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3.

Adarashi Fantasy-최경태

구글 검색창을 열고 최경태 작가를 검색해 보자. 아, 그전에 성인인증부터.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이나 사무실이라면 화면을 가릴 것을 강력히 권한다. 변태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다면. 20세기에 마광수가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최경태가 있다고 할까.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지, 그의 그림 앞에서는 마광수조차도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일 지경이니까. 그가 표현했던 소재들은 사회적 통념이나 규범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오죽하면 표현의 자유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미술계에서도 찬반 여론이 첨예하게 대립했을까.  

1957년에 태어나 뒤늦게 미대를 졸업한 그가 민중화가로 제대로 활동해 보기도 전에 군부정권은 무너졌고 운동권의 시대 역시 막을 내렸다. 동시에 함께 연대하며 투쟁했던 사람들은 시나브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민주화 운동 경력을 스펙으로 삼아 출세 가도에 나섰고 어떤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집과 차를 샀다, 그리고 민중화가 노선의 막차를 탄 그만 덩그러니 남아 붓을 들었다 조각칼을 들었다 하며 방황하다 칩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4년간 웅크려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세상으로 다시 뛰쳐나왔다. 헐벗은 소녀들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세이셔널 한 포르노그래피 작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민중예술에서 포르노그래피로 급격히 전향한 그 배경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덧붙였지만 그는 자신의 변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나라에서 화가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김일성을 그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포르노를 그리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전자의 시대가 끝났기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고. 작가는 "그래, 나는 포르노가 좋다"라고 외치며 엄청나게 센세이셔널한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고 있노라면 마광수 따위는 수줍은 새색시같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을.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와 정치를 향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대통령선거에 나서자 그는 김영삼의 선거 포스터와 포르노 사진들을 합성해 색정시대라는 작품을 내놓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던 해에는 하체를 노출한 채 다리를 벌린 여성을 작게 그려 넣고 큰 글씨로 "씹새끼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라고 적은 작품을 그렸다. 또 다른 작품에선 개 목걸이를 목에 걸고 팔걸이의자에 교복 차림으로 앉은 여학생의 이미지 위에 "우파 정당 한나라당은 자폭하라"라는 구호를 크게 적어 넣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공권력이 일일히 정해주던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 포르노그래피란 나는 내가 꼴리는 대로 살겠다는 정치적 반항과 저항의 도구와도 같았다.

그는 결국 2001년 개인전을 연 후 음화전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항소를 거쳐 대법원까지 간 끝에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 31점이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당시 그의 전시회 타이틀이 "여고생-포르노그라피2"였으니, 입버릇처럼 표현의 자유를 외치던 미술계와 평론가들조차도 둘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일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덕분에 최경태 작가는 가장 유명한 포르노그래피 작가가 되었고 이후에도 그는 서정적이면서도 폭력적이고, 도발적이며 변태라고 불릴만큼 센세이셔널한 그 작품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동료 작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이 개기는 건 (최)경태 뿐이야"

최경태 작가가 유죄판결을 받은 지 대략 20년이 지났다. 마지막 군사정권의 수장도 죽었고 공권력의 검열과 탄압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더욱 자유롭고 관대하게 변했을까. 잊힌 이 작가의 옛 작품들을 다시금 둘러보고 있노라면 불편한 현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자를 들고 치마 길이를 재는 경찰은 없지만 익명성 뒤에 숨어 남의 옷차림을 재단하고 린치를 가하는 인터넷 자경단의 숫자와 영향력은 전례 없이 커졌다. 국민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주입하던 이들은 모두 죽고 없지만 이제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핑계로 서로가 서로를 단속하고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에 위화감을 한가득 끼얹은 것은 한때 작가와 연대하며 공권력에 대항하던 운동권 정치인들의 오늘날 모습일 것이다. 작가가 21세기에도 숨가쁘게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공권력에 뻐큐를 날리는 동안 586, 아니 이제 686 정치인들은 권위주의로 무장하고 자신들이 몰아냈던 권력자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안을 지지하고 사회적 린치를 조장하며 성적 폭력을 묵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가는 억압당하는 민중을 강간당한 여성들로 표현했는데, 그 작가를 지지한다면서 동시에 실제로 어린 여성들의 속옷 안에 손을 쑤셔 넣기에 바빴던 정치/문화계 진보 인사들의 민낯들은 이 아이러니의 표상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자칭 진보적이라 자처하던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잡아 더욱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었던 그 시점에 작가는 창작의 의욕을 잃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꼴려야 그릴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토로했다. 2021년 2월 어느 날,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으로 연명하던 그는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그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누구고 또 그 경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 온갖 질문들을 던지고 억압자들에게 꼴리는 대로 뻐큐를 날리던, 가장 센세이셔널 했던 작가 최경태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기자: 포르노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고 성적인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작가님은 더 이상 (여고생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작가: 예, 그리지 않을 겁니다.


