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7.

(미정)

예전에 한번 파생상품을 샀다가 아주 큰 손실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몇날 밤을 뒤척일 정도로 괴로웠다. 그 종목은 수 년간의 내 저축과 달콤한 희망을 삼킨 대신, 깡통으로 남은 잔고와, 꽁초가 수북히 쌓인 현관 옆 재떨이 그리고 투자 습관을 전부 뜯어고칠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내 면전에 던져놓고 홀연히 (만기되어) 사라졌다.

이게 그 종목이 나에게 무슨 원한을 품고 저지른 일인가. 그럴리가 있나. 그냥 그 자산은 원래 폭락할 자산이었고, 잘못된 것은 제 값을 찾아간 그 자산이 아니라 거기에 돈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나의 판단이었다. 스크린 속 반짝이는 그 종목코드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러냐"라고 울부짖어봤자 개짖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의미 없는 뻘짓이다. 그것은 원래 그리될 것이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어떻게 나에게 이러냐며 고통받지만, 이 역시 어리석은 짓이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럴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때 부터, 아니면 적어도 작년 재작년 부터 그는 그런 사람이었지 간밤에 갑자기 짠 하고 변한게 아니다.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으니까. 내 믿음을 져버렸다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일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애초에 믿음을 준 것이 잘못이고, 그건 온전히 내 잘못인데.

그렇다고 지금 뭐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와 같이 식상한, 설날에 개그맨들이 한석규나 이명박 성대모사를 하는 것 처럼 진부한 넋두리를 늘어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는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 믿을 수 있겠는가. 다만 믿어야 할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해야 하며, 또 우리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설령 그 믿음이 짓이겨지더라도 원망하지 말자. 애초에 그런 사람이 그런 짓을 했을 뿐이거늘. 마음은 쓰리지만 또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내 자신을 탓해야 한다. 밖으로 분노를 분출하고 다 잊어버리기 보단 내 안으로 삭히고 이 쓰린 감정을 하나하나 곱씹는게 이 괴물같은 세상으로부터 내일의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글의 제목을 무엇으로 지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헤메고 있다.

2018. 12. 17.

고 전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여러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남은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가 확고한 정치 철학을 가졌다는 것과, 또 그를 현실 정치에 접목시기키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

정치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박정희를 비롯한 국가주의자들은 민주주의보다 경제성장을 선택했고 문민정부는 과거사 청산과 민주주의 이념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저 둘 중 하나를 칭송하고 다른 하나를 욕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이 선택한 가치관에 맞는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한 잣대로 보면 노무현은 대중 그 자체를 선택했다. 그렇기에 때론 마키아벨리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대통령이 앞장서서 공격하기도 했고, 또 사회를 가진 자와 못 가진자로 나누어 분열시킨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어쨋든 그에게는 확고한 철학과 방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철학을 현실화하려면 무엇을 빼고 무엇을 더해야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이다. 세상에 미국과 FTA를 맺고 미군과 함께 군대를 파병하는 좌파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랫다. 아마 그에게는 좌냐 우냐 하는 이념논쟁보다 자신의 철학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뭐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인데,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FTA를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영민한 정치가는 이렇게 우선순위를 구별할 줄 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매우 미숙했을지언정 분명 우리 사회가 적어도 한번은 필요로 했던 정치인이었다. 보수층은 그를 싸움닭 같은 대통령이라고 기억할 지 몰라도 필요할 때 보수적 가치와 정책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대통령이 바로 그 아닌가. 지금도 노동계는 그를 신자유주의자로 분류한다.  
 
그의 방식이 세련되고 매끄러웠다고 할 순 없다. 별 경험이 없던 그 초보 운전자의 정책실수로 부동산은 폭등했고 빈부격차는 벌어지자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끼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할 수도 없다. 임기 말 그의 지지율은 거의 대국민 사과방송을 하던 박근혜 수준 까지 추락했고 17대 대선에서 그를 계승한 정동영 후보는 보수진영에게 더블스코어를 넘어 거의 트리플 스코어에 가까운 격차로 패배했다. 임기 내내 실험적 마인드로 좌충우돌하는 그 운전사에게 승객들은 휴지를 던지며 야유를 보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핸들을 잡은 그의 목적지를 모르는 승객은 없었다.
 
