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9.

오징어게임3: 최악의 사이코패스 성기훈

비범한 일을 겪은 사람은 결코 이전의 평범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그가 겪었던 사건이 끔찍하다면 더더욱. 이 잔혹한 생존게임에서 살아남은 성기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 게임에서 그의 친구-상우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게임을 포기하겠다는 기훈을 막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렇게 기훈은 자신의 손으로 단 한 명조차 죽이지 않았음에도 이 잔혹한 데스매치의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깨달았다.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가 분명히 부서졌음을.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는다는 도파민의 끝을 경험한 그의 뇌는 더 이상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었다. 머리를 빨간색으로 물들여 보아도, 456억이라는 돈을 아무리 써도, 아무도 없는 호텔 방에서 소총을 난사해 보아도, 심지어 가까운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그의 뒤틀린 욕구는 도통 만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광적으로 프런트맨을 찾는 일에 집착했다. 새로 피어난 사이코패스적 욕망을 자각하지 못한 그는, 그것이 오징어게임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포장했다. 하지만 기훈은 형사처럼 섬을 수색하지도, 이 끔찍한 사건을 언론이나 유튜브에 폭로하지도 않았다. 그가 간절하게 찾던 것은 바로 지원자를 모집하던 딱지맨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변태 살인마가 되어버린 기훈이 진심으로 원했던 건, 다시 그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었으니까.

오징어게임의 세계관에서는 큰돈을 내면 죽음을 구경할 수 있다. 살인 게임을 두고 내기를 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 오징어게임을 설계하고 플레이했던 오일남조차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보는 것이 하는 것보다 재미있을 수는 없다고. 수십 회의 라운드를 거치며 그가 본 모든 극적인 살인과 자극적인 죽음들을 다 합쳐도, 단 한 번의 직접 겪어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455개의 죽음을 직접 경험한 성기훈의 내면은 과연 얼마나 비틀려 있었을까. 그리고 그 너머에는 오일남도, 프런트맨도, 딱지맨조차도 미처 도달하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쾌락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넘어, 영혼을 파괴하는 일. 누군가가 자신을 믿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쾌감은,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쾌감에 눈을 뜬 세계관 최악의 싸패 살인마가 그 두 번째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 게임에서 그는 낯선 이들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나를 믿지 않는 이들이 랜덤하게 죽는 일은 아무런 재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자 그는 끔찍한 욕망을 분출한다. 밤에 혈투가 벌어질 것이 뻔하니 먼저 기습하자는 오영일의 제안을 극구 말린다. 그러다 X파가 이겨서 게임이 끝나면 재미없잖아. 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미궁 같은 게임장의 지리도 모르고 병력도 적고 무기도 탄약도 없던 반란파가 이길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희생자들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무모한 반란을 감행한 건, 한 번 게임을 경험했다는 기훈에게 뭔가 믿을 만한 계획이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애초에 기훈의 계획은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한 번에 몰살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기훈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믿음을 샀던 것 아닌가. 타다다다탕.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끔찍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미션 완료.

모든 것이 끝난 그는 의욕을 잃었다. 이제 나를 신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나를 믿고 죽어줄 사람도 없다. 아 재미없다. 나는 고작 돈이나 벌자고 이 게임에 다시 들어온 것이 아닌데. 왜 벌써 끝났지. 힘이 빠진다. 그 와중에 눈치 빠른 대호라는 자식이 내 본심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절규한다. "그때 차라리 동그라미 새끼들이랑 싸웠으면 이길 수도 있었어.  싸움도 이기고! 투표도 이기고!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말한 그 말도 안 되는 작전 때문에 다 죽은 거야! 당신이 죽인 거야!" 

아니 어떻게 알았지.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그를 가만둘 수 없다. 누군가를 죽여야 통과할 수 있던 네 번째 게임에서 그는 다른 타겟들은 모두 버리고 오로지 대호 만을 노린다. 뭐 여기서 이겨서 456억을 더 받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징어게임 전 시즌의 모든 참가자들이 생존을 위해, 또 상금을 늘리기 위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인을 저지를 동안 기훈은 오로지 살인 그 자체를 움직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탈락해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도.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지독한 싸패 살인마였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는 결국 목적을 달성한다.

아 이제 정말 끝이다. 아무 재미가 없다. 오징어게임 밖에서도, 또 안에서도 이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여기까지다. 모든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한 그 앞에 갑자기 새로운 사건이 펼쳐진다. 한 아이가 탄생하고 여러 사람들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한다. 한 미친 노파는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제 손으로 친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아 이거다. 이 미친 싸이코패스의 눈이 다시 희번덕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 아이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아 이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를 위해 스스로 죽어줄 것인가. 히히.

그래서 그는 준희에게 헛된 희망을 준다. 혹시나 그녀가 무리해서 다리를 건너다 하찮게도 고작 사고로 죽을까 봐 그녀를 만류한다. 끝까지 자신을 믿고 거기에 남아 있으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그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발목을 다친 준희를 데리고 돌아오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진짜 간다? 내가 간다, 갈게? 참 근데 그랬다가 나도 죽으면 애는 어떻게 하지. 응? 사실상 기훈은 준희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이 싸이코패스는 그 목적을 이룬다.

기훈: 네가 거기서 다 죽이면 재미가 없잖아

마지막 고공 오징어게임에서도 그의 천연덕스러운 싸패 짓은 계속된다. 그는 100번 참가자의 도시락 제안이 답이 아니라며 이를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럼 한 명밖에 안 죽잖아. 어차피 누군가 최소 하나는 죽어야 나머지가 사는 이 게임에서 기훈은 아득바득 분란을 일으켜 기어코 하나 대신 다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친부인 명기와 엄마를 잃은 아이. 그것이 기훈이 기획한 엔딩이었다. 근데 이런 젠장, 엄마처럼 아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어줄 줄로만 알았던 명기가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 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아닌가. 아니 애써 극적인 마지막까지 다 준비했더니 이 쬐그만 놈이 망쳤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가만둘 수 없다. "넌 자격이 없어" 기훈은 저 아래로 그를 밀어 떨어뜨린다. 

