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5.

남녀의 사회적 진실 II-82년생 김지영

0. 우리가 성평등 문제를 바라볼 때 첫번째로 저지르는 실수는 양 성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눈다는 것이다. 수컷은 가해자, 그리고 여성은 피해자.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사하는 날 불려온 인부가 전부 아줌마라면 여자들은 이야 평등한 세상이다! 하고 좋아할까? 아님 업체에 항의전화를 넣을까. 남자 청소부가 여자화장실의 변기를 닦고 있다면? 옆집 아줌마는 의사라 돈을 버는데 아저씨는 무직으로 집안일을 하신단다. 여자들은 그집 아저씨를 백수라고 하지 않고 내조의 제왕이라고 불러주는가?
 
만약 성차별의 가해자가 오로지 남자들 뿐이라면 성평등은 남자들이 정신차리면 되는 일이고, 또 여자들이 합심하여 아들놈을 잘 교육시킨다면 한세대 만에 사라질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골칫덩이는 아직까지도 희대의 난제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정신차려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결국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하는 것은 할머니고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것은 어머니다. 성차별에 있어 가해자는 사회 전체이며 희생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다. 물론 여자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의 문제지 그 윗동네에 서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 다친 성이 덜 다친 성을 문제의 근원으로 모는 일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금성과 화성을 오가는 일 보다도 더.
 
1. 가사노동과 육아는 남녀가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정 외의 책임 역시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하지만 둘다 지켜지지 않는다. 요리와 빨래는 주로 여자의 몫이며 착한 남편은 이를 "돕는다". 반대로 그 집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의 직업이며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남편이 자기에게 선물한 백을 꺼내서 자랑하지, 자기가 남편에게 무슨 차를 사줬는지를 두고 자랑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다른 성역할을 강요하고 압박하는 것이 어찌 한 성의 문제인가. 남자와 여자(게이와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2.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이 지워지지 않는 핵심 이유는 성에 따라 부담하는 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군역.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여자들은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하지만 의무의 면제는 필연적으로 권리의 박탈로 이어지며 여자는 군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차별은 병영의 담을 넘어 사회로 확산된다. 다음 사례를 보자. 모 의대 외과교수 A씨는 여학생들을 뽑지 않는다. "여자들은 신체적으로 약해서 힘든 외과의사가 맞지 않아." 몇몇 여자들은 자신은 외과의사를 하기에 체력적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항변하나, 매번 남자 동기들에게 밀린다. 모 회사 B상무가 연말에 임원승진 후보자들을 심사하고 있다. 어느 회사나 일은 고되고 힘들다. 군대 역시 고되고 힘들다. 군필인 남자 후보와 헌법상 군대를 못갈정도로 나약한 여자 중 누가 승진에서 유리하겠는가?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완전히 붙어있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건 특혜가 아닌 차별이었듯, 처음부터 군역을 이수할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들은 이어 사회 곳곳에서 차별과 싸워야 했다.
 
일부 페미니스트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여자들이 그 차별을 묵과했다. 여자들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꼰대 남자들도 그 차별을 당연시한다. 그 둘 모두가 가해자다. 모든 차별은 득과 실을 동반한다.(대개 한쪽이 더 많은건 사실이지만) 명절때 남자아이들만 데리고 성묘에 가는 것과 아들들에게 재산을 더 많이 상속해주는 것은 같은 정확하게 같은 차별에서 나온다. 내가 꼰대 남성들 뿐 아니라 차별의 혜택을 계속해서 누리려는 여자들 역시 가해자라고 비난 하는 이유가 어기에 있다. 편견을 없앤다는 것은 단것만 삼키고 쓴것만 뱉는 것이 아니라 달던 쓰던 맵던 자시던 간에, 한 사람을 비틀어진 성역할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깨인 페미니스트들이 국방의 의무를 달라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들이 남성을 동경하는 톰보이라 군대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든 차별을 정복하고 섬멸하기 위해서.
 
3. 많은 사람들이 군대와 출산을 비교한다. 논리적으로 어떤 두 대상을 비교하려면 그 둘이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엄마와 아빠, 버스와 자동차, 곶감과 배. 하지만 전혀 다른 대상은 비교하기가 어렵다. 셔먼 탱크와 아름다움, 산들바람과 목성의 위성 이오니아, 그리고 사회적 의무와 생물학적 기능. 그러니 저 둘은 애초에 비교할 것이 못된다. 임신이 사회적 의무라면 모를까. 하지만 신체 건강한 모든 여자에게 애를 둘 이상 낳지 않으면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든지, 혹은 폐경기에 임박한 여자가 애가 없을 경우 국가가 강제로 임신을 명령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혐오스러운 주장을 하는 인간들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의무와 자유를 비교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들과도 말 붙이기 싫은건 마찬가지고.
 
4. 한 여성의원이 남성의 역차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접힌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 종이를 반듯하게 만들기 위해선 접었던 부분을 펴는 것 만으로 모자를 때가 있다. 때론 반대로 접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난 남성에게 역차별을 가해 여성의 권익을 보장하는데에 찬성한다. 물론 그 시작은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82년생 지영씨지만 가장 부당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온 것은 22년생 할머니고 그 다음이 52년생 어머니일 것이다. 아마 현재 92년생 지영씨의 사정은 좀 더 나을 것이다. 차별에 대한 보상 역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악에 받쳐 꽥꽥대는 가짜 여성인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진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마치 후순위 채권처럼 리스트의 저 아래에 있다.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당한 차별에 대한 댓가를 왜 저들이 타가는가. 그들은 권리에만 민감하다. 국민의 4대 의무중에서 한 것이라곤 교육 하나밖에 없으면서. 저리 멍청한 걸 보니 과연 그 하나라도 잘 이행했을까 의문이 든다.
 