나는 참여정부의 여러 정책에 동의하지 않았고 남상국 사장을 자살시킨 일, 그리고 친인척 비리들 때문에 그가 정의롭다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노무현의 정치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임기 말 사람들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인터넷 밈을 유행시킬 때 조차 그는 "국민들이 살기 힘들면 대통령 욕도 좀 하고 그럴수 있는거지 뭘"이라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의 서툰 정치가 빈부격차를 벌리고 젊은이들이 서울에 집을 마련하지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말 만큼은 국민들에게 위로를 주지 않았는가. (이를 립서비스와 쇼라고 한다면 다른 여의도 정치인들은 바보인가. 왜 안하나.)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정치인들이 국민 여러분이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국민보다 경제나 안보, 혹은 민족을 더 앞에 내세우던 소통방식에 지쳐있었다. 처음으로 국민과 유권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내세운 대통령. 어쩌면 대중은 그래서 노무현에게 그렇게 열광했던것 인지도 모른다.
 
*       *       *
 
지금 우리는 6년 째 철학이 없는 청와대를 상대하고 있다. 박근혜는 운전대를 친구에게 내주고 조수석에서 졸다 쫒겨났고 문재인은 눈을 감고 운전하고 있다. 그 둘은 너무도 닮았다. 우파의 아이돌 박근혜는 수첩공주가 되어 박정희 오마주 정치를 폈고 좌파의 아이돌 문재인은 A4용지 왕자가 되어 노무현 오마주 정치를 편다. 그렇게 우리는 망자의 유령이 미래를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있다. 주사파 운동권 출신 비서실장이 라이방 선글라스를 끼고 미제국주의 맥아더와 박정희를 흉내내며, 테러방지법을 필리버스터로 막던 영웅들이 어느새 빌런이 되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에 사인하는 희극을 보고 있다. 거기엔 아무런 철학도 없고, 또 따듯함도 없다. 수시, 최저임금, 소득주도경제 등 애초에 약자를 위해 마련한 제도가 엇나가 약자의 목을 조르는데도 샴페인 좌파들은 교조적 이념에 집착한다. 마치 자신들의 목적은 노무현에게 물려받은 이념의 관철이지 국민의 삶이 아니라는 듯이. 그 와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고 소외된 이들은 더욱 소외되고 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이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아래 표를 보면 가장 힘든 계층의 사람들의 현 정권 지지율이 가장 낮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서민들을 대변한다고 자위한다.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40/50대 화이트칼라 운동권들이 빈민들의 가난까지도 훔쳐다 정치적 자산으로 쓰는 꼴이다. 정작 하는 일이라곤 사회적 자산을 젊은 20대 여성들에게 퍼부으며 열렬히 구애하는 것 뿐이면서. 마치 이태원 클럽에서 명함을 돌리는 유부남들처럼. 현 정부는 참여정부를 계승했다고 주장하지만 내 눈에 이 둘은 너무나 다르다. 만약 고 전 노무현 대통령이 이념을 위해 인민을 내팽겨 친 현 정부를 본다면 과연 뭐라고 할까.
 
 
 
 

2018. 12. 16.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이기주의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내가 원하는대로 살라고 강제하는 것이라고.

2018. 12. 14.

착각에 빠진 운동권 피터팬들

최근 발표된 문재인 지지층의 분포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나이로 분류할 때, 문 대통령을 가장 강하게 지지하는 세대는 바로 40대고 반대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대는 60대, 그리고 놀랍게도 20대가 그 뒤를 잇는다는 것. 보수를 외치며 홍준표의 발언에 열을 올리는 6070대를 보며 486운동권들은 “쉰내 나는 틀딱들”이라며 조롱했지만, 그들보다 두 배는 더 젊은 20대의 지지율은 오히려 60대에 가깝다. 스스로를 세련된 오빠라고 착각하는 40대 운동권들이여, 착각에서 깨어나라.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늙어가면서 성격도 성향도 가치관도 달라진다. 그건 1900년에 태어난 사람에게도, 2000년에 태어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유독486 운동권들은 자신은 그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보수 계층을 보며 늙었다고 조롱하는 그들은, 자신들도 더 이상 젊은 계층이 아니라 꼰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믿겨지지 않는다면 을지로에 서서 지나가는 신입사원에게 사내에서 회식과 야근을 강요하는 꼰대 상사가 몇 학번인지 물어보라.)
 