이제 정말 다 끝났다. 이제 죽일 사람은 모두 죽었고 나를 믿고 더 죽어줄 사람도 없다. 밖으로 나가면 기다리는 건 또다시 아무 의미 없는 하루들. 공허함이 몰려온다. 차라리 아까 죽을걸. 그런 그의 눈에 VIP들의 관람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깨닫는다, 아직 그가 배반할 믿음이 하나 더 남아있음을. 타인의 믿음을 배신하며 죽음을 가져오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던 이 뇌가 망가진 사이코패스는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믿음을 배반하기로 한다. 자신을 죽여가면서까지. 절벽 아래로 뛰어들기 전 그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는 프런트맨의 질문을 떠올리며 이렇게 답한다 "(응 그리고)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죽더라)" 


*               *               *


극적인 장치와 연출, 그리고 탄탄한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시즌 3에 대한 평가는 전반적으로 박하다. 그 이유는 많은 시청자들이 성기훈의 변화된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오징어게임을 한차례 겪었던 인물이 별다른 계획도 없이 진행요원들의 본부에 무작정 침입한다거나, 순박한 얼굴로 모두를 살리겠다고 다짐하던 성기훈이 갑자기 증오에 휩싸여 대호를 추격 끝에 죽인다는 설정은, 감정선의 연속성이 너무 부족했다. 그의 반복적인 변화와 불규칙한 선택들은 시청자에게 설득력을 주기 어려웠고, 도리어 그는 세계관 최강의 변태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이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인물처럼 보였다.

이렇게 모순된 주인공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황동혁 감독 본인의 모순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오징어게임이라는 세계관을 통해 경쟁적 자본주의의 잔혹함과 비인간성을 비판적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미국 테크회사의 막대한 자본 덕분이었다. 황 감독은 10여 년 전부터 오징어게임의 시나리오를 구상했지만, 국내의 협소한 펀딩 환경에서는 이질적인 내용을 다룬 작품에 선뜻 투자할 이가 없었다. 결국 그 모험을 감수한 것은 자금력이 막강한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였다. 그리고 시즌 1은 성공했다. 오징어게임은 전 세계 수많은 경쟁작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황 감독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마치 게임의 최종 우승자가 모든 것을 거머쥐듯이. 이제 그는 후속 시즌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도 원래 하나였던 이야기를 두 시즌으로 쪼개는 방식으로. 황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인정했듯이, 그 동기는 다름 아닌 돈이었다.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감독은 다시 기훈을 게임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의 페르소나가 반영된 주인공은 그 작품 안에서 이상주의를 호소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성기훈이라는 인물은 갈라지고 어그러진다. 자본을 비판하려는 이상과 자본을 좇는 욕망 사이에서

결국 성기훈의 혼란스러운 변화는 단지 캐릭터의 붕괴가 아니라, 창작자인 황동혁 감독 스스로가 겪고 있는 자기기만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자본을 비판하며 만들어진 이 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의 힘으로 탄생했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 역시 그 모순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시즌 3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오징어게임은 작품 자체로는 어색하고 파편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작품 밖 현실과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창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파열음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제 현실에서 VIP에 더 가까워진 이 글로벌 스타 감독은, 억지로 사회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참가자들에게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려 애쓰며, 그 간극을 지적하는 대중의 비판을 오히려 사회 탓으로 돌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만들어낸 세계와 자신이 택한 현실 사이의 모순과 균열이 다음 작품에서는 과연 어떻게 정당화될지, 또 감독은 어떤 변명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2025. 7. 2.

문제는 공급이야, 멍청아 (It's gong-gub, stupid)

한국의 부동산이 저평가되어 있다고 분석한 것이 10년 전의 일이다(링크). 그리고 진보 정부가 각종 세금과 규제로 공급을 막아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불과 5년 전의 일이다(링크). 그리고 이후 서울의 평균 아파트 매매가격은 5년 마다 두 배씩 뛰어올라 이제는 10억을 훌쩍 넘어간 지 오래다. 올해 들어 다시금 부동산 가격은 무섭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정부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강력한 대출 규제를 들이밀었다. 자, 규제는 하늘로 치솟은 집값을 끌어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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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인류가 마실 식수가 가까운 미래에 크게 오염될 위험이 크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장 미래에 자신들이 마실 물을 사재기할 것이다. 당장 오늘의 물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 물의 공급이 끊길지 모르기에 모두들 비싼 값에 물을 사서 저장하기 시작한다. 패닉바잉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을 모두 물을 사 모으는데 쓸 뿐 아니라, 대출까지 내서 물뿐 아니라 대형 물통과 저장탱크를 사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TV에서 갑자기 몇몇 저수지의 물이 마시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더욱 패닉 할 것이다. 사람들을 다른 소비와 투자를 줄이더라도 더 많은 물을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병당 300원밖에 하지 않던 생수의 가격은 열 배로 크게 뛰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래의 소득을 영끌 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생수를 확보하려고 들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생수부 장관 김 씨가 등장해서 아무 근거 없이 미래의 물이 부족하지 않다고 백날 우겨봤자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할 뿐이다. 그녀는 결국 비참하게 경질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전문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다리 짧고 관종기 가득한 인간이 장관으로 와서 손놓고 놀다 정작 식수가 부족하기 시작하니 재빨리 사퇴하고 도망가고 말았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점점 짙어진다. 거기에 뜬금없이 금융당국이 등장한다. "아, 미래 식수가 모자랄지 말지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물값이 폭등한 것은 투기적 수요 때문이야"라며 국민들이 당장 마시지 않을 물을 미리 사들일 경우 페널티를 주기로 했다. 뒤이어 징벌적 물 보유세가 등장했다. 금융권에서 인기 있던 물 담보대출을 금지하기로 했다. 얼굴에 기름기 낀 장차관들이 대국민 담화에서 근엄한 얼굴로 미래의 소득을 끌어당겨 과도하게 물을 사들이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며 일침을 가한다. 올바른 거시건전성을 위해 이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훈시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얼마 못가 고위 공직자들이 뒤로 수백 톤의 물을 쟁여놓고 있었다는 폭로가 등장한다. 정부 예산으로 세종시 생수 특공이라는 혜택이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에 그들은 자신들이 쟁여 놓은 물은 실수요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리고서 되려 눈을 부라리며 요새 애들이 물을 너무 많이 쓴다, 오염됐다는 그 물 마셔도 안 죽는다 그냥 마셔라, 라며 국민 탓을 한다. 그렇게 언론이 시끌벅적하게 난리를 피우지만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각종 대출을 막은 탓에 미래가 창창한 사회 초년생들만 미래에 마실 물을 확보하지 못해 불안할 뿐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과도하게 오른 물값을 낮추는 가장 올바른 정책은 앞으로도 식수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를 주는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주택시장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에 양질의 신축 아파트가 부족해 가격이 치솟는 상황이라면, 이를 안정시키는 유일한 해법은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그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결국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예고했던 대로 공급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고, 이제는 일반 수요자들조차도 주택 공급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의견이 갈리는 지점은 이 공급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판단, 그 차이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서울시 아파트의 공급 부족은 이제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서울시 주택 인허가 수

