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국제사회는 이 침략국의 자산을 동결하고 대대적인 경제 제제를 가했다. 그리고 금융시장의 수많은 전문가들과 저명인사들이 러시아의 경제가 머지않아 파탄에 이르러 부도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너무나 자명한 일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을 때도, 심지어 유가가 마이너스로 폭락하던 코로나의 한가운데서도 이 동토의 나라는 파산하지도, 국가부도의 날을 겪지도 않았다. 모스크바는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다.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머쓱해해할 무렵, 국제금융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로운 변동환율제 아래서 외환위기를 겪는 나라는 드물다"
반대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거나 외환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하던 나라들은 어김없이 위기를 겪었다. 러시아보다 더 자원이 많았던 남미의 나라들이나, 더 부유했던 선진국들도 예외는 없었다. 영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폴란드, 브라질 등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모두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 리스트의 끝자락에는 우리나라의 이름도 있다. 왜 전쟁을 겪지도, 경제 제제를 맞지도 않았던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던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같은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 IMF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끄집어내보자, 당시 경제관료들은 어떻게 나라를 파산시켰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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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 앞서 먼저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의 한국의 펀더멘털은 비교적 건강하기 때문에 같은 방식의 외환위기가 올 가능성은 낮으니 97년과의 비교가 잘못된 인상을 전달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관료제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지,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IMF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공직자들은 매우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조직 자체의 문제로 이들의 노력의 합은 빈번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때로는 파멸적 결과를 가져오곤 했다. 그런 폭주를 견제하지 못한 것은 구조적인 문제이지 대다수 공무원들이 사악하고 부패해서가 아니다. 조직이 무능한 것이다, 개개인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는 그들 역시 이 비합리적인 조직의 희생자들이기도 하다.
1997년 외화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국가적 위기를 야기한 그 배경을 두고 우리는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 원인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대외적 환경,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나 일본의 버블 붕괴 때문에 한국이 유탄을 맞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악화된 대외적 여건도 물론 중요한 요인이지만 원래 거시환경은 좋다가 나쁘기도, 나쁘다가도 좋기도 하는 것 아닌가. 97년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대외여건이 훨씬 나빠진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부도 위험에 처한 것은 오로지 그때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달랐던 것인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핵심은 비탄력적인 환율에 있었다. 당시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정무적인 이유로 낮은 환율을 고집했다. 당시의 기사들과 여러 시장 참가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외환시장의 일과는 기재부(당시 공식 명칭은 재정경제원)의 눈치를 살피는 일로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무역수지가 적자를 찍든 해외송금액이 줄든 늘든, 관에서 내려라 하면 내리는 것이고 오르라 하면 오르는 것이 환율이었던지라 대부분의 금융기관들은 관의 눈치를 살피며 거래를 했지 경제지표들을 분석하지 않았다. 애초에 펀더멘털을 무시했던 것은 환율을 결정하는 관료들이었다. 경제 부처에서 청와대를 거쳐 정치권에 입문하는 것은 당시에도 매우 인기 있던 출세 루트였던 터라, 많은 관료들은 대통령실의 눈치를 보며 정책들을 짰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주요 경제적 성과로 OECD 가입과 국민소득 1만 불 달성을 내세웠기 때문에 낮은 환율을 선호했고, 청운의 꿈을 꾸며 청와대를 바라보던 경제 부처의 여러 고위직들은 이에 동조하여 아주 무리하게 낮은 환율을 유지했다. 이런 선택은 이후 아래 몇 가지 사안과 맞물려 큰 재양을 초래했다.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기재부는 세계화라는 표어 아래 여러 개혁적 조치들을 내놓았는데, 그중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규모가 작고 전문 인력들이 미비했던 소규모 단자회사(단기자금회사)들을 대거 종금사(종합금융회사)로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외환 조달과 여수신까지 허용한 일이다. 오늘날로 치면 러시앤캐시나 듣보잡 저축은행 같은 회사에 면허를 모두 몰아줬다고나 할까. 이 단자회사들은 본디 지방에서 주로 사채업을 하던 회사들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데없이 외화를 조달해 국내에 풀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으니 그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생소했던 종금사들이 해외 금융시장에서 어떻게 외환을 조달하겠는가? 여기에 전직 기재부 관료들이 등장한다. 당시에는 경제관료들이 퇴임 후 각종 금융사의 임원으로 가는 것이 지금보다도 더 흔하던 시기였는데, 이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영입했던 기관들 중 하나가 바로 종금사였다. 90년대 중반에 강남 아파트 한 채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고 재취업한 전직 관료들은 시중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관이 누우라면 눕고 서라면 서던 시중은행들은 부실한 그들의 회사에 외화를 공급했다. 즉 시중은행들이 높은 대외 신인도를 바탕으로 해외에서 달러를 조달하고 나면 위험관리도 안 되고 자본도 부실한 종금사들이 전관들을 비롯한 여러 루트를 동원해 가져간 것이다. 그들은 이를 영향력이라고 하지 않고 영업력이라고 불렀다.
