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30.

비트코인의 미래는 없다.

사람들은 비트코인이 새로운 통화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화폐가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주장이다. 단언컨대 100년뒤엔 비트코인은 오늘날 우표보다 무가치한 디지털 쓰레기로 전락할 것이다.

경제학에서 화폐의 기능은 세가지로 나뉜다. 교환, 저장 그리고 가치척도. 따라서 비트코인이 기존 화폐와 경쟁하려면 이 세가지 기능 면에서 적어도 한가지는 우월해야 한다. 먼저 교환과 저장에 있어 전산화 된 기존 화폐와 비트코인은 전혀 다를바가 없다. 어차피 서버에 숫자로만 기록되니까. 따라서 비트코인 추종자들이 말하는 구세대의 유물과 디지털 금화의 차이는 가치척도에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무분별한 정책에 따라 증발이 가능한 법정통화와는 달리 비트코인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늘어나므로 안정적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현실적으로 그들의 주장과는 완전 반대로 비트코인은 지구상 현존하는 그 어떤 법정통화보다도 가장 변동성이 심하다. 지난 2년간 비트코인은 약 1200% 폭등했는데 동 기간 달러는 약 4% 강해졌다. 가치가 안정적이라는 이야기는 "안 빠진다"는 뜻이 아니라 "안 변한다"는 뜻이다. 비트코인이 작년엔 5백불 올해는 2천불인데, 그 말은 작년엔 소나타 한대가 비트코인 6개였는데 1년만에 1.5개로 폭락했다는 말이다. 이런데 어떻게 제대로 된 가치척도의 수단이 되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가치가 심하게 변동하면 저장의 수단도 되지못한다. 달러와 미국채가 최고의 안전자산인 이유는 그게 항상 올라서가 아니라 그 가치가 크게 등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퇴자에게 어제도 100이고 오늘도 100인 자산을 사라고 권유하긴 쉽지만 제정신으로 어제는 10이었는데 오늘 200을 가는 자산에 수십년 돈을 묶어두라고 조언하긴 어렵다. 비트코인 추종자들의 말이 맞다면 애초에 비트코인이 이렇게 폭등하지 말았어야 했다.

게다가 그들의 가장 큰 실수는 누가 통화의 안정적 가치를 지탱하는지를 망각한 것이다. 달러는 원화보다 더 안정적이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통화지만 10불짜리 지폐를 가지고 우리나라 마트에 가봤자 살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택시나 버스도 탈 수 없다. 원화보다도 더 훌륭한 달러를 가지고도 아무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정부가 모든 거래를 원화로 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런 법을 정한 이유는 독자통화를 쓰는게 수익을 가져다 주고(세뇨리지) 통화정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할일없어서 귀찮게 원화지폐를 찍어대고 한국인들이 바보라서 더 좋은 달러대신 원화로만 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원화에 대한 수요는 항상 있다. 원화값이 폭락해서 환율이 3000원에 이르면, 해외 교포들은 전재산을 팔고 귀국해서 3배 더 부자로 살 것이고 한류 팬들은 엑소 콘서트를 1/3가격으로 볼 수 있으며 해외 소비자들은 소나타를 티코가격에 살 수 있다. 따라서 애초에 원화가격은 1/3로 폭락하기 어렵고 또 그만큼 폭등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5년전에 비트코인이 무가치했던 것 처럼 비트코인은 내일모레 당장 언제라도 똥값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 그래도 비트코인만 쓰라고 강제할 정부는 없다. 어떤 정부가 무슨 이점이 있다고 세뇨리지와 통화정책을 포기하고 비트코인을 유일한 법정통화로 선언하겠는가. 게다가 이미 비트코인과 유사한 디지털 통화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는데 비트코인의 독점적 지위가 유지될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결국 비트코인은 온라인게임의 골드, 우표, nba농구카드, H.O.T 사인시디 등 이제껏 거처간 수많은 유사통화들과 하나도 다를게 없다. 온라인에서 거래된 역사는 리니지의 아덴이 더 오래되었고, 우표는 그 가치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있다. 글로벌 인지도는 nba농구카드가 더 유명하고 추종자들의 열정면에서는 H.O.T사인 시디가 단연 1등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게임의 서비스종료와 함께 온라인 게임머니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이제 액면가100원짜리 우표는 90원에 거래된다. nba농구카드는 폐지가 된 지 오래며 H.O.T사인시디는 방안에 쳐박혀있다. 유행이 끝나면 비트코인의 말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트코인의 인기는 현대 통화정책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왔다. 연준이 양적 완화로 달러를 찍어내자, 달러가치가 폭락하고 하이퍼인플레가 올 것을 두려워 한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공급을 늘릴 수 없는 비트코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이퍼인플레는 오지도 않았고 달러의 가치는 폭락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통화의 본질은 늘 손에 잡히는 금속물질과 종이지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신용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 원시인들은 안정적으로 눈에 보이는 매개를 원했고 비트코인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럴거면 차라리 길가의 짱돌을 통화로 숭배할 것이지. 하지만 정부가 절대로 짱돌 본위제를 도입하지 않을 것 처럼 비트코인 본위제를 실시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로또를 사라.