종이를 반대로 접어주는 일은 인구 피라미드의 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황혼 이혼을 쉽게 한다던지, 그 이후에도 여성이 재산 분할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한다던지. 사회적 편견을 뚫고 올라온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우대한다던지. 가장 지독한 차별을 뚫고 살아온 피해자들을 제치고 2030대 여성부터 치료하는 현재의 성평등 정책은 분명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하지만 아예 안하는 것 보다 나으니 비판하지 않겠다.)
 
5. 이 소설인듯 소설아닌 소설같은 책의 소설적 요소는 첫 세 페이지에 몰려있다. 나머지는 진부하다 못해 곰팡이 냄새가 날 것 같은 클리셰들을 늘어놓다가 끝난다. 아침드라마에서 시청률이 가장 낮았던 장면들을 글로 옮긴다면 아마 이 소설이 되지 않을까. 출처를 잊었지만 누군가는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단 한줄로 평가했다. 창작은 어려운데 자꾸 쉬운길로 가려고 한다고. 뭐 현실을 재구성한 것도 하나의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도 때론 소설만큼이나 소설적이니까.
 
그 좋은 예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장 호레이쇼 넬슨제독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역사의 판도를 바꾼 그 해전에서 영국인들에게 승리라는 유산을 남긴 넬슨은 연인 엠마 해밀턴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의무를 다했단 사실에 감사하오" 하지만 엠마를 비롯한 영국의 여성들은 영국의 찬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에서 조연에 머물러야 했다. 죽어가면서도 허세를 부린 넬슨이 자랑하던 그 의무라는 것은 오로지 남자들에게만 부여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여성들은 그 다음 세기에도 식사가 끝나면 남자들이 위스키와 시가를 즐기며 정치를 논하는 자리에 끼지 못하고 홍차에 우유를 부어 마시며 뒷방에서 가쉽거리를 재잘거리는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투표를 할 수 없던 것은 물론이고. 영국에서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그 다음 세기인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빅토리아 시대와는 달리 현대의 전면전은 모든 성인 남자들을 전선으로 빨아들였고 군수공장의 빈자리는 여성들이 메워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20세기의 엠마들은 자신들이 짊어진 의무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요구했고, 처칠같은 꼰대들이 반대했지만 수백만명의 독일군도 물리쳤던 그들조차 치마 대신 머리띠를 두른 그녀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의무를 다한 영국 여성들은 1928년부터 참정권을 따냈다. 당당하게. 그 앞에서 묻는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은 과연 어느 세기에 살고 있는가?

2017. 9. 21.

부는 어떻게 유전되는가?

A씨는 "최근 대출 받아 집 산 사람들 대부분 30년 상환 조건이다. 이를 달리 생각하면 앞으로 30년동안 소비할 것을 현재로 당겨 집값을 올린 것"이라며 "이론적으로만 따져보면 20년 동안은 집값이 멈춰야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E씨는 "서민들이 무리하게 대출 받아 집 산 이유는 집 없이 전세로 2년에 한번씩 이사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너무 힘들고, 주거 안정을 원했기 때문"이라며 "지난 정권에서는 사실상 '제로 금리'였기에 그때가 내집마련의 적기라고 생각해 집을 샀던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위는 모두 실제 기사에서 발췌한 두 사람의 인터뷰이다.(링크) 30년간 A씨와 E씨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먼저 A씨는 30년간 현재 집값의 평균 약 6%의 월세를 내며 살 것이다. E씨 역시 평균 악 6%의 원리금을 상환하며 살아갈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는 측면에서 둘의 차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30년 뒤 E씨는 (낡았지만, 그래도)자가 주택을 가진 자산가가 된 반면 A씨는 세입자로 월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바로 자본주의의 특성 때문이다. 이 시스템 아래서는 자본 역시 하나의 생산요소가 된다. 독산동에서 압구정을 가는 사람이 버스를 배제하고 지하철로만 다닌다면, 버스와 지하철을 모두 이용하는 사람보다 앞서나갈 수 없듯 자본을 배제한 사람은 자본과 노동을 모두 사용하는 사람을 이기기 힘들다. 그리고 그 자본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은행이다. 따라서 이 은행을 어떻게 이용하는 지에 따라 사람들의 부가 갈린다. 바로 위의 예에서도 노동수익률에만 의존하는 A씨가 세입자로 주저앉은데 비해 노동과 자본수익률 모두를 사용한 B씨가 더 많은 자산을 형성한 것 처럼.

하지만 오감에만 의지한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듯, 사람은 자본이 중요한 생산요소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그렇게 A씨는 동네 복덕방 앞에 앉아 훌쩍 올라버린 가격표를 손으로 탁탁 치며 "투기세력 때문에" 혹은 "세상이 썩어서" 집값이 이모양으로 올랐다며 분노를 터뜨린다. A씨를 욕하지 마시라.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어떻게 A씨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빚을 내어 집을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잘못된 것은 내 판단이 아니라 오른 저 집값이라고 믿으며 정의가 구현될 그 날만을 기다릴 것이다. 자기가 모은 자본을 월세의 반도 안되는 이자를 주는 은행에 넣어두고서.