왜 서울시의 공급은 막혀버렸을까. 일반적인 시장 환경에서는 공급이 막힐 이유가 없다. 모두가 살고 싶어 한다는 강남의 신축 아파트 가격은 이제 평당 1억 5천만 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아파트 공사비는 아무리 고급 사양으로 지어도 평당 1천만 원을 겨우 넘기는 수준에 불과하다. 용적률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구축 단지도 많기 때문에, 재건축이나 재개발은 일단 추진만 해도 조합이 수백억 원을 벌 수 있는 수익성 높은 사업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각종 인허가권을 무기로 그 수익을 적극적으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초과이익이 생기면 환수하고, 기부채납을 요구하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수많은 규제를 덧붙인다. 분양가는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하고, 공공시설도 함께 지으라고 한다. 심지어 정부가 세금으로 책임져야 할 취약계층의 주거 복지까지 조합에 떠넘기며, 너희 돈으로 지어서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다. 국토부와 서울시는 공사비 상승이 공급 부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강남 신축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에 비하면 건축비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규제와 기부채납으로 뜯기는 금액이 건축비보다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이런 공급 절벽에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규제를 바꾸거나 완화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의 권력은 이 인허가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장경제가 수요공급을 이끌면 우리 관료들은 뭘 먹고살겠는가, 누가 우리의 눈치를 보겠는가. 그래서 규제는 늘어나기만 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 문제를 규제완화 대신 완전히 빈 땅에 정부가 대규모 신축을 지어 해결했다. 수많은 신도시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이제 이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먼저 이제는 서울시 요지에 빈 대규모 택지가 거의 없고, 과거처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지 않아 새로 만든 신도시에 인프라를 구축하기 어려울뿐더러, 무엇보다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경기도 외곽에 살며 출퇴근에 수 시간을 들이는 비용이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의 한국을 발전시킨 관 주도의 성장 공식이 21세기에 먹히지 않는 것처럼 과거의 주거난 해소법이 21세기에 더 이상 먹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자신들의 실책을 인정할 생각이 없다."서울에 신축 아파트가 없으면 빌라에 살면 되지 않나?"라고 말하지만, 정작 빌라 공급도 줄어들고 있다. "경기도 외곽엔 빈 아파트가 많다"고 하지만, 그 말은 인생에서 총 5년을 통째로 빨간 버스 안에서 보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역세권 재건축을 장려하겠다"고는 하지만, 세대당 수억 원씩 정부에 바치라는 조건이 붙는다. 이처럼 현실과 괴리된 방안들만 쏟아내는 사이, 주택시장의 수급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시장이 자신들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정부는, 급기야 망가진 공급에 맞춰 수요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야 인마, 침대가 너무 짧으면 손님의 다리를 자르면 되는 거 아니냐 이 말이야." 이번에 발표된 6.27 부동산 대책은 정부가 지난 10년 동안 발표했던 수많은 수요 억제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어벙한 정치인들이 설계한 수많은 대책이 그랬듯이, 그리고 윤석열 정권에서 무능한 관료들이 내놓은 수많은 대책이 그랬듯이, 그들은 또다시 당신들의 다리를 슥삭슥삭 자르러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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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책은 대통령실이 아닌 금융위원회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부동산 시장이 아니라 늘어나는 가계부채를 억제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하지만 최근 늘어난 가계부채의 대부분은 부동산과 연관되어 있고, 가계가 무리해서 집을 사는 이유는 미래의 공급이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 그건 내 소관이 아니고, 난 가계부채만 때려잡으면 돼"라고 주장하는 금융위의 모습은 침몰하기 시작하는 배에서 도망쳐 나오는 학생들을 후드려 패며 복도에서 뛰지 말랬지! 라며 외치는 학주의 모습처럼 기괴하고 사악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말만 믿고 따랐던 순진한 학생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건 선장의 책임이고, 나는 교칙대로 복도에서 뛰는 애들만 처벌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선생이 있다면, 그 모습은 얼마나 혐오스럽겠는가. 앞서 든 비유처럼, 빚을 못 내게 막는다고 해서 생수 사재기를 유발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소비와 투자를 줄이면서라도 식수를 사 모을 것이다. 지난 3년간 윤석열 정부 아래서 소비와 투자가 망가진 것은 기재부나 금융위 같은 재경직 부처들이 공급 부족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대신 가계부채의 폭증이라는 현상만 때려잡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의 정책 실패의 원인을 되려 피해자인 국민들에게 돌리는 것으로 비열하고 무책임한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발표된, 공급에 맞춰 수요자의 다리를 자르는 강도의 칼이 무척이나 날카로운 것은 사실이다. 다리가 잘린 시장은 잠시 동안은 안정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손님은 끊임없이 올 텐데, 언제까지 침대에 맞춰 국민들의 다리를 잘라댈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고 당신들 역시 이 게임을 이미 해봤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면, 네 다리부터 잘라라. 금융위를 미분양 주택이 넘쳐나는 지방으로 이전하자. 이제 필요 없을 테니 수도권의 집 팔 기회도 드리겠다. 거기에 딸려 있는 대출도 다 상환하시라. 당신의 대출도 엄연히 가계대출의 일부다. 부당하다고? 그렇다. 부당하지. 그런데 당신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짓은 왜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가계부채가 심각한데 그럼 어쩌냐고 되묻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문제는 공급이야, 멍청아.  

2025. 6. 7.

