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25.

매우 우려스러운 국토부 장관의 헛발질

김현미 신임 국토부 장관의 취임사가 화제다.(링크) 그녀는 다주택자들의 주택 구매가 늘어난 것으로 볼 때, 최근의 부동산 상승은 투기 움직임 때문이라며 사실상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장담컨대 노무현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전쟁은 성공하지도 못할 뿐더러 서민을 더욱 힘들게 하고 적군인 자산가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이유를 아래에 간단하게 정리했다.


* 다주택자가 집을 더 사는 것은 서민들의 주택부족과 전혀 상관없다. 어느 마을에 한 사람이 집을 백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럼 그 마을에서 99가구가 노숙자가 되는가? 아니다. 99가구가 집을 자가가 아닌 월세, 혹은 전세로 살 뿐이다. 한사람이 집을 1채를 사든 백채를 사든 만채를 사든 공급량만 충분하면 장기적으로 주택가격엔 아무 영향이 없다.


* 김현미 장관은 현 부동산 가격상승이 투기수요란 증거로 많은 신규구입자들이 다주택자라는 점을 든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중산층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면 자산가인 다주택자도 사기 쉬워진다. 그리고 이 자산가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수익을 얻기 위해(혹은 이자비용을 벌충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월세를 받고 그 집을 내어 줄 것이다.


* 만약 집값이 하루아침에 2배 뛰었다고 치자. 자산가들의 월세 수익은 반토막이 난다. 따라서 집을 팔고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다. 이런 현상은 월세 수익이 비슷한 위험성을 가진 다른 자산들의 수익과 같아질때까지 일어난다. 결국 현재의 집값과 월세는 자산가들의 주택구입수와는 무관하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 따라서 집값을 떠올리는 힘의 핵심은 투기자본이 아니라 바로 월세다. 자산가들이 집을 사는 이유는 비트코인처럼 100에 사서 150에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사서 월세를 받으면 은행이자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얻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을 가장 많이 산 60대(2030대 자식들에게 사준 물량 포함)는 투자시 위험선호도가 가장 낮은 세대다. 가장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세대가 부동산에 가장 많이 투자한 세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2014/15년에 강남의 주요 지역의 월세 수익은 4.5%로 은행 대출이자 3%보다 월등히 높았고, 현재는 집값이 크게 올라 월세수익과 대출이자가 거의 같아진 수준이 되었다. 부동산 가격을 드라이브 하는 것은 한탕을 노린 투기가 아니라 기대수익률의 발란스를 맞춰주는 투자다. 무식한 김현미 장관은 이 점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 만약 강력한 대출 규제를 내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피해는 서민들이 본다. 앞서 말한대로 집값을 떠받드는 핵심은 평당 3-10만원의 월세를 내는 세입자들이므로 집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월세는 세입자들의 소득에 달린지라, 집값이 반토막나면 이 저금리시대에 8%나 주는 고수익 자산이 되어 빚없이도 집 살 돈을 가진 자산가들이 달려들테니. 하지만 서민들은 대출 없이는 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집을 살 수 없다. LTV를 강화하면 서민들은 영원히 자기 집을 사지 못하게 된다. 대신 집을 살 여유자금이 있는 자산가들은 더욱 부자가 된다.


* 만약 보유세를 강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피해 역시 서민 세입자들이 본다. 결국 보유세를 낼 여유가 있는 자산가들이 집을 소유하고, 보유세를 내지 못하는 계층은 월세입자로 전락한다. 그리고 시장에는 월세입자가 늘어났으므로 월세가 올라간다. 즉 세금은 세입자에게 자연스럽게 전가된다. 고율의 세금을 매기는 뉴욕의 부동산이 고수익을 주는 까닭이다.