정부가 새 업종에 특혜를 주고, 우후죽순 생긴 신생 종금사들이 경제관료들을 뽑아가며, 그렇게 빳빳한 새 명함을 든 고개 뻣뻣한 전관들이 시중은행과 국책은행에서 달러를 뽑아다가 돈을 버는 조선식 창조경제 일자리는 처음에는 그럭저럭 돌아갔다. 특히 반도체 특수와 맞물렸던 당시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1996년 D램 가격이 폭락하자 낮은 환율을 고집했던 한국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환율이 치솟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외환시장에 대한 통제를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리석으면서도 오만했던 그들은 세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사실 우리가 외화부족 사태를 겪은 것은 97년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과거 최소 4번 이상의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마다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하거나 미국 재무부의 협조를 받아 문제없이 고비를 넘겨왔기에 기재부는 이번에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한반도가 이념대결의 장이 된 이후 미국은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남한의 경제를 구제해 주었기에, 그 타성에 젖은 한국의 관료들은 이번에도 우방국이 이 위기를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현역이었던 부시를 물리치고 백악관에 들어서지 않았던가. 오랜 저성장을 끝내기 위해 이 젊은 대통령은 동맹국들이 불공정 무역을 일삼는 것을 더는 좌시하지 않았다. 미국 상무부와 재무부는 불평등한 무역조치들과 비관세 장벽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 기업들이나 상품을 차별하는 조치를 내놓는 동맹국들에게 기존의 특혜를 제공하지 않거나, 더 나아가 상응하는 조치를 가하겠다고 통보했다. 냉전 이후 바야흐로 정치가 아닌 경제논리가 워싱턴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게다가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의 북한 핵 시설 폭격을 저지하고 제네바 핵 협상에서 배제되는 등 관계가 매우 나빴기 때문에 미국의 호혜적 지원을 기대하기 아주 어려웠다. 그것도 비정상적으로 낮은 환율과 부실한 제도로 실시간으로 외화를 탕진하는 한국의 사정을 고려하면 더더욱. 하지만 여전히 경제관료들은 미국이나 일본이 한국에 돈을 퍼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공무원들의 사고 구조는 늘 그렇게 삼엽충 화석처럼 굳어있는 법이니까. 따라서 정부는 구제금융이 필요하지 않냐는 시장과 외신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큰소리를 쳤다. 그들의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후 (마찬가지로 근거 없는) 배신감으로 돌변해 IMF 막후에 미국의 음모가 있었다는 피해 망상의 근원이 되었다.
하지만 사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한국에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IMF와의 협상 과정에서도 이 관료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꼬장을 부렸다. 부실의 핵심이 된 종금사들을 모두 일괄 정리하라는 협상단의 요구를 거절하곤 한국 정부와 공동 실사 후 선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부실의 핵심이었던 종금사를 감싸고돌았다. IMF가 요구했던 관치금융의 철폐, 자본시장 개방, 노동/금융시장 개혁 등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선진화의 필수조건일 뿐 아니라 자본을 끌어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 관료들은 끝까지 한국식 관치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며 똥고집을 부렸다. 누가 같은 핏줄 아니랄까 봐 북쪽 동무들처럼 벼랑 끝 전술을 펼치는 한국 관료들을 보며 IMF와 막대한 자금을 출자했던 미국의 실무자들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를 보고받은 미 재무부 장관은 격분하며 이런 태도를 보이는 나라를 구제할 방법은 없다며 조기 지원을 반대했다. 하지만 펜타곤과 주한미군 사령관까지 나서서 구원을 요청하고 한국 역시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 가용 외화보유고가 20억 불 아래로 떨어져 불과 일주일도 버티기 어려워지자 양 측은 개혁안에 합의했고 IMF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결국 나라를 외환위기라는 폭풍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무능한 경제관료들이었다. 물론 방만한 경영과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한 대기업과 금융사들의 잘못도 있지만 원가가 만원인 국밥을 나라가 오천 원에 팔라며 돈을 대주다 끊어서 식당들이 부도났다면, 국밥 장사를 하던 사장님들이 문제일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이유로 돈을 대주다가 끊은 나라가 문제일까? 게다가 기업들과 금융기관은 그 값을 치렀다. 