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18.

요코 이야기와 위안부, 그리고 정의연

최근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위안부 피해자 중 가장 많이 대외활동을 하던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 대표 윤미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촉발된 이 사건은, 그동안 정의연에 지급된 막대한 후원금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에게 지급되기는 커녕, 사적으로 유용되고 심지어 횡령한 혐의까지 있어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공적 자금인 정부의 보조금과 사적 후원금으로 운용되어온 정의연은 마땅히 모든 혐의에 대해 해명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편법/불법 사건이 있었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비판은 결코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개인의 비극을 공공재로 여긴, 전후 한국사회가 겪는 수많은 마찰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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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요코이야기라는 책을 기억할까. 한때 한국 사회에서, 특히 미주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 아주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이 수필은 11살의 요코가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도피하는 과정에서 겪은 것을 서술한 자전적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되자 한국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조선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처녀가 조선인에게 강간당하는 이야기,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인들을 조직적으로 찾아내 박해하고 학살하는 이야기 등이 실려있는데 이것이 마치 조선인들을 가해자-일본인을 피해자로 그리고 있어 한국인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분명 역사에서 조선은 피해자고 일제는 가해자였다. 일부 일본 극우사학자를 제외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도를 개개인에게 투영할 때 논쟁이 발생한다. 집단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피해자라는 사실은 모든 조선인들이 피해자였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고, 또 모든 일본인들은 나쁜 가해자라는 명제로 귀결되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 모든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딱딱 나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가 바로 두 나라의 역사적 감정이 충돌하고, 또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지점이다.

내선일체 운동 아래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에 준하는 권리를 약속했고 그에 따라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평등한 지위를 가지가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우리가 해방 이전 문학이나 2000년대 이전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듯, 악인이 아니더라도 일제 부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수많은 조선인이 존재했다. 특히 1910년 이후 출생한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 부터 일본인으로 나고 자랐으니 그들에게 있어 국가에 대한 충성은 일본제국을 의미했고, 상당수는 자신이 배운 그대로를 따랐다. 하지만 해방이 찾아오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듯 독립운동가가 되었으며 그런 기만은 시간이 지나며 역사적 사실로 둔갑했다.(링크) 그렇게 모든 조선인들은 피해자로 둔갑했다. 그와 함께 조선인이 가해자였던 기억들 역시 삭제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교과서에서 1927년 화교배척운동이나 평양화교학살사건, 그리고 전후 미군정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정된 조선인들의 기록은 모두 지워졌다. 아마 역사에 특별히 흥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위의 사건들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만약 평양에서 학살된 중국인의 후예나 태평양전쟁시 필리핀의 조선족 군무원들이나 군인에게 학대를 당한 연합군 병사들의 후손이 우리에게 너희의 교과서는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까. 조선은 피해자니 조선인들에 의한 가해의 역사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이처럼 개인의 역사를 모두 뭉뚱그려 민족의 역사로 해석한다면 요코의 비극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본인이니까. 설령 강간을 당하고 목숨을 빼앗겨도 쇼비니즘에 빠진 한국인들의 국민감정 앞에 그녀는 절대 희생자들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이처럼 개인을 부정하고 민족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 태도야말로 우리가 혐오하고 경멸하는 바로 일본 극우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닮아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들이 피해자의 증언을 부정하는 방법까지도 똑같다. 한국의 많은 시민단체들은 작가 가와시마 요코가 11살 무렵이던 60년 전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그 증언에 세부적인 오류가 있다는 점-당시에는 인민군이 조직되기 전이었고, 요코가 증언한 대나무 숲이 함흥 일대에는 자생하기 어렵다는 등을 지적하며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단편적인 기억의 오류를 빌미로 핵심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극우세력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트집잡아 부정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피해자를 규정하는 것은 국적이 아니지 않은가. 요코와 위안부 모두 똑같은 전쟁 피해자고 그 사실은 현해탄의 어느 편에서든 바뀌지 않는다.
 
