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1.

문화계에 난입한 홍위병들


    
 
1. 여자의 다리가 트렁크 밖으로 묶인 채 나와있고 한 남자가 트렁크에 손을 얹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2. 한 흑인 여자가 하얀 테이블 위에 흰 족쇄로 묶여 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고로 사진의 제목은 Bon Appetit.
 
둘 모두 여성에 대한 폭력을 표현한 사진이지만 sns에서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첫번째 사진을 본 사람들은 "성폭력을 표현하다니 개념이 썩었다"는 반응을 보이며 거칠게 비난했고 해당 잡지는 사과와 함께 발행본을 회수하여 폐기해야 했다. 두번째 사진을 찍은 David LaChapelle의 전시는 성황을 이루었고 snser들은 자랑스럽게 해당 전시회를 다녀온 사실을 자랑하기에 바빳다. 이처럼 모순된 대중의 반응은 세가지 무지로부터 나온다.
 
 
첫째, 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 부족
 
양들의 침묵은 식인을 권장하는 영화가 아니며 대부는 조직폭력과 청부살인을 홍보하는 영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데이빗 라샤펠의 작품도 백인들에게 흑인 여성을 맛있게 먹으라고 권유하는 사진이 아니고, 맥심의 사진 작가도 여자를 묶어서 트렁크에 넣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소재만 보고 작가의 표현에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얼마나 많은 노벨문학상을 취소해야할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오르셰 미술관의 소장품을 불살라야 할 것인가.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에도 시체 성추행(백설공주), 살인(장화홍련전), 식인(헨젤과 그레텔), 장애인 비하(혹부리 영감), 동물학대(흥부와 놀부) 등 비 도덕적인 컨텐츠가 가득하니 전부 다 폐기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작품목록은 초라해지고 예술가들의 캔버스는 빈곤해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예술은 몰상식한 반달리스트와 끊임없이 싸우며 발전했다. 여성의 음부를 확대하고 동성애를 그린 쿠르베가 그랬고, 벗은 여자들과 피크닉을 즐기는 신사들을 그린 마네가 그랬다. 뒤샹은 사람들이 소변을 보는 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했고, 데미안 허스트는 더 나아가 자신의 소변을 작품에 활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라이로 기억되는 대신 예술사에 미술의 지평을 넓힌 화가들로 기록되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대중은 이와 같은 노력에 찬 물을 끼얹으며 편집자가 첫번째 사진을 폐기처분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는 또하나의 반달리즘에 불과하다. 차라리 '진부한 오브제나 클리세를 사용했다'고 비판한다면 모를까.
 
둘째, 메시지에 대한 이해 부족
 
백번 양보해 예술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하자. 그럼 왜 사람들은 맥심 잡지에 던지던 돌을 라샤펠에게 던지지 않는가? 이 작품이 주는 충격을 공감할 수 있게 작품을 좀 변형해 보자. 한 한국인 여성이 나체로 식탁위에 묶여 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녀 위에 욱일승천기가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제목은 일어로 "맛있게 드십시오". 만약 이런 작품이 한국에서 공개되었다면 아마 한국인들은 미술관에 돌을 던지고 라샤펠과 협업한 명품 브랜드들의 불매운동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왜 핑크나 아쿠아블루, 혹은 모델의 피부 톤이 아니라 하얀 색을 썼겠는가? 그것도 작가는 이것이 의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식기까지 모두 흰색으로 칠했다. 이래도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흑백 인종갈등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외계인이거나 맹인이다. 그런데도 대중이 라샤펠의 작품에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다. 대부분은 미술관에 셀카를 찍고 블로그 포스팅을 하러가지, 작품을 읽으러 간 것이 아니니까.
 
셋째, 사대주의.
 