우리나라 30대 대기업 중 거의 대부분이 부도를 냈거나 자회사를 매각했고 당시만 해도 5대 은행으로 불리던 조흥은행,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서울은행이 모두 인수되거나 합병되어 사라졌으니까. 그렇게 비싼 대가를 치룬 탓에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은 상당히 낮은 편이며 대형은행들 역시 매우 탄탄한 재무제표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라를 파산으로 몰아간 경제관료들과 정부 조직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적으로 아무런 처벌이나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행이 외환위기의 가능성이 있다며 23차례나 기재부와 청와대에 보고를 올렸지만 모두 묵살됐으며 KDI 역시 97년 3월에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보고서를 발간했지만 기재부는 이 보고서의 발간을 막고 이미 발행된 부수를 회수하기까지 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기재부 출신의 김인호 경제수석은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으로 기소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 외환위기를 악화시킨 종금사들이 1995~1996년에 무더기로 허가가 난 배경 역시 핵심 의혹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것 없이 국정조사가 마무리됐다. 또 종금사 허가 때문에 책임지고 처벌받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고작 6급에 불과했던 자금시장과 주무관에게도 다수의 종금사들이 무려 천만 원이 넘는 금품을 제공했다는 사실(
링크)로 미루어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배경에 뭔가 석연찮은 동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건국 이래 최대의 환난이라고 했던 IMF는 이렇게 발생했다. 기재부가 변화한 거시환경에 눈을 감고 저환율을 밀어붙이고, 무자격 부실회사들이 무분별하게 단기외채를 쌓는 것을 적극적으로 조장하였으며, 그렇게 문제가 터지자 다른 기관의 입을 틀어막고서, 달라진 국제관계를 무시한 채 관행적 대외원조에만 매달리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은 것이 바로 IMF의 본질이다. 그 가운데 경제관료들은 정치권에 줄을 대거나 민간 금융사에 낙하산으로 내려가 전관 대접을 받으며 출세를 노렸고, 이미 그렇게 출세한 그들의 선배들은 그 연줄을 한껏 이용해 국가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대로 비틀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국가 부도의 길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할뻔하자 그들은 전국민 가스라이팅에 나섰다. 순진한 국민들은 무분별한 해외여행에 나섰던 과거를 반성하고 금모으기 운동에 나서며 국산품을 애용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확보한 외화는 당시 정부가 외환시장에서 바보같이 탕진하던 금액의 불과 며칠 치 밖에 되지 않았다. 환란의 주범으로 몰린 경제관료들은 자신들은 불을 끄는데 실패한 소방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만, 무리한 환율조작에 나서다 나라를 홀랑 태워먹은 그들이 방화범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가스라이팅에 몰두하다 진심으로 자신이 선의의 피해자라고 믿게 된 과천의 사고뭉치들은 결국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했다. 바로 탐욕스러운 양키 금융가들이 의도적으로 아시아 외환위기를 촉발하여 결과적으로 한국의 자산을 싸게 샀다는 것. 게다가 IMF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기에, 일본이 우리를 도와주려 했지만 양키들이 일본의 원조를 막고 한국의 외채 상환을 독촉했으며, 또 한국에 호의적이었던 IMF가 강경하게 돌아서도록 막후에서 조종했다는 민족주의적 음모론이 등장했다. '그래 내가 국가를 부도낸 것이 아니라 미국이 나로 하여금 부도를 내도록 조종했다, 이거야.' 하지만 그런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이는 현실도피를 위한 애처로운 망상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인위적 환시 개입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과도한 관치금융과 비정상적 리스크를 진 국내 금융기관의 위험성, 그리고 폐쇄적인 자본시장으로 인한 국제수지 불균형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한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그 모든 조언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다 부도를 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 자신이었다. 실제로 외환위기가 터지기 불과 1년 전 금융연구원이 주최한 한 세미나에서 MIT의 뤼디거 돈부쉬 교수가 당국자들에게 환율시장을 통제하는 정책의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한 적이 있었는데 한국 관료들은 거기에 "한국의 금융시장은 성숙하지 못해 이렇게 통제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돈부쉬 교수가 지적한 바로 그 이유로 한국은 국가부도에 내몰렸으니, 미개한 것이 한국의 금융시장이었을까 아니면 한국의 관료들이었을까.