딱히 E씨가 더 똑똑해서 집을 산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목돈이 생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E씨가 집값이 싼 동네서 살아온 터라 대출로 집을 사기가 더 수월했을수도, 혹은 은행에 취직해 대출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더 낮았을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우연에 의해 A와 E로 인생이 갈렸다. 당위가 아닌 우연이 가른 이 팔자의 갭은 다소 가혹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차이가 자식에게도 유전된다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 온가족이 모인 식사자리에서 부동산이 올랐단 소식을 접한 A씨는 짜증을 내며 노릿하게 구워진 굴비의 배를 젓가락으로 휘젓는다. 어린 아들이 눈앞에 있는걸 잠시 잊은 채 주택시장이 제정신이 아니다, 보나마나 폭락할 것이다, 나라경제가 얼마나 엉망인지 아냐며 온갖 악담을 퍼붓는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아들은 두렵다. 집값이 무너질까 두렵고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망해갈까 두렵다. 그래서 그는 두가지를 의심없이 믿으며 자란다. 하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둘, 집값은 거품이다. 그런 아이가 자라서 또 다른 A씨가 된다. 그는 결혼해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사는 대학 동기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혹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쟤는 어쩌려고 겁없이 집을 사나, 이게 다 버블인데. 불쌍한 친구에게 맥주한잔을 사고 집에 들어와 와이프와 해외여행 계획을 세운다. 친구가 원리금을 상환할 동안 자기는 월세를 내고 남는 돈으로 차를 산다. 와이프 구두도 산다. 자고로 YOLO의 시대 아닌가. 시간이 흘러 월세계약이 만기되니 집주인은 세를 올려달라 한다. 그제서야 A씨의 아들은 집을 한번 사볼까 복덕방을 기웃거리지만 가격은 2년 전보다 더 올랐다. 이거 버블인데.. 주택시장 상투를 잡고 돈좀 빌려 달라며 찾아올 줄 알았던 친구는 오른 집값에 함박웃음을 짓고있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줄 알았던 시장은 나를 두고 내달리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입맛 뿐 아니라 말버릇도 닮았다. 그 역시 굴비의 배때지를 젓가락으로 파내며 중얼거린다. "그놈의 투기꾼들.."

반면 E씨는 금융시스템과 자본주의에 대해선 A씨 만큼이나 모르지만 단 하나는 알고있다. 소득 만으로는 집을 절대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 고작 중3밖에 안되는 딸의 손을 붙잡고 은행에 찾아가 청약통장을 만든다. 언젠가 이게 딸의 인생을 바꿔줄 로또가 될지 모르지 않는가. 다 큰 딸이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자 E씨는 그녀에게 전세로 살 바에는 집을 사라고 조언한다. 그는 어려운 자본 뭐 수익 그런 용어들을 쫙 빼고, 간결한 말 한마디로 자신의 딸에게 인생경험을 물려준다. 빚도 자산이다. 얘야, 빚을 져야 돈이 모인단다. 아버지가 집을 산 덕분에 한 집에서 쭉 나고 자란 딸 역시 2년마다 이사를 다닐 자신이 없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지 않는가. 그녀는 용기를 낸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가 주저하는 남편을 부추겨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 의외로 삶이 그리 팍팍해 지지도 않는다. 그저 월세 대신 은행에 이자를 낼 뿐이니까. 이대로 30년이 지나면 온전한 내 집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E씨의 딸은 E여사가 된다. 이처럼 부는 상속뿐 아니라 경험을 통해도 유전된다.

현재로는 이 고리를 끊는 길은 A씨의 아들과 E씨의 딸이 결혼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 길은 점점 좁아지고 있고, 또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결혼에 사랑 이외의 것을 따지는 일은 좀 슬프지 않나. 집을 무조건 사라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빚을 내 투자하는 것이 맞다는 것도 아니다.(물론 나는 지금은 그래야 한다고 믿지만) 그저 부의 증식을 막는 비뚤어진 금융 상식을 좀 걷어내자는 것이다. 월세를 내나 이자를 내나 동일한 지출이고, 갚을 수 있다면 빚을 터부시 할 필요는 없다. 낼 능력만 있다면 현금카드를 쓰나 신용카드를 쓰나 무관한 것 처럼. 집값, 버블, 폭락. 이세 단어를 30년째 관용어구처럼 붙여 쓰는 기래기들도 오바질 좀 그만해라. 니들이 설레발 칠 때마다 망했다면 지금쯤은 한반도를 넘어 화성까지도 파산했을것이다. 교육수준과 배경에 상관없이 금융시스템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하고 누구나 올바르게 이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현재와 같은 부의 세습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 막말로 A씨가 원한다면 언제든 E씨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부동산 정책이 나올 때마다 분노하는 그룹과 환호하는 사람으로 양분된 사회보다 더 낫지 않은가.

