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12.

평등을 외치는 돼지들, 그리고 안보타령을 읇는 얌체들

Global Rich List의 분석에 따르면 연봉이 3500만원이 넘는 사람은 지구상 70억 인구 중에서 상위 1%에 해당된다.(링크)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3,480만원)은 이미 이 수준을 넘어서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다수는 전세계 기준으로 최상위권이다. 만약 UN이 인류의 평등을 위해 지구상 상위권에 해당하는 한국인들에게 40%의 소득세를 걷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다면, 지금 평등을 외치는 한국인들은 그때도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펼치며 기꺼이 본 적도 없는 이들을 위해 소득을 바칠까? 아마도 그 날이 오면 그들은 현재 강남 주민들이 외치는 것과 똑같은 주장을 펼칠 것이다. 상위 1%의 배부른 돼지는 더 배부르기 위해 평등이란 가치를 도둑질해 정의의 용사 흉내를 낸다.

국경일이 되면 압구정 단지에는 태극기가 자동으로 걸리고 아파트 옆면에 프로젝션으로 대형 태극기 영상을 투사한다. 강남은 자칭 "안보 1번지"라고 주장하지만 이중국적자나 병역기피자 비율을 보면 아마 이 곳이 전국에서 1위일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휴전선에서 가까운 파주나 국방부가 있는 용산 사람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안전한 한강 이남의 강남구가 왜 허구한 날 안보타령을 읇는가? 정 걱정되면 군대라도 가고 반포 한강공원에 사드를 배치해달라고 청원운동이나 할 것이지. 이렇게 말과 행동이 어마어마하게 다른데 어떻게 그 이면에 안보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겠나.

우리는 돼지가 얌체들 보고 탐욕스럽다고 욕하고, 얌체가 돼지들보고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하는 촌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 처럼, 이를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눈에는 희극이지만 직접 겪는 우리들에겐 서글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아멘.

2017. 10. 30.

서민 정치인들과 진짜 서민.

  •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다주택자들을 향해 "집을 파시라"라며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알고보니 본인이 2주택자임이 들어났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나머지 한 채는 은퇴용으로 쓰려고 마련한 것으로 투기목적이 아니라고 답했다.
  • 이기성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8채의 주택을 보유해 공직자 중 1위를 차지했다는 비난에 대해, "모두 합해도 강남의 집 한채값도 안된다"고 해명했다.
  • 중기부 장관에 내정된 홍종학 후보자는 장모에게 압구정 집과 빌딩을 상속받고, 부인이 딸에게 편법으로 재산을 상속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는 홍 후보자가 이제껏 강력하게 비판해 온 부의 대물림의 전형적 사례라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부가 죄악이요 가난이 정의가 아니니 이들이 가진 재산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저들의 지지자들이 당황한 까닭은 알고보니 그들이 나와 다른 계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껏 나와 출신이 비슷한 줄 알고 밀어줬는데, 그가 물고 있던 수저는 내 것과는 색이 달랐다. 아뿔싸. 내 것 같은 똥색인줄 알았더니 똥 닮은 금색이로구나, 속았다.  속은 서민 지지자들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목청을 높인다. 아니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놈의 쉐끼들. 싸늘해 진 지지자들의 여론을 마주하는 당사자들은 더욱 당황한다. 동지들 왜 이러오, 나 서민이오. 서민이 맞소. 이 자중지란을 두고 보수 일간지는 낄낄대며 조롱한다. 이 촌극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흥미롭게도 저 셋은 모두 강남에 연관되어 있다. 김현미는 강남 재건축을 콕 집어 지적하며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고 이기성은 자신의 재산목록을 다 합쳐도 강남의 아파트 하나 만 못하다며 면죄부를 얻으려 했다. 홍종학은 평생 부의 세습을 반대하다가, 장모가 압구정 아파트를 준다니 덥썩 받았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서민의 선이 어디에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바로 한남대교와 영동대교 사이의 한강, 한마디로 강남.