앞서 맥심 표지사진에 대한 논란은 영국의 한 코스모폴리탄 에디터로부터 나왔다. 우리나라 대중이, 자기 독자들에게 여자의 오르가즘을 판별하는 기술따위나 알려주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예술과 표현에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이유는 그가(혹은 그녀가) 서구 잡지의 에디터이기 때문에 그렇다. 도대체 맥심과 코스모폴리탄이 뭐가 그리 다르길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는가?? 반면 파격적인 라샤펠의 작품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서구 문화권에서 성공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라샤펠이 첫번째 사진을 찍고, 맥심 표지에 두번째 사진이 등장했다면 대중의 반응은 180도 달랐을 것이다.(물론 그가 찍었다면 저렇게 촌스럽진 않았으리라) 대중들은 예술을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도, 본인이 이를 판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권위에 쉽게 의존한다. 그들은 특히나 영어 혹은 불어를 쓰는 금발머리 백인은 그 권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것 같다.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며 대중들의 문화소비도 늘어났다. 사람들은 예술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쓰고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중의 인식과 이해는 30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문화소비가 늘어나며 대중들이 스스로 예술을 이해할 소양을 갖췄다고 착각하며 작가와 작품에 사회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지와 무관심으로 무장한 이들이 갑자기 예술계에 난입하여 도덕적 잣대와 다수의 취향, 정치적 메시지 등의 채점표를 만들어 작품 검열에 나서기 시작했다. 멀게는 조영남의 대작사건에서부터 가깝게는 서울역 고가도로의 설치미술까지, 이 문화계의 홍위병들이 중세의 눈으로 현대를 심판하며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봐 왔다. 문화계 인사들과 예술인들은 늘어나는 작품과 티켓판매 실적, 그리고 sns 팔로워 수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이 아니라 대중과 각을 세우며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뒤를 따라다녔던 대중은 곧 앞서나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만들고 그리고 쓸지 지시할 것이다. 그들에겐 당신들은 자신의 취향을 맞춰줘야 하는 영화배우나 가수나 다름 없으니까. 그때에 이르면 미술계는 마치 청소년관람가 영화만 남은 밋밋한 영화제처럼 죽어있을것이다.

2017. 5. 6.

sns의 프로테스탄티즘

오늘날 사회 여론의 큰 축은 sns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스턴트식으로 소비되는 매체의 특성 답게, sns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들을 보면 단편적인 선악구분과 흑백논리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한다. 그래서 결국 많은 주장들은 엄격한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밀곤 하고, 그 결과 실생활에서 아무도 지키지 않는 새로운 윤리규범을 탄생시킨다. 나는 그들을 sns상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른다. 이 신프로테스탄티즘을 뜯어보기로 하자.

1. 성 상품화 금지
설리가 sns에 게시한 사진에 대한 기사나 섹시함을 강조한 광고의 티져 영상 아래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비판들이 있다. "여성을 상품화" 혹은 "로리 컨셉의 성적 욕구 자극"을 시도 했다는 것. sns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와 같은 행위는 사악하고 따라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것 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열광한다. 여성 팬들이 엑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시각적으로 "섹시"하기 때문이다. 정종철이 머리를 염색하고 춤을 춘다고 해서, 조정치가 랩을 하며 카메라를 노려본다고 해서 여성 팬들이 열광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성 팬들은 트와이스의 성적 매력에 돈을 쓴다. 쯔위가 노출이 없는 옷을 입고 사나가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들이 그들의 섹시함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부르카를 써서 얼굴까지 가리고 같은 노래와 안무를 한다면 그렇게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설리의 사진에는 종교적 근본주의 수준의 검열잣대를 들이대던 snser들은 kpop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엔 앞다투어 좋아요를 눌러댄다.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개념을 빻은건 설리나 광고주가 아니라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헥헥대고 상의를 반쯤 벗어제낀 다니엘 헤니가 사라는 제품을 위해 지갑을 여는 본인들의 이중잣대다.

논의를 좁혀 논란을 "로리타 이미지"로 한정해보자.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문제지만 그 범주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샤이니가 "누난 너무 예뻐"라는 노래로 히트를 쳤을 때 멤버 5명 중 3명은 미성년자였다. 그럼 당시 그 노래를 소비하던 성인 여성(혹은 게이)들은 모두 미성년 성범죄자에 해당한다. 이는 왜 비난하지 않는가? 더욱이 욕망 그 자체, 혹은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곧장 범죄로 다루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살인은 미성년 성범죄처럼, 혹은 그 이상의 사악한 행위이다. 그런데 고대전쟁에서의 살육이 영상의 주 소재를 이루는 영화 "300"은 국내에서만 300만명 가까운 관람객을 모았고, 연쇄살인마의 끔찍한 살인과정을 표현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220만명이 자발적으로 관람했다. 성인 여성이 교복을 연상하는 옷을 입고 야릇한 표정을 지은 사진은 "미성년자의 성적 매력"을 표현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실제로 살육장면, 혹은 살인자의 모습과 심리를 실감나게 묘사한 영화가 좋아서 보러간 저 사람들은 어떤 비난을 받아야 할까? 과연 로리타적 표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른 비윤리적 행위를 표현한 예술매체를 보며 일관된 기준을 적용했을까?

2.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를 욕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피해자인 척 하지만 사실 가해자들이다. 그들이 만약 이국주가 선전하는 청바지를 사고, 김상호가 디제잉을 하는 클럽을 찾아간다면 외모 지상주의는 더이상 없을 것이다. 광고주들은 미인 모델을 쓰고 그들의 외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왜? 소비자들이 외적 아름다움에 민감하니까. 회사 면접관들도 평가점수에 지원자들의 외모를 반영한다. 왜? 심지어 지원자들도 편의점이나 까페에 가면 알바생들의 외모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니까.(자영업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외모지상주의적 행위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당신이 이쁜여자, 혹은 잘생긴 남자를 보며 헤헤거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못난 외모가 차별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타인이 내 내면의 가치를 몰라준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외면만 보는 위선자들이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 내면을 어찌 볼 것이며,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살아가는데 그들의 진면목을 보는데 일일히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러니 남들을 외모지상주의로 비난하지마라. 당신도 그 중 하나니까.