이런 쇼비니즘적 사고는 타 집단의 희생자들 뿐 아니라 우리편에게도 비극을 안긴다. 사람들이 정의연에 분노하는 이유는 마땅히 소수의 사람들과 단체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을 마치 자기것인 양 남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우리 역시 정의연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2015년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는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포괄적인 배상이 아니라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안이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그녀들이 결정할 문제였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그녀들에게 묻기도 전에 반대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윤미향이 이끄는 정의연은 그 돈을 받으면 창녀가 되는 셈이라며 피해자들을 회유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 생존 희생자들 47명 중 절대 다수인 36명이 차후 지원사업을 받아들였던 것과는 반대로 국민의 66.7%는 위안부 협상을 반대했고 이 사건은 한일관계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많은 피해자들은 생활고를 겪고 있었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87세나 되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불과 5년이 지난 지금 27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고작 20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애초에 원고는 47명의 위안부였고 피고는 일본정부였던 재판에서 일제시대를 겪지도 않은 국민 대다수가 갑자기 방청객의 자리에서 원고석으로 난입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실제 피해자들은 조연으로 밀려났다. 이처럼 그들의 비극을 공공재로 삼아 사유화 한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당사자들과 협의 없이 일본과의 협상에 나선 박근혜 행정부나 정의연, 그리고 일반 국민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모든 태도는 전체주의적 사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개인과 전체를 분리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비극을 진영으로 판단하며 개인의 비극을 공유하는 쇼비니즘적인 태도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갈등의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책 요코이야기를 태우던 개량한복을 입은 민족주의자와 이마에 욱일기를 두르고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가 만났다고 하자, 그 둘이 합의에 이르는 길은 어느 한 쪽의 죽음 뿐이다. 과연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과거사가 매듭되는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한일 양국에서 누군가는 희생자의 아픔을 사유화하는 것을 넘어 상업화했고 그런 비극은 좋은 비즈니스가 되었다. 정의연이 지난 4년간 거두어들인 기부금 수입은 50억에 육박하는데 이는 국내 프로야구 연봉순위 5위인 SK 이재원 선수의 지난 4년간 수입보다도 많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이용수 할머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민족적 문제로 여겼고 정의연은 단순히 아군이라는 이유로 모든 면죄부를 받아왔다. 아니고서야 어떻게 30여 년간 회계장부를 저렇게 엉망으로 작성했는데도 단 한번의 지적없이 그 대표가 국회의원까지 되었겠는가. 

요코이야기를 쓴 작가 가와시마 요코는 1933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고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같은 땅에서 같은 시기에 태어난 두 소녀의 삶은 B52 폭격기의 굉음과 덴노헤이카라는 외침이 뒤섞이기 시작하며 함께 망가지기 시작했고 전쟁의 시대는 그녀들에게 반백년이 지나도 씻어낼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서로를 죽였고 탱크에 짓이겨지고 포격에 불타버린 수천만 구의 주검 앞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아픔을 술회하는 것은 흰 쌀밥에 고깃국과 함께 하나의 사치가 되었다. 매일 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그네들을 겁탈한 것이 몇 천 번 즈음 되었을까. 생의 마지막 장에서 죽음을 마주한 그들이 악몽의 기억들을 어렵사리 꺼냈을 때 그녀들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외치는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그 두 소녀들 사이에서, 어떤 이는 누구의 아픔이 더 큰지를 따졌고, 어떤 이는 편가르기에 나섰으며 어떤 이는 그녀들을 내세워 큰 돈을 벌었다. 그녀들은 아직도 민족과 국가 앞에 개인이 지워지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비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2020. 5. 12.

이준석, 실패한 갬블러

 
난 인터넷 커뮤니티나 페북을 잘 하지 않는다. 읽을 가치가 없는 글들에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것도 싫고 또 멍청한 소리에 발끈해서 반박하느라 정작 훌륭한 글을 읽고 사색할 시간을 빼앗기는게 아까워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읽었다가 분노한 적이 딱 두번 있었는데, 한번은 아빠찬스를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왕세자 문준용님의 글이었고 나머지 한번은 박근혜와 밥먹고 지니어스 출연한게 인생의 최대 업적이신 이준석 최고위원님의 어제자 포스팅이다. 이 글을 단톡방에 두번이나 올려 억지로 읽게 만든 A야, 반드시 복수할테다.
 