* 만약 1가구 2주택, 혹은 그 이상 보유를 금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택난이 악화된다. 먼저 자산가들이 1주택 이상의 집을 팔아치워도 집값은 크게 낮아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3%의 월세를 낼지, 3%의 주택구매자금대출 금리를 낼지, 혹은 그 돈을 딴데 투자하여 3%의 수익을 얻을지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즉 자산가들이 집을 팔아 집값이 낮아져 월세가 3.5%로 살짝 오르면 사람들은 3%의 대출이자를 물고 집을 살 것이다. 그러니 집값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문제는 신규 분양이다. 집을 가진 가구는 집을 더 살수가 없고, 집을 가지지 못한 가구는 애초에 돈이 없으니 아파트를 새로 지어도, 살 사람이 거의 없다. 따라서 건설사들은 신규물량을 공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의 주택은 계속 노후화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득은 점점 늘어나 더 나은 주거환경을 원한다. 그러니 좋은 조건의 집들은 월세가 폭증하고 월세를 추가로 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나쁜 환경으로 몰려나간다. 결국 대부분의 서민들은 더 낡은 집에서 더 많은 월세를 내고 살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규제로 신규공급이 없던 강남의 집값이 가장 빠르게 오른 것을 보라.


* 김현미 장관의 논리에 따르면 자동차를 가장 많이 사는 것은 렌트카 회사들이므로 대한민국 자동차 판매는 실수요가 아닌 투기수요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고 가난한 서민들도 에쿠스를 한대씩 몰고 다니려면 리스회사들을 죄다 규제해서 차를 한대이상 못사게 하면 된단 것이다. 하지만 리스회사들을 다 없애면 서민들은 삶에서 에쿠스를 탈 기회가 아예 없게 된다


결국 부동산 가격을 잡을 수 없는 이유는 현재 집값이 대한민국 평균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되려 중산층의 소비수준에 비하면 현재 집값은 매우 싸다. 서울의 집값을 가처분 소득으로 나누면 역대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는데다 대출제도도 그 어느때보다 유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1985년만 해도 월급쟁이가 돈을 모아서 강남에 집을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되지 않느냐고 항변하는데, 그 시절엔 강남은 중심지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지역엔 지하철도 현재처럼 잘 뚫린 도로들도 없어 대중교통으로 시내로 가는데 1시간씩 걸리곤 했다. 지금도 강남을 포함한 시내 중심가로부터 1시간 거리에 있는 외곽지역에는 직장인들이 돈을 모아 살 수 있는 집들이 많다. 게다가 은행에서 저금리에 대출도 잘 해준다. 지금 집을 안 산 사람들은 차도 굴리고 해외여행도 가고 좋은거 입고 먹고 놀고 즐기고 싶은데, 시내 중심가에 집도 한채 떡하니 있기를 바라는 놀부들이다. 그리고 집이 필요한데도 안사는 그들이야말로 집값이 빠지는데 베팅한 게으른 투기꾼들이 아닌가.


김현미 장관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지만, 경제를 왜곡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부자를 더욱 부자로, 빈자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 뿐이다. 병신같이.

이태원에서 밀려난 한 생산자에게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식물들이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그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도태되는게 대자연의 법칙이죠. 어쩔 수 없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와 영양분과 물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편하게 찾을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모두가 좋아하는 가게였다면 아무도 당신을 쫒아내지 않았겠죠, 행여 쫒겨나도 갈 곳이 많았을거에요. 쓸모없는 것을 만드는 생산자들에 관심을 보이고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를 누가 지녀야 할까요?  당신도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예쁘지 자라지 않은 저 가게 앞의 잡초들을 돌보지 않잖아요.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소비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제품을 억지로 구매하고, 가게에 헐값에 공간을 제공하고, 당신을 강제로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는건 파렴치한 일이죠. 당신이 비유로 든 식물계에서는 그것을 기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대의 추억과 낭만을 지탱하기 위해선 다른 이들의 땀과 눈물과 손실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타인에게 그런 희생을 강제할 순 없어요. 바로 그것이 당신의 감상이 철없는 이기심으로 읽히는 까닭입니다.

to 유은혜 Studio_KOTTBATT
재美난학교 포럼 1회

2017. 6. 11.

부재의 의미, 그리고 정치.


