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9.

오만한 멍청이들과 크레디트 스위스

본인은 현재 언급되는 금융사들의 재정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으며 아래 글은 모두 현재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나 해당 회사가 발표한 재무자료, 혹은 누구나 접근 가능한 금융시장의 데이터에 의존한 자료에 개인의 견해를 얹은 것임을 밝힙니다.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누구도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낙관론을 펼치는 사람들이나, 확신에 찬 비관론을 펼치는 사람들이나 모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진앙은 16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 투자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로부터 출발한다.

낙관론을 펼치는 몇몇 은행 애널리스트들은 이 회사의 대차대조표는 탄탄하며 충분한 유동자산을 보유했기 때문에 과도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장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 크레디트 스위스의 PBR은 불과 0.13에 거래되고 있는데 이는 주요 투자은행들은 물론이고 이름이 알려진 금융사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비율이다.  어쩌면 이는 투자자들이 그들의 대차대조표를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또 이 숫자를 현재 시장에서 거래되는 신용부도스왑에 대입하면 CS의 파산 확률을 추산 할 수 있고 그 수치는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보도에 따르면 이에 대응하여 스위스 중앙은행과 스위스 금융 규제 기관, 그리고 스위스의 다른 대형은행인 UBS는 발 빠르게 CS를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은행이 파산한 지 불과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세계적 은행 하나가 또 금융시장의 도마 위에 올라온 것이다. SVB의 실패는 테크와 스타트업에 집중한 은행이 리스크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터진, 해당 은행 고유의 문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금리 아래서 버티기 어려운 산업은 테크 하나가 아닐뿐더러 자신이 어떤 리스크를 짊어졌는지 모르는 기관과 투자자가 비단 SVB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계심을 높여야 한다. 

절대 오해하지 마라. 나는 인버스에 몰빵하는 것을 권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가진 금융주를 모두 매도하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현재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던 멍청이들이 그 오만함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뿐이다. 각 나라의 중앙은행들과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게 대응에 나서고 있으니 이번에는 파산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 수도 있다. 혹은 인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정부와 중앙은행의 대응이 원하는 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시나리오를 빠르게 오갈 수도 있다. 심지어 2008년 리만 위기에서도 먼저 파산한 베어스턴스 은행이 인수되고 나서 시장은 두 달간 약 15% 랠리 하기도 하지 않았나. 여하튼 지금은 호가 창을 가득 채울 만큼 부푼 에고와 과도한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시장과 싸울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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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언급했듯 금리를 올리면 무엇인가가 무너진다. 그리고 가장 무모하고 멍청한 놈이 먼저 무너지곤 한다. 그러니 잠시 그 멍청이들의 명단을 읊어보자. 금융 시스템의 기초나 화폐금융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권도형은 자신이 통화 시스템을 대체할 알고리즘을 개발했다고 허풍을 떨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열역학 법칙을 뛰어넘을 수는 없듯 대단한 알고리즘과 뛰어난 블록체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통화이론의 기본 원칙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평생 경제나 금융을 공부해 본 적이 없던 너드 프로그래머들과 제도권 밖의 사기꾼들, 그리고 과도하게 대범했던 투자자들은 기존의 금융을 비웃으며 자신만의 금융 시스템을 창조했다. 하지만 권도형이 주장했던 루나 생태계와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가장 업신여기던 중앙은행의 지원에 기반했던 사업이었고,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거둬들이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규제와 시스템을 준수하던 기존의 체계를 미개하게 여기던 오만한 투자자들은 울부짖으며 방향을 180도 바꾸어 자신들이 멸시하던 중앙정부와 은행에 보호와 사후 처리를 애걸하고 있다. 2022년 5월의 루나 사태는 첫 번째 멍청이들의 몰락을 의미했다.

