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17.

ZER0

 
 

  • 세상에 0보다 더 강력한 지지선은 없다. 그리고 지난 48시간의 금융시장은 영의 위대함을 깨부수는 충격에 시달렸다. 미국채 금리의 3m vs 30yr 스프레드는 0을 깨고 마이너스로 돌입했으며 유로 스왑금리는 전 테너가 0 아래를 찍었다. 그 여파로 미국 주식시장은 3% 폭락했으며 한국이 광복절을 기념하는 동안 세계 금융시장은 광기와 복통에 절어야 했다.
  • 인도에서 발명된 이 0은 단순히 zero를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십진법의 자리수를 구분하여 금융 전반의 발전에 기여했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복식부기와 회계학, 재무제표는 모두 영의 부산물일 뿐이다. 와닿지 않는다면 USD 40,101+USD 170,010을 각기 로마숫자, 한자, 한글로 기입해서 계산해보라.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 금융시장의 발전은 0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었다.
  • 이성의 화신인 고대 그리스 수학자들에게도 0은 특별한 숫자이다. 수 체계의 첫번째 구분은 자연수로부터 시작되며, 용어 그대로 0은 수의 세계에서 natural과 unnatural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중학교 수학에도 등장하는 피타고라스의 학파는 우주의 모든 사물은 자연수의 특성에 기인하고 있으며 1부터 10까지의 각 수는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학문을 넘어 종교의 영역에까지 도달했고, 피타고라스의 후예들은 자연수의 영역을 벗어난 무리수 √2를 최초로 발견한 동료 히파수스를 강물에 던져 죽이고야 말았다.
  • 굳이 피타고라스 학파가 아니더라도, 순수하게 수학적으로도 0은 신비의 영역이다. 수학적으로 무한의 정의는 1/n에서 n을 극한으로 0에 가깝게 만들때의 값을 의미한다. 즉 0은 가장 작은 숫자임과 동시에 가장 커다란 수의 어머니가 된다. 성경의 "나는 곧 알파요 오메가이니"라는 구절처럼 0은 곧 ∞요, infinite은 곧 zero다.
  • 이렇듯 모든 숫자 중에서 깊이와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은 오로지 0 뿐이지만 애달프게도 이는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정보는 지식이 아니며 지식은 지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금융인들은 정보와 지식을 지혜라고 생각한다. 아니, 자본이 곧 지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가난이 선을 의미하지 않듯 부자는 현자가 아니며 우리는 그저 무한대의 데이터 속에서 황금을 캐내려하는 일개 연금술사에 불과하다. 가진 재주라고는 그저 0으로부터 달아나는 것 밖에 없는.
paint by Saul Steinberg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