한국 보수는 어째서 무능해졌는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에게 묻다

계엄이 없었더라도 지난 보수 정권은 재집권에 실패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경제적 성과가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숫자만 보더라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윤석열 정부 임기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을 크게 밑돌았고, 최근 4개 분기 동안은 무성장 혹은 역성장을 기록했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세계 주식지수와 비교했을 때, 코스피는 IMF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을 냈다. 환율은 무려 220원이나 급등하며, 외환시장 자유화 이후 전례 없는 불안정을 보여줬다. 이전 정부는 그 원인을 외부 변수 탓으로 돌리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윤석열 대통령 집권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지난 3년간 글로벌 경제를 흔들만한 사건들은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9.11 테러, 북한의 첫 핵실험, 혹은 리먼 브라더스 사태에 필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단 하나, 본인들이 자초한 ‘계엄’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게다가 2024년은 세계 경제가 견고한 성장세를 보였고, AI 열풍의 영향으로 글로벌 수출이 호조를 이뤘다. 한국 역시 사상 최대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국 경제 성장률과 주식시장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경제는 보수”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주리를 틀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 보수는 무능해졌다. 단순히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내부 대립을 중재해 정치적 해법을 도출하는 능력마저 상실했다. 이제는 전통적인 보수 지지층조차, 보수 정치인들이 더 유능하거나 탁월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김영삼과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과거 보수는 눈부신 경제 성장과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주도했던 DNA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유산은 온데간데없다. 그렇다면, 이 보수의 몰락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때마침 보수가 폭주하던 해에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들(대런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A. 로빈슨)의 주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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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국가의 경제적 성공과 번영이 인종이나 지리적 요인보다, 법과 제도 같은 사회 시스템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류 역사 전반에 걸친 방대한 사례 분석을 통해 밝혀냈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처럼 인종과 지리적 조건이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차이로 인해 경제적 성과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경제 주체들이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그 성과를 정당하게 분배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때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양한 실증 사례를 통해 강조한다. 더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일수록 경제적 번영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결론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일부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는 오히려 강력한 독재 체제 아래서 초기 산업화를 빠르게 달성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이들은 ‘착취적 제도의 초기 효율성’이라 설명한다. 기존 사회에서 생산요소가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배분되어 있을 경우, 권위주의적 체제가 단기적으로 높은 집중력으로 자원을 재배치해 급속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대부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며 제도적 개혁과 정치적 포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장은 정체되고 사회 불안정이 증폭된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대표적 사례다. 내전 이전 러시아는 낮은 부가가치의 농업 중심 구조였으나, 공산당은 폭압적으로 자원을 중공업으로 이동시켜 단기적으로는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요소의 배분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성장을 이룬 이후에는 곧 구조적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이러한 역사는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다. 과거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형식적으로 소련의 계획경제와 유사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 제국은 1930년대 대공황의 충격을 극복하고 전시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면밀히 분석했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공업 중심의 계획경제적 요소를 전략적으로 도입하여 만주국을 실험무대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만주국에서 군사 및 행정 경험을 쌓은 박정희는 이러한 국가 주도 개발 체제의 작동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자, 이러한 방식은 한국의 산업화 전략으로 이어졌고, 강력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보수가 이상화하는 과거 한국의 고도성장은 서구의 자유시장경제보다, 소련식 계획경제와 이를 기술적으로 흡수한 일제의 국가통제 시스템에서 비롯되었다.

다행히 한국은 소련이나 일제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빠른 성장 이후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를 요구했고, 미국 역시 군사독재에 제동을 걸며 민주화를 압박했다. 내외부의 압력 속에서 한국은 점진적으로 더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치 체제로 이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민주 정부 아래서도 여전히 정부는 권위적인 태도로 시장에 개입했으며 생산과 소비 분배를 전반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와 관료 사회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경제성장을 저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국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면서도 중앙 정부의 관료가 신축 아파트 분양가부터 수천가지 의료행위의 값을 정하고, 택시비도 정하고, 전기값도 정하고, 누구한테 돈을 빌려주고 누구는 빌려주지 말지도 정해주고, 뭐 이것도 정해주고 저것도 정해주는 경제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본질적으로 스탈린식 계획경제와 닮아 있다. 앞서 언급한 노벨 경제학 수상자들이 경고했듯, 이러한 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계에 봉착한다. 계획경제는 실시간 수요·공급 변화가 시장가격에 반영되지 않아 자원 배분이 왜곡되며, 과잉생산이나 물자 부족이 반복된다. 이는 중앙에서 복잡한 경제를 계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획경제는 유인의 결여로 인해 구조적 비효율을 초래한다. 고시공부 외에는 아무런 실무 경험이 없는 세종시 어진동의 사무관들이 가격과 생산요소의 배분을 통제하는 방식은, 현장의 성과를 과장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이는 곧 생산성 저하와 보고 체계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결국 스탈린식 계획경제는 단기적 산업화에는 일정 부분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과 기술 혁신, 복잡한 자원 배분이 요구되는 현대 경제 체제에는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다수 경제학자들의 일관된 평가다.