두 번째 몰락은 샘 뱅크먼 프리드의 FTX였다. 앞서 상장된 종목 하나가 파산한 것이었다면 이는 거래소가 통째로 몰락한 사건이었다. FTX는 거래소를 자청하면서도 동시에 자사의 코인을 발행해 유통한 참가자였고 또 동시에 코인 펀드를 운용한 이해 당사자이기도 했다. 창시자 SBF는 이렇게 통정매매와 내부자거래, 시세조종을 거듭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기 금융시스템이 엄격한 권한/직무분리에 집착하는 것을 두고 제도권의 투자자들과 펀드들을 크게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거듭한 결과 해당 거래소의 담보 자산은 거의 대부분 자기 자신이 발행한 코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신뢰성이 손상되자 빠르게 뱅크런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거래소가 통째로 파산하는 바람에 FTX가 발행한 코인에 투자한 투자자는 물론 해당 코인을 사지도 않았지만 FTX에 자산을 보유한 사람들까지 자신의 돈을 모두 날려야 했다. 앞서 루나 사태가 특정 증권의 파산이었다면 FTX의 파산은 크립토 세계의 은행의 파산이나 다름없었다. 

세 번째 몰락은 드디어 제도권 금융기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실리콘 밸리 은행은 본디 세상을 바꿀 천재 창업가들을 주로 상대하던 은행이었다.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프로세스, 양자컴퓨터 등에 비하면 안전자산이라는 채권이라는 상품은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하고 쉬운가. 그래서 그들은 1% 중반 밖에 안되는 금리에 채권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만기가 아주 긴 채권을 아주 많이. 채권이라는 것은 안전한 자산이기 마련인데 관리할 리스크 따위가 있을까. 하지만 작년은 바로 그 채권금리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의 주가도, 최첨단 테크 기술을 보유한 전도유망한 회사의 주가도 폭락을 거듭했다. 은행의 CFO들은 자신이 무엇에 투자하는지, 어떤 리스크를 짊어졌는지 안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결국 그들은 코로나 사태 이후 첫 번째로 파산한 은행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리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 많은 투자자들은 코로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에 충격이 가해질 경우 중앙은행과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들의 어리석음은 권도형이나 샘 뱅크먼, 혹은 실리콘밸리 은행의 CFO들에 비견될 만큼 막대하고 무모하다. 지난 2020년에는 하나, 이미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는 사이클에 있었고, 둘, 세계경제가 기나긴 시간 동안 디플레 압력 아래 있었고, 셋, 충격이 경제적 원인이 아니라 공중보건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중앙은행과 정부는 대담한 부양책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2020년 이전과 정확하게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급격하게 금리를 인하하고 양적완화에 나서는 기준은 시장이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높고 대규모 부양책과 구제책을 마련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훨씬 더 강하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테크 회사들이나 쓰레기 같은 알트 코인들이 금리 인상을 선 반영하며 랠리를 이어가는데 정작 루나, FTX, SVB와 가장 흡사한 자산은 바로 그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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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오만한 멍청이들은 현 정부 안에도 있다. 경상수지가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는데도 외화보유고를 지속적으로 풀어 자신들이 원하는 환율 수준을 맞출 수 있다고 믿는 멍청이와, 검사였던 자신이 나서면 모든 금융기관을 살려줄 수 있고 또 그것이 옳다고 믿는 멍청이, 그리고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점에 대통령이 말 몇 마디 했다고 더 부실하고 빈약한 자본을 가진 참가자들을 허용하겠다는 멍청이. 그 멍청이들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며 그 해악은 우리나라 경제와 시장에 커다란 상흔을 남길 것이다. 

이들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의 배경이 좋기 때문에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 적극 개입해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맞춰 이렇게 이렇게 조언하겠다. 권도형은 스탠퍼드를 졸업했고 샘 뱅크먼은 공학의 꽃인 MIT를 졸업했으며 현재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크레디트 스위스에는 서울대보다 훨씬 더 이름 높은 명문대의 졸업생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도 실패하지 않았나. 그러니 당신들도 잘 모르는 분야에 오만하게 나서지 말고 할 줄 아는 것이나 잘 해라. 능력에 걸맞지 않은 야망은 늘 무언가를 망치는 법이다.

2023. 3. 18.

고장난 기억들과 지정학, 그리고 한일회담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너무나 불리한 위치에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대외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이고 그 대부분은 바다를 통해 이루어진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제주도 남쪽 항로를 봉쇄한다면 대한민국의 경제와 사회는 그 즉시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가 수백 년 뒤에도 독립국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무역과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는 패권국이 계속해서 세계를 지배하거나, 혹은 우리가 스스로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거나. 현재 우리는 다행히 전자의 세상에 살고 있다.