*혹자는 위의 예시는 집값이 무한히 오를경우의 이야기고 빠질때 어쩔거냐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집은 땅 위에 짓는다. 그리고 공급이 한정된 생산요소인 땅 위에 짓는 집값이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는 것은 인류 문명 자체가 하락한다는 소리와 같다. 혹은 인류는 잘 사는데 한국만 망하든가. 그게 걱정이라면 당신이 빚을 내 집을 사든 말든 별 차이가 없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니까. 좀 더 아는척 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디플레에 빠질거라고 한다. 예전 글에서 밝혔듯이 일본은 정책적으로 디플레를 일으킨 것이며 우리의 상황은 일본과 매우 다르다. 단지 가까이 붙어있단 이유만으로 우리도 디플레를 겪을거라고 믿는 다면 되려 대한민국이 공산국가로 변할거라고 전망해야하지 않나. 우리랑 가까운 나라들 중에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더 많으니까.

2017. 9. 15.

합리적 성주/강서구 주민과 이기적인 대중들

(나는 성주 혹은 강서구 주민이 아니다. 아 너가 니 동네 사람이라 이런 주장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모지리들 때문에 미리 밝힌다.)

사드 배치에 반발하는 성주 지역민들과 장애학교 유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을 향한 비난이 거세다.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면 다 하나같이 "지역이기주의의 추악한 단면" 이라는 투로 비난하는 아무 생각이 없는 기자들의 글 아래, 그 지역 주민들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만약 저들이 댓글을 저장할 서버 저장장치를 만드느라 땀흘려 고생하신 엔지니어들과 기계의 감가상각을 떠올렸다면 댓글달기 전에 과연 내가 정당한 주장을 하는 건지 생각이라도 했을텐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사드는 안보에 관계된 자산으로 그 혜택은 온국민이 동등하게 누리고 장애우를 부양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니 당연히 사회 전체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인들은 모두가 누리는 혜택의 비용을 소수인 특정 지역 주민에게 청구하고 있다. 그건 다수가 우르르 몰려가 소수를 삥뜯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깡패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르면서 거리낌이 없는 저 무리의 행태를 보면 사이코패스와 매우 유사하다.

또 엄밀히 따져보면 국가 안보를 위험에 빠트리고 가련한 장애우 부모들을 무릎꿇린건 자기동네에 사드와 특수학교 설치를 반대하는 저 주민들이 아니라, 저 둘을 내심 혐오시설로 취급하는 온 국민의 인식이다. 자칭 안보 1번지라구 뻐기고 다니는 강남구민들이 성주로 우르르 내려가 "여기가 국가안보의 성지로군요!"라며 땅과 집을 사들인다면, 그리고 온 국민이 장애학교를 훌륭한 주민편의시설로 여긴다면 당장이라도 해당 집값이 뛸 테니 지역주민들은 "유치를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사비를 털어 축제라도 열 것이다. 당신네들이 사드와 장애학교를 꺼림칙하게 여기는데 저 주민들이 왜 이 시설들을 반기겠나? 사회의 인식이 그모양인게 과연 주민들의 잘못인가? 댓가없이 집값 땅값이 수천만원 떨어지는 걸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 않았다고 인간 말종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당한가?

일부 사람들은 사드는 해롭지 않고 장애학교는 집값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며 주민들을 바보취급하지만 그러는 사람들이야말로 두개골 안에 뇌 대신 핑크색 브로콜리를 담고 다니는 진짜 바보다. 그렇게 무해하면 자기 동네에 설치하잔 소리는 왜 안하나? 게다가 유해하고 말고를 떠나 설치하는건 내 자유다. Not in my backyard because it is MY backyard, 공공시설을 지으면서 지자체의 의견을 무시하는 건 합당한가? 아무리 해가 없더라도, 그게 아리수 수돗물이든 미국산 쇠고기든 수십개를 먹어야 영향이  있다는 살충제 계란이든 뭐든, 내가 싫으니 싫다는 건데 왜 제3자들이 괜찮다며 내 턱밑에 억지로 들이대는가. 자기나 실컷 즐길 것이지. 특히 조희연 교육감은 장애인 교육은 양보할 수 없는 문제라며, 독박 쓰기를 거부한 주민들을 쓰레기로 몰아간다. 저새끼는 왜 남의 동네에서 지랄하는가? 그게 그리 급했으면 자기네 집에 지으면 되지 않나.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이면 아무 동네나 쳐들어가서 지멋대로 해도 되는건가? 대개 정의라는 탈을 쓴 괴물들이 가장 많은 폭력을 저지른다.

우리는 자신의 니즈는 정의로, 타인의 욕구는 더러운 탐욕으로 매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자기들은 철저히 이기적이면서 남보고 이타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정신병 걸린 레밍들의 무리 한 가운데에 있다. 만약 성주/강서구 주민들을 비난하는 댓글들 통계를 내서 가장 많이 서명한 동네에 저 시설을 배치하기로 한다면 댓글란은 하루아침에 깨끗해질 것이다. 그제서야 저 주민들이 사탄의 자식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보통 사람들이고 우리도 저들 만큼이나 이기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고. 성숙한 시민 시회라는건 남이 사는 동네에, 나조차 기피하는 시설을 지어놓고 그냥 참고 살라고 윽박지르며 여론몰이로 조리돌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무식한 미개인들의 방식이다. 공공의 이익을 핑계로 소수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마우 부당하다. 그런 공리주의적인 관점이야말로 생산성이 낮은 약자들을 억압하고 학살해 온 가장 사악한 사고방식 아닌가. 부득이하게 국가의 이익을 위해 지자체가 원하지 않는 시설을 배치해야하는 경우라면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 옳다.

어쩜 이런 당연한 소리를 하는 기자와 정치인들이 단 한마리도 없을까.

