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
6년 5개월만의 금리 인상
2017. 11. 29.
자애로운 노무현과 파렴치한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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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
2017. 11. 25.
집을 당장 사라고 외친지 어언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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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이들의 정모: 2년 전, 공급부담으로 집값이 빠질거라는 전망을 한 기자와 거기에 달린 베스트 댓글들. |
2017. 11. 16.
대한민국 외교, 또 낙제
2017. 11. 13.
왜 대한민국의 청년 실업은 줄어들지 않는가?
청년 실업은 경제성장이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실패를 세계적 문제로 승화하는 이들에게 차가운 물 한잔을 권한다. 경제성장은 인당 GNI가 1만불이 넘으면 주저앉기 마련이고 3만불이 넘으면 대체적으로 3%에 수렴한다. 전 세계가 다 그런데 뭔놈의 저성장 고실업. 게다가 외환 위기 이래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3%대로 안정적이었고 지난 5년간 취업자 수는 155만 명이 늘어나지 않았나. 남유럽 국가나 타 신흥시장과는 달리 한국에서 고실업은 일어난 적 없다. 일자리 수만 두고 보면 우리나라 전체의 고용시장은 아무 문제가 없다. 실업은 오로지 청년들만의 문제고 전반적 경제 상황과는 무관하다.
물론 청년실업 데이터를 보면 그 전망은 장미빛 보다는 똥색에 가깝다. 장미에서 추출한 향수 원액을 짙게 농축하면 똥냄새에 가깝다지만 이 숫자는 그냥 똥이다. 정부 발표 통계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10-30대 근로자는 고작 2만여 명이 증가했는데, 50세 이상의 노동자는 무려 151만 명 증가하여 사실상 지난 5년 간의 취업시장을 50-60대가 독차지한 것이다. 2 대 151. 이런 스코어는 20대가 60대 할배들과 농구시합을 해도 만들기 어렵다. 게다가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무참하게 두들겨 맞는 쪽이라니. 이럴수가. 이렇게 대한민국의 고용시장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고 그 결과는 아버지의 승리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기업들이 노쇠한 아버지를 선호하며 젊고 패기 넘치는 청년들을 외면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벌건 대낮의 태양 만큼이나 자명하다. 바로 청년 노동자들이 밥값을 못한다는 것.
92년생 지영씨를 고용하면 기업이 매 달 250만원의 생산성을 낸다고 치자. 그런데 그녀의 월급이 200만원이라면 기업은 지영씨를 열 명 스무 명 뽑는다. 노동시장에서 평균연봉이 올라가든 추가 노동자의 생산성이 낮아지든, 그 둘이 같아질 때 까지 뽑는다. 왜? 돈이 되니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란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현실에서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고용해서 투입해봤자 월급을 뽑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반대로 생산성 만큼의 월급을 준다고 하면 92년생 지영씨는 기분 나빠하며 면접장을 박차고 나갈테지만.
그러나 거시적으로 이런 실업은 장기간에 걸쳐 유지될 수가 없다. 정상적인 시장에서는 물건이 안 팔리면 가격이 내려가고, 그러면 수요가 증가해 수급이 맞게 된다. 고용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실업이 높아질 경우 임금이 내려가면서 기업의 고용 수요가 늘고 따라서 실업도 해소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균형점에 도달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경기가 불황일땐 단기적으로 실업률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청년 실업은 장기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 경제는 불황과 거리가 아주 멀다. 청년들이 구직난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중소기업들은 구인난을 겪고 있으니 청년들은 직업을 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 구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의 핵심 질문은 왜 젊은 저숙련 신입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받아들이지 않는지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매몰비용. 현재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세대는 약 70%는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고용의 85%를 담당하는 중소기업 일자리의 상당수는 굳이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하위권 대학의 졸업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인기가 없는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자신의 4년 이라는 시간과 5천만 원이라는 등록금 투자가 취업에 별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용만 보면 1류 대학이나 하위권 대학이나 동등하지 않은가. 본전 생각이 자꾸 떠올라 취업 눈을 낮추지 못하는 것이 아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투자에서 고작 수백만원의 손실에 손절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인데 하물며 20대의 전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졸업장을 손절하겠는가.
