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위안부 피해자 중 가장 많이 대외활동을 하던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 대표 윤미향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촉발된 이 사건은, 그동안 정의연에 지급된 막대한 후원금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에게 지급되기는 커녕, 사적으로 유용되고 심지어 횡령한 혐의까지 있어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공적 자금인 정부의 보조금과 사적 후원금으로 운용되어온 정의연은 마땅히 모든 혐의에 대해 해명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편법/불법 사건이 있었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비판은 결코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개인의 비극을 공공재로 여긴, 전후 한국사회가 겪는 수많은 마찰들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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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요코이야기라는 책을 기억할까. 한때 한국 사회에서, 특히 미주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 아주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이 수필은 11살의 요코가 일본의 패망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도피하는 과정에서 겪은 것을 서술한 자전적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되자 한국인들은 크게 반발했다. 조선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처녀가 조선인에게 강간당하는 이야기,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인들을 조직적으로 찾아내 박해하고 학살하는 이야기 등이 실려있는데 이것이 마치 조선인들을 가해자-일본인을 피해자로 그리고 있어 한국인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분명 역사에서 조선은 피해자고 일제는 가해자였다. 일부 일본 극우사학자를 제외한다면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구도를 개개인에게 투영할 때 논쟁이 발생한다. 집단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피해자라는 사실은 모든 조선인들이 피해자였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고, 또 모든 일본인들은 나쁜 가해자라는 명제로 귀결되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 모든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딱딱 나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가 바로 두 나라의 역사적 감정이 충돌하고, 또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지점이다.
내선일체 운동 아래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에 준하는 권리를 약속했고 그에 따라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평등한 지위를 가지가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우리가 해방 이전 문학이나 2000년대 이전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듯, 악인이 아니더라도 일제 부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수많은 조선인이 존재했다. 특히 1910년 이후 출생한 조선인들은 태어날 때 부터 일본인으로 나고 자랐으니 그들에게 있어 국가에 대한 충성은 일본제국을 의미했고, 상당수는 자신이 배운 그대로를 따랐다. 하지만 해방이 찾아오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듯 독립운동가가 되었으며 그런 기만은 시간이 지나며 역사적 사실로 둔갑했다.(링크) 그렇게 모든 조선인들은 피해자로 둔갑했다. 그와 함께 조선인이 가해자였던 기억들 역시 삭제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교과서에서 1927년 화교배척운동이나 평양화교학살사건, 그리고 전후 미군정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정된 조선인들의 기록은 모두 지워졌다. 아마 역사에 특별히 흥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위의 사건들은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일 것이다. 만약 평양에서 학살된 중국인의 후예나 태평양전쟁시 필리핀의 조선족 군무원들이나 군인에게 학대를 당한 연합군 병사들의 후손이 우리에게 너희의 교과서는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까. 조선은 피해자니 조선인들에 의한 가해의 역사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이처럼 개인의 역사를 모두 뭉뚱그려 민족의 역사로 해석한다면 요코의 비극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본인이니까. 설령 강간을 당하고 목숨을 빼앗겨도 쇼비니즘에 빠진 한국인들의 국민감정 앞에 그녀는 절대 희생자들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이처럼 개인을 부정하고 민족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 태도야말로 우리가 혐오하고 경멸하는 바로 일본 극우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닮아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들이 피해자의 증언을 부정하는 방법까지도 똑같다. 한국의 많은 시민단체들은 작가 가와시마 요코가 11살 무렵이던 60년 전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그 증언에 세부적인 오류가 있다는 점-당시에는 인민군이 조직되기 전이었고, 요코가 증언한 대나무 숲이 함흥 일대에는 자생하기 어렵다는 등을 지적하며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단편적인 기억의 오류를 빌미로 핵심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의 극우세력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트집잡아 부정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피해자를 규정하는 것은 국적이 아니지 않은가. 요코와 위안부 모두 똑같은 전쟁 피해자고 그 사실은 현해탄의 어느 편에서든 바뀌지 않는다.
이런 쇼비니즘적 사고는 타 집단의 희생자들 뿐 아니라 우리편에게도 비극을 안긴다. 사람들이 정의연에 분노하는 이유는 마땅히 소수의 사람들과 단체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을 마치 자기것인 양 남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우리 역시 정의연과 비슷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2015년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는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포괄적인 배상이 아니라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안이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그녀들이 결정할 문제였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그녀들에게 묻기도 전에 반대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윤미향이 이끄는 정의연은 그 돈을 받으면 창녀가 되는 셈이라며 피해자들을 회유했다. 결과적으로 위안부 생존 희생자들 47명 중 절대 다수인 36명이 차후 지원사업을 받아들였던 것과는 반대로 국민의 66.7%는 위안부 협상을 반대했고 이 사건은 한일관계뿐 아니라 실제 피해자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당시 많은 피해자들은 생활고를 겪고 있었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87세나 되었는데 그러면 도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불과 5년이 지난 지금 27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고작 20명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애초에 원고는 47명의 위안부였고 피고는 일본정부였던 재판에서 일제시대를 겪지도 않은 국민 대다수가 갑자기 방청객의 자리에서 원고석으로 난입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실제 피해자들은 조연으로 밀려났다. 이처럼 그들의 비극을 공공재로 삼아 사유화 한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당사자들과 협의 없이 일본과의 협상에 나선 박근혜 행정부나 정의연, 그리고 일반 국민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모든 태도는 전체주의적 사고로부터 비롯되었다. 개인과 전체를 분리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비극을 진영으로 판단하며 개인의 비극을 공유하는 쇼비니즘적인 태도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갈등의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책 요코이야기를 태우던 개량한복을 입은 민족주의자와 이마에 욱일기를 두르고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의 극우가 만났다고 하자, 그 둘이 합의에 이르는 길은 어느 한 쪽의 죽음 뿐이다. 과연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과거사가 매듭되는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한일 양국에서 누군가는 희생자의 아픔을 사유화하는 것을 넘어 상업화했고 그런 비극은 좋은 비즈니스가 되었다. 정의연이 지난 4년간 거두어들인 기부금 수입은 50억에 육박하는데 이는 국내 프로야구 연봉순위 5위인 SK 이재원 선수의 지난 4년간 수입보다도 많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이용수 할머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민족적 문제로 여겼고 정의연은 단순히 아군이라는 이유로 모든 면죄부를 받아왔다. 아니고서야 어떻게 30여 년간 회계장부를 저렇게 엉망으로 작성했는데도 단 한번의 지적없이 그 대표가 국회의원까지 되었겠는가.
요코이야기를 쓴 작가 가와시마 요코는 1933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고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같은 땅에서 같은 시기에 태어난 두 소녀의 삶은 B52 폭격기의 굉음과 덴노헤이카라는 외침이 뒤섞이기 시작하며 함께 망가지기 시작했고 전쟁의 시대는 그녀들에게 반백년이 지나도 씻어낼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서로를 죽였고 탱크에 짓이겨지고 포격에 불타버린 수천만 구의 주검 앞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아픔을 술회하는 것은 흰 쌀밥에 고깃국과 함께 하나의 사치가 되었다. 매일 밤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그네들을 겁탈한 것이 몇 천 번 즈음 되었을까. 생의 마지막 장에서 죽음을 마주한 그들이 악몽의 기억들을 어렵사리 꺼냈을 때 그녀들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외치는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그 두 소녀들 사이에서, 어떤 이는 누구의 아픔이 더 큰지를 따졌고, 어떤 이는 편가르기에 나섰으며 어떤 이는 그녀들을 내세워 큰 돈을 벌었다. 그녀들은 아직도 민족과 국가 앞에 개인이 지워지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비극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