2016년 기준 강남구의 인구는 약 56만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수준에 불과하다. 서초구나 송파구를 포함해도 총 인구의 3%밖에 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늘상 사회 지도층들만 만나고 다니는 진보 정치인들은 강남3구를 제외한 나머지가 죄다 서민이라고 믿지만, 이 기준은 "진짜 서민"들의 눈높이와는 너무 다르다. 부의 피라미드에서 서민편 정치인들의 위치가 실제로 어딘지 그 좌표가 노출되자, 진짜 서민들은 그들이 결코 자신과 같은 층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네들이 어디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서민들은 고개를 수직으로 꺾어 저 피라미드의 끝을 쳐다봐야 했고 실상 그 곳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욕하던 적폐 상류층(혹은 상류 적폐층)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동네서 껌좀 씹는다는 날라리가 우연히 독서실에서 자칭 학교 일진이라는 애를 만나 친해져서 담배 피고 미팅도 하고 수업도 째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걔가 한성과학고 일진이라 나중에 연세대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런 기분일까. 현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껌 씹던 날라리는 어금니 꽉 깨물고 그 과학고 일진을 줘패러 간다. 여론도 마찬가지다. 진짜 서민들은 자칭 서민 정치인들을 패러 간다. 아니 패지는 못하니 뒤돌아서 인터넷에 악플을 단다. 과학고 학생이나 서민 정치인들이 뭘 잘못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편인 척 하며 내 호의를 넙죽넙죽 받아 처먹은 것이 분하고 고까운 것이다. 가재는 게편이랬더니 개가 게 행사를 했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지 언제 똥색이라 했느냐.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듯 예전의 지지율은 곧 악플로 돌변했다.

애초에 이 사단은 사람들을 부자와 서민으로 양분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심지어 수능에서도 1등과 꼴등 사이에 공식 등급이 9개나 있는데 하물며 사회계층이 두개 뿐이랴. 농촌 영농인 입장에선 도시 아파트 산다고 으스대는 것들이 상류층이고, 지방도시 사는 사람은 광역시 사는 사람을 질시하며, 광역시 주민들은 수도권 사람들을 기득권층으로 본다. 소주, 석고분진, 땀냄새 등 서민 내음 풀풀 풍기는 지옥철 1호선을 타고 퇴근하는 수도권 사람들은 관악산 넘어가기 전에 내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위화감을 느끼지만 내린 이들은 또 외제차로 출퇴근 한다는 동기들을 떠올리며 짜증을 낸다. 이러한 계급 나누기는 마치 프렉탈 구조처럼 나누고 나누고 나누어도 계속 반복된다. 심지어 재벌모임에서도 급이 나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부자와 서민이라는 구도는 소규모 모임이라면 몰라도, 나라 차원에서는 존재 할 수 없는 그림이다. 게다가 애초에 "서민 정치인"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정치인이 될 정도로 잘 배우고 잘 먹고 힘있는 이를 "서민"으로 내려다 볼 사람은 평창동이나 한남동의 3층짜리 단독 주택에 살며 더 잘 배우고 더 잘먹고 더 힘센 극소수 사람들 뿐이고 그들은 대개 서민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정치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을 서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여. 자신을 서민이라고 포장하는 정치인들에게 속지 말지어다. 그들이 닳아 헤진 구두를 신고 나오든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니든 그들이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그네들을 알 정도로 유명하고 힘 있는 사람이라면 명절 때마다 구두와 가방과 최고급 한우 세트와 에르메스 넥타이를 갖다 바치려고 대기표를 뽑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빈티난다고 좋다고 지지하지 말고, 뭐 꼭 지지할거면 빈티가 알고보니 빈티지였다고 해서 빡쳐서 악플달지도 마라. 그들은 애초에 당신과 같은 리그에 있지도, 당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도 않았다. 빈부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졌을때가 참여정부 시절 아니었던가.

2017. 10. 13.

찐따들을 위한 전시작전권 이전 논쟁 정리: 불가

지난 국군의 날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전시작전권을 조기 이전하겠다고 밝히며 안보 불안에 불을 지폈다. 우리가 전혀 준비도 안된 상황에서, 더욱이 북한 이슈가 자신의 지지율을 갉아먹는데 저런 발언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작전권을 환수해야 북한이 우리를 더욱 두려워 한다."라니.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 미군과 같이 싸우는 것 보다 독자적으로 싸우는 걸 더 무서워할거라는 이 기괴한 발상은 이토 준지의 만화 만큼이나 괴기스럽다. 혹시 살바도르 달리가 미술에서,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가 문학에서 초현실주의를 구현한 것 처럼 문재인 대통령도 정치에서 초현실주의를 시도하는 것인가.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 일상의 삶은 그의 환상과 매우 다르며 국방은 절대로 초현실적 문제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Q1. 작전권은 어떤식으로 행사할 수 있나?

전쟁시 작전권을 행사하는 문제에는 세가지 방안이 있다. 첫째, 한미가 각각의 군대를 지휘. 둘째, 한국이 한미 양 군을 지휘. 셋째, 미국이 한미 앙 군을 지휘. 먼저 첫번째 방안, 즉 하나의 적과 싸우는 두개의 군대가 따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대단히 비효율적이다. 일례로 1차세계대전 당시 연합한 영국과 프랑스의 GDP는 독일의 거의 2배였지만 각자가 별도로 작전을 펼치는 비효율성 때문에 종전 직전 까지도 프랑스 영토에서 독일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 중에도 자존심 경쟁을 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수백만명의 목숨을 잃고 나자 전쟁 말기에 연합사령부 창설에 합의할 정도로 지휘권 통합은 중요한 문제다. 두번째, 한국이 한미 양 군을 통제하는 방안은 아예 불가능하다. 미국의 자존심이 허용해주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군은 전쟁시 한반도에 전개될 핵심 전략무기를 운용할 능력이 없다. 최고 지휘권자가 가장 중요한 전략자원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작전지시를 내리겠는가? 2번 역시 불가능한 대안이다. 결국 방안은 3번밖에 없다.