민주주의에서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단순히 경제적, 혹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사악한지 궁금하다면 8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한 나치가 자국의 소수파 시민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리길. 그리고 최근 정치색 강한 이들의 단톡방을 뜨겁게 달구는 21대 총선 재검표 논란 역시 그 대표적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란은 대개 진영논리의 연장선상에 있기 마련이다. 민주당 지지자는 200석도 넘었어야 할 결과가 불과 180석 밖에 안 나왔는데 무슨 조작이냐 할 것이고, 또 보수 지지자들은 작년 여름의 광화문 집회와 커다란 규모의 반조국 시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대승을 거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진영의 논리도 아니며 상식/비상식의 문제도 아니다. 심지어 실제 조작이 있었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다. 단지 선거인과 후보자의 권리 문제일 뿐이다.
 
우리나라 공직선거법 222조(링크)와 223조(링크)는 선거인과 정당, 그리고 후보자가 선거의 효력이나 당선에 관하여 이의가 있는 경우, 당해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을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권한과 절차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선거소송이냐 당선소송이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해당 조문들은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의 권리를 명확하게 보장하고 있고 나머지 조문들을 읽어보아도 그 권리를 제한하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법이 당신에게 보장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려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설득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선거가 조작되었다기보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용되던 선관위의 한심함이 드러난 것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생각을 재검표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강요할 권리가 내게는 없다. 그런 권한 따윈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이준석은 반대파를 설득하기는 커녕 윽박지르고 있다.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려면 정치생명을 걸고, 유튜브를 걸고, 또 뭐 페북 아이디를 걸라고 하는데 그는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정치인이지 갬블러가 아니다. 게다가 무리하게 판돈을 올려 블러핑으로 상대를 죽이려는 것이야말로 허풍센 멍청이들이 자멸하는 흔한 클리셰 아닌가. 게다가 그는 경찰수사관이나 검사나 판사가 아니라 이번 21대 총선에서 (또) 떨어진 한 후보에 불과한데 자신이 투개표 절차의 적합성 여부를 뭘 어떻게 입증한단 것인가. 정작 본인은 선거법도 똑바로 몰라서 공개토론회에서 망신당한 주제에. 당장 포털에 특정 제과회사 이름이 들어간 단어를 검색하면 빵 사진보다 선관위 사진이 더 많은데, 그럼 이준석은 선거과정중 위법적인 행위나 규정위반이 아예 없었다는데에 자신의 삼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걸 수 있겠나. (대신 나는 내 남은 정치생명과 파리바게트 포인트 카드를 걸겠다.)
 
그는 아마 미통당이 무너진 후 자신이 새로운 구심점이 될거란 희망에 가슴이 벌렁벌렁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보수가 무너진 것은 우병우와 김기춘 같은 꼰대들이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닫고 국민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며 계도하려고 들었기 때문인데 이준석이 보이는 태도는 그들과 똑닮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혹시 박근혜 키즈였던 이준석이 명맥이 끊어진 진박의 계보를 잇기 위해 불통 타이틀을 승계하려는 것은 아닐까.
 
NBA에서 Rookie는 데뷔한 해에 훌륭한 성적을 낸 신인에게 주어지는 타이틀이다. 하지만 만년 중고 신인신세를 못 벗어나는데다, 경험도 없고 실적은 더더욱 없으며, 정치철학도 없는데다 유권자들과 맨날 쌈박질까지 벌인다면 그 루키의 미래는 대단히 어둡다. 심지어 이렇게 조언해 줄 측근조차 없다는 것이 그의 암담한 미래를 암시한다. 데뷔에 실패한 많은 루키들이 종종 스포츠 해설자로 전향하던데 혹시 이준석의 재능도 차라리 그쪽에 있지 않을까.
 
 
요새 가장 핫한 빵.JPG
 
 

2020. 5. 10.

주식은 어째서 강한가 (by Paul Krugman)

요새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받는 질문은 "어째서 실물경제는 이렇게 엉망인데 주식은 강한가"일 것이다. 거기에 대해 폴 크루그먼의 짧은 글이 있으니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링크) 이 글의 핵심은 주식시장은 실물경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들에게 다음의 간단한 한가지 사고실험을 해보도록 하자.