3. 동물보호
강아지는 귀엽고 예쁘다. 나는 처음 보는 강아지라도 반나절을 질리지 않고 데리고 놀 수 있다. 너무 귀여우니까. 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 멍청한 박애주의를 아무데나 들이대는 것은 다르다. 현재 순종 강아지들은 대부분 인간의 눈에 예뻐 보이는 기형 개체들을 근친교배해서 낳은 결과물이다.(그래서 순종견은 유전병에 시달린다. 아는 수의사에게 물어보라) 그 뒤에도 그 개들을 거세하고 성대를 절개하며 인간들도 적응 못하는 좁은 공간에 쑤셔넣어 기르는 것은 전부 애견인들이다. 어떤 동물보호론자들은 악어가죽이나 모피코트를 입은 사람을 잔인하다고 부르는 무식을 뽐낸다. 그중 몇몇은 죽은 소의 시뻘건 살덩이를 고온에 구우는 사진을 좋다고 인터넷에 올려 욕먹기도 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동물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치약, 샴푸, 인슐린, 책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공산품에도 동물의 원료가 들어간다. 더 나아가 동물은 죽이면 안되고 식물은 죽여도 되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정말 생명을 사랑해서 해치기 싫다면 가을에 떨어진 낙엽만 먹거나 아니면 자연사한 동물의 사체를 파먹어야 한다. 그도 싫다면 본인이 직접 광합성을 하던가. 최초의 진화 과정에서 동물세포가 식물세포와 다르게 분화한 특징은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섭취한다는 점이다. 그런 동물중에서도 뭐든 다 먹을 수 있는 잡식성 포유류로 태어나 "생명을 사랑하니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건 첫째, 위의 내용을 모르는 멍청이거나 둘째, 죽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아직 안 죽고 살아있는 생명보호론자들은 다 멍청이다.

어떤 생명보호론자들은 "어쩔수 없는 생명소비는 인정하되, 나머지 동물들의 행복권도 인정하자"라며 타협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의미없는 허언에 불과하다. 동물들의 행복을 늘리려면 인간의 행복이 아닌 수를 줄여야 한다. 지구상에는 70억의 인구가 300억마리 이상의 가축과 공존하고 있다. 이 가축 중 절대 다수는 가금류인 닭으로 250억마리를 차지하고 나머지 50억마리 이상의 가축은 대부분 포유류이다. 그리고 인간과 이 나머지 가축의 생활 가능 반경은 거의 같다. 즉 인간이 못살 땅에서는 가축도 못산다. 가축에게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활 반경을 줄여야하는데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수를 줄여야 한다. 즉 가축을 더 행복한 환경에서 키우려면 어떻게든 인간이 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정책을 지지한 강력한 정치단체가 있었다. 바로 나치였다. 영화제작장에서 동물들의 촬영시간 제한, 동물학대 처벌 등 유럽에서 가장 선진화 된 동물보호법을 도입한 것은 바로 나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절멸시킬 게획도 함께 입안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snser들이 들이대는 프로테스탄티즘적 주장들은 일상 생활에서 통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인들도 그 규범에 따라 생활하고 있지 않다. (sns에 대한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생각하는 시간보다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시간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스스로 주장 안에 내재된 모순을 깨달을 시간도 없다. 그 결과 종교적 원리주의자들 마냥, 우르르 몰려다니며 마녀재판을 하고  희생자들을 사냥하러 다닌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을 신 프로테스탄트라고 일컫는 것은 적절한 은유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자화자찬)

2017. 5. 3.