자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만약 미국이 쇠퇴하는, 적어도 압도적인 해군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을 가정한다면, 그래서 항행의 자유가 더이상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경제에서 교역비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던 나라들도 교역로를 봉쇄당하면 무너지곤 했는데 한국이야 말해 무엇하리. 따라서 한국은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무역로를 보호할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그 후보로는 두 지역이 있다. 중국의 동부 해안가, 혹은 규슈를 포함한 일본의 남부 지방. 전자의 경우 상대가 너무나 막강한데다 내륙 세력으로부터 긴 해안지역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후자의 선택 만이 남는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국력이 역전된 것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고려 초기 이후로 보이는데 그 이후 단 한 번도 한반도의 생산량이나 인구는 일본을 앞서본 적이 없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현재 한반도의 육군은 일본열도보다 앞서 있으며* 이는 두 지역의 GDP가 역전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불균형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의 정치세력이 장기적으로 독자 생존하려면 현재의 군사적 우위가 다시 역전되기 전에 어떻게든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쇠퇴하는 순간 우리 역시 위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쓸데없는 가정을 꺼내는 이유는 우리의 대외전략이 현실과 국제정세에 맞춰서 이루어져야지, 특정 국가에 대한 호불호를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꺼내는 이야기 역시 그런 관점에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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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금나라는 북송의 제안으로 협공을 펼쳐 요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이후 송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되레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등 공작을 펼쳤다. 이에 금나라 황제는 분노하며 수도인 개봉을 포위하였는데 금군은 12만에 이르렀지만 도성 수비군은 고작 3만 명에 불과한 데다 송의 형편없는 전투력은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수도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가운데 혜성과도 같이 구원자가 등장했으니 그의 이름은 곽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음양오행의 이치와 도술에 통달할 사람이라 도술의 힘으로 금군을 섬멸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을 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당당했던지 그를 만난 황제는 단번에 그를 도성 수비의 총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한날한시에 태어나 사주가 같은 7,777명의 민간인을 선발하여 육갑신병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매일 하늘에 기도하며 부적에 물을 뿌리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만히 사주를 따져보던 곽경은 오늘이 길일이라며 갑자기 육갑신병의 총 출전을 명했다.

제대로 된 전투훈련도 받지 않은, 체격이나 군 경험이 아닌 오로지 사주팔자 하나로 선발된 고작 7천여 명의 부대였지만 용한 도사의 비술로 거칠고 야만적인 유목군대의 정예군을 무찌를 수 있다고 진심으로 굳게 믿은 황제와 고관대작들은 기대어린 눈으로 그의 출전을 반겼다. 이윽고 성문이 열리고 흰옷을 입은 육갑신병은 용감하게 금군 기병대를 향해 돌진했다. 사막과 초원, 그리고 얼어붙은 유라시아의 대지를 넘나들며 온갖 적들과 싸운 금나라 군대였지만 이런 이상한 군대를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들은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 칼과 창을 뽑아 이들을 맞이했다. 잠시 후 육갑신병들의 흰 옷은 모두 빨갛게 물들었고 그들의 사지는 찢어져 사방에 널려 있었으며 송의 수도 개봉은 함락되어 불타고 말았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 육갑신병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이름을 닮은 찰진 욕을 떠올리며 비웃겠지만 과연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주문을 되뇌지만 실제 역사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의 현실인식은 이 주문을 외우면 자동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휘종만큼이나 처참하게 왜곡되어 있고, 부적을 태우며 죽창가를 부르던 곽경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만큼 어리석다. 과연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위안부 합의와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딱 그렇다. 12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에서 열린 한일 단독회담은 지난 몇 년간 악화일로를 걸어온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그간 양 국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자리였다. 여러 자극적인 보도와 헤드라인에 경도된 몇몇 사람들은 이번 외교 합의를 비난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뭘 얻을 수 있고 어떤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일본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마음만 가지면 상대가 벌벌 떨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마땅히 들어줄 것이라 기대한다. 마치 육갑신병에 의지하던 개봉의 시민들처럼. 그리고 나는 이를 병신외교라고 부르기로 했다.(링크) 이제 그 병신외교가 아닌 현실의 눈으로 사태를 다시금 돌아보자. 우리가 이길 수 있던 싸움이었던가.  