Q2. 전시작전권 환수는 주권의 문제다?

현재 합의에 따르면 유사시 한미 양국은 연합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연합 사령부에 양 군의 지휘를 위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모든 한국군이 연합사의 지휘를 받는 것도 아니고 후방을 담당하는 제 2군, 특수전사령부 그리고 수도방위사령부는 제외된다. 게다가 전쟁이 발발해서 연합사가 국군을 지휘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실질적 통제권을 잃는다고 보기도 어렵다. 6.25 당시 이승만이 총참모장 정일권에게 국군이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할 것을 지시하자, 유엔군의 직접 통제를 받는 상황에서도 제 2군단은 전선을 이탈, 방향을 틀어 평양으로 진격했다. 이 외에도 12.12 사태 당시 노태우가 전방 사단을 빼내는 등, 미군의 지휘권을 무시하고 한국군이 멋대로 지휘권을 행사한 사례는 드물지 않다. 현 시스템 이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군사통제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백면서생들의 기우에 불과하다.

Q3. 우리는 작전권을 가져올 준비가 되었나?

아니다, 현재 각종 전략무기와 방위시스템을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이 직접 도입하려면 예산의 약 3%에 달하는 국방비 지출이 두배로 늘어나야하는데 이는 순수 복지예산을 전부 삭감해야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이다. 게다가 이는 북한을 상대하는 상황만을 상정한 것이며 잠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견제할 군사력을 확보해야한다면 그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북한은 남한보다 인구는 1/2, 총생산은 1/48에 불과하다. 따라서 같은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의 남성은 군 복무 기간이 무려 10년에 달하는 데다, 여자도 5년간 군복무를 해야한다. 중국의 총생산은 남한의 10배고 일본은 3배이며 인구로는 중국이 남한의 28배, 일본이 2.4배다. 미군을 뺀다면 이제 우리가 북한의 처지로 전락할 차례다. 당신은 그럴 준비가 되었는가.

Q4. 작전권 환수가 동북아시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은?

이건 교복마이 깃 세운 중딩의 가오잡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주요국 남한의 군사작전권 독립은 당연히 주변 국가에게 영향을 주는데, 특히 일본의 평화 헌법 개정과 사실상 맞물려 있는 문제다. "주권국가" 일본이 군대를 보유 못하는 헌법을 유지하는건 미군이 공산국가 중러로부터 지켜주고, 자유진영 한국과는 사이가 나쁘지만 그 군대를 미군이 지휘하는 형식이라 가능했던것이다. 실제로 미국 입장에서 한국 전작권 이양 협상과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허용은 같은 맥락에서 이뤄져 왔다. 우물안 개구리로 국내뉴스밖에 안보는 사람들은 절대 몰랐겠지만. 또 일본은 전범국가라 그런 것이고 우리는 자주국가라 전작권을 가져와야한단 도덕책 낭독하는 골빈소리도 집어치워라. 애초에 세상이 도덕책처럼 안되니 군대를 보유하는 것 아닌가. 일본이 재무장한다고 해서 남한이 할수 있는게 뭐 있나?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이고 안되는 일은 안되는 일이지 구한말 고종 수준의 국제정세 인식 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갈 순 없다.

Q4. 왜 전쟁부터 할 생각을 하나? 평화를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하자.

간첩 신고는 111.

유아와 성인을 구분하는 차이 중 하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할수 있는 것을 구별하는데 있다. 대한민국 국민 중 누가 전작권도 가져오고 스텔스 전투기도 200대 쯤 도입하고 항공모함을 건조해 북한과 일본을 혼내주고 중국에게 큰소리 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PC 게임용 판타지와 우리가 두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매우 다르다.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명분만 따지는 논쟁은 그저 소모적인 파티에 불과하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얼굴 앞에 인의예지를 따지던 정묘호란때의 척화파와 구한말 선비들이 겹쳐 보인다. 내년 쯤 이 멍청이들은 미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지 않으니 우리도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지 말자고 주장하지 않을까. 화이팅.

2017. 10. 5.