문재인 지지자들과 박사모들의 놀라울 만한 유사성

(이 글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방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지지자들의 이성을 상실한 불통과 비합리성을 지적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박정희가 사법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과 공산주의가 낫다는 가치판단은 무관해야 하지만 많은 박사모들은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자기가 지지하는 인물을 신격화 시키며 일말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분은 선이자 정의요, 이에 대항하는 무리들은 사악하다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이는 2030대 문재인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들과 박사모들 사이에서 놀랄만큼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다. 두 계층 사이의 세대차, 정치적 견해 차이, 그리고 경험의 차이를 고려하면 이 점은 단순히 놀람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최순실 게이트가 시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발점이 정유라의 입시비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2030대들이 문준용씨 의혹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소위 꼰대기질이 가장 가득한 공공기관에 지원하면서 점퍼를 입고 귀걸이를 달고 찍은 사진을 내고도 입사하는 것이 아버지의 힘 없이도 가능하다는 주장은, 다른 지원자들이 면접관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쓴 결과물-천편일률적인 입사원서 사진들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그 지지자들에겐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적폐세력을 지지한다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고 전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직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지 않은 박근혜-최순실의 비리 처럼 고 노무현 대통령의 금품수수 비리도 충분한 의혹과 물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보수의 정치탄압이라는 "가치판단"으로 둔갑한다. 더욱이 형 노건평씨는 봉하대군이라고 불리며 돈을 받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검찰수사 결과 사실로 드러나 실형까지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지지자들은 그 당시 우병우처럼 민정수석을 맡았던 문재인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있다. 문재인 지지자들이 자신의 후보를 신격화하며 치부를 감싸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모습은 박정희-박근혜를 대하는 박사모들의 모습과 아주 동일하다.
 
사실 이는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2030대 문재인 지지자들은 박사모들의 아들딸들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 둘은 닮아있다. 게다가 오만함과 무식함까지 똑닮았다. 2030대들은 부모세대의 정치관과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지만 정작 선거날 놀기 위해 투표권을 포기하는 것은 그들이다. 단언컨대 저들이 이 난리를 피우지만 이번 선거에서도 이들의 투표율이 가장 낮을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투표도 안해 놓고, 지난 대선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문재인 후보 대신 박근혜가 당선된 것은 투표조작 때문이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남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조작과 공작으로 모는 그 의식구조는 촛불시위대를 종북세력의 선동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박사모들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더욱이 2030대는 한국의 민주화 산업화에 별다른 기여도 하지 않고 무임승차한 세대이면서, 정작 민주화 항쟁에서 피흘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한 세대를 무시한다. 박사모들이 젊은계층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하듯, 이들은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노년계층의 분노를 공감하지 못한다. 젊은 꼰대들이 나이든 꼰대를 꼰대라고 비난하는 블랙코메디를 곳곳에서 보고 있다. 코메디 프로인 Saturday Night Live는 토요일 밤에만 볼 수 있지만 비리를 비난하며 또다른 비리를 옹호하는 이 개그는 Everyday 24hrs Live다.
 
물론 그들이 조금 더 똑똑하다면, 이것이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권력남용을 용인하는 시스템의 문제고, (존재하지도 않는) 더 도덕적인 지도자를 고르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비리를 처벌하는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만큼이나 현명하지 못하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라. 이 글은 문재인도 저런 비리가 있으니 뽑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15명의 후보 모두 개인 비리가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의 도덕 수준은 다 거기서 거기고 비리를 용인하는 후진 시스템 아래선 비리를 저지를 능력이 있는 사람과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 두 부류 뿐이니까)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은 같은 신에게 기도하고, 성경들과 선지자들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서로 가장 많이 죽여댄 종교이다. 외계인이 그 둘을 본다면, 정말 똑 닮은 그 둘이 서로를 다르다고 믿으며 싸우는 모습이 아주 신비롭게 느껴질 것이다. 내 눈에는 문재인 지지자들과 박사모들이 그렇게 보인다.

2016. 12. 17.

정치적 사안 총 정리

이진법과 십진법의 세계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있다/없다 밖에 구분하지 못하지만 후자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흑백세계의 인간에게 우리가 빨간색이 무엇인지 가르칠 수 없듯 지능이 낮은 이진법의 존재들에게 다면적 세상을 가르치는 것은 너무도 힘겹다. 그러니 이번엔 그 단세포들의 세계로 내려가 yes/no로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 박근혜 탄핵은 정당한가?
그렇다. 헌법에는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시킬 절차과 권리가 명시되어있다. 그 헌법에 따른 국회의 대통령 탄핵은 정당하다.

• 대통령 하야 주장은 정당한가?
아니다. 대통령을 뽑고 하야 시키는 문제는 주말드라마 주인공 교체하는 문제와는 다르다. 헌법에 엄연히 대통령을 임기도중 갈아치울 권리와 절차가 명시되어 있는데, 광장에서 여론의 힘으로 대통령을 의지를 꺾어 물러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헌법을 무시한 처사다. 우리가 박근혜에게 화가 난 이유가 헌법을 무시해서라면, 우리는 더욱 더 헌법이 보장한 절차에 따라 분노를 표출해야한다.

• 그럼 시위는 잘못되었나?
아니다. 잘못된 구호를 외치더라도, 아무리 멍청한 주장이어도 시위는 정당하다. 그 권리는 헌법에 보장되어있다. 민주주의는 정답을 찾는 방법이 아니라 다수의 의견을 가늠하는 과정이며, 나는 이것이 정치에 있어 최우선 명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지지한다. 맞건 틀리건, 그들도 정치적 문제에 대해 끝없이 생각해보고 토론해보는 습관을 익히길 바라기 때문이다.