2008년 Adarashi Fantasy전시 작 중에서. 
(그나마 덜 센세이셔널한 작품)


2024. 2. 9.

청진기와 6펜스, 그리고 아비트라지

병에 걸린 한 남자가 신에게 애원하며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하나님 이 병에서 낫게 해주신다면 집을 팔아 그 돈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얼마 안 가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가 아까워졌다. 못된 생각을 하면서도 신의 벌을 받기가 두려웠던 그는 다음과 같은 꾀를 내었다. 바로 매수자에게 그 집을 시세의 1/100에 불과한 금화 한 닢에 파는 대신, 기르던 고양이 한 마리를 금화 99개에 사야 한다는 조건을 다는 것. 매수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기괴한 소리를 꺼내는 집 주인과 거래하는 것이 꺼림직했지만 그래도 원하던 집을 시세보다 약간 싸게 사는지라 이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을 판 그 남자는 신이 나 교회로 달려가 금화 한 닢을 바치고 이렇게 말했다. '전 약속대로 집 판 돈을 모두 바쳤습니다 하나님' 

트레이더라면 여기서 훌륭한 아비트라지의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고양이와 집의 가격은 반드시 왜곡될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 현실에도 이런 기괴한 거래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대한민국의 의료시장. 우리나라의 병원에서 필수의료는 바로 집이 되고, 반복된 보험진료나 비보험 항목은 고양이가 된다. 이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보험과 비보험이 어떻게 다른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시스템은 모든 의료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보험과 비보험. 필수적인 의료 서비스는 보험으로 분류하여 나라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인 미용/성형 등은 비보험으로 분류하여 병원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 보험으로 분류된 의료 서비스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는데 대략 70-80%를 보험에서 부담하고, 치료를 받은 개인은 나머지 20-30%를 낸다. 이 비율은 몇몇 항목의 경우 10% 미만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엄격한 고정가격제를 도입하는 여느 시장이 그렇듯이 의료시장에서도 가격의 왜곡으로 인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보험 진료는 복지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인이 부담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데, 심지어 그 가격조차도 비용의 대부분을 지불하는 정부가 정하므로** 보험 진료의 수가는 늘 과도하게 낮다. 따라서 필수적인 진료를 보는 병원은 다음 두 가지 행위로 손실을 보전해야 한다. 하나는 추가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보험 진료를 대량으로 하거나, 임의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비보험 진료를 끼워 파는 것. 집을 싸게 팔면서 망하지 않으려면 고양이도 비싸게 팔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환자도 이 시스템에 만족했다. 다른 나라였다면 약 10-15만 원어치 청구서를 받았을 진료를 단돈 만 원으로 받을 수 있으니 안 갈 이유가 없다. 목이 칼칼해서, 콧물이 나서, 그냥 회사가 가기 싫어서, 등 오만가지 이유로 한국인들은 병원으로 달려간다. 안 가는 것이 바보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2017년 이전 시장에서 결정된 MRI 촬영의 비급여 가격은 대략 60-70만 원 선이었다. 하지만 2018년 MRI를 보험 진료로 포함하자 심평원은 해당 진료행위의 가격을 약 27-29만 원으로 고정했고, 그중 환자가 직접 내는 금액을 그 절반도 되지 않는 8-17만 원으로 책정했다.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량은 증가한다. 2017년 140만 건에 불과하던 MRI 촬영 건수는 코로나로 병원 이용이 어려운 2020년에도 무려 354만 건으로 폭증했고 이에 따라 MRI‧초음파 검사 진료비 역시 2018년 1,891억 원에서 2021년 1조 8,476억 원 10배 가까이 뛰었다.