이런 비효율은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서울은 집이 부족해 집값이 폭등하는데도 공급은 이뤄지지 않고, 수요가 없는 지방엔 과잉 공급으로 건설사들이 파산한다. 필수 의료 분야의 공급은 줄고, 피부과는 넘쳐난다. 출퇴근 시간에 택시는 안 잡히는데, 기사들은 저임금에 시달린다. 에너지 가격이 올라 한전은 수십조의 적자를 내지만, 인스타 핫플 카페는 창문을 열고 에어컨을 튼다. 부도 위험이 높은 소상공인 대출은 권장되면서도, 담보가 충분한 부동산 대출은 막힌다. 그 차이는 결국 재정으로 메워지고 있다. 정부가 개입하는 분야마다 자원과 자본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있으며, 이는 전반적인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구소련을 무너뜨린 계획경제의 비효율이, 그 정도만 다를 뿐 지금 한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계획경제의 비효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경제 시스템 아래에서, 민간 경제 주체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지 않고, 관의 의중이 좌우한다면, 기업은 당연히 로비에 자원을 투입한다. 이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존재하는 일이지만, 계획경제에 가까울수록 관료의 힘이 더 크기에, 로비는 투자보다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기업들은 퇴직 관료에게 억대 연봉을 내밀며 임원으로 영입하고, 그렇게 들어온 그들은 충실한 로비스트가 되어 법인카드를 들고 후배 관료들을 찾아간다. 그렇게 전체주의적 경제 체제에서는 늘 카르텔이 자라난다. 독일에서는 융커들이, 일제 아래에서는 자이바쓰가, 그리고 한국에서는 관피아와 재벌이 그렇게 등장했다. 이제 많은 재벌 가문에게는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것보다 정부 정책을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되었고, 실제로 보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전직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비중은 증가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보수 정권이 자본시장 정상화를 외쳤음에도 결국 상법 개정을 포기한 배경에는 이런 비대칭적 권력 구조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결국 오늘날 한국 보수가 무능해진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이 경험한 경제성장은 반세기 전 박정희 시대에나 효과가 있었던 스탈린식 계획경제 덕분이었고, 이제 그 모델은 더 이상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다. 중앙정부 관료들이 공급과 수요, 그리고 가격을 결정하는 모델은 오늘날처럼 고도화된 경제에서는 비효율만 키울 뿐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 모델은 더욱 비현실적이 된다. 나라에 축적된 자본이 없던 초기에는 창업주가 곧 회사였다. 마치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의 관계처럼. 그런 시절에 정부와 재벌의 편의를 봐주던 것은 기업 활동에 다소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재벌 3세로 태어나 개차반으로 살다 아빠 돈으로 비싼 로열티 주고 외국 햄버거 브랜드나 가져오는 무능한 경영인을 정부가 싸고도는 것은 기업가치에 해를 끼치는 일이고 국내 자본시장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보수가 가진 성장에 대한 기억과 경험은 대부분 1인당 GDP가 1,0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의 유산이며, 그 유효 기간은 이미 끝났다. 보수가 지지율에 개의치 않는 대통령을 만나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본 결과, 경제가 철저히 무너졌다는 사실은 바로 이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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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이 계획경제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정부가 민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스탈린이 시인이 되고 싶었던 미하엘을 군수공장으로 내몰고, 도조 히데키가 자전거를 사고 싶었던 다카시에게 대신 전쟁 국채를 강매했듯, 한국 보수가 안전한 부동산 담보대출에 집중하려던 신한은행에 대신 위험한 큰 소상공인 대출을 늘리도록 강제하려면, 정부와 관료가 강력한 권력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명령을 거스르면 처벌할 힘을 가져야 한다. 계획경제는 늘 민간의 자유, 그리고 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더 많은 법, 더 복잡한 규제, 그리고 더 강력한 처벌을 들고나온다.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적 가치관은 민주주의적 시스템과 양립할 수 없기에 경제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갈등을 더욱 확산한다. 초등학교 입학연령 하향 시도에서부터 계임계 검열, 나무위키 차단, 생필품 가격통제, 수능카르텔 척결, R&D 지원, 그리고 의대정원 갈등까지. 정부의 온 부처와 관료들은 민간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마치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의 성범죄자처럼 사방으로 분출하며 갈등을 더욱 키웠다. 타협은 없다. 민간과 일일이 얘기하고 설득하면서 어떻게 중앙정부가 국가 경제를 "계획"하겠는가. 바빠 죽겠는데. 관료 출신이자 가장 K-보수적 이념에 심취한 대통령이 계엄이라는 희대의 광기를 분출한 그 배경에는, 민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보수의 이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대런 애쓰모글루가 지적한 대로 민간의 자율성과 정치적 포용성이 약화되는 것과 성장의 지속 가능성이 훼손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 결과 국가는 장기적 침체의 수렁에 빠진다. 이는 단지 경제적 후퇴에 그치지 않고, 표현의 자유와 지식의 확산, 창의성의 발현까지 억제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활력을 잃게 만든다. 지난 보수 정부의 일련의 정책과 태도는 이러한 경고를 현실로 옮기고 있으며, 마치 구시대적 국가사회주의의 유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 위를 떠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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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는 너무나 성공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냈기에, 과거의 방식을 지나치게 신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개발독재 시절의 국가 주도 성장 모델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때 육사 출신들이 사회경제 전반을 독점하던 시대가 있었다. 대통령, 장관, 시장은 물론이고, 공기업의 감사나 대표, 심지어 민간 기업의 사장 자리까지 군 출신들이 점령했다. 그것이 효율적이던 때도 있었다. 1960년대의 한국은 매우 가난했고, 행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교육받은 엘리트도 거의 없었다. 당시에는 군의 행정력과 인재 풀이 민간보다 훨씬 우수했고, 실제로 사회 전반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군 출신이 사회를 주도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정치와 경제·사회 전반에서 물러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 시절을 이상적으로 기억하는 보수 이념만은 그대로 남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군대와 유사한 조직을 새롭게 찾았다. 바로 관료 조직이다. 엘리트주의, 수직적 조직문화, 강한 권력 지향성과 집단주의 등은 과거 군부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다. 관료 집단은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를 그리워하는 보수 세력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 결과, 과거 군인들이 차지하던 자리에는 이제 관료 출신들이 낙하산처럼 내려앉았다. 과거 군 출신들이 민간으로 내려가 낙후된 군대 문화를 퍼뜨려 조직을 병들게 했듯, 관료 출신들 역시 어진동의 후진 관료 문화를 민간에 전이시켜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끊임없이 터진 인사 참사들은 다수가 이 구조적 병폐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처럼 한국 보수는 철학과 현실이 완전히 괴리된 집단으로 전락했다. 겉으로는 친미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미국과 정반대인 스탈린식 계획경제를 추진한다. 자본주의를 주창하지만, 자본시장 질서를 해치는 재벌들의 편을 든다.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반자유적인 정책을 도입하며 환호한다. 심지어 계엄령까지 시도했다. 반미 보수, 반자본 보수, 반자유 보수.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들을 보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쯤 되면 그들의 극단적인 언어를 빌려 "너희야말로 빨갱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들이 예고했던 대로 그들이 도입한 이 빨갱이식 시스템은 경제를 좌초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보수가 처한 위기의 핵심이다. 한국 보수는 철학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으며, 스스로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 보수가 신봉하는 성장 모델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을 가장 빠르게 발전시킨 방식이기도 하다. 이 모델은 여전히 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유효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성적이 바닥이던 학생을 두들겨 패서 대학에 보내는 스파르타식 교사의 방식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 학생이 박사학위를 따고 세계적 연구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으려면 전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한국 보수는 슬럼프에 빠진 이 과학자에게 맞으면 연구가 잘 돼서 노벨상도 가능하다며,  어디서 새롭게 구해온 무식한 선생에게 몽둥이를 쥐여주고 연구실로 밀어넣은 셈이다. 왕년에 이게 얼마나 잘 먹혔는데! 라고 외치면서. 올해 대선에서 많은 유권자들은 여러 잡음과 논란이 있었음에도 야당 대표 이재명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의 당선 이후 주요 시장 지표들은 한국 경제의 향후 회복 가능성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유권자와 시장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야당 대표의 처참한 도덕성보다, 보수의 끔찍한 무능이 나라경제에 더 해롭다는 것이다. 남 탓만 하며 어정쩡한 표정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한국 보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이런 구시대의 왜곡된 철학은 이제 퇴장할 때가 되었음을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그 경고를 들을 귀가 아직 남아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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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27.

노쇼경제학 vs 고시주도성장

모 후보의 노쇼 경제학이 논란을 빚고 있다. 승수효과를 설명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맞으려면 애초에 호텔 예약이 취소되어서는 안됐다. 케인즈 경제학은 정부가 실제로 돈을 써서 시작되는 것이지 뉴딜 하겠다고 설레발 치다 갑자기 입씻고 취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약이 취소되는 일이 반복되면 경제주체들이 불확실성을 반영하여 투자를 늘리지 않는다는 많은 연구들이 있다. 화려한 언변과 경제이론을 비틀어가며 이 모델을 옹호하는 이들은 지식이 아닌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반대 진영이라고 이 사이비 경제학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현재 한국 경제가 전례 없이 끔찍한 저성장을 마주한 배경에는 무능한 관료집단의 무분별한 민간 개입이 자리하고 있다. 고시 출신들이 경제정책도 짜고, 개혁안도 마련하고, 집행도 하고, 환율도 정해주고 수천 가지 의료 서비스의 가격도 정해주고, 은행의 예대마진이나 강남 집값까지 정해주는 데다 민간에게 무슨 사업을 하고 어디에 대출을 할지 지시를 잘 하면 경제가 발전할 것이란 이 고시주도성장모델은 4분기 연속 0% 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게다가 그 바람에 세수가 줄어 재정건전성은 되려 더 나빠졌다. 무능한 보수, 반자유 보수, 반시장 보수. 보수의 진짜 위기의 원인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다.