그들의 뒤틀린 세계관은 미 로버트 루빈 미 재무부 장관과의 일화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 루빈 장관이 골드만 삭스의 회장으로 있던 시절 그가 과천 기재부 청사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원래 장관이나 차관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둘 다 각기 개인 사정을 이유로 자리를 비웠고 따라서 루빈은 과천 청사의 비상계단을 걸어 오르락내리락 하며 뺑뺑이를 돌다 고작 과장 하나를 만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수모를 당한 루빈 장관이 이후 한국과의 IMF 협상에서 그가 거칠게 나온 배경이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그 일화를 거듭 언급하는 관료들의 의식 저변에는 우리가 귀한 분인 줄 몰라뵙고 의전에 실패했기 때문에 한국을 도와주지 않은 것이라는 너무나 김치스러운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관료들이 금융사들 법카를 빌려다가 그를 풀코스로 모셨어도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한국의 외화보유고는 2011년에 관료들과 국내언론이 그렇게 비웃고 멸시하던 그리스보다도 훨씬 더 작았고 기업들의 부실은 더 심각했으니까. 부패하고 도태된 조직문화의 수호자들답게 그들은 IMF의 원인을 접대와 의전에서 찾았다, 발전된 선진국의 시스템에서는 민간 영역의 인사가 공공 부문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대신에.
하지만 실제 구제금융의 배경은 관료들의 망상과는 매우 달랐다. 당시 아시아에서만 해도 한국뿐 아니라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가 구제금융을 신청했으며 게다가 우리에게 지원된 패키지는 역사상 최대 규모로 IMF가 과거 영국에 지원한 액수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러니 여차하면 추가 출자가 필요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최대 출자국인 미국의 협의 없이 IMF가 막대한 자금을 쓸 수는 없었기에 쩐주인 미국 재무부 차관이 함께 파견된 것이다. 게다가 당시 그들이 요구했던 포괄적인 구조조정과 경제개혁은 매우 교과서적인 내용들로 낙후된 한국 경제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사안들이었다. 자본잠식에 빠져도 연줄만 잘 대면 화수분처럼 대출이 나오던 금융과 과도한 중복투자, 연공서열로 돌아가던 종신고용제, 그리고 불투명하게 관치가 판치던 금융시장이 오늘날까지 지속되었다면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적 위상은 어땠을까? 관료들은 당시 미 재무장관이 월가 출신이어서 약탈적인 투자회사들의 입장을 관철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IMF 지원 결정 이후에도 추가 대출을 꺼리던 JP모건과 시티은행에 압박을 넣어 한국이 낮은 금리로 달러를 조달하게 도운 것은 바로 그 루빈이었다. 물론 IMF의 처방에도 흠결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못된 정책과 개입으로 경제를 파탄내 놓고서도, "나는 금융사 법카로 룸싸롱에서 마이웨이나 부르며 하던 대로 할 테니, 너희는 얌전히 돈만 두고 가라" 라는 요구를 들어줄 상대는 없다. 나라가 파산한 것은 관의 도덕적 해이가 파산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관료들은 한국이라는 방구석에서만 통하던 자신들의 여포짓이 해외에 먹히지 않으니 해묵은 자본주의 음모론으로 메타버스를 구축하고 그것이 외환위기의 배경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작년 크레디트 스위스라는 대형 금융사가 붕괴했지만 스위스는 망하지 않았다. 2008년 리만과 메릴린치가 파산하며 금융시장이 붕괴했지만 미국은 망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고 투자를 했다가 회사가 망하는 것은 그 회사의 문제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같이 파산하는 것은 국가의 문제다. 제도의 문제다. 외환위기의 배경을 뜯어보면 무분별하게 부실을 키운 기업들의 파산 이전에 외화보유고를 탕진하고, 부실을 키우라고 적극적으로 독촉했으며, 문제 제기를 막은 기재부와 관료들이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은 전쟁을 겪거나 금융제제를 얻어맞은 나라조차도 겪지 않았던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와 관료들은 참사를 초래한 자신들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축소하였고 우리가 기억 속에서도 그들이 저지른 참사는 재정경제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시나브로 지워졌다. 그래서 여전히 그들을 견제장치는 마련되지 않았다. IMF 구제금융 그 이후 25년, 기업들은 혁신을 이뤘고 은행들의 대차대조표는 훨씬 더 건전하다. 97년 이후 한국경제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상당 부분 개선했다. 하지만 환란의 주범인 기재부는 거의 바뀌지 않았으며 여전히 똑같은 구조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마치 구제금융을 신청하던 그날이 어제인 것처럼. 우리는 과연 IMF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래된 사건을 다시금 끄집어내어 사실관계를 정리한 이유는 이것이 아직도 끝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IMF 구제금융을 받아 개혁안을 수용한 일은 당시 많은 기재부 고위공직자들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남겼는데, 이후 관가에는 독특한 철학을 가진 부류가 탄생했다. 그들의 신념은 환율주권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풀어서 이야기하면 한 나라가 자신의 환율을 결정하는 것은 주권의 영역이라는 것. 