그렇게 병원과 환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수요공급 곡선은 새로운 평형점에 도달했다. 한국인들의 연간 진료 횟수가 OCED 평균 대비 약 2.5배에 달하는 수준에서. 그렇다면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고 있을까? 바로 건강보험료였다. 공공기금이 고양이를 비싸게 사주니 집을 싸게 파는 의사도 집을 싸게 사는 환자도 모두가 만족하며 미소 짓는 것이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찌어찌 해서 어영부영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이 기형적 시스템이 갑자기 붕괴하기 시작했다. 문재인케어로 보험의 영역이 급속히 확장되자 흑자를 기록하던 건강보험이 갑자기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조차도 정부가 물가 상승률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로 건강보험률을 올린 결과다. 이렇게 막대한 지출에도 불과하고 시민들은 병원을 이용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언제부턴가 대학병원 응급실은 환자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고, 엄마들은 백화점의 샤넬 매장 대신 소아과를 향해 오픈런을 뛰기 시작했으며, 동네에선 미용이 아닌 진짜 피부과 진료를 하는 병원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참고로 동기간 경제활동 인구가 계속 증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령화로 인한 영향은 이에 본격적으로 반영되지도 않았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은 잘못되어 있다

정부와 대중들은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 물론 한국의 국민당 의사 수는 OECD 평균보다 낮으니 다소 늘어나야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수치는 10년 전에 비하면 다른 나라들보다 빠르게 개선되고 있고, 특히 서울의 경우 의사들의 수는 OECD 평균보다도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느끼는 의료 서비스의 질은 과거보다 악화되었으며 그 추세는 서울이라고 다르지 않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의 수가 부족하기보다 그 배분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2024년 의료수가 인상률
첫 번째로 의료 수가의 왜곡이 커졌다. 이전부터 한국의 의료 수가는 다른 나라들보다 크게 낮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지속적으로 물가 상승률, 혹은 병원을 운용하는데 필수적인 월세나 최저임금이 오르는 속도에 비해 수가는 현격하게 천천히 인상되었고 이 불균형은 매해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특히 2021년 이후 기록적인 물가 상승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의료 수가를 낮게 유지해 이 왜곡은 더더욱 커졌다. 따라서 의료시장의 참가자들은 필수진료의 수익성이 개선되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될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고, 따라서 병원의 경영진은 응급실이나 외과와 같은 필수의료에 대한 투자를 줄였을 것이다. 이런 그들의 결정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고양이를 끼워파는 집의 가격이 적정 가격보다 낮을수록 고양이는 반드시 비싸져야 하고, 그를 비싸게 사는 기금은 더욱 빠르게 고갈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괴리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고양이를 거래하지, 집을 거래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미용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들 수 있다. 미용시장의 수요는 국내뿐 아니라 관광객을 통해 국외에서도 빠르게 유입되고 있어 기존 시장의 의료 인력을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미용시장의 경우 대부분의 진료가 시장가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고양이 문제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 결과 지난 몇 년간 필수진료과에서 이탈하는 의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 이제 약 1/4에 달하는 의사들이 미용 혹은 연관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의료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두 가지 사안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의료 수가를 시장가격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고, 두 번째 문제의 경우 미용시장을 의사 외 다른 의료인들에게 일부 개방하면 된다. 의사들은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미용기기를 다룰 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부작용을 우려하지만, 지금처럼 필수의료과에서 의사가 급격히 유출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 더 크지 않은가. 