경제 상황에 따라 통화·재정정책은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명목성장률이 8%에 달하던 2021년에 재정확대를 외치던 이재명의 경제관이 현실감각을 상실한 것이라면, 실제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의 반에도 못 미치는 시점에 균형재정을 고집하는 관료들의 경제 인식도 마찬가지로 정신줄을 놓은 셈이나 다름없다. 엑셀만 밟는 병신과 브레이크만 밟는 등신이 멱살 잡고 싸우는 사이, 나라 전체가 휘청이고 있다. 그리고 인플레고 디플레고 알바 없이 재정건전성에만 교조적으로 집착하던 경제 관료들이 남긴 가장 해로운 유산은, 그들이 급브레이크로 경제를 좌초시키는 바람에 이제 엑셀밖에 밟을 줄 모르는 바보가 마치 유능한 것처럼 보이게끔 환경을 만들어 그들에게 넘겨준 일이다.

2025. 4. 24.

금융위원장 봉이 김병환의 지분형 주택공유제: 없는게 양심인가 지능인가

주택공유제의 골자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주택 구매 시 주택금융공사가 50%의 지분을 가져가고 구매자는 나머지 50%를 부담한다
- 구매자 지분의 50% 중 40%는 은행 대출이 가능하다
- 집값이 반 토막이 날 때까지는 주택금융공사가 손실을 100% 떠안는다 (주금공, 후순위 보유) 
- 집값이 상승할 경우 구매자는 주금공의 지분을 시세보다 낮게 매입할 수 있다
- 거주 기간 동안 구매자는 주금공에 이자보다 저렴한 월세를 지급한다
- 대상 주택은 서울의 경우 10억 이하, 지방의 경우 4억 이하의 주택을 대상으로 한다

자 이 혜택을 주식으로 바꿔보자

- 주식 구매 시 산업은행이 50%의 지분을 가져가고 구매자는 나머지 50%를 부담한다
- 구매자 지분의 50% 중 40%는 증권사에서 대출이 가능하다
- 주식이 반 토막이 날 때까지는 산업은행이 손실을 100% 떠안는다 (산은, 후순위 보유)
- 주식이 상승할 경우 구매자는 산은의 지분을 시세보다 낮게 매입할 수 있다
- 주식 보유기간 동안 구매자는 산은에 이자보다 저렴한 지분 대여료를 지급한다 (배당은 구매자가 모두 가져감)
- 대상 주식은 서울시민 경우 시총 1000억 이하, 지방의 경우 시총 400억 이하의 주식을 대상으로 한다

자 이 조건으로 당장 잡주에 베팅을 안 한다면 당신은 정녕 바보다. 재테크는 포기하고 그냥 은행 예금만 해라. 

모두가 사고 싶어 하는 우량주들은 이 혜택을 절대 볼 수 없다. 펀더멘털이 워낙 엉망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개잡주들이 이 정책의 최고 수혜자들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정책금융을 실시하면 미분양이 산더미같이 쌓인 산간벽지와 지방에 마구잡이로 지은 악성 매물들의 가격이 뛰게 된다. 반 토막이 나면 그때 손절하면 된다. 어차피 내 손해는 0이니까.(제도가 존속하는 한 어치피 제 2의 테마주 투기꾼이 또 이것을 지분공유제로 사 줄 것이다.) 나라가 다 책임져준다는데. 문제는 누군가가 반드시 그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이 경우 그 호구는 바로 주택금융공사가 된다. 주택 값이 오를 경우 주금공은 시세보다 싸게 지분을 넘겨줘야 하고, 주택 값이 내릴 경우 주금공은 독박을 쓰게 된다.  

이렇게 상식에서 어긋나는 구조를 설계한 사람의 의도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 설계자가 멍청해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고시가 어느 정도의 지능을 보장할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사시에 합격한 대통령이 계엄을 발표한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둘, 악성 미분양을 주금공에게 떠넘겨 파산 직전에 내몰린 지방의 시행사들을 살려주기 위한 것이다. 수상하게도 이번 정부에서 나온 거의 모든 부동산/금융 대책들은 부족한 주거용 부동산의 공급을 늘리기보다, 마치 리만 브라더스만큼이나 부실한 PF들을 구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인가. 도무지 알 길은 없지만 공교롭게도 마음에 두 가지 기사들이 떠오른다. 하나는 수많은 전직 기재부 관료들이 낙하산으로 신탁사/시행사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고, 또 시행사들 중에서는 엄청나게 부패한 방법으로 뇌물을 돌리고 접대를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의도의 금융인이라면 한 번쯤은 그들의 화려한 영업방식과 한도를 알 수 없는 법인카드들이 어디서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들어보지 않았나. 그중 일부 사례는 사실로 드러나 법적인 처벌까지 받기도 했다.(링크1)(링크2) 한때 화려하게 역삼동 지하 술집들과 백화점의 명품 가게들을 누비던 그 법카들과 현금들이 지금 어디에 있을까? 

에이. 국가와 민조옥을 위해 헌신하신다는 우리 고매하고 높으신 나으리들이 설마 퇴직자들의 연줄 때문에, 혹은 양아치 같은 로비의 영향을 받아 이런 정책들을 내놓았을까. 에이, 설마. 에이, 그럴 리가. 그래서 나는 그들이 그냥 멍청하다고 믿기로 했다. 그래서 우연히 PF들의 부실을 우량 금융기관에 떠넘길 대책이 나온 것이고, 또 서울의 공급을 막고 풍선효과가 지방으로 번지도록 유발한 것이며, 그리고 이번처럼 지분형 주택공유제 같은 근본 없는 대책을, 그저 우연히, 정말 멍청해서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럴 만도 하다. 평생 시장경제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백면서생들이 시장경제를 고쳐 보겠다고 나서는데 그 결과가 엉망진창인 게 당연하지 않나.

이번 대책은 금융위가 주도했다는데, 그 수장은 기재부 출신의 김병환이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것처럼, 그는 주금공의 자본을 주인 없는 대동강 물처럼 아무 데나 팔아넘기려 한다. 그리고 그 손실은 우리의 세금으로 메워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이의 호는 고사를 본떠 봉이 김병환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의 이름을 한자로 풀어보니 잡을 병(秉)에 빛날 환(煥)이란다. 좌우 합작으로, 또 정치와 관료들의 합작으로 비정상적이고 반시장적 규제로 집값 폭등을 일으켜놓고 그 해결책으로 반시장적 정책금융을 내놓는 관료답게, 그의 이름 첫 글자는 통제와 관리를 의미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완벽한 작명센스인가. 하지만 다음 글자는 뭐가 빛난다는 것인지 도통 맥락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감히 추천하건대 그 이름의 두 번째 글자로 신중하고 겸허하다는 의미의 삼갈 신(愼)을 쓰는 게 어떠하신지.