미래를 예언한 영화들 1부 킹스맨과 브렉시트

대중의 영화취향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정치적 선택을 가늠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영화에 기대하는 바와 정치에 기대하는 것이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억압된 욕망을 해소시켜주며 돈을 끌어모으는 영화의 흥행방식은, 정치인들이 표를 끌어모으는 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 게다가 정치와 영화는 타겟층마저 똑같다. 누구나 극장에 갈 수 있듯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영국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이 영화, 킹스맨은 브렉시트의 전주곡이었다. 이제 그 노래를 다시 풀어보자.
맨 오른쪽이 평민 출신 주인공 에그시
영화는 잉글랜드 서민층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주인공 에그시는 영국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한 슬럼가 출신인데, 심지어 거기서도 골목대장 출신이나 범죄자 꿈나무도 아닌 그냥 찐따 똘마니로 나온다. 동네 깡패들에게 맞고. 엄마 남친 깡패 대장한테도 맞고. 맨날 맞는다. 그렇게 헬조선의 쌍팔년도 이등병처럼 쳐맞는게 일과였던 주인공은 갑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어쩌다 뭐 비밀 조직에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금수저 도련님들을 만나지만 그들을 모두 제치고 구원자가 되어 폼나게 정장도 입고 스웨덴 공주한테 찐한 섹드립도 날리는, 출세한 개룡남에 등극한다. 이제까지의 스파이 첩보 액션영화가 영국의 젠틀한 젠틀맨들이나 피지컬이 우수한 몸짱들의 손에 이끌려왔다면, 킹스맨의 줄거리는 신박하게도 브리티쉬 찐따가 이끌어간다.(아메리칸 찐따가 주인공인 액션을 보고 싶다면 원티드를 보시라.) 잉글랜드 중하류충의 카타르시스는 마지막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서민들이 죽어가는데 자기들끼리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한손에 샴페인 잔을 든 고오급 상류층 사람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차례차례 펑펑 터지는 그 장면을 보며, 참수된 귀족들의 머리를 들고 환호하는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리는 일이 어렵진 않으리라.

이 대한민국 아침드라마 급의 신분상승 스토리는 스케일을 키워 국제적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이 영화의 셀링포인트다. 현실 국제무대에서 영국이 주연에서 쫒겨난 지 수십년이 지났는데 영화에선 인류를 구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뭐 이정도의 국뽕가지고 뭘,이라고 넘기기엔 미국인 악당에 묘사가 너무 적나라하다. 발렌타인 박사는 혀가 짧아 발음도 이상한 영어를 구사하는데다, 손님에게 정찬으로 맥도날드 감자튀김을 내 놓는 경박스러움 까지 갖췄다. 이 모두는 영국인들이 평소에 미국인들을 조롱할 때 쓰는 전형적 클리세들 아닌가. 이 잉글랜드의 아메리칸 까기는 교회 액션 신에서 절정을 이룬다. 미국 교회는 종교적 관용도 없고 유색인종, 성적 소수자를 다 사탄의 아들로 싸잡아 비난하는 광신도 집단으로 나온다. 그 미국인들은 발렌타인 박사의 조종으로 미치기 전에 이미 반쯤 미쳐있다. 감독이 왜 이 액션 신을 쇼핑몰이나 극장, 혹은 학교가 아니라 교회로 잡았는지 생각해 보시라. 스크린 저 너머로 영국인 감독이 미국인들을 향해 내미는 중지가 비치지 않는가.

결국 킹스맨은 앞서 말한대로 영국 중산층이 상류층에게, 그리고 미국인에게 느꼈던 컴플렉스를 적나라하게 해소하는 신분상승 판타지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사람들이 바로 브렉시트를 주도한 계층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투표함의 개표가 끝났을 때 영국인들은(그리고 전 세계인들은) 이 투표는 영국을 반으로 가른 계급투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United Kingdum의 사실상 비주류에 속하는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중절모를 쓰고 거들먹거리길 좋아하는 런던의 잘난 젠틀맨들은 브렉시트에 반대한 반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잉글랜드 서민들은 영국이 EU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왜 그들은 영화속 에그시에게 열광하며 EU탈퇴를 주장했을까?