따라서 다른 나라들처럼 미용시장을 일부 개방하는 것이 적은 사회적 비용으로 더 큰 부작용을 방지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빨라야 10년 후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 방안들은 즉각적으로 의료시장의 구멍을 보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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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수가를 방치하면서 급격히 성장하는 미용 의사의 수요를 일반 의사의 공급으로 대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양이/미용 의사와 필수의료 의사 간의 격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추가로 공급되는 의사는 대부분 고양이/미용 의사로 빠진다. 이는 순수 필수의료만 담당하는 대학병원의 응급의학과 전공의 모집률이 매년 빠르게 하락하는 현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고양이 의사가 더 이상 빼 먹을 것이 없거나, 혹은 미용시장의 공급이 포화되어 비급여 수가가 빠르게 하락하는 시점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건보재정의 파탄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미용시장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좀처럼 포화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필수의료 서비스의 수가와 자가 부담률을 높이고 낮은 난이도의 미용시술의 의사가 아닌 의료진에게 개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현재의 시스템에서 단순히 의사만 늘린다고 의료 서비스의 소비자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증적 증거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서울의 인구 천 명당 의사의 수는 3.6명으로 OECD 평균을 상회하고 여기에 한의사까지 포함할 경우 4.1명으로 OCED 내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 인구밀도까지 고려하면 서울의 의료접근성은 가장 높은 수준임을 시사하는데, 이는 별다른 예약 없이도 대부분의 진료과에서 예약 없이 병원을 찾아갈 수 있다는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서울시민들은 의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서울시민들의 비율은 84.1%로 전국 평균 84.3%과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인구 천 명당 의사 수가 가장 부족한 충청이나 세종, 강원이나 제주보다도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 명당 의사의 수는 OECD 평균 보다 빠르게 증가하는데 반해(+13% vs +8%) 같은 기간 의사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여론은 낮아지기는커녕 되려 크게 높아졌다.(84% vs 69%) 이는 시민들이 느끼는 의료 시스템의 공백이 단순히 의사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빠르게 늘린 의사들의 수가 지방의 의료공백을 메워 전국 모든 지자체의 의사 수가 서울과 비슷해진다고 해도 국민들은 여전히 의료 서비스의 불만을 가질 것이다. 지금 서울 시민들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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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대 증원을 반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료인의 수가 좀 더 늘어나는 것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당장 정원의 2/3을 늘려야 할 정도로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그 부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과들은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아주 소수의 과를 제외하고는 예약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 응급한 상황에서 의료 서비스를 찾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그 부족을 느낀다. 응급실에서, 대학병원에서, 그리고 수술실에서. 정상적인 시장 상황이라면 우리는 얼굴에 울쎄라 써마지를 받을 때보다 응급실이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설계한 이 의료시스템은 정확하게 반대로 작동한다. 이 경우를 우리 금융인들은 시장이 왜곡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대개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된 시장에서 나타난다.

인위적인 가격통제로 인해 경제주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비슷한 사례로 한국전력을 들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전력 생산단가는 급격히 상승했지만 공급가격이 통제되어 있어 한전은 매년 기록적인 수준의 적자를 내야 했다. 이 구조에서 양적완화를 한다고 해서 한전의 시총이 삼성전자만큼 커지지 않는다, 전력회사의 숫자를 늘린다고 적자가 해소되는 일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이 회사의 주가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왜곡된 가격을 바로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매일 퇴행하는 의료시스템의 저변에는 왜곡된 의료수가가 있다. 이 왜곡된 가격이 존재하는 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의사들은 필수의료 대신 피부미용과 고양이를 파는 의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수를 늘린다고 해서 그 격차는 결코 줄어들 수 없다. 