봉이 김秉愼, 빼어난 관료들이 시장을 다스리는 아름답고 푸근한 전근대적 관료사회에 걸맞은 훌륭한 이름 아닌가.

금융위원장 봉이 김병환


2025. 2. 1.

한 번의 계엄과 열여덟 번의 탄핵

과거 박근혜의 하야나 탄핵에 반대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탄핵 절차와 새 선거 시점을 고려하면 기존의 대선 일정과 불과 7,8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비워두는 비용에 비해 실익이 작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당시 박근혜의 탄핵 사유로 제시된 비리들이 전임자들에 비해 무엇이 더 심각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링크


그리고 같은 기준으로 나는 윤석열은 탄핵되어야 할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독선적 행동으로 고립을 자초해서 정치적 뇌사상태에 빠진 정치 초보가 그 돌파구로 계엄을 선택한 어처구니없는 일은 87년 헌법 이후 최초이자 최악의 사고였고, 이런 선택을 한 그의 사고력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임기가 2년 반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탄핵이라는 결정은 불가피하다. 더욱이 계엄보다 훨씬 경미한 사유로 탄핵소추된 노무현의 탄핵에 9명 중 3명이나 찬성한 사실과, 전임자는 물론이고 후임자도 저지른 흔한 비리를 사유로 탄핵당한 박근혜의 전례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반대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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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수 유권자들은 물론이고 일부 중도층이 계엄을 비난하면서도 탄핵에 쉽사리 찬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이후에 벌어질 정치적 후폭풍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입법부를 장악해서 깽판만 쳐 온 야당 대표가 이제는 전방위적 행정 권력까지 차지하게 될 때 벌어질 일들에 대해 심지어 일부 민주당 지지층까지 우려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탄핵 이후 되려 여당의 지지율이 오르는 일이나, 야당 대권주자들에 대한 지지율이 오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보수 유권자들의 과표집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8년 전 탄핵 사건과 비교해서 여론의 추이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은 민심에는 정신 나간 대통령에 대한 혐오 못지 않게, 총 18번이나 탄핵 소추안을 올린 야당에 대한 불만도 함께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탄핵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다 모조리 실패한 한 얼뜨기가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이 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 시스템을 강제로 셧다운 시켰는데 그를 탄핵시키지 않고 놔둔다면 이는 현대 정치사에 아주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일이다. 나는 결코 그를 용인할 수 없다. 각 유권자들의 가치관과 지향점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에겐 공유하는 가치가 있지 않은가.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그 시스템을 공격하는 이들은 누구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반드시. 설령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이 이토록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면, 중요한 순간마다 그릇된 판단을 거듭한 윤석열이야말로 그 과업을 수행하기에 매우 부적절한 인물 아닌가. 가망이 없던 부산 엑스포가 박빙이라고 믿었던 것이나, 얻을 것도 없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김태우를 사면한 뒤 내보낸 것, 별 목적 없이 대기업 총수들 보고 헤처모여를 시킨 일, 선거 앞두고 뜬금없이 공매도를 금지하고 비상식적 규모의 의대 정원을 증원한 것을 떠올려 보라. 어떤 장군이 군사작전을 이따위로 펼쳤다면 그의 군대는 벌써 전멸했을 것이다. 심지어 극우적 시각으로 보아도 그는 너무나 무능하다. 하필 그 시점에 계엄을 꺼낸 윤석열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이재명을 되살려내 걷게 해준 예수나 다름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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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왜 계엄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평생 오로지 검사로만 살아온 배경이 그의 이런 이 결정을 다소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검사는 일반적인 직역에 비해 피드백을 잘 받지 않는 직업이다. 이는 사회생활에서 모든 갑을 관계에서 발생하는데 갑에게 제대로 된 피드백을 전달할 을은 거의 없고, 또 이를 받아들여 개선할 압박을 느끼는 갑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율권을 보장해서 독립적으로 일하는 시스템은 이런 독불장군들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잘 모르는 사안도 잘 안다고 착각하는데 평생 그 부푼 자의식을 고쳐줄 사람도 거의 만나지 못한다. 우리 트레이더들도 정확하게 똑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단점들을 잘 알고 있다. 나부터가 이 블로그에 온갖 주제로 글을 쓰지 않는가. 하지만 적어도 트레이더들은 다른 회사들과, 또 외국의 금융기관들과 경쟁하며 실적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그나마 강제로 자기 주제를 주입당한다. 하지만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 조직은 그럴 기회조차 없다. 오만한 트레이더가 심각한 오판을 내리면 대부분의 피해는 그 자신이 보지만, 오만한 검사가 심각한 오판을 내리면 대부분의 피해는 다른 누군가가 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만능 인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자신들이 현대미술의 정의와 분류까지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나.(링크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정부의 인사권을 가지게 되면 이 검사 만능주의에 대한 괴상한 믿음이 전체 조직을 장악하게 된다. 검사에게 금융감독을 맡기고, 토목과 건설을 맡기고, 공정거래를 맡기고, 통일정책을 맡기고, 첩보와 보안을 맡기고, 국민의 권익과 인권을 맡기고, 공공기관 감사를 맡기고,  방송통신도 관여하고, 국민연금에도 가고. 또 이 모든 인사검증을 한 늙은 검사와 어린 검사가 했다. 그리고 남는 자리에는 기재부 출신들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기재부 출신들이 과학기술도 하고, 환경부도 가고, 금융위도 가고, 보건복지부도 가고, 국민연금도 가고, 농업도 하고, 해수부에도 가고, 통계도 하고, 관세도 하고, 조달도 하고, 문화체육도 하고, 공공기관 감사들로도 가고, 원내대표도 하고, 심지어 친정을 감사하는 기획재정위원도 했다. 조직관리 학자들은 하버드 출신들을 가지고도 이런 식으로 조직을 구성하면 실패하는데(링크)  고작 아시아 변방의 국립대 출신들이 자기네들이 천하제일이라며 국정을 이렇게 운영했으니 그들이 추진하는 개혁과제들이 성공할 리가 있나. 쌍팔년도 서울대 문리대에서 진로를 정하듯 사시 성적과 행시 성적대로 인사를 했고, 그들은 21세기에 쌍팔년도에나 통하던 정책을 펴다 망했다. 이 정부가 추진하다 실패한 모든 개혁과제들은 전부 검사나 행시 관료들의 작품이지 않았나.