브렉시트 투표의 결과-노란색: 반대/파란색: 찬성
그 답은 영화 안에 있다. 영화 속에 간간히 비치는 몰락한 공장지대가 암시하듯 영국의 산업경쟁력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금융과 같은 서비스업종이 메웠다. 영국이 21세기에 주력으로 삼은 이 신 사업에 자기자리 한켠을 차지하는 것은 고학력자 상류층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었으며 수많은 고졸 에그시들은 고향의 작은 펍에 앉아 낮에는 공을 차고 밤에는 펍에 모여 에일 잔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는 것으로 분노를 해소해야 했다. 청년 실업률이 20%에 이르고 세계 GDP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반세기만에 반토막나자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내려갔으며 이윽고 그들의 불만이 수면 위로 등장하게 된다. 성난 그들은 신분상승 포르노, 킹스맨을 보며 열광적으로 자위하는 동시에 현실세계에서 "강한영국"이 재건되길 원한다. 솔직히 그들은 브렉시트를 통해 어떻게 강한 영국이 되는지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브렉시트를 추종하던 정치인들이 EU에서 탈퇴하면 영국이 더 부강해진다고 주장했으니 찬성표를 던진 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관객이 킹스맨을 보고 나에게 저런 일이 일어날 확률을 계산한 뒤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듯, 대중도 브렉시트가 정말 좋은 것인지 생각하고 투표한 것이 아니다. 다만 막연하게 영국이 EU의 규제와 법령에 얽매이는게 싫다는 자존심 투표를 한 것이다. (그래서 투표 다음날, uk google의 최다검색어는 "what's brexit?"가 됐다) 전세계는 이를 두고 영국인들을 조롱했지만, 그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투표 저변의 심리를 깨달아야 한다.

킹스맨이 제공한 카타르시스, 그리고 무기력한 영국에 대한 대중의 분노. 이 둘의 뿌리는 맞닿아있었으니, 이는 바로 꺾인 잉글랜드의 욕망이요, 침전하는 중하류층의 꿈이었다. 전세계인은 영화를 보며 머리가 터지는 불꽃놀이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왜 첩보 액션영화의 주인공이 제임스 본드에서 깡촌의 문제아로 바뀌었는지 눈치 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어떤 영화가 트럼프의 당선을 예견했는지 보자.

대한민국의 부패의 근원을 공개합니다.

그건 바로 너.

딴데 돌아보지 마라. 대한민국 부패의 원흉은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이다. 만약 김기춘 일당이나 종북 좌파, 공무원들 혹은 재벌일가가 나올 줄 알았다면 당신은 부패한데다 머리까지 나쁜 꼴통이니 더 기분 상하기 전에 그냥 글 닫고 나가라. 나는 뭐 국민들이 투표를 잘 안해서, 혹은 시민들이 감시기능을 소홀히 해서 부패가 만연한다는 간접적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당신이 썩어서 대한민국이 썩은 것이다.

99%의 사람들은 자기는 나름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위정자들이, 혹은 가진 자들이 부패해서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윗대가리들은 죄다 썩었는데 아랫사람들은 청렴한 사회가 단 하나라도 있는지 예를 들어 보시라. 최순실과 박근혜의 윤리/도덕의식 수준이 대한민국 평균에 비교해 유난히 썩었나? 전혀 아니다. 당신도 똑같이 썩었는데 단지 무능해서 청와대에 들어갈 능력이 없던 것 뿐이다. 김영란법이 시작되니 파리 날리는 고급 음식점과 내가 접대를 안받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지랄하는 기레기들을 보라. 또 상대가 사기업이라고 안심하고 네가 거래처 법카로 밥 얻어처먹는 건 배임이 아니라 관례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뇌구조는 돈받고 깜방간 정치인들과 똑닮았다. 당신은 뇌물과 향응을 "안"먹은게 아니라 병신이라 "못"먹은 것이고 정치인들이 수억 수십억 먹는 동안, 거래처 영업사원이 당신에게 돼지갈비를 사준건 당신 능력이 꼴랑 5만원짜리라 그런거지 수만배 더 깨끗해서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때 많은 이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혼자 달아난 이준석 선장을 찢어죽이라고 욕했지만, 오늘도 길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이준석을 만날 수 있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들, 불법유턴, 오토바이 헬멧 미착용, 무단횡단. 새벽 1시에 강변북로에 가 보면 규정속도를 준수하는 차들이 거의 없다, 그들은 그렇게 달려 집에가서 이준석을 욕한다. 아마 이준석도 세월호 사고를 내기 전엔 당신네들과 똑같았을 것이다. 불법과적을 하고 회사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고 유병언씨에게 무려 5억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마치 공비 잡아죽이듯 전국을 뒤지고 다니느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법인카드로 물건을 대량 구매하고 포인트는 자기가 챙기거나 거래처에게 명절 선물 얻어먹는 것은 뭐 그럴 수 있는 일인데 부자들이 떡값 돌리는 건 개쓰레기 취급을 한다. 이사람아. 재산 5억 모아놓고 5만원짜리 선물 타먹는 당신이나 5조 재산에 5억원 떼먹은 사람의 양심이 뭐 그리 다르겠나. 다른건 통장잔고 뿐이지.