그들은 그저 어질러진 검은 조각들에 불과했다. 의미없이 각지고, 찢어지고, 뾰족하게 날 선 검은 도형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윽고 흰 직사각형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늘 존재를 본다. 검게 칠해지고 채워진 그 존재를. 반면 흰색은 공허한 여백이요 부재에 불과하다. 우리는 빈 것에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의미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재에 있기도 하지 않은가. 마치 이 그림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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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뱃지는 정치적 아이콘이다. 세월호는 마음 아픈 사건이고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며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일은 인도적 행위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정치가 없다. 하지만 그 뱃지가 정치적 코드로 해석되는 이유는 어쩌면 거기에 다른 죽음들에 대한 추모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정치인들은 노란 뱃지를 달고 어떤 정치인들은 천안함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하나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보편적 인류애지만 다른 죽음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정치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보아야 한다. 마치 저 그림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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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현실정치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술관에서 정치를 떠올리는 나 자신이 왠지 편협하게 느껴진다. 아마 금호미술관에서 문준용 작가의 이름을 본 탓이리라. 좀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낸 내 탓이겠지. 하지만 정치가 덧칠된 외투를 입은 작품도 충분히 감각적 충격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도 바로 같은 미술관에서, 5월의 어느 날 윤동천 작가의 대형 리본상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분이 떠오른다.



십여년 전, 그날도 그랬듯이.

오늘도 산자는 죽은자의 흔적을 뒤적거리다 흐느끼며 운다.



위, by 프랑스와 모를레
아래, by 윤동천

2017. 6. 1.

슈즈트리 on 홍위병들의 블랙리스트

서울역 앞에 설치된 슈즈트리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대중은 흉물스러운 오브제를 철거하라고 주장하고 기자들은 자극적 타이틀로 이를 부추기고 있다. 시민들은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정권을 바꾼 터라 한껏 자신감에 차 있으며 집단행동을 정치 외의 영역으로 확대하려든다. 진중권, 반이정과 같은 미술 평론가들이 대중들을 제지하지만 그들은 듣지않고 자기들끼리만 의견을 교환하며 자기확신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는 물리학을 영화 인터스텔라로 배우고 경제학을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서 배우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해당 분야에 수십년을 바쳐 연구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조롱을 덕지덕지 달고 묻히기 마련이다. 왜?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그런 글들은, 자기표현을 권장하는 sns에 익숙해져 배우려기보다 가르치기를 즐기는 대중들에게 맞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 그네들의 태도가 왜 반달리즘인지 길게 설명하는 것은 또하나의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어느 서점에 가던 미학에 대해 쉽게 쓰여진 책 한권쯤은 있고 나는 진중권씨보다 더 쉽게 쓸수가 없으므로.
 
따라서 그냥 대중들의 주장을 따른 비슷한 사례를 상기해보련다. 가깝게는 박근혜 김기춘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그렇다. 서울시 예산에는 예술작품에 할당된 항목이 있고 그 일부가 공공 설치미술에 투자되는데, 내 취향에 맞지 않는걸 만드는 작가에겐 단 몇달간의 기회도 주지 말아아하는 것 처럼(그리고 그걸 기업이 후원할리도 없으니 그는 결국 창작을 접든가 굶어죽어야 하는 것 처럼) 박근혜 정부의 눈에는 좌편향 문화인들이 그랬다. 정부 돈으로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친북성향을 가진 문화인사들에게 왜 국가지원금을 주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취향에 어긋난 슈즈트리를 철거하라는 사람들은 박근혜 김기춘의 취향대로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실제 예술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술과의 어마어마한 차이.
 