1. 우한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인을 모두 죽고 단 한명이 살아남았다고 하자, 그런데 우연히 인류 유일의 생존자가 파웰 연준의장이었다고 가정하자. 이 처참한 비극의 과정에서 연준은 1,524,231번째 양적 완화에 나설 것이고 세계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넘어 무로 돌아가겠지만 S&P500 지수는 0이 되기는 커녕 더 오를수도 있다. 100을 만들지 100,000,000을 만들지 그것은 순전히 파웰의 마음에 달렸다.

2. 사실 당신은 닥터 스트레인저다. 영화와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신이 외과의사가 아니라 기업의 회계사, 혹은 GDP를 산정하는 한국은행의 직원이라는 점이다. 인피니티 스톤을 모두 모은 타노스가 어떤 힘을 발휘해서 지구의 시간을 멈췄다고 한다.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진 당신만은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성실한 당신은 회사로 출근해 2분기 재무제표, 혹은 GDP 통계를 작성하고 있다. 당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경제활동이 멈췄으니, 이번 분기 실적은 전분기 대비 -100%가 될 것이다. 이런 젠장할. 이런 끔찍한 지표는 인류 역사를 넘어 백악기 대멸종이래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활약으로 타노스의 마법이 풀리고 사람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3분기 GDP는 전분기 대비 무한대의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당신을 제외한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1과 2의 복합적 현상과 같다. 세계 주요 경제는 전면적 셧다운에 들어갔지만 아직 죽지 않은 파웰은 공격적인 양적완화를 시행했고 셧다운이 풀리고 나면 닥터스트레인져의 장부 뿐 아니라 많은 국가와 기업의 장부가 그와 비슷해 질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람들이 코로나의 상흔을 기억하리라는 것과, 또 수많은 가계/기업들이 락다운 기간동안의 비용지출로 인해 파산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정부가 각종 구제책을 내놓아 이를 막는다면 위의 사례와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제는 나쁜데 주식시장은 좋다는 아이러니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전제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처참하게 망가진 GDP와 미국의 실업률을 내세우며 왜 주식시장은 하락하지 않냐며 고성을 지르는 것은 수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시 금융은 다 사기야! 라는 자기위안도 당신의 수익률을 개선시키지 않는다.

1973년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즈, 그리고 로버트 머튼은 옵션의 공정가격을 계산할 수 있는 방정식을 정립해서 1997년에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 수식에 따라 산정한 옵션가격은 시장가격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시장을 우습게 알았던 그들이 만든 펀드는 당시 역대 최대규모로 파산했다. 우리는 늘 시장을 앞서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하지만 동시에 시장이 충분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를 인정하고 시장이 무엇을 프라이싱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트레이딩과 투자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보지 말아야할 영화, Big Short

[영화 Big Short에 대한 감상은 과거에 한차례 올린 적이 있으니(링크) 본문을 읽기에 앞서 먼저 읽기를 권한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두가지 카타르시스를 판다. 대중들이 동경하는 월가의 고소득 뱅커들은 사실 인성 빻은 멍청이들이자 사기꾼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똑똑한 당신이라면) 그들의 헛점을 노려 큰 돈을 벌 기회가 수시로 찾아온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싶은 이들은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한다. 그 환상은 무척이나 잘못되어 있으니까.
 
금융권은 매년 대학 졸업자들 중 가장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들을 뽑기 위해 애쓰고 그들중 가장 돈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승진하며, 또 가장 훌륭한 시스템을 가진 회사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애쓴다, 낮에도 그리고 밤에도. 뭐 그러다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다 감방에 가기도 하지만. 그리고 금융시장은 그들중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돈을 몰아준 뒤, 다시 게임을 시작하는 곳이다. 따라서 당신이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다면 시장이 아닌 자신이 바보가 아닌지를 먼저 의심해야 한다. 명심하라, 당신은 천재도 아니고 또 금융시장에 타고난 천재란 없다. 타고난 일중독자만이 있을뿐.