2017. 5. 21.

문화계에 난입한 홍위병들


    
 
1. 여자의 다리가 트렁크 밖으로 묶인 채 나와있고 한 남자가 트렁크에 손을 얹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2. 한 흑인 여자가 하얀 테이블 위에 흰 족쇄로 묶여 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참고로 사진의 제목은 Bon Appetit.
 
둘 모두 여성에 대한 폭력을 표현한 사진이지만 sns에서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첫번째 사진을 본 사람들은 "성폭력을 표현하다니 개념이 썩었다"는 반응을 보이며 거칠게 비난했고 해당 잡지는 사과와 함께 발행본을 회수하여 폐기해야 했다. 두번째 사진을 찍은 David LaChapelle의 전시는 성황을 이루었고 snser들은 자랑스럽게 해당 전시회를 다녀온 사실을 자랑하기에 바빳다. 이처럼 모순된 대중의 반응은 세가지 무지로부터 나온다.
 
 
첫째, 예술 자체에 대한 인식 부족
 
양들의 침묵은 식인을 권장하는 영화가 아니며 대부는 조직폭력과 청부살인을 홍보하는 영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데이빗 라샤펠의 작품도 백인들에게 흑인 여성을 맛있게 먹으라고 권유하는 사진이 아니고, 맥심의 사진 작가도 여자를 묶어서 트렁크에 넣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소재만 보고 작가의 표현에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얼마나 많은 노벨문학상을 취소해야할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오르셰 미술관의 소장품을 불살라야 할 것인가.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에도 시체 성추행(백설공주), 살인(장화홍련전), 식인(헨젤과 그레텔), 장애인 비하(혹부리 영감), 동물학대(흥부와 놀부) 등 비 도덕적인 컨텐츠가 가득하니 전부 다 폐기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작품목록은 초라해지고 예술가들의 캔버스는 빈곤해지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예술은 몰상식한 반달리스트와 끊임없이 싸우며 발전했다. 여성의 음부를 확대하고 동성애를 그린 쿠르베가 그랬고, 벗은 여자들과 피크닉을 즐기는 신사들을 그린 마네가 그랬다. 뒤샹은 사람들이 소변을 보는 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했고, 데미안 허스트는 더 나아가 자신의 소변을 작품에 활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라이로 기억되는 대신 예술사에 미술의 지평을 넓힌 화가들로 기록되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대중은 이와 같은 노력에 찬 물을 끼얹으며 편집자가 첫번째 사진을 폐기처분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이는 또하나의 반달리즘에 불과하다. 차라리 '진부한 오브제나 클리세를 사용했다'고 비판한다면 모를까.
 
둘째, 메시지에 대한 이해 부족
 
백번 양보해 예술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하자. 그럼 왜 사람들은 맥심 잡지에 던지던 돌을 라샤펠에게 던지지 않는가? 이 작품이 주는 충격을 공감할 수 있게 작품을 좀 변형해 보자. 한 한국인 여성이 나체로 식탁위에 묶여 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녀 위에 욱일승천기가 그려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제목은 일어로 "맛있게 드십시오". 만약 이런 작품이 한국에서 공개되었다면 아마 한국인들은 미술관에 돌을 던지고 라샤펠과 협업한 명품 브랜드들의 불매운동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에 담긴 메시지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왜 핑크나 아쿠아블루, 혹은 모델의 피부 톤이 아니라 하얀 색을 썼겠는가? 그것도 작가는 이것이 의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식기까지 모두 흰색으로 칠했다. 이래도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흑백 인종갈등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외계인이거나 맹인이다. 그런데도 대중이 라샤펠의 작품에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다. 대부분은 미술관에 셀카를 찍고 블로그 포스팅을 하러가지, 작품을 읽으러 간 것이 아니니까.
 
셋째, 사대주의.
 