보다 완벽한 사례로 나치의 퇴폐예술이 있다. 화가시절의 히틀러의 작품들은 참 예쁘다. 파스텔톤의 색채로 표현한 평화로운 풍경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이 수천만명을 죽일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는 화가로 실패했다. 동시대 미술계는 이미 "예쁜 그림"을 넘어서서 회화의 표현을 다변화하고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수백년전의 지루한 "예쁜그림"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가 정치인으로 성공하여 집권한 뒤, '흉측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의 작품을 모두 압수하여 "퇴폐미술전"이란 테마로 전시했는데, 역설적으로 이는 20세기 초의 최고 미술전시로 남았다. 이후 막스 에른스트나 케테 콜비츠같은 당시 생존화가들의 작품 뿐 아니라 피카소나 뭉크의 작품들도 같이 불태워졌다. 공공조형물에서 추한 작품은 배제해야한다고 주장하는 한국 대중들의 취향과 태도는 히틀러와 똑같이 닮았다.(그리고 "한마음 한뜻"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인 사상도 똑같이 닮았다.)
 
또한 대중들은 자기 세금이 들어갔으니 자기 취향에 안 맞으면 철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일견 옳은 말인데 내생각에 그럼 모든 공공조형물은 이건희나 이재용의 취향대로 만들거나 강남구에만 세워야 한다. 그리고 2030대들은 지방세를 거의 내지 않으니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5060대 취향에 맞춰 매일 트로트 콘서트나 열어야 하지 않을까? 또 지방세에는 담배세와 취등록세도 있는데 비흡연자들이나 집을 사고팔지 않은 사람들은 이번 논의에서 좀 빠져야 할 것 같다. 이런식의 사고방식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번외로 진중권씨를 비롯한 예술평론가들이 대중의 반달리즘을 막으려면 좀 다른 전략을 써야했다. 미적분학조차 배운 적도, 배울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선형대수를 가르칠 수 없듯 예술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현상이 왜 문화탄압인지 가르쳐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대신 대중들은 예술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부분을 파고들어야 한다. 슈즈트리의 미학을 예찬하며 이 작품의 사회적 의미와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한 뒤 이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모르는 무식한 원시인이라고 깔아뭉개야한다.(게다가 그건 사실이다) 대중들은 슈즈트리와는 비교도 안되게 혐오스러운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보기 위해 아귀같이 미술관으로 달겨들며 슈즈트리보다 더 정신 사나운 잭슨 폴록의 작품이 수천억원에 거래되자 앞다투어 작품 이미지들을 자기 블로그에 올린다. 당장 내일이라도 찰스 사치가 저 작가의 작품을 자기 콜렉션에 넣으면 대중들은 벌떼같이 몰려들어 슈즈트리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작가를 팔로우 할 것이다. 찰스 사치까지 가지 않아도, 딱 열명의 예술평론가가 신문에 기고해서 이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폄하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중들의 예술인식 수준은 딱 그정도밖에 안되니까.
 
얼마 전 배우 송강호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소문만으로도 그 힘을 발휘한다, 그런게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모든 제작자들과 배우들이 작품을 고를때 이걸 정부가 좋아할까 생각해보며 자기검열에 나서게 된다고. 그의 말처럼 검열은 창의를 제한하는 가장 위험한 예술가의 독이다. sns에서 활개치는 저 홍위병들은  몇만원 내고 구입한 미술전 티켓과 블로그 포스팅을 완장으로 차고 안 이쁜 예술에 테러를 가하며 진중권씨 글에 악플을 단다. 송강호가 지적한 것처럼 이제 설치미술작가들은 예쁜걸 좋아하는 대중의 취향을 고려해 자기검열에 나서게 되리라. 분명한 반달리즘이다.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대국 중국이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문화를 수입하는 나라로 전락하게 된 데에는 홍위병들의 힘이 컷다. 붉은 완장을 찬 어리고 젊은 청년들이 앞다투어 자기 취향에 맞지 않은 문화예술품들을 파괴하고 문인들과 예술가들을 꿇어앉혀 집단 린치를 가했다. 그런 검열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 결과 중국의 대중문화는 한국의 TV프로와 영화를 베끼기에 급급하고 중국인들은 가로수길에서 커피한잔을 마시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검열은 문화를 파괴한다. 한 예술품에 대해 자신의 감상을 표출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 그를 넘어 철거를 논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신중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