서머셋 몸은 고갱을 모티프로 하여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썼다. 여기에서 달은 이상의 세계를 의미하고 6펜스는 세속의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소설에서 한때 주식 브로커였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타히티까지 찾아갔지만 거기에서 나병에 걸렸다. 죽어가는 삶의 마지막 기간 동안 그는 영혼을 쏟아부어서 최후의 걸작을 그리지만, 완성된 그림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잿더미로 사라지고 만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필수 의료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에게 스트릭랜드 처럼 6펜스 따위는 잊어버리고 달을 쫓아 청진기를 들고 타히티만큼 외진 바이탈과 수술실로 향하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스트릭랜드 같은 괴짜나 슈바이처 같이 고결한 사람은 몇 없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6펜스를 찾아 고양이와 미용의 세계로 떠났다. 일부 사람들은 왜 의료계에는 청진기를 들고 달을 바라보는 스트릭랜드가 없냐며 의사들의 도덕성을 비난한다. 하지만 내 눈에 그들의 도덕성에는 별문제가 없다. 마치 아비트라지 기회를 포착한 트레이더들이 최대한의 수익을 내기 위한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의 경제적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만약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70만 원짜리 MRI를 남의 돈으로 공짜로 찍는 시스템을 박수 치고 찬성하는 일반 대중의 도덕성 역시 지탄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환자를 살리는 의료 행위에 낮은 수가를 책정한 이 시스템이야 말로 가장 사악한 악마라는 것이다. 



*집을 팔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양이를 구해야 한다,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늘 고양이를 팔고 싶어한다. 따라서 둘이 지불하는 고양이의 가격은 반드시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집을 팔려는 사람과 집을 사려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고양이를 사고파는 계약을 맺는다면 그는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가격을 부담하는 것은 건강보험공단이고 가격을 정하는 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지만 둘 다 정부의 일부인 보건복지부의 관할이다.




2024. 2. 5.

신과 함께, 그리고 정의와 함께

태초로부터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최초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등장한 이후 몇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이고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구별해왔다. 선한 존재가 행하는 것이 곧 정의이며, 또 그 존재는 정의를 행하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 따라서 정의를 논하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신의 뜻에 더 맞는지를 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태고의 철학은 종교와 가까이 맞닿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과 그의 대리인들이 다스리던 세계가 붕괴한 이후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문명의 주류로 자리 잡자 사람들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선악의 개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편리와 행복을 정의의 기준을 삼기 시작했다. 이렇게 퍼지기 시작한 공리주의는 구성원들의 행복의 합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의 기준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18세기 말 당시 퍼지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도 대체로 일치했기에 서구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한계를 경험했고 동시에 공리주의가 온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문제점 역시 깨달았다. 가장 유명한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의 경우 사회 전체의 행복을 개선하기 위해 소수의 불량배나 부랑아들을 가둘 수용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회시스템은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나치였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한 명의 장애인을 보조하는데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지출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독일이 지배하던 유럽 전역의 소각로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 동성애자들이 불타며 비누와 카펫, 그리고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번역: 한 명의 유전병 환자를 위해 국가는 매일 5,50마르크의 비용을 지불한다
/ 그 5,50마르크는 한 건강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돈

