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2.

넷플릭스 지옥, 그리고 잡담들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랬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다양한 컨텐츠를 선보일 수 없을 것이라고. 아마 그 말을 넷플릭스 CEO가 들었다면 소리내어 HAHA 웃었을 것이다. 한국 감독과 제작진은 DP에 이어 오징어게임이라는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흥행작을 낳았고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 오징어게임을 2위로 밀어낸 것은 지난주 공개된 지옥이었다. 

사실 드라마의 연출은 다소 미흡하고 일부 에피소드들의 개연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연상호의 스토리텔링의 정수는 특수한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겪는 아이러니와 모순을 그리며 빛을 발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박정자는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을 행운이라고 부른다. 하루 종일 일해도 사랑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는, 그런 비루한 삶에 찾아온 행운. 자식들을 위해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의 죽음을 중계하는 대가로 30억을 주겠다는 냉혈한들에게 굽신거리며, 울부짖는 아들을 되려 혼내는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연필 한 자루 훔치지 않고 착하게만 자라온 정진수. 하지만 신은 그에게 지옥을 선고한다. 그것은 신의 장난일까, 장난의 신일까. 우리가 도덕과 규율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정의롭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벌의 기준이 공정하지 않다면 어떨까. 학창 시절 수학선생님이 "오늘이 21일이지? 21번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라고 외칠 때 21번은 자신이 정신봉으로 맞을 그날의 운명을 결코 공정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정의란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서 정진수는 결심한다. 신의 장난을 살짝 비틀어 정의로 만들겠노라고. 그렇게 그는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인다. 무작위로 찾아온 자신의 죽음이 그래도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이바지했다고 믿으며. 

형사 진경훈은 법과 질서를 믿는다. 자신의 아내를 무참히 난도질한 범인이 10년 만에 심신미약으로 풀려났지만 남편은 그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법과 질서를 믿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정진수를 추적하고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는 진경훈이 믿는 법과 질서를 위협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정진수는 그를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당신은 이제 법 혹은 질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법을 택하면 사회적 질서가 무너질 것이고 질서를 택하면 자신의 신념을 지탱해 온 법을 어기게 된다. 정진수는 그에게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라고 했지만 사실 애초에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법이 하나 뿐인 딸을 심판하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신이 정진수에게 잔인한 장난을 친 것처럼 신의 반열에 오른 정진수 역시 진경훈에게 짓궂은 장난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살인자를 산 채로 불태운 딸, 진희정. 그녀가 살인자의 단말마가 울려 퍼지는 한 가운데 울며 웃는 장면은 소름 끼칠 정도로 슬펐고 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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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고지를 받은 희생자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숨는다. 가장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은 본인이지만 사후 가족들이 겪을 핍박과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달아난다, 그리고 증발한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외로이 맞이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그들을 보며 에이즈환자들을 떠올렸다. 후천적 면역결핍증이 성적으로 방종하거나 동성애자, 마약중독자들 사이에서 퍼진다고* 믿는 대중들의 시선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은 종종 숨곤 한다. 하지만 모든 환자들이 지옥에 갈 죄를 지어 걸린 것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억울하게 병에 걸린 이들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갓난아기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낙인찍으며 특정 종교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죄악으로 치부한다. 

한번 고지를 받으면 언제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그들. 그리고 죽음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고 외로우리라. 또 죽음 너머의 업보는 온전히 가족들의 몫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사회적 매장, 그리고 과격단체의 폭력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HIV 바이러스가 아닌 우리 인간들이 같은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마찬가지이다. 지옥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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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드라마가 공개된 시점에 한국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위층의 남자가 아랫집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협박을 거듭해 경찰이 출동했는데, 남편과 남자 경찰이 1층 현관으로 내려간 틈을 타서 범인인 위층 남자는 아래로 내려와 아내의 목을 칼로 찌르고 그 칼로 딸 역시 난도질했다. 그 자리에 한 여경이 있었지만 그녀는 달아났고 범인을 제압한 것은 1층에 있던 남편이었다. 드라마 내의 진경훈 형사가 겪은 것과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드라마의 후반부 내내 이어진 김현주의 액션 신이 매우 불편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면에서 신체적 전성기를 훌쩍 넘긴(작중 시점은 2027년) 여자 변호사가 삼단봉을 휘두르고 테이저 건을 쏘며 신체 건장한 깡패들을 여럿 제압하는 동안 우리의 현실에서는 훈련을 받은 젊은 20대 여경 하나가 범인을 두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말았다.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다. 일부 PC 주의자들은 성별 간의 차이가 전적으로 사회문화적 학습에 기인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컨텐츠에서 남녀 간의 성 역할을 뒤섞으라고 압박하고 있고 이에 굴복한 현대의 창작자들은 개연성을 무너뜨려가면서까지 액션신을 여성 캐릭터들로 채우고 있다. 