그러나 환율이라는 것은 달러화와 원화의 거래비율을 의미하고, 이를 결정하는 것이 한국 정부라면 반대로 미국 정부에게는 주권이 없어야 한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이 과천에, 뒤이어 세종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이 믿음은 외환위기가 어리석은 관료들의 처참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외국의 투기세력으로 인해 촉발된 일이라는 생각을 내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관을 개혁하고 견제할 것이 아니라 되려 우리 관료들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정부의 시스템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늘린 권한으로 이 신흥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은 여전히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다닌다. 리만사태 전후로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금융시장 밖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사례를 열거하면 끝도 없다. 특히 거시환경이 급변할 때마다 그들은 엄청난 실패를 저질렀다. 2000년대 대표적 환율주권론자였던 강만수와 최중경 듀오는 수출을 위해 높은 환율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의 주권이니까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환율을 방어하겠다며 무제한으로 달러를 사다 수조 원의 손실을 내고 항복하더니, 얼마 후 리만사태로 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지자 갑자기 돌변해서 이번엔 낮은 환율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의 주권이라며 막대한 달러를 시장에 내다 팔다 또 위기를 맞는다. 붕괴의 진원지에 있던 연준조차도 경제적 여파를 가늠하지 못해 사력을 다하고 있던 순간 법대 학부 출신의 장관까지 나서서 이제 곧 환율이 안정될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며 정부는 미네르바라는 전문대 나온 무직 블로거와 영혼의 맞다이를 벌였지만 환율이 하루 세 자리수 씩 오르자 처참하게 패배했고, 그러자 그들은 다분히 보복적인 의도로 그를 기소했다. 죄명은 명예훼손과 허위사실유포. 하지만 실제로 허위사실을 적극적으로 뿌리던 것은 바로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관료들 아니었던가.
바닥에 떨어져 짓밟힌 체면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또다시 언론 플레이와 대국민 가스라이팅에 나섰다. 당시 연준은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미국 내의 자산 가격뿐 아니라 미국의 기관들이 보유한 해외자산의 가격도 안정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여러 신흥국들의 외화스왑라인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당시 연준 의장이었던 버냉키의 회고록에 이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데, 당시 미 금융기관들의 익스포저가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선별하여 브라질 싱가포르 멕시코 4개국과의 통화스왑을 일괄적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연준이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네 신흥국들과의 스왑라인을 같은 금액으로 결정해서 같은 날에 발표한 것을 고려하면 이 프로그램에 한국 정부의 역할이나 기여도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뉴스를 접한 기재부는 이게 웬 떡이냐며 마이크와 기자들 앞으로 달려가 아, 이게 쉽지 않은 일인데 우리가 노력한 한국 경제외교의 쾌거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이 허풍은 두고두고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앞서 거시환경이 급변할 때마다 기재부가 크게 삽질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최근에도 거시환경이 크게 변했다. 그러자 경제관료들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삽질을 시작했다. 연준이 급격한 금리 인상에 나서며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자 그들은 선제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율은 1200원보다도 낮았던 데다, 전 세계적으로 달러가 크게 강세였으며 결정적으로 한국의 무역수지가 건국 이래 최대 적자폭을 기록했던 시점이기에 그렇게 낮은 환율에서 펼치는 정부의 매도 개입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 그깟 경제지표가 나라님의 발목을 잡을 소냐. 한국은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외환보유고를 퍼부었는데, 그들이 이후 1년간 환시 개입에 쓴 규모가 코로나 당시에 시장안정에 투입된 보유고의 무려 5배에 달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옆 나라 일본의 사례와 비교해 보자. 일본중앙은행의 경우 연준의 첫 금리 인상 이후 외환시장 개입에 나선 것은 불과 네다섯 차례뿐인데 그 모두 환율이 현재보다 현격하게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졌으니 일본의 환시 개입은 시가평가 기준으로도 모두 큰 이익을 본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같은 기간 거의 매달 매도 개입에 나설 정도로 아주 빈번하게 시세조작에 나섰는데 그마저도 대부분을 올해 상반기 말 기준보다도 낮은 환율에 팔아버렸으니 상당히 큰 평가손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개입은 시장이 비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로 제한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금융관료들은 아주 빈번하게 시장개입에 나서 비이성적인 결과를 초래하니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과거의 허풍이 만기 된 어음처럼 돌아왔다. 