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두방의 원자폭탄이 일본의 항복을 가져왔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소련이 만주에서 관동군을 붕괴시켰던 사건이었다. 중국을 무너뜨리기도 전에 소련을 상대해야했던 일본 군부는 주력이 서쪽에 가 있던 소련이 당장 만주를 침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만주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넓었던 터라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방어한다면 소련이 침공하더라도 지연전을 펼칠 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독일의 전격전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소련은 6년간 약 3000만 명의 인명피해를 낸 끝에 그들의 전략을 완벽하게 숙지했고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이제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극동에서 피로 익힌 소비에트식 전격전을 펼칠 준비를 끝마쳤다. 1945년 8월 9일 스탈린의 군대는 일본의 방어선을 넘기 시작했으며 단 일주일 만에 일본 육군의 최정예 주력인 관동군 약 90만 명 중 60만 명을 포로로 잡으며 만주 방어선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만주의 북쪽에서 황해까지 거리는 연합군이 상륙한 노르망디서부터 소련이 진격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만큼이너 먼 거리였는데 소련이 조선의 청진시에 진입한 것이 작전 시작 후 단 5일차인 8월 13일이니 이 전격전의 파괴력을 가늠할 수 있었으리라.
반면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 위해 수십 발의 핵 투하와 최대 6백만 명의 병력 동원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소련이 일주일 만에 관동의 주력 병력을 분쇄하자 크게 놀라 종전과는 반대로 소련의 남진을 막으려 했다. 미국은 소련에게 38도를 기점으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자고 제안했고, 마음만 먹으면 남부지역까지 점령할 수 있었던 소련은 한발 양보하여 미군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분단의 역사가 시작된다.
한반도 북쪽의 지배권을 확립한 소련은 크렘닌의 지령을 충실히 따르는 괴뢰 공산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새 정부는 누가 이끌것인가? 소련이 원하는 북조선의 새 수장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보이지 않기 위해 완전한 조선사람이어야 했다. 처음에는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이면서 소련군에서 3년간 복무한 김일성이 낙점되었지만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자 이윽고 조선공산당의 당수 박헌영의 막강한 영향력을 깨닫게 된다. 소련의 점령지역은 38선 이북에 그쳤지만, 당시 한반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선전의 각축장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소련은 한반도 전체의 조선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명망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고 이 부분에서는 국내파의 거두 박헌영이 김일성보다 더 나은 후보였다. 두 선택지 중에서 갈등하던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 모두를 크렘닌으로 불러 면접을 치르게 된다.
1946년 7월 신생공화국의 지도자를 뽑는 면접이 시작됐다. 이는 단순히 김일성 vs 박헌영의 대결이 아니라 해외파(빨치산파, 소련파)와 남로당파의 대결이었기도 하고 더 나아가 KGB의 전신 NKVD와 소련외무성의 알력 다툼이기도 했다. 군부와 NKVD는 소련군 88여단에서 복무했던 김일성을 선호했고 외무부는 한반도 점령전 자신의 소식통이었던 박헌영을 지지했다. 박헌영은 명문가 출신에다 레닌대학교를 졸업한 자존심이 강한 엘리트였던 반면(아마 그래서 같은 지식층 출신인 소련 외무부 인사들이 그를 선호했으리라) 대다수의 빨치산파들이 그랬듯 김일성은 중학교를 자퇴한 뒤 마적으로 활동한 적도 있는 하층민이었다. 하지만 거친 개싸움을 거친 밑바닥 출신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뛰어난 생존본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게다가 박헌영이 젠체하는 소련의 지식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데에 비해 김일성은 군화발의 폭력과 욕설 그리고 살인이 난무하는 소련군 출신 아닌가. 트로츠키면 몰라도 스탈린과 당시 2인자였던 베리아는 후자에 더 가까운 인간들이었다.