2017. 9. 11.

전세가 없어지지 않는 진짜 이유-미개한 정부와 현명한 시장

많은 사람들이 전세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이고 사회발달과 함께 없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평균 전세액은 사상최고가를 경신하며 여전히 월세보다 두배는 더 많은 계약방식으로 없어지기는 커녕 더 흔해지고 있다. 전세가 없어질거라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머쓱해하며 집값 상승이 재개되어 그런거라고 변명하지만 어디 그런가. 집주인이 집값 상승을 바라보고 전세계약을 한다면 세입자는 집값 하락을 바라보고 전세를 계약한다. 아니고서야 세입자는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샀을테니까. 상승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가 하락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를 만나 거래를 하는데, 집값이 올라갈거라 믿는 사람이 많아 전세가 늘어난다는 말은 이 계약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주장이다. 그리고 그 특성을 이해하면 우리 사회에서 전세가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저 크로마뇽인 같은 정부가 현대인으로 진화하기 전 까지는.

전세란 한마디로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월세를 내지 않는 대신 집을 담보로 잡고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거래다. 따라서 전세금을 결정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월세, 시장금리 그리고 담보가치인 집값.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월세율과 시장금리이고 집값은 전세가가 주택가격의 70-80%을 넘지 않는 이상 이 거래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월세가 동일할 경우 한국은행이 시장금리를 내리면 전세 가격은 올라간다. 같은 원금으로는 월세를 보충할만한 이자를 못 받기 때문에 원금을 더 받아서 맞춰야 하니까. 따라서 전세금의 트렌드와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비교해보면 거의 동행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집주인와 전세입자는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고 맡기는 대신 이런 복잡한 계약을 할까? 집주인이 전세를 놓는 대신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고 월세를 받는다면 더 큰 돈을 벌수 있다.(전월세 전환률 4%-은행 대출이자 3%) 물론 세입자 입장에서는 전세가 나쁠 것이 없다. 목돈을 은행에 맡겨봤자 2%의 푼돈만 받는데 비해, 4% 월세를 내야하니 얼마나 손해인가. 따라서 전세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럼 애초에 집주인은 왜 은행으로 가지 않는가?

왜냐하면 애초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금융시스템이 미개했던 시절, 은행의 대출은 일부 특권층에게만 열려있었고 이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해선 연줄이 필요하기도 했다. 선진화 된 금융시스템이 없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대출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현대의 언어로 말하자면 전세는 주택담보 p2p 대출인 것이다.

물론 이 시스템은 중앙화 된 효율적 금융 시스템이 있다면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접근 가능하며 공정한 금융 시스템이 존재해야 한다. 정부가 환율을 묶어둔 많은 개도국에서 달러 암시장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처럼, 정부가 시세를 무시하고 시장에 입김을 가하면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공정한 시장을 창출해 낸다. 전세가 없어지기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미 사람들은 서로서로 집의 담보가치를 70-80%까지도 인정해주는 데 비해, 정부는 은행이 주택담보가치를 40%까지만 인정해주라고 지시했다. 참고로 파산하기 직전의 그리스 채권의 잔존가치가 이보다 더 높았다. 그럼 어떤 집주인이 자기 집을 망해가는 나라 국채수준으로 취급하는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겠는가? 게다가 정부는 다주택자에게 대출문턱을 조이고 있다. 다주택자들은 부자고 그들이야말로 부도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을 올리는 비효율적 시장이 어떻게 효율적으로 자생하는 전세시장을 집어 삼키겠는가. 이는 북한이 남한을 적화통일하는 일 보다 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정부 자체도 전세가 없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나의 부채는 누군가의 자산이므로 국가부채가 늘어난다는 것은 국가자산이 동시에 늘어난다는 것인데 금융원시인들은 대개 부채라는 차변만 보고 대변은 읽지 않는다. 그런 미개인들의 집합인 정부는 무턱대고 부채가 안 늘면 손뼉치고 좋아한다.(그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부채가 없던 고조선 혹은 지금도 없는 보츠와나 같은 사회인가보다) 그런데 모든 전세를 금융시스템으로 편입하면 집주인들의 부채가 하루아침에 500조가 늘어나므로(동시에 세입자들의 자산도 500조 늘어나지만, 우리는 대차대조표의 왼쪽을 볼 줄 모르는 반푼이들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나라가 망한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조차 전세가 없어지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전세는 멍청한 정부가 만들어 낸 공공시스템이 제 할일을 하지 못해 사람들끼리 스스로 만들어 낸 효율적 시스템이다. 범죄가 끊이지 않는 도시에서 경찰이 나서지 않으면 시민들이 스스로 자경단을 조직하는 것 처럼 전세는 주택시장의 금융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태어났다. 전세 시장은 금리와 월세 주택 가격에 따라 유기적으로 반영하며 세입자 집주인 모두에게 이익을 줄 뿐 아니라 멍청한 정부까지도 지속되길 원하는 시장이다. 효율을 무시하는 시장은 언제나 도태되는 법이다. 전세 시장은 정부를 비웃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 참고로 집값상승에 대한 기대는 금리에 반영되지만 복잡하니 넘어가자
**이 외에 2차효과도 있으나 역시나 복잡하니 넘어가자

2017. 9. 10.