트레이더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의 팀원들이 자신에게 CDS를 매도한 도이치의 세일즈 지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을 불러 항의하는 장면이다. 모기지 시장의 붕괴에 베팅했던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기초자산이 박살나는데 어떻게 MBS의 가격이 오를 수 있냐면서. 지레드는 침착하게 그들에게 이렇게 받아친다. "당신들은 이 시스템이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데에 베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시스템을 믿고 있지 않냐." 사실 MBS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은 은행들의 양심이 불량이어서가 아니라, 당시 연준이 7개월동안 금리를 325bp나 급격하게 인하해서 모든 채권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는 파산위험이 금리하락분을 상쇄해서 가격이 하락하는 것이 맞았겠지만, 부동산시장의 붕괴에 베팅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지 않은가. 그런 은행들이 매기는 시가평가가 하락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애초에 시장이 비합리적라는데에 베팅한 이들이 시가평가가 잘못됐다고 항의하는 것 또한 비합리적인 일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기억해야하는 것은 투자은행의 로비에서도 쫒겨나던 얼치기들이 베팅을 잘해서 수억달러를 버는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시장을 거슬러 베팅하기로 결정한 마크 바움의 팀원들이 실사를 펼치는 장면이다. (그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실제로 수천개의 모기지를 기반으로 한 CDS를 매입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모기지 집 주인들, 부동산 중개업자, 모기지 세일즈, 세입자들을 찾아가 일일히 면담했고 심지어 그들 중 하나인 스트리퍼를 만나기까지 했다. 그는 평생 살면서 자신이 마주칠 일도 없던 사람들을 일일히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조롱을 참아가며 실사를 마친 뒤 베팅에 나섰다. 99대 1의 베팅을 하기 위해서는 남들의 99배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시장에 맞선 베팅기회는 십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인데다 그 기회를 포착하려면 백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머지 시간은 시장에 순응한 이의 몫이다. 지난 한달간 개미들이 세번째로 많이 사들인 종목이 코스피 인버스인데 우리 한국 시장에 마이클 베리와 마크 바움 꿈나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마이클 베리는 비관론이 최고조일 때가 아니라 낙관론이 팽배할 때 시장을 거슬러 베팅했고, 마크 바움은 시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접 자기 발로 뛰어 밝혀낸 뒤 행동에 나섰다. 악재가 터진 뒤 시장이 붕괴한 뒤에 방구석에 앉아 신문기사 몇개 읽고 인버스를 사는 것은 Big Short이 아닌 그저 small gamble일 뿐이다.

2020. 5. 5.

착한 건물주, 못된 정부 그리고 빵구난 지준

착한 시리즈가 유행이다. 우한코로나 때문에 경기가 나빠지자 정부가 앞장서서 임대료를 인하하는 착한 건물주 운동을 선도하더니, 이제는 또 사지도 않은 물건의 대금을 미리 납입하라는 착한 소비자 운동을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정부는 4월 건보료를 예정대로 걷었고 6월 1일 기준으로 부과될 종부세의 공시지가를 십여년만의 최고치로 올렸으며 공기업/공무원들의 임금을 줄이거나 그러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타 경제 주체들에게 착해질 것을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은 반대로 행동하다니. 임대료를 내리는 건물주가 착하다면, 기회를 틈타 세금을 더 올리는 정부는 못된 정부인가.

윤리적으로 무차별한 경제활동에 착하다는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지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걱정해야할 것이 있다. 바로 연달아 빵구나는 지준이다. 지준이란 지급준비금의 약자로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예치해야하는 지급준비금적립액의 적수를 의미한다. 모든 은행은 고객 예금의 일정 부분을 중앙은행에 예치해서 자신들이 고객의 예금인출에 대비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하는데, 간단히 말해 모든 은행은 매달 특정 날짜에 중앙은행에 특정 금액을 예금해야한다. 만약 이를 못 맞추면? 우리 세련된 금융인들은 이를 전문용어로 빵구났다고 하는데 자금부에 오래 계신 분들이라면 이 용어를 듣자마자 문득 조인트가 얼얼해지는, 그런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키는 마술적 단어라고나 할까.