결국 크렘닌은 민족주의자 성향을 숨기지 못한 박헌영 대신 김일성을 선택했고 그가 새로운 북조선인민공화국의 수장이 된다.(비슷한 시기 미국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이승만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선 내 영향력이 워낙 막강했던 터라 김일성조차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6.25전쟁의 승인을 구하는 과정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이후 중공의 군사적 지원을 구하는 공식요청서류에도 그 둘은 나란히 서명했다. 하지만 그 둘의 협력은 지속될 수 없었다. 둘은 너무도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두 지도자가 공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가. 1950년 11월 압록강 연안에 설치된 임시 소련대사관에서 열린 볼세비키 혁명 기념행사에서 만취한 그 둘은 크게 충돌하여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잉크병을 집어던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갈등이 표면화되고 나서도 둘의 불안한 공동체제는 한동안 지속된다. 하지만 권력이란 시소와 같아서 균형이 무너지고 나면 곧 걷잡을 수 없이 기운다. 그리고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시점에서 남로당의 당수인 박헌영의 값어치도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결국 1953년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기 직전 그는 미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가혹한 고문 끝에 그는 자신의 혐의를 억지로 인정했지만 재판장에서 그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 "그렇다"라고 인정하지 않고 "그렇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의 지지자들이 많았던 터라 중국공산당과 심지어 소련 조차 그의 처형에 반대하며 여러 경로로 구명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스탈린의 사후 소련뿐 아니라 공산권의 정치 지형이 크게 변하며 북한 내부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축출기도가 터지자 김일성은 두 공산주의 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을 처형한다.
박헌영이 진짜 미국의 스파이였을리는 없다. 그것은 명목상의 핑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데다 무식한 하층민 출신인 김일성에게 복종했다면 숙청을 피할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 군부에 줄을 잘 섰다는 것과 몇몇 소규모 항일전투를 치뤘다는 명성 외에는 별 영향력이 없던 김일성은 옌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갑산파와 연합한 정부를 세운다. 한국전쟁 이후 남로당파를 숙청한 이후, 김일성은 소련파, 연안파를 숙청했다. 심지어 갑산파는 김일성의 빨치산파의 방계나 다름없는 계파였는데도 불구하고 1967년 북한의 경제체제가 위기를 맞자 숙청된다. 분단과 동시에 영향력을 잃어버린 남로당계의 박헌영 역시 그 숙청의 역사에서 AK47의 총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1956년 박헌영이 마주한 죽음은 이미 그가 1946년 7월에 스탈린의 사무실을 나오며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렘닌 궁을 나서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인생에서 모스크바는 그때가 두번째로, 그는 1929년 겨울서부터 1931년 10월까지 약 2년여간 국제레닌대학교를 다니며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그시절부터 1946년까지 모스크바 서쪽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크렘닌 주변과 붉은 광장은 아마 예전 그대로였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심장에서, 공산주의의 지도자 레닌의 이름을 딴 대학에서 수학하던 한 청년은 이제 조선노동당의 영수가 되어 스탈린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갔다. 크렘닌 특유의 무거운 공기. 불안한 정적. 그리고 그를 꿰뚫고 울려퍼지는, 군화발이 대리석을 때리는 그 특유의 소리. 이윽고 문이 열리고 강철동지 스탈린의 차가운 미소가 책상 건너에서 그를 반겼으리라. 잠시 후 면접을 마친 그는 지친 얼굴로 크렘닌 궁을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공항으로 향하기 전에 잠시 자신이 자주 찾던 카페와 식당, 그리고 친숙한 거리들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붉은 광장 앞 한 벽돌건물의 벽에 기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는 모스크바에서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들을 추억했을 것이다. 같이 국제레닌대학교에서 수학하던 조선인 동지들-그 사이의 사랑과 배신, 호치민을 비롯한 동양인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의 지령을 받아 상하이로 떠나며 생이별한 자신의 첫 딸-사랑하는 비비안나. 그리운 이름들과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는 1930년의 봄을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이윽고 담배를 비벼 끄고 그는 무거운 얼굴로 돌아서서 격동하던 조국의 두번째 전선으로 향했다. 한쪽 어깨에 예정된 죽음을 얹고서.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재밌게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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