살인자의 기억법: 감독의 머리가 설현의 몸매보다 좋았어야

스릴러 영화는 잘 맞는 퍼즐이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스릴러의 반전이란, 마치 반쯤 맞추다 뒤집어 다르게 맞춰도 맞물리는 퍼즐 같아야 한다. 즉 이제까지 영화가 a를 범인으로 몰아가다 갑자기 b가 범인이라며 관객을 놀라게 하려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봐도 아귀가 맞아들어야 관객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그 위화감과 어색함을 뭉텅이로 던져놓고 끝난다. 대개 머리가 나쁜 감독이 스릴러를 만들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가장 큰 설정의 구멍은 주인공 설경구에게 있다. 설경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인 동시에 딸을 너무나 사랑하는 인간적인 아빠로 묘사되는데 이런 사이코패스이면서 동시에 휴머니즘이 가득한 캐릭터는 마치 영국식 중절모에 힙합바지를 입은 패션 만큼이나 난해하다.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정서장애로 남들 울 때 깔깔대고 웃는 주인공이 갑자기 딸 때문에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겠나.

또 설경구는 나쁜 놈만 죽인다는 자신의 철칙을 가진 연쇄살인마인데 왜 지난 17년동안 살인을 멈추다 재개했는지, 재개한 뒤 왜 희생자들을 젊은 여자로 바꿨는지에 대한 납득할만 한 설명 없이 갑자기 모든 살인을 설경구가 했을수도 있다고 몰아간다. 게다가 본인은 그걸 믿고 자살까지 시도한다.(뭥미) 이 외에도 담배가게 아가씨에 대한 설정이 증발한 것이나 딴 모순들이 가득하지만 뭐 그런건 다른 영화들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수준의 오류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기억상실로 인한 영화적 연출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가 보여줬고 영화적 장치로 착한 살인자가 나쁜 살인자를 죽이는 설정으로는 미드 덱스터가 있다. 그 둘을 적절히 섞은 소재부터 출발하는 이 영화는 마치 싸구려 중국산 퍼즐세트 같다. 어떤 조각은 서로 맞지 않고 쓰이지도 않으면서 유난히 큰 조각도 있었다. 설득력 있는 반전을 보여주기엔 퍼즐조각이 충분하지 않아 뻔한 스토리로 흘러가고 만 영화이다. 액션 영화나 로맨스 영화였다면 차라리 나앗겠지만 스릴러 영화의 묘미는 관객이 등장인물들과 별개의 입장에서 같은 단서들을 가지고 같이 추리해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엉망인 설정 오류가 더욱 더 크게 느껴진다. 주인공의 딸 역할로 나온 설현의 몸매를 순간순간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을 보며, 만약 감독의 머리가 설현의 몸매보다 나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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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김병수씨의 입을 빌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추가한다.

어떤 감독이 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겠다며 찾아왔다. 그의 말을 듣다 화가 났다. 이 작자는 보기에도 멍청하지만 실제로는 더 멍청하다. 그 쓸모없는 머리를 내리칠 둔기를 찾으러 가는 동안 나는 또다시 기억을 잃었다. 가장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다니. 내 알츠하이머가 그를 살려준 덕에, 그 감독은 덤으로 사는 인생 첫날에 하나의 문학을 학살했다. 재능은 좆도 없으면서 겉멋만 가득 든 영화감독들이 너무 많다. 그들 손에 희생당한 훌륭한 원작들은 더욱 많다. 하지만 나와 은희가 그 희생자 리스트 맨 위에 올라갈 줄이야. 그때 감독의 머리를 부숴 대나무 숲에 묻었어야 했다. 내가 못했다면 박주태라도 나섰어야 했다.

반드시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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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아직도 화가 가시지 않아 한줄 더 적는다.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아이돌 가수가 롹을 한다고 할땐 죽일듯이 달려들어 욕하면서 스턴트맨/무술감독 출신의 멍청이가 스릴러 영화를 만드는 건 내버려둔다. 이 훌륭한 작품을 유치뽕짝으로 타락시키다니. 중3 학생이 팬픽을 써도 이보단 나을 것이다. 원작 소설은 깡촌의 수의학자 김병수씨의 입을 통해서 풀어내는 것이 위화감이 들 정도로 독자와 철학적 질문을 주고받는데, 그걸 한마디도 못 알아들은 이 무식한 아저씨는 결국 지 장기대로 이 소설을 주먹이나 주고받는 삼류 깡패스토리로 전락시켰다. 박찬욱 감독대신 이 저능아가 메가폰을 잡았다면 올드보이는 제목이 "친누나와 교실에서"정도 되는 포르노가 되었을 것이며 반전스릴러, 식스센스는 "꼬마유령 캐스퍼"로 개작되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입이 걸은지라, 글에는 욕을 삼가는 편인데 못참겠다. 씨발.

2017. 9. 7.