앞서 맥심 표지사진에 대한 논란은 영국의 한 코스모폴리탄 에디터로부터 나왔다. 우리나라 대중이, 자기 독자들에게 여자의 오르가즘을 판별하는 기술따위나 알려주는 것이 직업인 사람에게 예술과 표현에 자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이유는 그가(혹은 그녀가) 서구 잡지의 에디터이기 때문에 그렇다. 도대체 맥심과 코스모폴리탄이 뭐가 그리 다르길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는가?? 반면 파격적인 라샤펠의 작품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서구 문화권에서 성공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만약 라샤펠이 첫번째 사진을 찍고, 맥심 표지에 두번째 사진이 등장했다면 대중의 반응은 180도 달랐을 것이다.(물론 그가 찍었다면 저렇게 촌스럽진 않았으리라) 대중들은 예술을 판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도, 본인이 이를 판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권위에 쉽게 의존한다. 그들은 특히나 영어 혹은 불어를 쓰는 금발머리 백인은 그 권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것 같다.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며 대중들의 문화소비도 늘어났다. 사람들은 예술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쓰고 있지만, 이를 이해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중의 인식과 이해는 30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문화소비가 늘어나며 대중들이 스스로 예술을 이해할 소양을 갖췄다고 착각하며 작가와 작품에 사회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지와 무관심으로 무장한 이들이 갑자기 예술계에 난입하여 도덕적 잣대와 다수의 취향, 정치적 메시지 등의 채점표를 만들어 작품 검열에 나서기 시작했다. 멀게는 조영남의 대작사건에서부터 가깝게는 서울역 고가도로의 설치미술까지, 이 문화계의 홍위병들이 중세의 눈으로 현대를 심판하며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을 여러차례 봐 왔다. 문화계 인사들과 예술인들은 늘어나는 작품과 티켓판매 실적, 그리고 sns 팔로워 수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것이 아니라 대중과 각을 세우며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뒤를 따라다녔던 대중은 곧 앞서나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만들고 그리고 쓸지 지시할 것이다. 그들에겐 당신들은 자신의 취향을 맞춰줘야 하는 영화배우나 가수나 다름 없으니까. 그때에 이르면 미술계는 마치 청소년관람가 영화만 남은 밋밋한 영화제처럼 죽어있을것이다.

2017. 5. 6.

sns의 프로테스탄티즘

오늘날 사회 여론의 큰 축은 sns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스턴트식으로 소비되는 매체의 특성 답게, sns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들을 보면 단편적인 선악구분과 흑백논리의 잣대를 적용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한다. 그래서 결국 많은 주장들은 엄격한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밀곤 하고, 그 결과 실생활에서 아무도 지키지 않는 새로운 윤리규범을 탄생시킨다. 나는 그들을 sns상의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른다. 이 신프로테스탄티즘을 뜯어보기로 하자.

1. 성 상품화 금지
설리가 sns에 게시한 사진에 대한 기사나 섹시함을 강조한 광고의 티져 영상 아래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비판들이 있다. "여성을 상품화" 혹은 "로리 컨셉의 성적 욕구 자극"을 시도 했다는 것. sns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와 같은 행위는 사악하고 따라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것 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열광한다. 여성 팬들이 엑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시각적으로 "섹시"하기 때문이다. 정종철이 머리를 염색하고 춤을 춘다고 해서, 조정치가 랩을 하며 카메라를 노려본다고 해서 여성 팬들이 열광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남성 팬들은 트와이스의 성적 매력에 돈을 쓴다. 쯔위가 노출이 없는 옷을 입고 사나가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들이 그들의 섹시함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부르카를 써서 얼굴까지 가리고 같은 노래와 안무를 한다면 그렇게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설리의 사진에는 종교적 근본주의 수준의 검열잣대를 들이대던 snser들은 kpop가수들의 뮤직비디오엔 앞다투어 좋아요를 눌러댄다.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개념을 빻은건 설리나 광고주가 아니라 걸그룹 보이그룹을 보며 헥헥대고 상의를 반쯤 벗어제낀 다니엘 헤니가 사라는 제품을 위해 지갑을 여는 본인들의 이중잣대다.

논의를 좁혀 논란을 "로리타 이미지"로 한정해보자.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문제지만 그 범주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샤이니가 "누난 너무 예뻐"라는 노래로 히트를 쳤을 때 멤버 5명 중 3명은 미성년자였다. 그럼 당시 그 노래를 소비하던 성인 여성(혹은 게이)들은 모두 미성년 성범죄자에 해당한다. 이는 왜 비난하지 않는가? 더욱이 욕망 그 자체, 혹은 이를 표현하는 행위를 곧장 범죄로 다루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살인은 미성년 성범죄처럼, 혹은 그 이상의 사악한 행위이다. 그런데 고대전쟁에서의 살육이 영상의 주 소재를 이루는 영화 "300"은 국내에서만 300만명 가까운 관람객을 모았고, 연쇄살인마의 끔찍한 살인과정을 표현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220만명이 자발적으로 관람했다. 성인 여성이 교복을 연상하는 옷을 입고 야릇한 표정을 지은 사진은 "미성년자의 성적 매력"을 표현했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실제로 살육장면, 혹은 살인자의 모습과 심리를 실감나게 묘사한 영화가 좋아서 보러간 저 사람들은 어떤 비난을 받아야 할까? 과연 로리타적 표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른 비윤리적 행위를 표현한 예술매체를 보며 일관된 기준을 적용했을까?