두번째, 캥거루 족의 증가. 굶어죽는 대신 저임금 저숙련 일자리를 받아들여야 할 청년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은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고학력 실업난이 심했던 조선후기에 허생의 마누라는 고학력자 남편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나가서 상것들 처럼 밭이라도 갈라며 집밖으로 쫒아냈다. 허모씨(28세, 후암동, 고시생)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부모가 있었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실직자로 남았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처럼 자녀가 늦은 나이까지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손벌리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의 청년 실업률은 EU 내에서 가장 높다.
세번째, 높아진 눈높이.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단군 이래 가장 잘 먹고 잘 자란 세대다. 1990년대 강남의 초등학교 교실엔 영어를 할 줄 아는 학생이 하나 있을까 말까 였는데 이젠 시골 초등학교에도 원어민 선생님이 들어온다. 그들은 70-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놀면서도 대학만 졸업하면 꿀빨면서 취직하지 않았냐며 부러워하지만 그 시절엔 바나나는 부잣집 애들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과일이었고 고등학생들은 교련복을 입고 전직 군인 교사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군사교육을 받는 부조리를 겪었다. 그렇게 자라 대학에 가면 학자금 대출 이런 혜택조차 없어서 부모가 소와 땅을 팔아 학비를 대야 했고 그 대학을 졸업해 취직하면 헝가리나 멕시코 노동자들과 엇비슷한 임금을 받았다. 그게 부럽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구로공단이나 동남아로 가시라. 현재 우리나라 청년들이 가장 호화스러운 삶을 살 수 있던 것은 본인들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인 부모들이 그 모든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회사로 치면 이제 그들은 부장의 월급으로 놀고먹다 신입사원의 연봉을 벌기위해 취직을 해야한다. 평생 강남에서 자란 20대는 강북으로 쫒겨나는게 당연한 일이고 아부지 카드로 해외여행 다니던 아들은 이제 부산으로 피서 가는 일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곱게 자란 이 캥거루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세상이 부조리해서 그런거라며 투덜거리기를 택한다.
따라서 50, 60대들이 취업시장에서 20대들을 누르고 완승을 기록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상대적으로 아들딸 보다 학력 수준이 낮은 아버지 어머니들은 취업시장에서 눈높이를 높일 일이 없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부모가 있는 청년과, 부양해야할 가족이 주렁주렁 달린 부모 중 누가 더 절박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가난한 개발 도상국에서 태어난 5060대는 남유럽 선진국 수준으로 자란 2030대가 꺼리는 직업을 기꺼이 택한다. 물론 아들과 아버지가 똑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지는 않지만 위와 같은 과정을 거처 하청업체는 신입사원을 뽑는 대신 거래처 부장을 더 싼 연봉에 모셔오거나 아줌마 영업사원을 뽑는 것이다. 155만개 일자리 중 151만개를 휩쓴 실버 세대의 신화는 이렇게 씌여졌다.
나는 우리나라의 기업문화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청년들이 그걸 못 견디는게 나쁘다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다. 쓸모없이 상사 눈치를 보며 야근하는 비효율적 문화는 하루바삐 없어지는게 좋고 대졸 청년들이 졸업장을 찢어버리고 고졸자와 외노자와 어깨를 맞대고 일하는 것이 옳다는 소리도 아니다. 나는 선악에 대해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적으로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해 볼 뿐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기대와 현실의 불균형에 있다. 모두들 세계 일류 국가들과 경쟁하는 삼성 현대 LG SK를 바라보며 대학 학비를 대고 미래에 투자하지만 그들이 고용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미미하다. 대부분의 고용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대기업과는 달리 이들 중소기업은 동남아 후진국과 경쟁하고 있고 자영업의 노동생산성은 OCED 최하위를 두고 박터지게 싸우고 있다. 여기서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는 정치와 여론이 결정할 문제이다. 노동 집약적 산업과 동남아 스타일에서 탈피히여 중소기업들의 생산성을 강화하든 5060대가 늙어 죽을때까지 기다리든, 미래에 어떤 길을 택할지는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오늘날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실상부터 알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인정하기 싫을 만큼 불편하고 시선을 맞추기 어려울 만큼 어글리 할 지라도.