• 시위 현장에는 종북좌파들의 구호가 울려퍼진다. 시위대는 선동된 것 아닌가.
아니다. 단지 시위에 좌파들도 일부 있는 것이지 악한 의도로 종북좌파가 선량한 시위대를 선동한다고 보기 어렵다. 종북좌파들이 없었다면 시위가 없었겠는가. 촛불행사 진행이나 자금이 좌파적 단체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평소 시위를 주도하던 좌파들이 마침 준비되어있었을 뿐, 그걸 빌미로 일반 대중들의 의견을 좌파에게 선동되었다고 보며 무시해선 안된다.

• 폭력과 쓰레기 없는 시위는 시민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나?
아니다. 물리적 폭력과 쓰레기는 민주주의와 전혀 상관없다. 파리대혁명때는 엄청난 피가 흘렀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왔다. 파시스트였던 나치 독일인들과 군국주의 일본인들이 아마 가장 쓰레기를 잘 치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훌륭한 시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쓰레기가 길거리에 넘쳐도 국민들이 투표만 잘하고 평소에 정치에 관심만 가졌어도 한국정치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이게 나라냐고 분노하는 인간들은 도대체 뉴스를 보기는 했는가. 과거에도 이런 나라였고 난 한번도 이렇지 않은 나라에서 살아본 적 없다. 본인들이 무식해서 신문도 안보고 관심끄고 살다가, 사방에서 떠드니 그제서야 알고 분노하기 시작한 것 뿐이다. sns에서 가장 정치적 포스팅을 많이 올리는 세대가 2030대인데,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투표를 안하는 세대다. 주말마다 광장으로 나가 시위할 시간에 매번 투표라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삼류 국민에 삼류 정치가 따라오는 것이다. 역겨운 자위질은 그만하자.

• 표창원의 탄핵반대의원 공개는 정당한가.
아니다. 헌법에는 국민주권뿐 아니라 양심의 자유도 언급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양심의 자유를 억압받는 쪽은 박근혜 지지자들이다. 친박의원이든 박사모든, 심지어 최순실도 국민 중 하나이고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 아무리 밉더라도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내가 존중하는 헌법의 기본정신이다. 이는 통진당에게도 박사모나 정의당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에밀 졸라는 말했다.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싸운다'

• 박근혜는 멍청한가.
아니다. 박근혜보고 멍청하다고 하는 인간들이 멍청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선거에서 사실상의 민주 자유선거 사상 최고의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무너진 이래 박근혜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대통령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 이전에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이끌며 단 한차례도 선거에서 패하지 않아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바보는 결코 이런 결과를 낼 수 없다. 박근혜가 바보라면 그 바보에게 진 야당과 박근혜에게 승리를 안겨준 유권자들은 유인원인가. "그건 박근혜의 능력이 아니라 보좌진들의 힘이었다"라고 주장한다면 왜 다른 정치인들은 그런 보좌관을 못 구하는가? 아버지의 후광때문이라면, 왜 박정희의 다른 아들들, 또 다른 대통령의 디른 아들들은 정치계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박근혜는 멍청하지 않다. 그녀가 근무태만에 빠진 것은, 국민들은 대통령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나태해 진 것이고, 이제껏 국민들이 비리대통령과 비리정치인들을 지지해왔으니 본인도 비리에 둔감해진것이다. 멍청한 것은 국민이다. 박근혜가 아니다.

•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만이 정권을 잡을 수 있나.
아니다. 그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더 타락한 것이 아니다. 아마 대한민국 평균의 도덕성이나 그들의 도덕성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약한 급우를 두들겨 패는 학생들, 그리고 그를 방관하는 학생들이 갑질하던 우병우를 욕한다. 아이들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음주운전을 하는 민폐어른들이 최순실을 욕한다. 자기돈으로 밥사먹는게 당연한줄 모르고 부정부패법을 없애달라고 구걸하는 기자들과 공무원들이 차은택을 욕한다. 자신의 부패는 관행이고 타인의 관행은 부패라고 욕하는, 역겨운 위선이 가득하다. 부유함이 지혜로움과 동의어가 아니듯이 무능함은 선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2016. 11. 25.