2. 외모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를 욕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피해자인 척 하지만 사실 가해자들이다. 그들이 만약 이국주가 선전하는 청바지를 사고, 김상호가 디제잉을 하는 클럽을 찾아간다면 외모 지상주의는 더이상 없을 것이다. 광고주들은 미인 모델을 쓰고 그들의 외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왜? 소비자들이 외적 아름다움에 민감하니까. 회사 면접관들도 평가점수에 지원자들의 외모를 반영한다. 왜? 심지어 지원자들도 편의점이나 까페에 가면 알바생들의 외모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니까.(자영업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외모지상주의적 행위에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당신이 이쁜여자, 혹은 잘생긴 남자를 보며 헤헤거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못난 외모가 차별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타인이 내 내면의 가치를 몰라준다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외면만 보는 위선자들이다. 사실 어쩔 수 없다. 보이지도 않는 내면을 어찌 볼 것이며,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살아가는데 그들의 진면목을 보는데 일일히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러니 남들을 외모지상주의로 비난하지마라. 당신도 그 중 하나니까.

3. 동물보호
강아지는 귀엽고 예쁘다. 나는 처음 보는 강아지라도 반나절을 질리지 않고 데리고 놀 수 있다. 너무 귀여우니까. 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 멍청한 박애주의를 아무데나 들이대는 것은 다르다. 현재 순종 강아지들은 대부분 인간의 눈에 예뻐 보이는 기형 개체들을 근친교배해서 낳은 결과물이다.(그래서 순종견은 유전병에 시달린다. 아는 수의사에게 물어보라) 그 뒤에도 그 개들을 거세하고 성대를 절개하며 인간들도 적응 못하는 좁은 공간에 쑤셔넣어 기르는 것은 전부 애견인들이다. 어떤 동물보호론자들은 악어가죽이나 모피코트를 입은 사람을 잔인하다고 부르는 무식을 뽐낸다. 그중 몇몇은 죽은 소의 시뻘건 살덩이를 고온에 구우는 사진을 좋다고 인터넷에 올려 욕먹기도 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도 동물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치약, 샴푸, 인슐린, 책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공산품에도 동물의 원료가 들어간다. 더 나아가 동물은 죽이면 안되고 식물은 죽여도 되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정말 생명을 사랑해서 해치기 싫다면 가을에 떨어진 낙엽만 먹거나 아니면 자연사한 동물의 사체를 파먹어야 한다. 그도 싫다면 본인이 직접 광합성을 하던가. 최초의 진화 과정에서 동물세포가 식물세포와 다르게 분화한 특징은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섭취한다는 점이다. 그런 동물중에서도 뭐든 다 먹을 수 있는 잡식성 포유류로 태어나 "생명을 사랑하니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건 첫째, 위의 내용을 모르는 멍청이거나 둘째, 죽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아직 안 죽고 살아있는 생명보호론자들은 다 멍청이다.

어떤 생명보호론자들은 "어쩔수 없는 생명소비는 인정하되, 나머지 동물들의 행복권도 인정하자"라며 타협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의미없는 허언에 불과하다. 동물들의 행복을 늘리려면 인간의 행복이 아닌 수를 줄여야 한다. 지구상에는 70억의 인구가 300억마리 이상의 가축과 공존하고 있다. 이 가축 중 절대 다수는 가금류인 닭으로 250억마리를 차지하고 나머지 50억마리 이상의 가축은 대부분 포유류이다. 그리고 인간과 이 나머지 가축의 생활 가능 반경은 거의 같다. 즉 인간이 못살 땅에서는 가축도 못산다. 가축에게 더 많은 공간을 할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활 반경을 줄여야하는데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수를 줄여야 한다. 즉 가축을 더 행복한 환경에서 키우려면 어떻게든 인간이 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정책을 지지한 강력한 정치단체가 있었다. 바로 나치였다. 영화제작장에서 동물들의 촬영시간 제한, 동물학대 처벌 등 유럽에서 가장 선진화 된 동물보호법을 도입한 것은 바로 나치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절멸시킬 게획도 함께 입안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snser들이 들이대는 프로테스탄티즘적 주장들은 일상 생활에서 통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본인들도 그 규범에 따라 생활하고 있지 않다. (sns에 대한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생각하는 시간보다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시간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스스로 주장 안에 내재된 모순을 깨달을 시간도 없다. 그 결과 종교적 원리주의자들 마냥, 우르르 몰려다니며 마녀재판을 하고  희생자들을 사냥하러 다닌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을 신 프로테스탄트라고 일컫는 것은 적절한 은유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자화자찬)

2017. 5. 3.