또 강남 부동산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인터넷 기사의 댓글란을 보라. 저 투기꾼들 때문에 내 인생이 개판이라는 발광이 태반이다. 부자들의 강남 부동산 투기를 신명나게 비난하던 이들은 곧 인터넷 창을 닫고 키움증권에 접속해 개잡주에 투기를 한다. "아 이 잡주는 필수재가 아니잖아!"라고 항변하면서. 옘병. 그럼 강남 부동산은 필수재냐. 강남구 인구는 전국민의 1%밖에 안되는데 강남에 살아보지도 않은 99%가 강남 부동산을 쳐다보며 침을 뱉는다. 어떤 이는 투기꾼들이 강남구 집값을 올리면 전국으로 퍼져 전국 집값이 오른다는 신박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97년 이래 강남 집값이 3-4배 뛰는 동안 담배값은 4.4배, 시내버스는 3배, 삼겹살 1근 가격은 4.52배가 뛰었는데, 그럼 강남의 몇몇 투기꾼이 대한민국의 상품가격과 통화량을 결정한단 말인가. 그럼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은 뭐하러 남대문에 있나, 압구정에 있어야지. 결국 강남의 실질 가격은 대부분의 한국인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 남탓하기 좋아하는 멍청이들은 자기들이 집을 못 사는게 강남 투기꾼들 때문이라며 꽥꽥거린다. 이보소. 강남 집값이 반토막 나는 상황이 오면 당신과 당신 친구들은 이미 다 짤리고 한강에서 투신하고 있을거요.

대한민국의 부패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죄다 부패했기 때문이다. 역대 중국 왕조나 조선에서 끝없이 탐관오리들을 척결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는 그날까지 부패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딴 사람들이 죄다 고만큼 부패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미담은 대부분 조작된 것으로, 뇌물먹던 김대감이 뇌물먹던 정판서랑 싸워 이겨서 역사에 자기 이름을 청렴한 김대감으로 기록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당신과 부패한 대중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 처럼 부패한 고위공직자를 무한정 공급한다. 부는 지혜를 의미하지 않고 가난은 선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뉴스보며 자긴 깨끗한 척 도덕적 딸딸이좀 그만 쳐라. 역겹다.

드라마 구해줘-자기는 아닌 줄 아는 모두들

[나는 기독교인이다]

*    크리스찬들이 이 드라마에 반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국 기독교의 폐쇄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중 구선원이라는 종교는 누가 봐도 기독교의 교리와 용어를 차용했고 포교의 방식이나 예베의 방식 역시 많은 교회의 모습과 대단히 유사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평소 프로불편러에 유난떨기 좋아하는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이 드라마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드라마는 "이단"종교에 관한 것이며 "정통"인 자신들과는 전혀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과 세세한 교리 하나만 달라도 악마로 매도하는 폐쇄적 종교이다. 기억하라. 기독교인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불교나 유교와는 대화할 수 있지만 딱 1%가 다른 종교는 사탄으로 취급한다. 가장 극심한 종교전쟁은 같은 신을 믿으면서 이름만 야훼, 여호와, 알라라고 다르게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    하지만 애초에 이단이 아니었던 종교가 어디에 있나. 유대교에서 갈라진 예수는 거짓 선지자로 처형당했고 거기에서 가톨릭과 정교가 갈라졌으며 후에 이슬람교를 낳았다. 또 가톨릭은 신교의 목사들을 불태웠고 그 신교는 신대륙과 식민지로 퍼져나가 수많은 분파를 낳았다. 일부 사람들은 이단은 신도의 돈과 시간을 뺏고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세상 어떤 종교가 신자들에게 돈과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가, 또 거짓말을 안 하는 종교가 어디있나. 가톨릭은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고 구라를 쳤고 또 근 300여년간 지동설을 부정했다. 기독교의 거짓말이 듣고싶다면 목사님의 손을 이끌고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가 보라. 이단은 여신도들을 성적으로 학대한다? 가장 많은 성폭행을 저지르는 것은 기독교 목사들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 목사들의 성범죄율은 모든 전문직 중 단연 1등이다.(링크) 결국 이단을 판별하는 조건은 단 하나다. 내가 믿는건 정통, 너가 믿는건 이단.

*    무신론자나 비종교인들은 자신들을 합리주의자라고 포장하며 종교인들의 맹목적 믿음을 조롱한다. 멍청이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믿는 종교인이다. 누구는 야훼를 믿고 어떤 이는 천수관음보살을 믿으며 다른 이는 조상신이나 풍수지리를 믿는다. 혹자는 자유대한민국을 믿고 몇몇은 진보의 가치를 믿으며 강원래는 황우석 박사를 믿었다. 맹목적인 믿음은 인간의 깊은 본능이고 모든 믿음은 맹목적이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에 따라 아들 이삭을 죽이려하지 않았나. 다만 우리가 믿는 수많은 대상 중 아주 일부분이 종교로 분리될 뿐이다. 거기엔 아무런 논리적 잣대도 기준도 없다. 단지 관습에 따를 뿐.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종교인이나 다름없다.