이는 또 다른 폭력이다. 그들이 원더우면 아류의 히어로 영화들을 한 해에 수천 편을 쏟아낸다고 해서 평균 여성들의 근력이 자동으로 향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자신들의 왜곡된 이념을 대중에게 주입한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현실을 개조하려고 한다. 여경의 채용 확대를 위해 체력검정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내려갔으며 그로 인한 수많은 문제점들은 묵살되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은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자신들의 비틀린 생각을 강요하는 폭력은 현실이다. 어느 쪽이 더 해로울까. 

이 비극은 [여경]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장미란이나 여자유도 메달리스트 정보경 선수가 있었다면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참사를 부른 것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여자라는 이유로 해당 보직에 배치한 잘못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공권력이 힘을 잃으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약자들이다. 그 이념주의자들의 그런 왜곡된 믿음이 인천 논현동에서 두 명의 여성 피해자를 낳았다. 역설적으로 결과적 평등을 외치는 여성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여성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런 선입견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2021. 11. 18.

여의도 정치를 반기는 유권자는 없다

한국 정치에서 2021년은 그 이전 해와는 매우 다른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21대 총선에서 처참하게 참패한 야당은 절치부심하여 김종인과 여권 인사들을 영입하고 비주류였던 30대이자 바른미래당 계열인 이준석을 당 대표로 내세운 결과 보궐선거에서 압승하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오차 범위 밖 지지율을 확보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 윤석열과 오세훈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마치 폭등하는 주식시장에서 혼자 하한가를 친 주식처럼 얼굴을 한껏 찌푸린 두 남자가 있다. 바로 홍준표와 유승민. 무엇이 그들을 정치 여정을 셀트리온처럼 시퍼렇게 물들였는가. 

오세훈과 유승민, 그리고 윤석열과 홍준표의 정치 여정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오세훈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계기를, 유승민은 박근혜 탄핵을 주도하며 보수당의 몰락을 촉발했고 둘 다 바른미래당의 주축이었다. 홍준표와 윤석열은 둘 다 타협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강골 검사인 것도 똑 닮았고 두 사람 모두 문재인을 몰아붙여 지지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하지만 각자의 운명은 너무나 달랐다. 오세훈이 10년 만에 서울 전 구에서 과반을 득표하며 서울시장직에 복귀한 것과는 정반대로 유승민은 당내 경선에서 한 자리수 지지율로 탈락했다. 홍준표는 이변을 일으켜 경선 초기의 격차보다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당 대표를 두 번 그리고 대선 후보를 한번 맡았던 당에서 한때 문재인의 칼이었던 남자를 상대로, 더욱이 당원 투표에서 버림받아 패배했다. 