2017. 11. 12.
평등을 외치는 돼지들, 그리고 안보타령을 읇는 얌체들
Global Rich List의 분석에 따르면 연봉이 3500만원이 넘는 사람은 지구상 70억 인구 중에서 상위 1%에 해당된다.(링크)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3,480만원)은 이미 이 수준을 넘어서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다수는 전세계 기준으로 최상위권이다. 만약 UN이 인류의 평등을 위해 지구상 상위권에 해당하는 한국인들에게 40%의 소득세를 걷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한다면, 지금 평등을 외치는 한국인들은 그때도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펼치며 기꺼이 본 적도 없는 이들을 위해 소득을 바칠까? 아마도 그 날이 오면 그들은 현재 강남 주민들이 외치는 것과 똑같은 주장을 펼칠 것이다. 상위 1%의 배부른 돼지는 더 배부르기 위해 평등이란 가치를 도둑질해 정의의 용사 흉내를 낸다.
국경일이 되면 압구정 단지에는 태극기가 자동으로 걸리고 아파트 옆면에 프로젝션으로 대형 태극기 영상을 투사한다. 강남은 자칭 "안보 1번지"라고 주장하지만 이중국적자나 병역기피자 비율을 보면 아마 이 곳이 전국에서 1위일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휴전선에서 가까운 파주나 국방부가 있는 용산 사람들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안전한 한강 이남의 강남구가 왜 허구한 날 안보타령을 읇는가? 정 걱정되면 군대라도 가고 반포 한강공원에 사드를 배치해달라고 청원운동이나 할 것이지. 이렇게 말과 행동이 어마어마하게 다른데 어떻게 그 이면에 안보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겠나.
우리는 돼지가 얌체들 보고 탐욕스럽다고 욕하고, 얌체가 돼지들보고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하는 촌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 처럼, 이를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눈에는 희극이지만 직접 겪는 우리들에겐 서글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아멘.
2017. 10. 30.
서민 정치인들과 진짜 서민.
- 김현미 국토부 장관은 다주택자들을 향해 "집을 파시라"라며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지만 알고보니 본인이 2주택자임이 들어났다. 이에 대해 김 장관은 나머지 한 채는 은퇴용으로 쓰려고 마련한 것으로 투기목적이 아니라고 답했다.
- 이기성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8채의 주택을 보유해 공직자 중 1위를 차지했다는 비난에 대해, "모두 합해도 강남의 집 한채값도 안된다"고 해명했다.
- 중기부 장관에 내정된 홍종학 후보자는 장모에게 압구정 집과 빌딩을 상속받고, 부인이 딸에게 편법으로 재산을 상속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는 홍 후보자가 이제껏 강력하게 비판해 온 부의 대물림의 전형적 사례라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흥미롭게도 저 셋은 모두 강남에 연관되어 있다. 김현미는 강남 재건축을 콕 집어 지적하며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고 이기성은 자신의 재산목록을 다 합쳐도 강남의 아파트 하나 만 못하다며 면죄부를 얻으려 했다. 홍종학은 평생 부의 세습을 반대하다가, 장모가 압구정 아파트를 준다니 덥썩 받았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서민의 선이 어디에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바로 한남대교와 영동대교 사이의 한강, 한마디로 강남.