아마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금융시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이 시스템이 어떻게 운용되고 돌아가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지준이 금융시장의 주목을 받은 적이 두번이나 있다. 올해 1월에 사상최대의 지준적수가 대량으로 발생했으며 이어 4월에 다시 한번 빵구가 났다. 상세한 내용을 공개된 자리에 쓰기엔 적절하지 못하지만(과거 경제전망을 맞췄다는 이유로 미네르바를 색출해 기소한 무시무시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길), 아마 각각의 날짜로 기사를 검색해보면 대충의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뒤의 실상은 기사에 설명된 것 보다 더 심각했다고 생각하길. 그러나 그 원인은 분명하다. 정부의 실패. 2020년이 시작한 지 고작 4달밖에 안되었는데 그 중 지준이 빵구난게 벌써 두 달이다. 그리고 두번 모두 정부가 시장에서 대규모로 자금을 환수하거나 지급일정을 바꾸며 벌어진 일이다. 열심히 일하는 기재부/한은 사무관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는 순전히 그들의 잘못이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진 배경은 블로그에 쓸 수 없으니 지인들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시라.

작년 미국에서 9월 그리고 12월에 일어난 대규모 단기자금시장과 비슷한 일이 올해 1월 4월에 한국에서 벌어졌지만, 그 배경은 판이하게 다르다. 정부의 정책실패로 인한 이 지준부족사태는 현재 한국경제에서 벌어지는 일의 축소판이다. 정부는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으며, 정책이 필요한 순간에도 가장 멍청한 방법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빵구난 지준처럼 올해는 세수도 빵구나고 정부보조금도 틀어지는 등 각종 정책이 빵구나는 해가 될 것이지만 관료주의와 정치에 가려, 그 실수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일이 바로 5월의 지준일이다. 또다시 지준이 빵구나는 일도, 또 정부가 못된 짓을 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경제주체들에겐 착하기를 강요하는 것도 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합리적인 나라에 살고 있지 않다.



2020. 4. 26.

제로유가,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

  • 작년 여름의 한 글(링크)에서 언급했듯 모든 기술적 지지선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0이다. 다양한 파생상품을 접해온 사람이라면 유럽의 장기금리가 마이너스를 찍은 마당에 WTI 유가가 마이너스를 가지 말란 법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겠지만, 아니 이해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어떻게 유가가 마이너스를 갈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쉽게 풀어보기로 한다.
  • 모든 재화는 저마다의 활용가치를 지니겠지만 마찬가지로 비용을 발생시킨다. 당장 당신 집앞의 주유소에서 휘발류를 공짜로 나누어준다고 한다면 당신은 집안의 온갖 드럼통과 용기들을 모두 가지고 주유소 앞에 줄을 설 것이다, 당장 쓰지 않을 기름을 모으기 위해서. 하지만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주유소는 기름을 공짜로 뿌리는데 당신의 집안에는 휘발류냄새가 진동을 한다, 흉측한 드럼통때문에 거실에는 당신이 오갈 공간조차 부족하다, 그지경이 되면 얼마간 버텨보던 당신은 기름을 버리러 통을 돌돌 굴려가며 가지고 나간다. 하지만 쓰레기 하역장엔 당신같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주유소 앞에 줄 서있던 사람들은 이제 분리수거장 앞에 다시 줄을 선다. 이제는 휘발류를 처리하는데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그때의 휘발류 가격은 당연 마이너스겠지.
  • 상품의 가격이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다만 당신이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쓸만한 의자와 TV를 버리기 위해선 구청에 과태료를 내야 하며 가끔 신문에선 농민들이 배춧값이 폭락해 밭에 불을 지르고 돼지를 땅에 묻는 것을 보곤 한다. LA에서 오래 산 내 친구는 캘리포니아에선 오렌지가 굴러가도 거지도 집어먹지 않는다는 농담을 던진다. 단지 이번에는 텍사스 유가가 오렌지가 되었을뿐이다.
  •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투자자들은 자신이 투자하는 대상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너무 자책하지마라. 수많은 증권사, 헷지펀드 심지어 레이 달리오조차 그랬으니까.(그는 사실상 자신이 통화속도의 풋옵션을 팔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실수를 두번 저지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정말 유가에 대해 반등의 확신이 있다면 차라리 정유사 주식을 사는 것이 낫다.
  • 지금 이 말은 다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제 인플레이션에 대비해야한다. 수많은 전쟁에서 영웅들은 자신들이 가장 경시하던 위험 때문에 무너지곤 했다. 적어도 금융시장은 그랬다. 선진금융시스템과 시장원리를 과신하던 월가는 바로 그 이유로 파산할 뻔했고,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던 리만직후의 세계는 디플레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리고 현재 우리 모두는 인플레이션을 마치 지난 세기에 멸종된 생명체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 하지만 다음 10년은 인플레이션이 한밤중의 도둑처럼 닥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국 정부는 인플레이션이 닥쳤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을 것이고 그 결과 역대 가장 큰 버블사이클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 그 이유는 다음 셋과 같다. 하나-인플레이션에 대한 걱정을 아예 잊은 각 정부는 우한코로나사태 이후 수요가 회복하기 시작할 때 출구전략을 제때 시행하지 않을 것이고,  둘-2014년에 시작된 상품시장의 베어사이클로 인해 CPI는 실제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것이며 셋-코로나사태로 엄청나게 재정적자를 늘린 각 정부는 실질부채부담을 줄이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허용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유효했던 투자전략이 다음 10년간 통용된 적은 많지 않으며 아마 포스트코로나의 시대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적 생물학