그리고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운동권의 좌충우돌 정치적 실험은 바로 이 착각에 기인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2030대 유권자들과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둘이 공유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 뿐이다. 그 분노가 해소되고 나자 두 세대는 찢어지기 시작했다. 미투를 외친 20대 여성들이 지목한 가해자들은 대부분 운동권 세대, 혹은 그 지지자들이었고, 그녀들을 달래기 위해 4050대 정치 지도자들은 2030대 남성의 몫을 뺏어다 여성들에게 선물했다. 88년도에는 북한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진취적이고 열린 사상으로 비춰졌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는 김정은의 집권 이후 벌인 군사 도발에 형제 친구들을 잃은 세대라 북한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486세대는 자신의 머리 위에 빨간색 선을 그어놓은 뒤 이보다 나이가 많은 세대를 비정상이라고 규정지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젊은 우리들"이 정상이라며 젊은이들 사이에 은근슬쩍 뭉개들어가려고 했지만, 그 모습은 미혼남녀 신입사원들 주말 모임에 어거지로 낀 부장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다. 20대의 문재인 지지율이 초반 80%대에서 50%대로 폭락한 것은 바로 젊은 세대가 486들이 밀어붙이는 이념과 철학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에 대한 착각은 곧 시대에 대한 착각으로 이어지기 마련. 21세기에 정권을 잡은 그들은 체코가 체코슬로바키아였던 시절의 가치관을 고수하고 있다.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외세를 배격하며,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 그러나 남북한은 이제 서로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으로 변했고, 수출액이 GDP의 70%에 달하는데 국수주의는 더 이상 우리에게 맞는 이념이 아니며 노동자들의 삶은 고임금 노동자와 저임금 노동자로 양분되었다. 박근혜가 21세기 한국을 1970년대의 철학으로 운영하는 우를 범했듯 운동권은 나라를 80년대의 철학으로 경영하고 있다. 그 결과가 좋을 리 있겠는가. 이 철이 덜 든 피터팬 운동권들의 괴상한 주택정책으로 집값은 폭등하고 급진적 노동시장 개입때문에 저소득층은 근로소득을 잃고 빈부격차는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피해자는 진보성향이 가장 강한 2030대들이다. 이렇게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가장 진보적인 세대의 뒷통수를 냅다 후려치는 일은 다분히 슬랩스틱류의 희극이지만 그를 가장 가까이서 삶으로 직접 견뎌내야하는 젊은이들에겐 비극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시대를 착각한 이들은 잘못된 선악의 기준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반미/친미, 민족/반민족, 수시/정시, 정의/적폐, 네편/내편 등. 과거 민주화 vs 군사독재와 같은 이분법적 도식에 익숙한 486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선악의 이분법적 문제로 바라본다. 그러니 사실판단이 들어설 자리에 가치판단이 뱀처럼 또아리를 튼다. 친환경 에너지가 원자력 발전을 대체할 효율을 내는가? 와 같은 공학적 문제에 "원자력 에너지는 나쁘다"와 같은 도덕을 들이대곤 한다. 대중은 점점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물음에 "짝수는 나쁘니 답은 홀수다"와 같은 샴페인 좌파의 선문답에 지쳐간다. 게다가 이런 실패에 대한 반성조차 없지 않은가. 정책이 망해도, 돈과 청탁을 받다 걸려도, 성추문이 있어도 진정한 운동권은 반성하지 않는다. 쿨하게 이해하고 끝까지 연대할 뿐. 그 비위와 실패의 책임은 모두 지지자들의 몫이다. 이렇게 486들에게 뒷통수를 하도 맞아 조기탈모가 올 지경인 젊은세대가 주 지지층에서 이탈하고 있는데도, 운동권들은 눈을 감고 입을 모아 현실을 잊게해주는 주문을 외운다. 수리수리마수리 이모든게이명박근혜.
 
486들은 87년 항쟁을 주도하여 군사정권을 무너뜨렸지만 그 직후 자유 투표에서 국민들이 군사정권의 후신 노태우를 뽑았다는 좌절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1987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피터팬들은 대학생 시절의 낭만으로 돌아가 미완의 항쟁을 완성시키려 한다. 그것이 현재 486 운동권 정치의 본질이며 근본적으로 그들의 정치가 올드하고 과거지향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오늘을 산다. 조선시대 무덤이나 고려시대 무덤이나 시체이긴 마찬가지인데 이 486들은 자신들이 욕하는 박사모들과 무어가 그리 다른가.