대한민국 외교점수: 낙제

* 현 정부의 외교정책은 수준 이하다. 외교부 인턴만도 못한 현실인식을 가졌는데 어렵게 꼬인 국제문제를 다룰 능력이 있을 턱이 없고, 그런데도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끝없이 나서니 패닉하며 갈팡질팡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대북정책의 기조라고 밝힌 베를린 선언을 스스로 파기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1차 핵실험을 한 것이 11년 전이고 북한의 핵개발이 이슈가 된 지는 30년이 넘었다. 지난 두달 동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달라진 것은 북한이 수십번 쏴올린 미사일과 5번이나 했던 핵 실험을 그만둘 거라고 믿은 바보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 하나뿐이다. 비극은 그 바보들이 우리나라의 외교안보정책을 드라이브 한다는 것이다.|

* 문재인의 베를린 선언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흉내낸 것이지만 그 결과는 명확하게 달랐다. 김 전 대통령의 선언은 북한의 우호적인 반응과 교류를 이끌어 낸 반면 이번 선언은 당사자 북한 뿐 아니라 우방국들에게까지 비웃음을 삿다. 선배가 여자친구에게 고백했을때 먹힌 세레나데를 그대로 흉내내어 불렀지만, 잘못된 시점에 잘못된 대상에게 잘못된 노래를 불렀다. 외교 담당자들이 통채로 잘못된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 유엔 봉사기구에서 잡일하다 외교부 장관이 된 강경화 장관은 외국 정상들과 전화통화와 방문일정을 잡는 비서역할만 할 뿐, 실질적 외교 채널을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은 점점 북한의 핵에 덜 공격적인 멘트를 내놓는데 비해, 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노골적으로 한국의 대화기조를 조롱하고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이다. 21세기 신 냉전시대에 한국은 가장 위험하면서 취약한 고리로 전락했다. 외교전의 처참한 패배다.

* 안보 측면을 보자. 국군의 90%가 육군인데 이 조작을 통괄하는 국방장관은 해군출신, 합참의장은 공군출신이다. 게다가 안보가 긴급 사안이라면서 청와대는 아직 8개 군단장 자리 중 3개를 공석으로 비워두고 있다. 더욱이 국정원은 이미 대남 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여서 북한 핵실험을 탐지하기는 커녕 북한이 중러에게 핵실험 계획을 사전 통보했는지 조차 파악 못하고 있다. 안보에는 구멍이 있다

* 그들의 한심한 현실감각을 보여주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지난 7월, 베를린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고 청와대는, "사드문제에 대해 차갑던 시진핑을 문재인 대통령이 '끈질기게 설득'하여 '전향적인 태도'를 이끌어 냈다"고 자평했다. 그 때, 김현철 보좌관이 손뼉을 쳐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이에 대해 김 보좌관은 “회담이 끝날 때 중국과의 관계가 풀려가는 것을 보고 경제문제도 풀리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고 해명했다.(링크) 그 이후 두달간 북한은 ICBM을 두번 발사하고 수소폭탄을 실험하는 등, 그 어느때보다도 숨가쁜 시간을 보냈고 북중관계는 더욱 가까워졌으니 시진핑이 한중 회담에서 어떤 자세를 보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시큰둥한 시진핑을 붙잡고 앉아서 자기 주장만 반복하는걸 '끈질긴 설득'으로 보는 청와대의 외교전략 수준과 단호히 친북으로 돌아선 시진핑의 태도를 '전향적'이었다고 해석하는 그들의 아마추어적 현실인식 수준이다. 이 무의미한 회담은 기본적 외교 에티켓도 모르는 촌뜨기가 환각에 빠져 상대 정상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으로 개그의 대미를 장식했다

* 현 시점에 문재인 대통령은 사절단을 대동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을 만나 대북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북한 핵에 대해 중국보다 더 우호적인 러시아를 만나면서 성과를 기대하는 현실감각도 문제지만, 당근도 채찍도 없으면서 만나서 조르면 뭐라도 줄거란 어리석은 믿음이 더 큰 문제다. 그런 멍청한 태도로 정상회담에 임하니, 모든 우방국들이 북한에 가할 경제제제의 강도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남한 혼자 뜬금없이 북러 경제특구 개발에 2조원을 투자하는 방안이나 검토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는 문재인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는 이기적으로 굴면서 다른나라보고 도덕교과서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미국은 인도주의적으로 우리를 도와야만 하고, 중국은 더 강한데도 남한을 존중하며 알아서 기어야하고 일본은 남한이 기분나쁠때 마다 계속 자존심 굽혀가며 사과해야 한다고 한다. 타인의 이익과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은 지능의 문제일까 극단적 편협함의 문제일까.

* 보수도 반성해야한다. 사실 문재인은 엉망으로 망한 대북문제를 계승해서 더 이상 망칠 것도 없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해 될것도 없다. 대북문제를 말아먹은 것은 보수다. 남한이 뭐라 하던 북중미 모두 콧방귀도 안뀌는 코리아 패싱은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시작됐다. 김정은 체제로 넘어가던 북한은 남한의 전쟁의지를 태핑해보기 위해 천안함을 격침시켰지만 남한은 북한의 소행이 확실하지 않다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북한은 대놓고 남한 영토를 포격해 민간인 사상자까지 나왔지만 남한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남한이 아무리 얻어맞아도 반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북한은 남한을 졔끼고 대미전략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시점에서 국군 통수권자에게 전략적 조언을 해주어야 할 국정원장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서울시 체육회 부회장 출신의 원세훈이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자리에 안보 비전문가를 앉힌게 바로 이명박이다. 참고로 이명박은 국군 최신 전차 흑표의 엔진의 수주를 기술력도 없는 국내기업에게 주라고 지시해서 우리나라 기갑전력의 공백과 국방예산 낭비를 초래했다. 아직도 안보는 보수에게 맡기란 소리가 나오는가.