2016년 기준 강남구의 인구는 약 56만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수준에 불과하다. 서초구나 송파구를 포함해도 총 인구의 3%밖에 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 늘상 사회 지도층들만 만나고 다니는 진보 정치인들은 강남3구를 제외한 나머지가 죄다 서민이라고 믿지만, 이 기준은 "진짜 서민"들의 눈높이와는 너무 다르다. 부의 피라미드에서 서민편 정치인들의 위치가 실제로 어딘지 그 좌표가 노출되자, 진짜 서민들은 그들이 결코 자신과 같은 층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네들이 어디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서민들은 고개를 수직으로 꺾어 저 피라미드의 끝을 쳐다봐야 했고 실상 그 곳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욕하던 적폐 상류층(혹은 상류 적폐층)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동네서 껌좀 씹는다는 날라리가 우연히 독서실에서 자칭 학교 일진이라는 애를 만나 친해져서 담배 피고 미팅도 하고 수업도 째고 다녔는데, 알고보니 걔가 한성과학고 일진이라 나중에 연세대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런 기분일까. 현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껌 씹던 날라리는 어금니 꽉 깨물고 그 과학고 일진을 줘패러 간다. 여론도 마찬가지다. 진짜 서민들은 자칭 서민 정치인들을 패러 간다. 아니 패지는 못하니 뒤돌아서 인터넷에 악플을 단다. 과학고 학생이나 서민 정치인들이 뭘 잘못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편인 척 하며 내 호의를 넙죽넙죽 받아 처먹은 것이 분하고 고까운 것이다. 가재는 게편이랬더니 개가 게 행사를 했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지 언제 똥색이라 했느냐.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듯 예전의 지지율은 곧 악플로 돌변했다.
애초에 이 사단은 사람들을 부자와 서민으로 양분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심지어 수능에서도 1등과 꼴등 사이에 공식 등급이 9개나 있는데 하물며 사회계층이 두개 뿐이랴. 농촌 영농인 입장에선 도시 아파트 산다고 으스대는 것들이 상류층이고, 지방도시 사는 사람은 광역시 사는 사람을 질시하며, 광역시 주민들은 수도권 사람들을 기득권층으로 본다. 소주, 석고분진, 땀냄새 등 서민 내음 풀풀 풍기는 지옥철 1호선을 타고 퇴근하는 수도권 사람들은 관악산 넘어가기 전에 내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위화감을 느끼지만 내린 이들은 또 외제차로 출퇴근 한다는 동기들을 떠올리며 짜증을 낸다. 이러한 계급 나누기는 마치 프렉탈 구조처럼 나누고 나누고 나누어도 계속 반복된다. 심지어 재벌모임에서도 급이 나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부자와 서민이라는 구도는 소규모 모임이라면 몰라도, 나라 차원에서는 존재 할 수 없는 그림이다. 게다가 애초에 "서민 정치인"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정치인이 될 정도로 잘 배우고 잘 먹고 힘있는 이를 "서민"으로 내려다 볼 사람은 평창동이나 한남동의 3층짜리 단독 주택에 살며 더 잘 배우고 더 잘먹고 더 힘센 극소수 사람들 뿐이고 그들은 대개 서민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정치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을 서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여. 자신을 서민이라고 포장하는 정치인들에게 속지 말지어다. 그들이 닳아 헤진 구두를 신고 나오든 낡은 가방을 들고 다니든 그들이 당신을 모르는데 당신은 그네들을 알 정도로 유명하고 힘 있는 사람이라면 명절 때마다 구두와 가방과 최고급 한우 세트와 에르메스 넥타이를 갖다 바치려고 대기표를 뽑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빈티난다고 좋다고 지지하지 말고, 뭐 꼭 지지할거면 빈티가 알고보니 빈티지였다고 해서 빡쳐서 악플달지도 마라. 그들은 애초에 당신과 같은 리그에 있지도, 당신들의 이익을 대변하지도 않았다. 빈부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졌을때가 참여정부 시절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