당신의 지능에 관한 불편한 사실

열살무렵 수업시간에 같은 반 아이들에게 "태양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데 8분이 걸린다. 즉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전의 태양인 것이다"라는 내용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 뿐 아니라 선생님까지도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이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지와 지식의 충돌은 으례 그렇듯이 적개심과 공격으로 번졌고, 결국 지능이 높은 아이는 지능이 낮은 다수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멍청한 아이는 나이가 들면 멍청한 어른이 된다. (늙어간다고 자연스레 지능이 높아지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나는 평생토록 나보다 지능이 낮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살아왔기에 그들을 구별하는 법을 잘 알고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95%는 그 멍청한 다수에 속하고, 그들은 여러 사회적 사안에 대해 생각할 만한 지적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출신대학이 좋거나 암기력이 뛰어나다고 자신이 지성을 갖췄다고 착각하지 마라. 행복한 IQ 120의 영재보다 컴플렉스로 가득찬 아이큐 90의 아이가 더 좋은 대학을 간다. 암기력은 일부 자폐아들이 더욱 유리하다. 어린시절 지능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키가 먼저 자란다고 가장 큰 아이가 되는것도 아니며 평범한 지능을 가진 아이들 100명을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해봐도 객관식 테스트지의 한계상 25%는 영재로 나온다.

이런 호모 사피엔스의 95%를 차지하는 멍청이들의 첫번째 특징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예로 돌아가면, 선생과 아이들은 빛이라는 것도 다른 모든것들 처럼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과, 본다는 행위는 우리의 망막이 빛을 받아들이는 행위라는 '지식"을 몰랐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멍청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바로 추가 정보를 듣고나서도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멍청한 것이다. 보통 인간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적 자극이 아닌 권위, 즉 회초리가 필요하다. 3세기 전과는 달리 우리는 중력이 존재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능이 발달해서가 아니라 학교와 권위를 가진 교사들이 그게 맞다고 주입시켰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99.999%의 인간은 지구는 네모라고 믿고 중력의 존재를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 말에 반박하고 싶다면, 당신이 학교에서 배운 '상식'들에 대해 얼마나 의문을 던지고 검증했는지 보라. 당신은 거의 그런적이 없다. 이렇듯 비판적 사고를 펼치기엔 그대의 지능이 너무 낮다.
 
두번째 특징은 그들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실 그 둘이 완벽하게 다른 것이라고도 볼 수는 없다. 감정은 마치 어떤 부스터처럼 특정 상황에서 뇌의 특정 기능을 강화시켜주는 진화적 장치일 뿐이니까. 원시 사회에서는 합리적 판단이 감정적 충동과 다를 일이 적었다. 두려울 때 달아나는 것이 옳았고 화가 날때 상대를 한대 치는게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진화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발달하자 감정과 이성의 괴리가 벌어진다. 수만명이 맞부딪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각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달아나서는 안되었고 다인종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본능적 혐오를 억눌러야 했다. 이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고차원의 지적활동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감정과 분리하는 것이 지능의 한 척도가 된다. 일례로 개나 침팬치가 분노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옳음과 그름의 명제와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정적 호불호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수도없이 많다-'그는 선한 사람이야. 왜냐면 나한테 잘해주거든.'(나 하나한테 잘해주는 것이 왜 보편적인 선인가) '그녀는 너무 이뻐. 마치 천사같아'(당연히 성적 매력과 종교적 선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마치 수학 문제의 답을 이쁜 글씨체로 쓰여진 보기를 고르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지만 모두가 저지르는 일이다. 그러나 멍청한 이들은 이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일례로 여기까지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는 혹시 분노하며 내 주장을 거부하거나 반박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내 주장이 논리적으로 틀려서가 아니라 자기를 멍청하다고 부른게 기분이 나쁘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바로 그것이 당신이 멍청하단 증거다)

세번째 특징은 그들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지적 능력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분해주는 거의 유일한 기능이며 우리 몸에서 단일조직으로 가장 많은 열량을 소비하는 것은 바로 뇌다. 따라서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은 절대로 평범한 발상과 주장을 내놓을 수가 없다. 천재가 괴짜로 보이는 것은 마치 영장류들 눈에 옷을 입은 인간이 이상해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게다가 멍청한 보통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 주장과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예를 들면 "xxx은 강대국에게 정치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를까"라는 문제를 두고 xxx에 무자헤딘과 김구를 넣어보자. 당신의 국적이 한국이냐 혹은 아프가니스탄이냐에 따라 답은 사악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혹은 의로운 애국자가 되기도 한다. 즉 답을 결정하는것은 당신의 뇌와 논리가 아니라 국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남들의 답을 컴퓨터처럼 찾아 베끼는 동물일 뿐이다.

그로부터 나이를 20살도 넘게 더 먹었지만 현재의 사회는 아직 10살때의 국민학교 교실과 다를바가 없다. 사람들은 여러 복잡한 사회적 사안에 대해 생각하는데에는 거의 아무런 시간도 투자하지 않으면서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데 시간을 쓴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이를 지켜보는건 매우 거북한 일이다. 코끼리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바이올린을 가르칠 수 없고 사슴벌레에게 운전을 연습시킬 수 없듯, 그들 모두에게 사고하는 법을 훈련시키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무지의 동굴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면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눌 한사람이 늘어나지는 않겠는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이 이성적이기를 바라는 내 소망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부분인지도 모르겠지만은.

