81%로 전체 계층 중에서 가장 낮았다. 이에 관한 몇몇 논문들은 그 원인으로 남성호르몬을 지적한다. 평균적으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집단의 주식 수익률이 낮았는데 이 남성호르몬이 과도한 자기 확신을 야기하고 새로운 정보의 습득을 막으며 사고의 유연성을 억제해 수익률을 낮춘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현상은 현재의 20대 남성들의 정치적 태도와도 일치한다. 한때 문재인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던 계층이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돌아서서 특정 사상과 특정 인물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강력한 자기 확신과 독단은 지난 2016-17년과 똑같이 닮아있다. 그 과정에서 연합해야 할 장년/노년층을 틀딱이라며 조롱하고, 그들의 양보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한다. 그것도 야권에서 1/5도 안되는 지분을 가진 집단이, 유일하게 자신의 편을 들어줄 나머지 절대다수를 분노케 하면서. 그런 현실인식을 가진 그들에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부디 그들의 선택이 주식수익률과는 다른 결과를 낳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는 진심으로 당신네들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2021. 8. 4.

빨간구두



안데르센 동화 중 빨간 구두라고 알아?

소녀는 엄숙하고 경건한 정소에도 굳이 그 빨간 구두를 신고 가지.


그 구두를 신으면 두 발이 저절로 춤을 추게 되고

영원히 춤을 멈출 수도 구두를 다시 벗을 수도 없게 돼


그런데도 소녀는 빨간 구두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사형집행인이 나서서 소녀의 발목을 잘라냈지만

잘려나간 두 발은 빨간 구두를 신은 채 계속해서 춤을 췄어


억지로 갈라놔도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게 있어.

집착은 그래서 숭고하고 아름다운 거야.



나, 

이제야 내 빨간 구두를 찾았어.


 사이코지만 괜찮아 中


paint by Egon Schie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