*     아마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는 배우 박보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소수종파 교회의 여름캠프광고를 sns에 올려 대중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일부 사람들은 아무런 비행도 저지른 적 없는 이 남자배우를 드라마의 구선원 신도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이 배우의 sns에 악플을 다는 우리나라 2030대가 헌법 1조 1항을 신나게 외워 대던 것이 불과 반년 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 20조 1항에는 모든 국민들이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되어있다. 자기 편한대로 각 조항을 취사선택 할 것이었다면 애초에 헌법은 왜 들먹였나. 하기사 그 난리를 쳐 놓고도 2030대 투표율은 가장 낮았다. 쪽팔리게. 뭐 세월호 추모예베에 가서 눈물 흘려놓고 세월호 굿은 샤머니즘이라 미개하다며 침 튀겨가며 욕하는 돌대가리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 비합리적이긴 하다만.

2017. 9. 25.

남녀의 사회적 진실 II-82년생 김지영

0. 우리가 성평등 문제를 바라볼 때 첫번째로 저지르는 실수는 양 성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눈다는 것이다. 수컷은 가해자, 그리고 여성은 피해자.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사하는 날 불려온 인부가 전부 아줌마라면 여자들은 이야 평등한 세상이다! 하고 좋아할까? 아님 업체에 항의전화를 넣을까. 남자 청소부가 여자화장실의 변기를 닦고 있다면? 옆집 아줌마는 의사라 돈을 버는데 아저씨는 무직으로 집안일을 하신단다. 여자들은 그집 아저씨를 백수라고 하지 않고 내조의 제왕이라고 불러주는가?
 
만약 성차별의 가해자가 오로지 남자들 뿐이라면 성평등은 남자들이 정신차리면 되는 일이고, 또 여자들이 합심하여 아들놈을 잘 교육시킨다면 한세대 만에 사라질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골칫덩이는 아직까지도 희대의 난제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도 정신차려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결국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하는 것은 할머니고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것은 어머니다. 성차별에 있어 가해자는 사회 전체이며 희생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다. 물론 여자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기울어진 운동장의 문제지 그 윗동네에 서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 다친 성이 덜 다친 성을 문제의 근원으로 모는 일이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금성과 화성을 오가는 일 보다도 더.
 
1. 가사노동과 육아는 남녀가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정 외의 책임 역시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하지만 둘다 지켜지지 않는다. 요리와 빨래는 주로 여자의 몫이며 착한 남편은 이를 "돕는다". 반대로 그 집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의 직업이며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남편이 자기에게 선물한 백을 꺼내서 자랑하지, 자기가 남편에게 무슨 차를 사줬는지를 두고 자랑하지 않는다. 아내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다른 성역할을 강요하고 압박하는 것이 어찌 한 성의 문제인가. 남자와 여자(게이와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2.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이 지워지지 않는 핵심 이유는 성에 따라 부담하는 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군역.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여자들은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하지만 의무의 면제는 필연적으로 권리의 박탈로 이어지며 여자는 군대를 갈 수 없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차별은 병영의 담을 넘어 사회로 확산된다. 다음 사례를 보자. 모 의대 외과교수 A씨는 여학생들을 뽑지 않는다. "여자들은 신체적으로 약해서 힘든 외과의사가 맞지 않아." 몇몇 여자들은 자신은 외과의사를 하기에 체력적으로 부족하지 않다고 항변하나, 매번 남자 동기들에게 밀린다. 모 회사 B상무가 연말에 임원승진 후보자들을 심사하고 있다. 어느 회사나 일은 고되고 힘들다. 군대 역시 고되고 힘들다. 군필인 남자 후보와 헌법상 군대를 못갈정도로 나약한 여자 중 누가 승진에서 유리하겠는가?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완전히 붙어있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세금을 내지 않은건 특혜가 아닌 차별이었듯, 처음부터 군역을 이수할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들은 이어 사회 곳곳에서 차별과 싸워야 했다.
 
일부 페미니스트 여자들을 제외하면 많은 여자들이 그 차별을 묵과했다. 여자들을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꼰대 남자들도 그 차별을 당연시한다. 그 둘 모두가 가해자다. 모든 차별은 득과 실을 동반한다.(대개 한쪽이 더 많은건 사실이지만) 명절때 남자아이들만 데리고 성묘에 가는 것과 아들들에게 재산을 더 많이 상속해주는 것은 같은 정확하게 같은 차별에서 나온다. 내가 꼰대 남성들 뿐 아니라 차별의 혜택을 계속해서 누리려는 여자들 역시 가해자라고 비난 하는 이유가 어기에 있다. 편견을 없앤다는 것은 단것만 삼키고 쓴것만 뱉는 것이 아니라 달던 쓰던 맵던 자시던 간에, 한 사람을 비틀어진 성역할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깨인 페미니스트들이 국방의 의무를 달라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들이 남성을 동경하는 톰보이라 군대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든 차별을 정복하고 섬멸하기 위해서.
 