문재인 지지자들과 박사모들의 놀라울 만한 유사성

(이 글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방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지지자들의 이성을 상실한 불통과 비합리성을 지적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박정희가 사법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과 공산주의가 낫다는 가치판단은 무관해야 하지만 많은 박사모들은 이 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자기가 지지하는 인물을 신격화 시키며 일말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분은 선이자 정의요, 이에 대항하는 무리들은 사악하다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이는 2030대 문재인 지지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들과 박사모들 사이에서 놀랄만큼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다. 두 계층 사이의 세대차, 정치적 견해 차이, 그리고 경험의 차이를 고려하면 이 점은 단순히 놀람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최순실 게이트가 시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발점이 정유라의 입시비리라는 것을 감안하면, 2030대들이 문준용씨 의혹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소위 꼰대기질이 가장 가득한 공공기관에 지원하면서 점퍼를 입고 귀걸이를 달고 찍은 사진을 내고도 입사하는 것이 아버지의 힘 없이도 가능하다는 주장은, 다른 지원자들이 면접관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쓴 결과물-천편일률적인 입사원서 사진들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그 지지자들에겐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적폐세력을 지지한다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고 전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직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지 않은 박근혜-최순실의 비리 처럼 고 노무현 대통령의 금품수수 비리도 충분한 의혹과 물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보수의 정치탄압이라는 "가치판단"으로 둔갑한다. 더욱이 형 노건평씨는 봉하대군이라고 불리며 돈을 받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검찰수사 결과 사실로 드러나 실형까지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지지자들은 그 당시 우병우처럼 민정수석을 맡았던 문재인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있다. 문재인 지지자들이 자신의 후보를 신격화하며 치부를 감싸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모습은 박정희-박근혜를 대하는 박사모들의 모습과 아주 동일하다.
 
사실 이는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2030대 문재인 지지자들은 박사모들의 아들딸들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 둘은 닮아있다. 게다가 오만함과 무식함까지 똑닮았다. 2030대들은 부모세대의 정치관과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지만 정작 선거날 놀기 위해 투표권을 포기하는 것은 그들이다. 단언컨대 저들이 이 난리를 피우지만 이번 선거에서도 이들의 투표율이 가장 낮을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투표도 안해 놓고, 지난 대선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문재인 후보 대신 박근혜가 당선된 것은 투표조작 때문이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남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이를 조작과 공작으로 모는 그 의식구조는 촛불시위대를 종북세력의 선동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박사모들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더욱이 2030대는 한국의 민주화 산업화에 별다른 기여도 하지 않고 무임승차한 세대이면서, 정작 민주화 항쟁에서 피흘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한 세대를 무시한다. 박사모들이 젊은계층의 불만을 이해하지 못하듯, 이들은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노년계층의 분노를 공감하지 못한다. 젊은 꼰대들이 나이든 꼰대를 꼰대라고 비난하는 블랙코메디를 곳곳에서 보고 있다. 코메디 프로인 Saturday Night Live는 토요일 밤에만 볼 수 있지만 비리를 비난하며 또다른 비리를 옹호하는 이 개그는 Everyday 24hrs Live다.
 
물론 그들이 조금 더 똑똑하다면, 이것이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권력남용을 용인하는 시스템의 문제고, (존재하지도 않는) 더 도덕적인 지도자를 고르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비리를 처벌하는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만큼이나 현명하지 못하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라. 이 글은 문재인도 저런 비리가 있으니 뽑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15명의 후보 모두 개인 비리가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의 도덕 수준은 다 거기서 거기고 비리를 용인하는 후진 시스템 아래선 비리를 저지를 능력이 있는 사람과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 두 부류 뿐이니까)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은 같은 신에게 기도하고, 성경들과 선지자들을 공유하지만 동시에 서로 가장 많이 죽여댄 종교이다. 외계인이 그 둘을 본다면, 정말 똑 닮은 그 둘이 서로를 다르다고 믿으며 싸우는 모습이 아주 신비롭게 느껴질 것이다. 내 눈에는 문재인 지지자들과 박사모들이 그렇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