먼저 징용공 문제의 핵심을 살펴보자. 여운택 씨는 과거 일본제철의 공장에 동원되어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패전 후 해당 회사가 임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으니, 밀린 임금과 손해보상을 지급하라며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일본 법원은 해당 사건은 공소시효가 지났고 신일본제철은 일본제철과 다른 법인이기 때문에 배상의 당사자가 아닌 데다 해당 청구권은 한일 정부가 맺은 1965년의 합의로 종결되었다는 논리로 이를 기각했다. 이는 당시 일제가 동원한 일본인 노동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던 전후 일본 정부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이에 여 씨와 다른 세 명의 원고는 동일한 내용의 소송을 한국 법원에 제기하였다. 법원은 1심과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놀랍게도 2012년 대법원은 원고 승소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년 대구법원은 일본 기업에게 배상책임을 물으며 국내 일본 기업의 자산을 동결하고 압류 절차를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반발하며 한국에 대해 다분히 보복성을 띈 무역제재를 가했다. 이에 대응해 한국 정부는 지소미아를 종료할 것을 검토하고 WTO에 일본의 무역보복을 제소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이 문제는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이 국제적 정당성, 혹은 강제성을 갖췄는지의 문제였다. 만약 베트남이 특별법을 제정하여 월남전 당시 인명/재산피해를 입은 민간 피해자들에게 한국 정부에게 변상하라고 판결하고 당시 정부에 군수물자를 납품했던 삼성전자의 자산을 동결하고 매각한다면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네덜란드 정부가 하멜이 작성한 표류기를 근거로 조선 정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는 (현대 네덜란드 법 기준으로) 네덜란드 인을 불법적으로 억류하고 강제로 노역을 시킨 피해를 하멜의 후손들에게 배상하라며 징벌적인 추징금을 매긴다면 우리는 이를 흔쾌히 수락할 수 있을까. 국제법 전문가들은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이전에 벌어진 사건을 두고, 대한민국 법원이 그 법의 적용 범위를 국외로 확대하여 외국기업에 적용한 것은 국제법과 관례에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지적했지만 평양 주석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글로벌 기준은 따위는 개나 줘버린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를잊은민족에게미래는없다는 주문 만큼은 자다가도 외울 수 있다던 대중들은 그런 문제 제기를 철저하게 묵살한 채 죽창가를 드높여 불렀다. 이 문제에 있어 한국은 마치 북한 만큼이나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게다가 우리의 현실 인식은 크게 뒤틀려 있다. 한국은 1965년 합의에서는 강제징용과 식민지배 등을 다룬 것이지 당시 드러내지 않았던 위안부 성 노예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새로 맺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과거 책임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가 세운 재단에 일본 정부가 예산 100억 원을 출연하여 희생자들의 명예와 존엄,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 쓰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 합의를 비난하며 부정한 것은 바로 한국이다. 지난 정권에서 한국은 이 합의를 먼저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가 임기 말 또 이를 번복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대중들은 이제 강제징용 합의가 왜 위안부 합의보다 후퇴했냐며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2015년과 비교한다면 하나. 강제징용은 명백하게 한일협정에 포함된다는 것, 둘. 외교적 영향력을 강제할 힘을 가진 미국이 당시와는 반대로 일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는 점, 셋. 양국 간의 외교적 합의를 이미 번복한 전례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합의안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도덕의식 역시 크게 잘못되어있다.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원고는 모두 15명인데 그중에는 정부 합의에 찬성하는 유가족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뒤섞여 있다. 하지만 국내 여론과 대중들은 두 집단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을 선택적으로 보도했다. 이 문제는 위안부 합의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당시 일본 정부와 위안부 합의를 협상하던 정부는 네 차례에 걸쳐 생존 피해자들에게 협상 내용과 과정을 설명했고, 당시 기준으로 생존한 46명의 할머니 중에서 36명의 피해자들이 일본이 지급한 화해기금을 수령했으며 이미 사망한 분들의 유족 중 35명이 기금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런 사실은 철저하게 무시한 채 당시 정부의 합의안을 비난하기만 했다, 외교부가 피해자들과의 협의 없이 합의했다는 거짓 뉴스를 사실로 믿었다. 왜? 그래야만 자신들의 민족적 자존심이 채워졌을테니까. 정작 희생된 것은 피해자들이었지만 위안부 피해와 1도 상관이 없던 대중들이 실제 희생자들의 아픔을 공공재로 치환하여 희생자들에게 합의금을 거절하라는 압박을 가했다. 오로지 자신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희생자들을 착취한 것은 비리로 얼룩진 윤미향과 정의연만이 아니었다. 