전후 정의에 대한 논쟁은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출발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존 롤스는 해묵고 비틀린 공리주의 파편 위에 몇 가지 원칙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정의론을 완성했다. 그는 정의의 개념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도입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천국에서 한데 모여 회의를 연다고 가정하자, 그들은 자신이 부자로 태어날지 혹은 가난한 구두공의 아들로, 아니면 자폐인으로 태어날지 알 지 못한다. 어떤 사회적 지위나 배경을 가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그의 정의론을 대입한다면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의 사회시스템은 정의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태어나기 전 무지의 베일 상태에 있었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학살당할 수도 있는 그 시스템에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잣대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신이라는 존재를 창조하기도 전에 영장류들은 흑과 백, 선과 악, 아와 비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전부터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규범을 마련했다. 롤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인간은 공감능력을 발휘해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장애를 가진 개체들을 돌보고 먹여 살렸다.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정의 내리기 한참 전부터 이 잣대들은 우리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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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장애인 자식을 가진 한 유명인이 촉발시킨 논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정의의 기준과 그의 해명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해당 사건을 철저하게 흑백의 관점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상대가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나쁜 사람이며, 따라서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선 혹은 악 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진법의 세계에서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은 곧 상대의 불의를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유명인이 선고가 나온 바로 그날 대중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개한 것은 해당 교사의 유죄판결이 곧 자신의 무죄판결과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0과 1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 둘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유명인은 언어폭력을 저지른 교사를 교육계에서 퇴출시켰기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믿겠지만 동시에 그는 여러 장애우들과 그 부모들에게서 헌신적인 태도로 일하던 유능한 교사를 앗아갔다. 그는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들을 일반 학급에 편입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 결과 다수의 아이들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더 큰 자폐아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이런 일은 새 학교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공리주의적 본능은 그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도 이 불편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설령 우리의 아이가 자폐아로 태어난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쩡한 아이들이 그에게 지속적으로 얻어맞거나 노출된 성기를 보고 트라우마를 가지는 시스템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설령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그런 제도는 옳지 못한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학교와 사회 전체에게 무제한적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무제한의 인내는 부모조차도 보여줄 수 없다. 입장을 바꾸어 아들이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고, 더 힘이 세고, 더 자폐가 심한 학우들과 같은 반이 되어 폭행을 당할 때에도 그들은 자녀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요구는 매우 이기적이고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가 창작한 등장인물들은 매우 단순했다. 나쁜 놈은 나쁘고 착한 놈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결국 착하게 끝난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이 복잡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안으로 얽힌 이 문제를 자꾸 선악이라는 이진법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상대는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고 그를 상대하는 나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물론 나는 발달장애를 겪는 아들을 가진 그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덩치가 큰 자폐아에게 맞아야 했던 아이들과, 그 성기를 보고 놀랐을 여자아이들과, 소송에 시달리며 폭력 교사라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선생과, 따르던 선생님을 잃고 덩그러니 놓인 다른 장애우들과 또 그들을 눈물로 보살피며 탄원서를 쓰던 다른 부모들에게도 공감한다. 그렇기에 나는 안타까운 그의 결정과 행동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부모에게는 신일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세상 모두가 야훼에게서 등을 돌려도 아브라함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신과 함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신은 정의롭지 않다. 더욱이 그 아이가 상처입히고 괴롭히는 이들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신 아니었던가. 자식을 신처럼 여기며 편들어 주겠다는 아비의 부정을 누가 뭐라 하겠나, 다만 정의까지도 알뜰살뜰 챙기겠다는 그의 무모한 이기심과 과도한 욕심에 혀를 끌끌 찰 뿐이지. 

2024. 2. 4.

코리아 디스카운트와 죽지도 않고 또 온 각설이

2014년 7월 박근혜 행정부의 경제 구원투수로 등장한 정치인 출신의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곧바로 기업의 사내유보금에 새로이 과세를 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주요 대기업들은 투자도 배당도 하지 않으면서 사내에 과도한 현금을 쌓아두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책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나는 거시경제적으로 기업들이 보유한 잉여 현금이 이전되는 과정에서 정부는 추가 세수를 확보하면서도 투자와 소비가 증가할 것이었고, 재무와 가치평가 측면에서는 기업들이 비합리적인 현금보유성향*이 지나치게 쌓아두는 것이야말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에 한국 주식이 재평가될 수 있다는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 후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사라졌을까. 바로 이듬해 한 건설회사와 의류회사가 합병하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회사를 합쳤고, 최경환을 등용한 청와대는 여전히 기업들에 낙하산 인사들을 내려보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다 그중 몇몇이 유죄판결을 받고 구속되었다. 정권이 바뀌고 나서도 뒤가 구린 신주배정과 전환사채의 발행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기존 주주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기형적인 물적분할과 기업공개는 봇물 터지듯이 이어졌다. 그 중 가장 무분별하게 분할과 공개에 나섰던 몇몇 회사들의 오너들은 뻔뻔하게도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기업인들을 대표한다며 대중들에게 얼굴을 드리밀고 있다. 정상적인 주주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는 그 대신 머그샷을 찍었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그로부터 10년 뒤, 정부는 또다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며 PBR이 1.0이하인 기업들에게 적극적인 주주환원 조치를 요구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절름발이 자본시장에서 고전하던 투자자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 조치들을 반기며 매수 버튼을 두들기고 있지만 과연 올해는 이 지긋지긋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과거의 유물이 되는 원년이 될 수 있을까. 오랫동안 감언이설에 속아 온 우리는 기대와 회의가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다.