3. 많은 사람들이 군대와 출산을 비교한다. 논리적으로 어떤 두 대상을 비교하려면 그 둘이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엄마와 아빠, 버스와 자동차, 곶감과 배. 하지만 전혀 다른 대상은 비교하기가 어렵다. 셔먼 탱크와 아름다움, 산들바람과 목성의 위성 이오니아, 그리고 사회적 의무와 생물학적 기능. 그러니 저 둘은 애초에 비교할 것이 못된다. 임신이 사회적 의무라면 모를까. 하지만 신체 건강한 모든 여자에게 애를 둘 이상 낳지 않으면 징역형을 살아야 한다든지, 혹은 폐경기에 임박한 여자가 애가 없을 경우 국가가 강제로 임신을 명령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그런 혐오스러운 주장을 하는 인간들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 의무와 자유를 비교할 정도로 멍청한 인간들과도 말 붙이기 싫은건 마찬가지고.
 
4. 한 여성의원이 남성의 역차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접힌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 종이를 반듯하게 만들기 위해선 접었던 부분을 펴는 것 만으로 모자를 때가 있다. 때론 반대로 접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난 남성에게 역차별을 가해 여성의 권익을 보장하는데에 찬성한다. 물론 그 시작은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82년생 지영씨지만 가장 부당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온 것은 22년생 할머니고 그 다음이 52년생 어머니일 것이다. 아마 현재 92년생 지영씨의 사정은 좀 더 나을 것이다. 차별에 대한 보상 역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악에 받쳐 꽥꽥대는 가짜 여성인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진짜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마치 후순위 채권처럼 리스트의 저 아래에 있다.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당한 차별에 대한 댓가를 왜 저들이 타가는가. 그들은 권리에만 민감하다. 국민의 4대 의무중에서 한 것이라곤 교육 하나밖에 없으면서. 저리 멍청한 걸 보니 과연 그 하나라도 잘 이행했을까 의문이 든다.
 
종이를 반대로 접어주는 일은 인구 피라미드의 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황혼 이혼을 쉽게 한다던지, 그 이후에도 여성이 재산 분할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한다던지. 사회적 편견을 뚫고 올라온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우대한다던지. 가장 지독한 차별을 뚫고 살아온 피해자들을 제치고 2030대 여성부터 치료하는 현재의 성평등 정책은 분명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하지만 아예 안하는 것 보다 나으니 비판하지 않겠다.)
 
5. 이 소설인듯 소설아닌 소설같은 책의 소설적 요소는 첫 세 페이지에 몰려있다. 나머지는 진부하다 못해 곰팡이 냄새가 날 것 같은 클리셰들을 늘어놓다가 끝난다. 아침드라마에서 시청률이 가장 낮았던 장면들을 글로 옮긴다면 아마 이 소설이 되지 않을까. 출처를 잊었지만 누군가는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단 한줄로 평가했다. 창작은 어려운데 자꾸 쉬운길로 가려고 한다고. 뭐 현실을 재구성한 것도 하나의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도 때론 소설만큼이나 소설적이니까.
 
그 좋은 예로 트라팔가르 해전의 승장 호레이쇼 넬슨제독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역사의 판도를 바꾼 그 해전에서 영국인들에게 승리라는 유산을 남긴 넬슨은 연인 엠마 해밀턴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의무를 다했단 사실에 감사하오" 하지만 엠마를 비롯한 영국의 여성들은 영국의 찬란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에서 조연에 머물러야 했다. 죽어가면서도 허세를 부린 넬슨이 자랑하던 그 의무라는 것은 오로지 남자들에게만 부여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여성들은 그 다음 세기에도 식사가 끝나면 남자들이 위스키와 시가를 즐기며 정치를 논하는 자리에 끼지 못하고 홍차에 우유를 부어 마시며 뒷방에서 가쉽거리를 재잘거리는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투표를 할 수 없던 것은 물론이고. 영국에서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그 다음 세기인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빅토리아 시대와는 달리 현대의 전면전은 모든 성인 남자들을 전선으로 빨아들였고 군수공장의 빈자리는 여성들이 메워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20세기의 엠마들은 자신들이 짊어진 의무에 대한 응당한 보상을 요구했고, 처칠같은 꼰대들이 반대했지만 수백만명의 독일군도 물리쳤던 그들조차 치마 대신 머리띠를 두른 그녀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의무를 다한 영국 여성들은 1928년부터 참정권을 따냈다. 당당하게. 그 앞에서 묻는다. 오늘날 한국의 여성들은 과연 어느 세기에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