유승민과 홍준표의 운명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의도식 계산 때문이었다. 유승민은 21대 총선에서 험지 서울 대신 연고지인 대구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지만 TK의 유권자들은 냉담했고, 그가 주판을 꺼내 승산이 없다는 계산을 마쳤을 때 비로소 유승민은 불출마 선언과 함께 자유한국당과의 합당을 결정했다. 선거를 앞둔 미래통합당은 그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그 말을 누가 믿을까. 함께 탈당을 결정한 김무성이 이미 자한당으로 복당했고 자신의 의석마저도 확보할 가능성도 희박했는데. 그리고 같은 선거에서 홍준표 역시 당의 수도권 험지 출마 제안을 거절하고 탈당해 보수의 안전지대인 대구 수성구에 출마했다. 한때의 대선후보가 탈당해서 안전빵이나 노리는 꼴이라니, 마음 졸이며 야당의 의석 수 하나하나를 손으로 세어가던 지지자들이 그 모습을 결코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반면 오세훈과 윤석열은 여의도식 정치가 가장 기피하는 길을 걸었다. 오세훈은 87년 6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단 한 번도 보수가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광진구 을에, 그것도 상대가 정치신인 고민정이라 이겨도 본전이고 패배할 경우 엄청난 조롱거리가 되어 재기가 불투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독배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임기가 고작 1년 남짓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출마했고, 끝끝내 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윤석열 역시 박근혜 정부의 인사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잡아넣은 덕에 문재인과 여당 지지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기수를 뛰어넘어 검찰총장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는 전임/후임자와는 달리 청와대에 영합하지 않고 여당 관계자들의 비리를 원칙대로 수사해 조국과 추미애의 정치인생을 끝장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으나 오세훈과 윤석열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험한 길을 택했다는 사실에 이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그 둘은 여의도의 정치인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을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연애 경험이 부족한 모태솔로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성의 혼을 쏙 빼놓는 연애의 기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이 잔머리를 굴리고 어장관리에 나서는 것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은 차갑게 식기 마련이다. 그리고 홍준표와 유승민이 유권자들을 상대로 픽업아티스트를 자처하며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고 주판을 튕기는 동안 오세훈은 묵묵히 당의 험지 출마 요구에 응했고 윤석열은 자신에게 검찰총장이란 영예를 안긴 문재인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싸웠다. 무엇보다 보수층 지지자들이 윤석열을 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과반을 훌쩍 넘고 여당이 폭주하는 동안 유승민은 잠행에 들어갔고 홍준표는 자신의 금배지를 찾아 떠났으며 중도층은 여전히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그동안 보수 유권자들과 서민과 김경률, 권경애, 진중권과 같이 문재인 정부와 대립해 온 인사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묻는다, 그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19대 대선에서 야당의 핵심 지지층은 홍준표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 탄핵정국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홍준표는 안철수를 제치고 2등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홍준표는 자신의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했다. 바로 그놈의 여의도식 정치 때문에. 그리고 불과 4년 뒤 정치 지형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홍준표를 가장 지지하던 6070대는 그를 버리고 윤석열을 택했고 반대로 문재인을 가장 지지했던 2030대 유권자들은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를 택했다. 한때의 동지들이 적이 되고 한 때의 안티들이 팬이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우리가 가장 절박하게 싸우던 그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리고 진보도 보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윤석열이 아니었다면 지금 중도층이 가장 선호하는 대선주자는 바로 조국이었을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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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논리는 이준석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혁신 보수를 표방하지만 그의 정치는 결코 새롭지도, 젊지도 않다. 그의 정치는 철저하게 당내 영향력을 넓히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링크) 세련되지도 못하다(링크). 그는 마치 모범생이 공식을 외워 수학 문제 풀어내듯 철저하게 여의도식 정치를 하고 있는데 과연 새 인물이 구 정치를 재탕하는 것을 새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그가 표방하는 정치는 그가 들고 온 비단 주머니의 워딩과 디자인처럼 너무나 올드하고 구태의연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문제는 뚜렷한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경선 최종라운드에 오른 네 명의 후보는 모두 확고한 철학이 있다. 윤석열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법치주의, 홍준표는 정통보수정치, 유승민은 우파적 경제/안보와 진보적 복지, 그리고 원희룡은 보수의 틀 안에서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의 정치 철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준석의 모호한 정치철학은 그의 삶의 궤적과도 이어져 있다. 애초에 한 사람의 가치관과 신념은 그 사람이 걸어온 삶으로부터 나오지 않는가. 금융권에서 트레이딩으로 살아남은 나와, 삼성전자에서 10여년을 일해온 친구, 외길 검사의 길을 걸어온 선배, 그리고 외교가에서 일하는 후배 등 각자의 삶에서 이룬 성취는 현재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우리가 정치인들의 말보다 과거의 행적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이준석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박근혜의 키즈로 정치를 시작하기 전 그의 이력은 거의 전무하다. 그리고 정치에 뛰어든 이래 그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젊음이었고, 그는 이를 무기로 자신을 받아준 정치인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박근혜, 그리고 안철수 이후 당내의 여러 중진들, 심지어 대선 후보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철학은 무엇일까? 바로 여의도 정치 그 자체가 아닐까. 다른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여의도의 셈법을 따지지만, 사회생활의 첫 발을 여의도에서 내디딘 이준석에겐 여의도는 하나의 배틀그라운드이고 정치공학은 그저 그 서바이벌의 룰일뿐이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건지 비전도 철학도 없다. 다만 그 게임을 열심히 플레이할 뿐. 

지난 5년간 우리는 삶에서 정치 외에 아무런 사회경험이 없는 운동권 인사들이 어떻게 행정과 입법을 망가뜨렸는지 여실히 보았다. 그리고 우려스럽게도 이준석은 그들과 대단히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를 지지하되 비판적인 시각을 놓아서는 안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