1. 아마 기원전 1만년 전 쯤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했다면(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아주 다른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면) 털도 없고 강한 근력이나 이빨 혹은 날개도 없는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이 행성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의 압도적 성공이 우리의 뛰어난 지능과 이성에 있다고 주장했고, 인류학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 화석들이 대량으로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들은 현생인류보다도 더 늦게 출현했으며 놀랍게도 우리보다 더 강한 근력과 더 큰 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250cc나 더 큰 두뇌를. 이 차이는 우리보다 약 140만년 앞서 탄생한 호모 에렉투스와 현생인류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하지만 우리의 조상은* 보다 힘세고 영리한 네안데르탈인들을 멸종시키고 호모 종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승리자로 남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답은 집단의 규모에 있다. 네안데르탈인이 고작 20-30명의 무리로만 구성된 반면 호모 사피엔스들은 100명 이상의 집단을 구성할 때도 있었고 때때로 다른 무리와 연합하여 그 이상의 규모를 이루기도 했다. (현대 가장 큰 집단인 중국의 인구는 15억 이상이다.) 그러니 아무리 개개인이 뛰어난 네안데르탈인조차도 호모 사피엔스들의 집단 공격을 이겨내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증거는 우리의 행동양식에도 깊이 남아있다. 침팬치와 같은 타 유인원들은 아무리 가까운 친족에게도 결코 자신의 새끼를 맡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과 유전자가 전혀 섞이지 않은 이웃에게도 아이를 맡긴다. 이렇듯 우리의 생존 비결은 바로 집단화, 사회학적인 단어로 사회화에 있었다. 태초부터 사회주의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생존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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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단화를 곧장 사회주의로 연결하는 것이 논리적 비약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 둘은 필연적으로 이어져있다. 대규모의 집단을 이루려면 분업이 필요한데 구성원들끼리 생산물을 공유한다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집단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식량을 찾을 수 있을지 알수 없다면 누군가는 가젤을 잡으러 가고, 누구는 낚시에 나서며, 어떤 이는 과일을 따러 갈 것이다. 해질녘에 돌아온 그들이 모였을 때 실패한 이들에게도 자신의 수확물을 나누어줘야 내가 실패했을때 저들도 나에게 식량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첫 발생부터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면 이런 평등은 후천적 학습이 아닌 우리의 본능에 기인해야 한다.

이는 한 심리학실험으로 입증된 바 있다.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카타리나 하만 박사는 3살짜리 아이들을 둘씩 짝지어 줄을 동시에 잡아당기면 장난감 구슬들을 얻지만 한 쪽에겐 3개, 나머지 한 명에겐 1개씩 불평등하게 배분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실험에 참여한 75%의 아이들은 자신이 받은 구슬 하나를 상대에게 나누어주며 공평하게 2개씩 가졌는데, 이는 교육을 받기 전에도 인간이 협업한 상대에게 생산물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참고로 침팬지들을 같은 실험에서 동료와 획득물을 나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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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같은 방식으로 진화적 종의 경쟁에서 정점에 오른 생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개미. 당신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팬이 아니더라도 개미와 인간에겐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개미와 우리는 기후를 가리지 않고 전 대륙에 퍼져 살고, 둘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그렇다. 개미도 농사를 짓는다), 거대분업으로 생산한 먹이를 나누고, 또 빈번하게 전쟁을 벌이며 영역을 확장해 왔다. 그렇게 인간은 땅 위를 평정했으며 개미는 땅 아래를 정복했으니 이 두 종은 지구를 공평하게 반반씩 나눠가진 셈이다.