2016. 11. 14.

트럼프, 멍청한 SNSer들을 누르다.

예상을 뒤엎는 선거결과와 함께 백인 진보층의 위선이 들어났다. 경합주, 혹은 민주당이 우세할 것으로 보였던 지역 중 진보 백인들이 주를 이룬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니아 주는 여론/통계조사와는 달리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두가지 뿐이다. 여론조사의 표본과 실제의 오차가 컷거나, 아님 그 표본이 거짓말을 했거나. 하지만 미국 대선은 가장 정교하면서도 방대한 통계와 백데이터를 기반으로 여론을 조사하기 때문에 전자의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나는 후자의 가능성을 높게 본다. 고학력자인 북서부 백인들은 '나는 남부 촌뜨기 카우보이들과 다르다'라고 주장하며 힐러리를 지지한다고 응답했지만 실제 투표장에 가서는 트럼프를 찍었다. 개표와 함께 들어난 그들의 민낯은 텍사스 카우보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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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나? 이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떠맡을 역할이 21세기에는 달라질 것을 암시한다. 미국은 세계 주요 국가 중 세율이 높은 편에 속하면서 가장 형편없는 복지 시스템을 가진 나라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국민의 세금을 각종 국제기구의 분담금과 군비에 쓰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국인들에게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선민의식을 심어주며 과도한 부담을 강요했으나 이제는 이 모델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인들은 세계화라는 가치를 위해 손해보며 FTA를 맺는데 이골이 낫고 더이상은 자국 군대를 해외에 파병하는데 돈을 쓰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오바마케어와 트럼프의 고립주의는 국제사회에 퍼붓는 비용을 줄이고 내국민에게 쓰겟다는 점에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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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수많은 SNSer들이 주장하던 것 처럼 트럼프의 당선은 멍청함의 승리일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멍청한 것이다. 그들은 트럼프의 공약이 무엇인지 거의 모른다.(불법이민자를 추방하고 멕시코 국경에 담장을 건설한다는 것 외에는) 트럼프 본인이 이해하고 세운 정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내세운 두 핵심 경제공약-재정지출 확대와 금융규제 철회는 지금 현대경제가 마주한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처방이다. 대선결과에 비통해하는 노벨 경제학 수상자 폴 크루그먼(직업: 민주당원. 취미: 경제학)조차도 재정지출의 확대와 통화정책 지원을 강조해왔다. 더욱 웃긴건 트럼프를 얼간이 악마로 취급하던 SNSer들은 자기가 지지하던 힐러리의 공약에 대해선 더더욱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힐러리가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다. (그리고 얼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SNSer들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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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승리로 미국마저 극우의 나라가 되었나? 천만의 말씀. 미국은 본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국가이다. 카톨릭에서 파생한 근본주의자들이 기독교고 그중에서 더 극단적인 이들이 탄압을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은 국민의 40% 이상이 아직도 창조론을 믿고, 불과 15년전만 해도 유명 아이돌 소녀가 혼전순결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으며(물론 안지켰지만) 미국의 43대 대통령은 아프간을 침공하며 이를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했다.(그러면서도 서방세계는 십자군전쟁을 일컫는 이슬람 용어인 '지하드'라는 단어를 범죄와 동의어로 취급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든 말든 살았든 죽었든 미국인들은 본디부터 근본적 극우 극단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자신들이 세계의 경찰이라는 선민의식으로 이를 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참고로 북한, 시리아 등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더욱 온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 트럼프의 승리가 전쟁을 불러올 것을 암시하는 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SNSer들의 무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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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대상을 한국인들로 한정해서 보면 더욱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수 있다.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 결과에 가장 분노하고 있는 세대가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투표를 안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이 정치적 3무세대(무생각/무경험/무지식)의 오지랍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바로 그 3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정치는 매우 복잡한 다차원의 방정식이다. 모든 경우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 따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가치관을 서로 재보고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후보를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2030대는 정치를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결로 바라보려한다.(왜? 생각하기 귀찮고 아는것도 없고 공부하기도 싫으니깐) 그러니 각 후보의 공약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트럼프는 악, 힐러리는 선이라는 구도를 만든 뒤, 아하 하며 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겐 미 대선의 결과가 악당이 승리한 디즈니 만화영화의 결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아들은 시청자 게시판 대신 sns를 뻘글들로 도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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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당과 미국의 민주당은 아주 다르다. 하지만 프로 SNSer들은 마치 모든 나라의 민주당은 선이요, 반대인 보수는 악마들의 집단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 통계적으로 사람은 젊어서 민주당을 지지하다 나이들어 보수로 바뀌니,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은 나이들어 악마가 된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 Die young - Ke$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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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한국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나을까? 2년전 인터넷에 이자즈민 의원이 이민법을 발의한다는 잘못된 사실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잘못 퍼진 적이 있었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미국 레드넥 백인들과 정확하게 같았다. (링크) 저당시 반대서명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근 트럼프를 욕했을 것이다. 이 어리석음과 역겨운 이중잣대에 어찌 침을 뱉지 않을 것인가. 퉤!