* 햇볕정책이 의미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새로운 냉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박근혜의 개인적 목표가 그저 청와대로 돌아가 행복했던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것에 불과했듯 문재인 정부는 모든 것을 참여정부 때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듯 하다. 이런 노무현 오마주 정치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줄 지 몰라도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북한도 미국도 그리고 중국도 그 때로 돌아가기엔 너무나 먼 길을 왔으며 남한에겐 주변국을 강제할 힘도 없다. 아마추어들이 삼삼오오 앉아 자화자찬하며 셀카를 sns에 올리고 있는 동안, 일본은 멀어지고 미국은 안보 영수증을 청구했으며 북한은 우리의 코앞에 중지를 내밀었고 중국은 남한 기업의 팔을 비틀었다. 그 앞에서 대통령과 아마추어 외교라인은 왜 참여정부때 처럼 되지 않는가 자문하며 멍청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자연스레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정의당도 외교라인을 물갈이 하라고 주문하지 않는가. 예전에 유행했던 드라마 미생에서 주연을 맡은 고현정이 이런 대사를 했다. " 사람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래선 안됩니다" 외교라인도 마찬가지다, 얼른 다 잘라라.

2017. 8. 20.

김수현 수석 저, 부동산은 끝났다. 서평: 멍부의 변명

어디서부터 비판을 시작해야할까. 인과관계는 엉망이고 시장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전무하며 (멍청한 사람들의 전매특허인) 자신의 소망과 전망를 뒤섞은 주장까지 모든게 엉터리라 비난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다만 부지런하게 국내외 데이터를 조사하고 참여정부 시절 정책의 흐름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은 눈여겨볼 만 하다. 전형적인 멍부(멍청하고 부지런한)의 일처리 답다.

전반적으로 그는 일관되게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며 온갖 통계를 들어 변명한다. 집값이 오른 것은 정책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글로벌 유동성 과잉 때문이라며 되려 한국의 집값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집값은 더 내려야하며(싸지만 더 내려야 한다?) 안정적이지만 버블이 꺼질때의 파장이 클 것이라고 경고한다.(버블이 아니다. 하지만 없던 버블이 꺼질 수 있다!) 이런 논리적 자가당착은 책 후반부로 갈 수록 더 극심해진다. 공급을 늘려야 가격이 잡힌다는 시장론자들의 접근은 잘못되었다면서도 서울에 집은 모자른데 공급을 늘릴 곳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모습은 블랙유머인지 멍청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 모두가 현 상황이 어떤지 데이터가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는데, 그를 무시한 과거의 실책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이다.

그러면서 김 수석은 자신의 실패를 가리기 위해 후임자들의 정책은 잘못되었다고 싸잡아 비난한다. 오세훈의 뉴타운 정책은 곳곳에서 소송과 반발에 직면하지 않았느나, 그리고 쫒겨난 철거민들을 어쩔 것이냐며 거세게 비판한다. 하지만 책이 출간된 지 6년이 지난 오늘, 부동산시장의 훈풍과 더불어 각종 뉴타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저자의 비판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굳이 신길 뉴타운의 소형 아파트가 520:1이라는 경이적인 경쟁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거론하지 않아도 은평, 용산, 옥수, 미아에 직접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천명이 살던 열악한 판자촌 대신 만명이 살 수 있는 깨끗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것을 두고 "서울시에 저렴한 거주지가 사라져서 문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펴는 대목에서는 모골이 송연해 질 지경이다. 이런 인간이 70년대부터 주택문제를 진두지휘했다면 청계천서부터 용산역까지 창녀촌과 판자촌이 가득했을것이다.

더욱이 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지침이라며 하는 말은 더욱 가관이다. 부동산 신화를 믿지 말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집은 생활 수단이지 돈벌이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1+1=2를 이해할 논리적 사고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주장과 후술된 근거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 외에도 "집은 과시적 소비재가 아니다", "집은 오래 썻다고 고치는 물건이 아니다", "집은 이웃과 동네의 일부이다.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자"는 지침에 이르면 과연 이사람이 정책입안자인지 종교지도자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정부는, 특히 민주주의 정부라면 국민의 수요와 욕망에 맞춰 그를 만족시키는 정책을 수행해야한다. 국민의 욕망과 가치관을 개조하려는 시도는 신정일치국가나 파시즘 독재국가에서나 이뤄질 일이다. 마을만들기 운운하는 대목에서 군사정권의 새마을운동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비약이 아니다. 본인이나 판자촌에 살며 과시도 안하고 집도 고치지 말고 동네사람들과 "잘살아 보세" 노래나 부르며 살 것이지.

2차대전 초반 무패를 자랑하던 독일군의 기초를 마련한 상급대장 한스 폰 젝트는 이런말을 남겼다. "세상에는 네가지 유형이 있다. 그 중 멍청하고 부지런한 인간은 부하들과 작전을 위험으로 몰아넣으므로 당장 총살해야한다" 김수현 수석은 자료조사와 정책수립은 성실하게 수행하는 부지런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실패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줄 모르고 고집을 부리는 멍청한 사람이다. 그의 아둔한 머리가 그와 그 지지자들의 소망과 목표를 좌초시킬 것이다. 실제로 10년전 그의 멍청한 조언을 따랏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됐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사람들이 같은 베팅을 하고있다. 판돈만 두배로 올려서. 하지만 판돈을 올린다고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아마 같은 결론이 나올 것이다. 멍청한 이들만 그것을 모를 뿐. 올바른 투자는 바보들과 같은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나의 결론도 그렇다. 집을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