그들도 기억력은 있는지라 이렇게 계속 달러를 퍼붓다 외화보유고를 거덜 냈던 과거의 사례들을 떠올렸다. 따라서 그들은 보유고를 쓰지 않고도 개입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과거 통화스왑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연준이 스왑라인을 열어준 것은 국제금융시장이 극심한 패닉에 빠져있을때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위한 것이지, 너희 마음대로 펀더멘털로부터 벗어나서 환율조작을 하라고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절대 아니다. 마치 실업급여는 부득이하게 해고된 실직자들을 위한 것이지, 몇 달 일하다 자발적으로 잘려서 여행비로 흥청망청 쓰라고 있는 프로그램이 아닌 것처럼. 게다가 지금은 미국이 유동성을 흡수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라 리만이나 코로나 시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에 연준이 통화스왑을, 그것도 무모하게 환시 조작에 나선 한국에게 열어줄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법. 과거 통화스왑을 마치 FTA와 같은 경제외교의 성과처럼 포장했으니 이제 와서 통화스왑이 안된다면 경제외교를 못했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경제관료들은 마치 실업급여 부정수급자들처럼 계속해서 연준과 미국 재무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야 했다. 이를 바라보는 미국 재무부와 연준의 눈에 한국 관료들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실제 배경이나 제도의 취지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관료들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쓰던 국내 언론들도 마치 통화스왑이 마치 매달리면 될 것도 같다는 식으로 보도했는데 이는 무척이나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국제정세에 무지한 채 타성에 젖어 미국과 일본의 직접 지원에 매달리던 97년의 재경원과 22년의 기재부는 매우 닮아 있었다.
데자뷰가 느껴지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부실한 PF를 살려보겠다고 관치금융의 주먹을 휘두르다, 집값이 오르니 이젠 마치 조현병 환자처럼 반대쪽 주먹을 휘두르는 금융위, 금감원, 기재부, 그리고 대통령실의 전직 기재부 출신의 관료들. 기자회견 이후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종금사를 감싸고돌던 과거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나 하나뿐은 아닐 것이다. 무역수지가 빠르게 적자로 돌 때, 불가능한 정책목표에 매달리며 국가자원을 소진하고, 소수의 이익단체들을 비호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은 명확하게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정부의 시장개입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꾸준하게 실패하는 역사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가장 큰 실패는 당신과 나의 유년 시절의 비극을 낳았다. 안타깝게도 정부의 한심한 개입은 외환시장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정부의 거듭된 실패는 기재부의 칸막이를 넘어, 교육부, 국토교통부, 보건복지부 등 사실상 정부의 전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기재부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밸류 업은 코스피 다운으로 나타나는 중이고 국토부는 주택 공급에 10년 넘게 실패하고 있으며, 필수 의료를 살리겠다던 보건복지부는 성형외과 개원의들이 아닌 필수과 전공의들이 파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능한 관료들이 사방에서 나라를 파산시키고 있다.
옛말에 잘못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했던가. 현대사회에서 잘못된 정책은 전쟁보다도 무섭다. 그것이 IMF에서 우리가 얻은 진짜 교훈이다. 이젠 정부와 관료들이 주도하는 경제모델은 성공할 수 없다. 오늘날의 시스템은 더 이상 고작 학부 나와 십수 년 전에 행시 붙은 게 인생 업적의 전부인 비전문가들이 순환보직을 돌다 몇 날 야근한다고 해서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이 뒤처진 관료조직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권력을 확장해가며 민간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무슨 무슨 개혁안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관 주도의 성장 모델은 이미 지난 세기에 한보와 조흥은행과 함께 파산했다. 정부와 관료조직은 결코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되려 그들은 가장 시급한 개혁의 대상이다. 그러니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 또 삽질하다 외환위기 같은 것이나 터뜨리지 말고. 명심하라. 당신들이 정말로 개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태된 자기 자신뿐이다.
위의 내용은 이제까지 언론에 공개된 내용과 개인적인 의견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