이 회담의 결과가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일개 사법부의 구성원이라는 작자가 오만하게도 건국하는 심정으로 선고문을 썼다며 외교분쟁을 촉발했던 순간 당신들은 런던 올림픽의 축구 경기나 보고 있었다. 향후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고자 행정부는 대법원에 접근해서 선고를 지연시켰는데, 유권자들은 이를 사법 농단이라고 부르며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미국이 한국 편을 들어준 위안부 합의도 반대했다. 한국이 일방적으로 일본 기업의 재산을 동결/압류하겠다고 발표할 때 당신들은 조국을 따라 죽창가를 부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현재 정부의 조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될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질 수 밖에 없는 분쟁을 시작한 것은 바로 당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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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무런 결론을 내지 않고 질질 끄는 선택도 있지 않았나. 마치 이전 정권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푸틴이 무리한 계획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로, 구소련제 무기와 장비의 사용연한이나 러시아의 고령화를 고려하면 자국의 군사력이 정점을 지나고 있는 반면, 우크라이나는 군사개혁에 나서고 서방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등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이의 군사적 격차가 점차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비슷한 모래시계가 동아시아에서도 돌아가고 있다. 현재 미군이 추진하는 국방개혁은 2030년 이후에나 완성되는데 그 시점이 지나고 나면 중국이 미국의 봉쇄를 무력으로 돌파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중국의 인구와 경제성장률이 이미 정점을 찍고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륙이 대만을 삼킬 마지막 기회는 향후 5-10년뿐이다. 최근 미국의 고위 장성이나 전략국제문제연구소들이 가까운 시일 안에 양안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염두에 둔 분석을 내놓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군의 역량을 분산하기 위해 북한을 이용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북한이 전례 없는 과감한 도발이나 군사행동에 나서면 한반도 내의 미군 병력과 전략 자산은 발이 묶일 것이고 그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미군은 나뉜 전력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 얼마 전 CSIS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을 가정한 워게임 분석에서 한국의 지원을 배제한 것은 이런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그저 여러 전장과 요충지 중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과대평가하지만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내에서 미군의 배치는 점점 후방으로 후퇴하고 있으며 전략무기와 병력 역시 점차 축소되고 있다. 바이든의 취임사나 연두교서를 분석해 보아도 미국 대외전략의 최우선 목표는 중국을 억제하는 것이고 북한은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 혹은 부수적 문제로 언급된다. 그리고 중국을 압박하는 주 전선은 어디까지나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인 남중국해가 될 것이다. 현재 미군의 주력은 동아시아의 북쪽에 치우쳐 있는데 이 중 상당수는 산둥성의 미사일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방사포의 사정거리 내에 있다. 이런 전제조건들을 감안하면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미군은 전략자원들을 유사시 고립될 수 있는 남한보다는 후방의 요새화된 기지로 재배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면 미군의 자원을 독점하기를 희망하는 일본은 워싱턴을 설득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일본은 입장을 번복하고 적국인 북한과 민족적 유대감을 느끼는 한국은 신뢰하기 어려운 파트너이기에 미국의 대전략에서 한국의 비중을 낮추고 일본을 주 동맹국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주장은 오바마가 아베 신조의 팔을 비틀어 내놓은 위안부 협정을 한국과 한국 국민들이 발로 차버렸을 때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워싱턴은 이미 한국과 일본이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고 반목할 경우, 무엇보다 유사시 미국이 동맹국들의 협력이 절실한 순간에 한일 양 국이 대립할 경우 미국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답을 내기 시작했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일본을 택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어도 반대의 경우는 불가능하다. 시간은 결코 우리의 편이 아니다.