2016. 11. 6.

박근혜와 멍청한 대중들

최순실과 그 관련자들은 엄정한 수사를 받아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고 박근혜는 그에 따른 도덕적/법적 책임을 져야한다. 그리고 처벌은 여기에 그쳐야한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반대한다.

박근혜의 하야를 외치는 대중들은 현 정치시스템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멍청이들이거나 그녀를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잘못된 결정보다 더 나쁜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인데,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된다는 것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앉히는 것 보다 더 나쁘다.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교체될때도 인수위를 만들어 국정운영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준비하는 마당에 지금 대통령이 사임하면 향후 몇달간 행정적 외교적 공백은 피할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마치 TV 드라마에서 마음에 안드는 출연자를 하차시키는 문제를 대하듯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다.

대충들은 이제껏 정치적 사안에 무관심하고 공부도 안했으며 고민도 안하다 난데없이 길거리로 나와 민주주의에 관한 아름다운 문구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가리려 한다. 드라마와 뉴스를 구별 못하는 이 멍청이들은 박대통령이 하야하여 TV에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최종결정권자가 없어진 대한민국 국정운영 시스템이 떠안아아 하는 것은 더 심각한 정치적 패닉 뿐이다.

이 바보들에게 상기시켜주자면, 이제까지 단 한번도 대통령의 측근이 비리와 권력남용 및 국정개입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군사정권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 투사인 두 김씨 대통령의 아들들은 약속이나 한듯 나란히 수백억대의 돈을 받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는 봉하대군이라고 불리며 동생의 임기 내내 뇌물을 받고 대통령의 특사에도 개입하다가 걸려 감옥에 갔고,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돈 받은 자신의 형을 옹호하고 힘없는 사장을 비난하여 자살시켰다. 이명박은 노무현과 정치적으로 정반대지만 그 비리는 닮아있다. 이명박의 형 이상득씨도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고 이명박 본인 역시 BBK 내곡동 사저 등 온갖 정치적 개인적 비리에 휘말렸다.

그러나 양 김의 아들들은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친노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는 쏙 빼놓고 그를 아름다운 기억들로 포장한 영화를 내놓기도 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가 녹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외치며 광화문으로 몰려들던 대중은 이명박의 혐의에 대한 검찰수사가 허무맹랑하게 종결되었을땐 집에서 방바닥이나 긁으며 뒹굴다가 얼마 안가 박근혜를 찍었다. 그렇게 모든 대통령의 측근 비리에 대해 사실상의 면죄부를 줘 놓고서 어떻게 이런 일이 다시 터지지 않을것을 기대했는가.

물론 이번 사건의 경우 비리의 주인공이 무지렁이 여성이고 사이비 종교와 성적 추문이 연결되어 있어 참신한 충격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비리와 국정개입이 용납되는건 아니며,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청와대에서 굿을 하든 기도를 하든 별 차이는 없다.(샤머니즘은 미개하고 기독교는 합리적이란 말인가) 그리고 헌법이 성적 자주권을 보장하는 한 미혼인 대통령이 과거에 어떤 성적 관계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이성적으로 내용만을 두고 보면 과거에 지겹도록 반복된 비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 과거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무관심했던 국민들이 이런 구조적 문제를 박근혜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최순실 핑계를 대듯, 지금 국민들은 자신의 무관심과 멍청함으로 초래된 국정비리의 모든 책임을 박근혜 하나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 아래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와같은 재발할 것이며 여당이 아니라 다른 당이 집권해도 또 비리를 저지를 것이고 실제로 그래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면 최순실, 우병우 등 처벌받아야 할 사람들이 엄정히 처벌 받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측근비리/전횡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것은 거리의 시위대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목표가 박근혜의 하야에 맞춰 혼란을 자초하면서 또다시 검찰이 권력층에게 면죄부를 남발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이번 사태는 주인공만 바꾼 채 다시 재연될 것이다.

분노는 파괴적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 파괴의 힘이 필요한 적도 있었고 앞으로도 필요할 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대통령 측근의 전횡을 막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할 때고, 분노만으로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냉철히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