한낮 개체로서의 개미 역시 너무나 초라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위풍당당한 하늘소나 사나워보이는 사마귀에 비해 땅바닥에 떨어뜨린 잉크방울 같은 저 조그만한 개미를 보노라면 우리는 종종 그들이 땅 속을 지배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하지만 개미는 인간보다도 먼저 농업과 목축을 시작했으며 훨씬 더 철저한 분업과 계급에 의해 효율적으로 사회를 운영한다. 전쟁이 발생하면 몇몇 인간 전사가 그러하듯, 개미 역시 오로지 자살이 목적인 특공대까지 운용하곤 한다. 인간이 소뇌의 언어처리능력을 발전시켜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이끌어냈다면 개미는 독특한 유전자변형(개미는 수정시 정자에서 받은 유전자의 절반이 없어져 형제끼리는 유전자의 75%를 공유한다. 반면 대부분의 양성생식 동물은 형제끼리 50%만 공유한다.)을 통해 사회주의를 이룩했다. 진화의 과정을 나타내는 생명의 나무에서 인간과 개미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불구하고 동등한 진화적 성공을 이룩한 것을 보면 두 종이 채택한 사회주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진화의 계보를 그린 생명의 나무: 개미와 인간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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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에서는 사회주의와 전체주의를 혼용해서 썼지만 엄밀히 저 둘은 다르다. 아니 사실 대체로 같다. 우리는 전체주의를 표방한 독일과 사회주의의 종주국 소련이 맞붙은 2차세계대전의 기억 때문에 그 둘이 매우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만 이들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일 수 밖에 없다. 개미와 인간에게 성공을 가져온 것을 무엇이라고 명명하든 이는 결코 민주적이지도, 또 자본주의스럽지도 않다. 이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실패가 인간 본성에 반하는 정치시스템 때문이라고 배워온 우리 자유진영 사람들에겐 불쾌하리만큼 낯선 결론을 안겨준다.

어쩌면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비록 사회주의가 현대의 체제경젱에서 우월하지는 않더라도, 인간 본성에 맞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레닌이 연단에 올라서기도 전부터, 또 스탈린이 시베리아에 굴라크를 세우기도 전 부터 수도 없는 사회주의적 실험이 존재했고 또 하나같이 실패했지만, 인류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마치 달콤한 사탕처럼 계속해서 집어먹는다. 인간의 몸이 단짠의 유혹을 거절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은 좀처럼 사회주의를 밀어내지 못한다. 넘어져서 코가 깨지기 전 까지는.

우리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문재인의 사회주의는 이미 엇나가고 있고 때가 되면 대중은 그 부작용을 깨닫고 이명박같은 지도자를 찾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는 여당이 이번 총선에서 200석 이상 가져가며 개헌선을 넘겨 34년만에 헌법이 개정되는 것이었는데, 일단 그 선은 지켰으니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앞으로 정치는 게속해서 시끄러울 것이고 또 대중이 현실을 깨닫기까지 더 많은 사건들이 터지겠지만 이들이 대한민국의 장래에 불가역적인 상흔을 남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가 헌법에 명시된 한은.*** 그래도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좌절에 빠진 이들을 위해  미국의 20세기 소득세율 표를 공유하고자 한다. 미국 뿐 아니라 모든 선진사회는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의 위치에 도달했다. 다행스럽게도 현 정부의 노선이 너무나 멍청하기 때문에, 그의 사회주의는 아래 수준에 이르기 전에 좌초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다들 너무 낙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미국의 최고세율 구간: 1916년 이전과 1925-31년을 제외한다면 1986년 이전 미국의 소득세 최고구간은 상당히 높음  

* 사하라 이남의 인류를 제외하면 우리 모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3-5%정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우리는 그 두 종의 혼혈 후손인 셈이다.
** 개미 외에도 벌이나 흰개미도 있다. 참고로 흰개미는 개미가 아닌 바퀴벌레의 아종.
***하지만 만약 개헌이 된다면 나는 곧장 영주권을 취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