그들이 젊었던 시절, 한 개그우먼은 "착각의 늪"이라는 노래를 냈다. 박색인 그녀가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에 빠져들어 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게 바로 개그포인트였는데, 나는 이 노래가 현재 운동권 세대의 시대착오적 모습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녀의 노래는 대중에게 웃음을 줬는데 과연 운동권의 착각은 20대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2018. 9. 26.

지금이라도 집을 사라.

나는 지난 5년간 한국 부동산을 매수하라고 강력 권고했다, 2015년(링크)에도 그리고 2017년(링크)에도. 하지만 공급이 부족한 마당에 모든 사람이 집을 매수할 수는 없는 법인지라 몇년 전에 받았던 질문을 아직도 똑같이 받는다. "지금이라도 집을 사야하는가?" 내 대답은 아직도 똑같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사라"

이것이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다. 서울 주요지역의 집값은 저점이던 2014년 대비 거의 2배 이상 올랐는데 그때보다 대출은 더 어렵고, 세금은 늘어났으며 정부가 집값을 잡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수억이나 되는 돈을 들이는 데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트레이딩은, 그리고 투자는 그런 당연한 감정들을 극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유명한 펀드 매니저나 트레이더가 "마음 내키는대로 사고 팔았더니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더라"라고 하는 것을 보았는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투자한다는 것은 그냥 오랑우탄이나 침팬치같은 동물처럼 투자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명 돈은 인간의 감정을 싫어한다.

따라서 다시 한번 경제 지표와 시장을 냉정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현재 집값은 고평가되어 있는가, 그리고 서울 시내의 주택공급은 충분한가. 아래의 데이터와 수치는 yes라고 대답하기 쉬운 그 통념을 산산히 부순다. 서울의 집값은 버블은 커녕 아직도 저평가 되어있고 공급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1)주택 가격 평가


위의 차트는 서울시 내의 평균 주택가격을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 가처분 소득으로 나눈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1인당 가처분 소득이 거의 50% 증가하는 동안 주택 가격은 고작 12%밖에 오르지 않았다. 이 지표를 보면 서울의 주택난이 극심하던 1980년대나 주택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던 2000년대 중반에 비하면 서울의 주택가격은 아직도 싸다. 게다가 평균소득이 오르면 고소득자의 수는 더욱 빠르게 늘어난다. 2007년 연봉 1억이 넘는 근로소득자는 10.1만 명에 불과했지만 2016년에는 무려 65.3만 명이 되었다. 고액연봉자가 살고 싶어하는 강남이나 마포, 용산, 성동구의 신축 아파트 가격이 2배 이상 뛰며 타 지역을 압도하는 데엔 이와 같은 배경이 있다. 사람들의 소득이 줄지 않는 이상 집값은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다.



집값의 valuation을 비교할 또 다른 지표를 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특정 재화의 실질 가격을 평가할 때 통화량과 명목 가격을 종종 비교한다. 이는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효과를 대략적으로 보정해주기 때문이다. 통화량 대비로 보아도 한국의 주택 시가총액은 전혀 고평가 구간에 들어가 있지 못하다.


2)주택 공급 평가

서울시의 주택 공급 수급을 평가할 때엔 아래의 표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수요
서울시 가구 수  : 385만 가구
+서울시 생활권 :   55만 가구
           합           : 440만 가구

*공급
서울시 주택 수  : 365만 채
그 중 아파트 수 : 165만 채
신축 아파트 수  :   65만 채

아주 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서울 내 신축 아파트에 살고 싶어한다. 서울시의 인구가 줄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자발적으로 서울을 떠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주택 수로 인해 밀려난 것이다. 그렇게 서울시 밖에 살면서 시내를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156.3만 명, 약 55만 가구다. 이렇게 총 440만 가구가 저 65만 채의 신축 아파트를 차지하기 위해 쩐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서울 부동산 시장의 현 상황이다.