각종 안보 협의체들이 빠르게 구성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에 한국이 강력한 우방국 중 하나인 일본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은 우리들의 국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역시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며 대외전략을 개편하고 있는데, 만약 한국이 일본과 반복하는 믿을 수 없는 파트너로 남게 된다면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요구할 수 밖에 없고, 이미 그 초기 단계를 지나고 있다. 인구와 경제가 한국의 3배가 넘는 일본이 대규모로 육군을 재건하게 되면 한국의 미국에 대한 레버리지는 더욱 떨어진다. 이 외에도 한미일 군사협력이 절실한 수도 없이 많은 이유들이 있다. 거기에 반대할 세력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뿐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일 양 국이 강제징용 합의를 발표하자 UN 사무총장은 긍정적 교류와 미래지향적 대화를 환영한다고 밝혔고 EU 대외관계청 역시 즉시 성명을 내어 두 나라 간의 긴밀한 협력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축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의 백악관 역시 한일 양 국의 결정을 즉각 환영하며 윤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했고 미 상원 역시 초당적으로 이번 조치를 반긴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같은 목소리를 낸 몇 안 되는 사안 중 하나였다. 반면 중국은 이 합의를 미국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피해자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합의라고 폄하했고 북한은 이번 합의를 굴욕 회담이라며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이번 회담을 반대하고 정부의 조치를 욕하는 미개한 21세기 선조와 고종들이여, 지금 당신의 목소리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돌아보라. 

*               *               *

서강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는 저서 기억전쟁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 강철비에서 곽도원은 "남북이 대결로 치달아 수백만 명의 희생한 식민지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된다"라고. 그의 어조는 너무도 결연해서 희생자 수백만 명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권위적인 수치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전쟁사의 대가 존 다우어의 통계는 다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조선인 사망자 수를 약 7만 명으로 추정한다....UN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아시아에서는 1500만 명 의 사망자를 낸 중국의 희생이 가장 컸고, ....인도네시아는 기아와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했다....1945년에 대기근을 겪은 베트남에서는 통킹과 안남에서만 100만 명이 굶어죽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12만 5천명, 필리핀은 12만 명, 인도에서는 약 18만 명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정작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것은 식민지의 역사가 아니라 북한과 중국의 군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대중들의 기억은 시나브로 조작되어 6.25의 희생자 수를 일제에 덮어 씌웠고 가장 많은 한국인을 죽인 범인은 김일성과 마오쩌둥에서 은근 슬쩍 도조 히데키로 갈아치웠다. 그리고 북한이나 중국은 우리에게 배상을 하지도,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목에는 미국이라는 목줄이 채워져 있지만 북한과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건국 이래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지만 중국과 북한은 약 삼백만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야기했다. 후자의 위협을 막기 위해 전자와 협력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나는 아직까지 [역잊민미]를 외치는 사람 중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대한민국 국민을 죽인 이가 누구인지 제대로 이야기하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2018년 평창 올림픽에서 지난 정권은 북한에게 밑도 끝도 없는 구애를 펼쳤다. 그 결과 천안함의 폭침을 주도한 김영철과 지금도 틈만 나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김여정이 특급 VIP 대우를 받으며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이런 평화 회담이 성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그 질문에 실제 역사는 매우 부정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역사를 잊은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에게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보냈고 스스로 안보에 민감하다고 밝혔던 2030대 역시 약 85%의 지지율을 보냈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낳았던가. 그리고 그때와 정확하게 같은 사람들이 일본과의 협정에 문제가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혹시 그들의 현실 인식에 뭔가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사기꾼 도사에게 속아 육갑신병에게 국방을 맡긴 북송의 황제와 고관대작들도 자신들의 판단력이 정상이라고 믿지 않았던가. 금나라 기병의 칼에 그 아둔한 머리가 썰리고 그들의 창에 가슴이 꿰뚫리기 전까지는.


이 글을 모든 방구석 비스마르크들과 한국판 육갑병신들에게 바친다. 


*엄격하게 육군으로 한정할 경우

2023. 3. 14.

덤 앤 더머, 그리고 뱅크런

지난 1년간 가상화폐 시장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은 지난 수백 년간 금융 시스템이 겪은 성장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재화나 서비스를 거의 생산하지 못하는 생태계를 바탕으로 코인을 달러에 페그 하겠다고 나섰던 권도형, 부실한 자기자본으로 부실한 자기자산을 거래하다 파산한 FTX, 그리고 어리석고 욕심 많은 개미들의 종잣돈을 털어간 수많은 러그풀 등, 서부 개척시대를 방불케 하던 사이버 무법지대에서 발생한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학교에서 배운 각종 규제와 시스템이 왜 필요한지를 몇 번의 붕괴와 막대한 손실로 모두에게 일깨워 주었다.