지난 몇몇 글에서 한국 주식들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주요 원인들로 기형적 지배 구조와 비정상적 상속세를 비판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주식 할인 파티의 주범이 어찌 둘뿐이겠는가. 그 세 번째 독 사과는 바로 업종과 분야를 가리지 않는 관치의 DNA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영구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지는 이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재벌들의 잘못된 거버넌스와 상속세는 법률을 보완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현 행정부와 여당은 현 국회 회기 내내 손가락이나 빨면서 놀다가 막판에 개고기 법안이나 통과시키는 것으로 21대 국회의 임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선거를 앞두고 황급히 주식시장 저평가 대책 방안을 발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지만 정작 우려되는 것은 이 정부의 대안이라는 것이 관이 민간의 의사결정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는, 즉 관치를 강화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현상은 특히 금융주에서 두드러진다. 한국의 금융사들, 특히 금융 지주사들이 낮은 PBR를 가진 이유는 이 관치가 가장 만연한 업종이 바로 금융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모든 정부는 금융사들의 영업형태부터 순이익, 배당, 인사, 성과금 등 전분야에 걸쳐 무제한적 개입을 일삼았다.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를 읽고 시장경제를 존중한다는 현 정부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조금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난 정부보다 그 개입의 정도가 더 심해지기도 했다. 나 역시 현 정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미개하고 무분별한 금융정책을 지적했고, 보수언론들 역시 여러 차례 윤석열 정부의 반시장적 행태를 비판한 바 있다.(링크1 링크2 링크3) 관이 제 입맛대로 민간의 팔을 비틀어 생긴 디스카운트를, 다시금 팔을 반대로 비틀어 해소하겠다는 발상은 우매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현 정부는 출범 당시 코스피를 MSCI 선진국 지수에 편입하는 것을 국정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아마도 총선 전에 그 목표를 달성해서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그런 야심찬 계획은 난관에 부딪쳤고 대신 정부는 난데없이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는 삽질을 터뜨려 한국의 금융시장이 왜 여전히 후진국으로 분류되는지 세계 투자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고개를 돌려 올바른 관치금융으로 관치금융의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는 정부24판 피식 쇼를 벌이고 있다. 잊을 때만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지 떼처럼 그들은 깡통을 두드리며 이번에는 믿어주십쇼를 외치지만, 우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아야 한다. 여당이 추진하는 상법 개정안은 여전히 주주 비례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여러 물적분할과 주식공개를 막지 못할 것이고, 지지리도 인기 없는 대통령실은 상속세를 개편할 정치력이 없으며, 출신 학교와 기수를 따져가며 퇴임 후 낙하산 자리만 학수고대하는 세종시 공수부대들은 관치를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다. 그렇게 정부와 관료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단순한 방조범이 아닌 공동정범이 되었다. 따라서 나는 당분간 인기를 끌 이 각설이 쇼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10년 전의 각설이들이 그러하였듯이.   

하지만 이를 회의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코로나 이후 개인 주식투자자들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고, 이후 몇 차례의 문제적 유상증자와 주식공개를 통해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주주 가치가 어떻게 훼손되고 있는지 여실히 경험했다. 그로 인해 주주비례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보전해달라는 대중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따라서 지난 대선에서 여당과 야당은 모두 이를 공약으로 내세워야 했다. 그런 적이 또 있던가. 지금의 대통령실과 관료들은 어설픈 품바쇼로 그러한 요구를 적당히 다독이고 넘기려 하지만 유권자들은 진정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제도와 법의 개선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에서라도.   

2010년 이후 KOSPI P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