구체적인 숫자를 따져 보면 앞으로의 전망은 더욱 암담하다. 흔히 사람들은 지은 지 15년이 넘으면 구축 아파트로, 40년이 넘으면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 재건축 대상 아파트로 분류한다. 따라서 매년 9.1만 채(365만 채/40년) 집을 새로 지어 줘야 서울 내의 주택 수급사정이 악화되지 않는데, 지난 10년간 이 숫자를 맞춘 적은 단 두 해 뿐이었다. 나머지 8년 동안 수급 사정은 계속 악화되어 온 것이고, 그 결과 서울시에는 미분양 주택이 거의 사라졌다.

서울시 미분양 주택 수

이러한 수급 불균형은 재건축/재개발을 막은 국토부의 어리석은 정책 덕분에 더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멍청한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이미 겪은 적 있지만, 정책 설계자들은 집값 안정이라는 대의적 목표가 아니라 개인적 욕망에 따라 고집을 부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링크)

*      *      *

이렇게 서울 내 주택 수요는 풍부한데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면 어떤 대책을 써도 주택가격을 잡을 수 없다. 종부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매기면 가장 가난한 주택 보유자가 조세부담을 못 견디고 전세입자로 전락하여 전세수요가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돈이 가장 많은 다주택자가 그 집을 사들여 전세를 돌리게 되니, 결국 주택 가격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소유구조만 악화될 뿐이다. 조선시대에 지대를 높이면 결국 지주가 아니라 소작농이 비싼 세금을 부담하게 되듯, 모든 사회적 비용은 가장 약자에게 전가되기 마련이니까.

또 금리를 올리거나 대출을 죄는 통화정책은 부동산 외의 여러 시장에 영향을 주게 된다.  지나치게 많은 시중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이 폭등했다고 하지만, 그럼 이 통화량이 왜 주식시장, 상품시장, 혹은 떡볶이시장 학원수업료 등으로 흐르지 않고 부동산 시장에만 모이겠는가. 유동성은 마치 물과 같아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주는 곳으로 모이기 마련이고, 어리석은 정부 정책 덕에 마침 그게 부동산 시장이 되었을 뿐이다. 이를 막기 위해 유동성을 죄면 수익성이 가장 나쁜 시장에서 먼저 돈줄이 마른다. 부동산에서 돈을 퍼내도 어떻게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부동산 시장에서 빠져나간 만큼을 채울 테니까. 내 생각에는 만약 정부가 그런 정책을 쓰면, 자영업 대출시장이 그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들어 전세대출을 금지했다고 치자. 그럼 새 전세금을 맞추지 못한 세입자는 월세로 전환할 것이고, 이렇게 월세수익이 올라가면 집주인은 저축은행에서 예금을 빼서 전세를 월세로 돌릴 것이다. 자금이 빠져나간 저축은행은 안정적인 부동산 담보 대출보다 어떻게 돈을 날려먹을지 모르는 자영업자 대출과 신용대출을 먼저 줄인다. 그중에서도 저소득자의 대출을 가장 먼저 줄일 것이다. 결국 줄어든 통화량은 어느 경로를 통해서든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타격을 입히게 되어있다.

그리고 이 정책의 가장 큰 비극이자 희극은 현 정부를 가장 지지하는 계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2018. 7. 23.

노회찬, 그리고 한국 정당정치

자유한국당은 자유를 부정하고
민주당은 민주적이지 못하며
정의당은 정의롭지 못한 돈을 받았다.

정당정치는 명분도 목적도 의식도 없는 여의도 배 프로야구나 다름없는 듯.

2018. 3. 18.

새로운 신지식인들의 시대.

우리는 개그맨이 헌법 강의를 하고 미술 사학자가 수학논리를 가르치며 음식 평론가가 아이스하키 전술을 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경제학을 인터넷 댓글로 배우며 물리학을 인터스텔라로 깨우친다고 말한다.

이런 얄팍한 지식이 소비되는 사회에서 대중의 교양은 처참한 수준인데 비해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은 막강하다. 깊게 생각하는 이는 적고 주먹을 휘두르는 이는 많으니, 1970년대의 중국 홍위병과 다를 바가 무어냐.

바야흐로 새로운 신 지식인의 사회다. 지식의 척도가 돈 버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지식의 척도가 sns의 좋아요 갯수로 평가되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단언컨대, 무식은 죄가 아닌게 아니라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