현재 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실리콘밸리 은행의 경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 은행은 과도한 레버리지나 위험자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너무 많이 산 채권 때문에 파산에 이르렀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이 빠지고 그렇게 되면 손실이 난다는 매우 기초적인 사실을, 엄청난 규모로 간과한 탓에 회사는 큰 손실을 내어 예금자와 투자자들의 불신을 샀고 뱅크런이 발생했다. 이런 작은 은행은 대형 금융기관에게 적용되는 각종 규제들을 적용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분별한 대차대조표를 운용하다 사달이 난 것이다.* 

금리 인상 후 첫 제도권 금융기관의 파산을 겪은 미 정부는 과감한 조치를 선제적으로 내놓았다. 아시아 시장이 개장하기 전, FDIC는 금액과 무관하게 모든 예금을 보장한다고 발표했고 연준은 새로운 기금을 조성하여 담보를 제공하는 금융기관에 적절한 시장금리에 1년간 대출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과는 반대로 자금경색을 겪는 금융기관에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조치는 모순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 뱅크런은 좀처럼 멈추기 어렵고, 또 금융 시스템 자체가 위협받게 되면 그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연준과 미 정부는 이처럼 과감하게 선제적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치가 뱅크런을 초기에 차단할 수 있을지, 또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얼마나 튼튼한지, 그리고 좀처럼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연준의 노력과 위의 조치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일으킬지 현재로서는 함부로 예단하기 어렵지만 백여 년에 걸쳐 수많은 부침과 사고를 겪으며 내구성을 강화한 현대 금융 시스템은 그 역할을 보여줄 것이며, 또 진화하고 발전하여 다시 미래에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준비를 마칠 것이다. 물론 살아만 남는다면.

그리고 한국에는 덤앤 더머가 있다. 저번에는 PF 전수조사에 나서겠다며 자금경색을 야기한 선무당이 등장하더니(링크), 이번에는 금융 시스템이 흔들리는 가운데 은행의 설립 조건을 완화하겠다는 금융위가 있다. 지난 3월 2일 날 발표한 보도자료(링크)에서 그들은 선진국의 참고 사례로 실리콘밸리 은행을 소개했다. 그렇다, 바로 지난 주말 파산한 그 은행이다. 자신들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회사가 곧장 파산하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긴급 간담회를 열어 해당 사건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위기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시장을 다독였는데 회사 하나도 똑바로 못 보는 화상이 바다 건너 나라의 복잡한 금융시장을 무슨 근거로 예측할 수 있을까. 이런 희극은 계속된다.

금융은 반드시 규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규제는 규제 당국의 영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나, 기초적인 시가평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담당자들의 면피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금융사들 간의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을 촉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업에서 느끼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 모습은 격변하는 금융시장의 전광판 앞에서 한국의 두 금융 수장이 덤 앤 더머를 자처하며 서로 질세라, 열심히 슬랩스틱 코미디를 펼치는 장면으로 대변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슬랩스틱 쇼가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관람료로 상당히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금리를 올리면 늘 무엇인가가 무너진다. 어쩌면 이는 인플레를 잡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단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적자를 내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재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자산을 비싸게 사는 것에 익숙하며, 비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거쳐왔다. 은유로 표현하자면 주식도 주택도 채권도 배당주도 가치주도 신흥국도 선진국도, 모든 자산이 공평하게 하락했던 작년의 금융시장은 그 시기가 지속될 수 없다는 첫 번째 경종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앞에는 고통스러운 선택 만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우리는 중앙은행에게 독립성을 허용하고 전문 인력들을 제공한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 아무런 경험도 식견도 없는 두 덤 앤 더머는, 한국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리 영구와 땡칠이는 본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금융시장에 손대다 체면만 깎아먹지 말고 그냥 금융 범죄자들이나 열심히 잡아넣는 것이 경제에 이바지하는 길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반면 각종 규제를 적용받는 대형 금융기관들의 경우 유동성 비율이나 위험자산의 비중 등을 면밀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SVB의 문제가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