임기 후반에 들어서며 총선에서까지 참패하자 이대로 無업적 대통령으로 남을 자신의 미래를 보며 그는 초조함이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모든 개혁이 실패할 수가 있지, 아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세상에 서울법대 나와 검사한 나보다 어떻게 저 범죄자 새끼의 지지율이 더 높을 수 있지. 거기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 나와 내 사람들이 국정운영을 무능하게 하고 있구나. 둘, 나는 옳은데 누군가가 우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구나. 서울대 나와 고시까지 붙은 나와 내 똘마니들이 무능할 리가 결코 없기에 자연스레 답은 2번이 된다. 이 반 국가세력들이 환율을 올리고, 주식을 떨구고, 집값도 올리고, 양극화도 벌리고, 그래서 내 지지율도 떨구는 것이다. 거기에 관료들의 나쁜 버릇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관 출신들이 공적인 자리에 가면 그 직위에 딸린 권력을 자신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모시는 날이라든지, 수행의전이라든지. 관료들의 후진 조직문화가 오래 이어지는 것은 권력을 자신의 권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행사한 인사권이나 행정명령에 여론이 반발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늘 아침으로 된장찌개를 먹는 것이 오로지 나의 권리이듯, 오로지 내 입맛대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니까. 그래서 여론을 무시한다. 유권자들이 반발할수록 대통령과 그 측근 관료들은 그들을 가상의 적인 "반국가 세력"으로 묶어 무시한다. 그들은 내가 아침에 된장찌개를 먹을 정당한 권한을 억압하는 아주 나쁜 놈들이다. 놀랍게도 관료들의 세계관은 그렇게 돌아간다.

최종적으로 그가 계엄이란 선택지까지 이르게 된 것은 특수부 출신이라는 배경도 일조했을 것이다. 주로 정치인이나 대기업 오너 등, 권력자들을 수사하라는 매우 어려운 임무를 받은 특수부는 법의 테두리를 모범생처럼 지켜가면서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넘는 법을 배웠다. 수사 과정이나 절차에 대해, 혹은 그들이 적용한 법리에 대해 여러 의문이 제기됐지만, 특수부가 밝혀낸 사안들이 워낙 엄중하고 심각했기 때문에, 또 그들은 절대권력의 부패를 견제할 몇 안 되는 장치였기 때문에 여론은 특수부의 탈선을 눈감아주곤 했다. 이것이 반복적으로 겪은 검사들은 결과가 정당하다면 절차의 흠결은 용서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대통령은 국회를 멈추고 자기와 관료 똘마니들이 밀어붙이려 했던 정책들을 시행하면 대단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진심으로 믿었을 것이고 그러면 국민들이 용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계엄조차 똑바로 못하는 대통령의 정책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망상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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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대단한 실수도 아니었습니다.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근데, 그 친구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조직이란 게 뭡니까.....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하는 거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 친구 손목 하나가 날아갔어요. 잘나가던 한 친구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났습니다."

이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이 철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시나브로 지워졌지만 그의 첫 국정운영 방향은 이권 카르텔의 혁파로부터 출발했다. 그래서 그는 민간의 분야를 하나하나 조지기 시작한다. 교육부터 시작했다. 대통령께서 개혁을 명하셨으니 잘못한 일이 없어도 잘못한 사람은 나와야 한다. 그래서 사교육 카르텔이 등장한다. 그리고 검찰과 국세청을 동원해서 조진다. 그렇게 개혁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교육시스템과 수능이 뭐가 개선되었나. 다음은 과학기술계의 차례다. R&D 예산을 줄이자 과학계가 반발한다. 나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카르텔이다, 반국가 세력이다. 과기부와 교육부를 동원해서 R&D 카르텔을 적발해서 조진다. 다음은 은행들의 차례다. 기준금리가 올라갔다고 대출금리를 올려 돈을 버는 것은 카르텔이다, 이건 갑질이다, 소상공인 보고 종노릇을 시키는 것이다. 각하께서 노하셨다. 자, 이제 은행을 조진다. 검사와 금감원을 동원해 은행들의 팔을 꺾고 비틀며 관치금융의 진수를 보여준다. 뜬금없이 지방은행 하나를 시중은행으로 격상도 시켜준다. 이야. 각하께서 금융 카르텔도 해결하셨도다. 자, 다음은 의료 카르텔이다. 선거도 있고 하니 인상적인 숫자로 나도 표 좀 빨아보자. 하지만 반발이 강하다. 지지율이 오르기는커녕 빠지고 있다. 포퓰리즘 하나도 똑바로 못하는 우리 검사 대통령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필수의료 인력을 조지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미용시장으로 빠진다. 허.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내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적폐고 카르텔이고 반국가 세력이기 때문이다. 하. 이것들을 반드시 조져야 하는데. 계엄령 포고문 5항 전공의 처단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대든 의료인들에게 조직을 관리하는 오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나한테 반대하면 반국가 세력이라는 그 사고의 이면에는 내가 곧 국가라는 오만함이 가득 차 있다. 그러니 내 반대편에 앉은 과학기술계, 은행들, 금융시장, 교육계, 의사들의 이야기 따윈 들을 필요가 없다. 대화도 하지 않는다. 내가 곧 국가고 내 맘대로 하라고 대통령선거도 이겼는데 뭐. 선거에서 0.7%로 간신히 이긴 주제에 17세기 태양왕에 빙의한 이 오만한 대통령은 지금도 자신의 처지가 개혁을 추진하다 암살당한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와도 같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보수층들은 윤석열 탄핵안이 기각되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저렇게 믿는 사람이 다시 대통령 자리로 돌아온다면 어떤 짓을 벌이겠는가. 그는 반성하고 얌전히 있을 사람이 결코 아니다. 만약 기각된다면 그것이 보수 종말의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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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통령이 믿는 부정선거의 가능성도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여러 증거 중에서 일부는 대법원에서 해명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언뜻 보면 납득되지 않는 현상들이 많다. 하지만 그 이유는 우리가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전체 사실관계를 파악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전국적으로 수천만 표를 두고 조작하면서 걸리지 않으려면 그 계획은 매우 치밀해야 하는데, 이제까지 선관위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저런 조직력과 저런 일 처리로는 부정선거를 할 능력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음모론을 믿는 모든 유권자들을 무시해야 할까.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동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음모론 믿고, 어떤 사람들은 광우병을 믿었다. 음모론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코로나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한 만 65세 뇌과학자 유 씨(경제학 전공)께서는 미국이 달에 간 적이 없고 천안함 음모론을 믿는 것까지 모두 합리적 의심이라고 하시지 않았나(링크). 나의 음모론은 합리적 의심이고 너희의 음모론은 무지몽매한 소리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이다. 어떤 테마주가 버블이라는 주장과, 그 테마주의 거래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다른 주장이다. 우리가 모든 음모론을 검증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나라의 수장이, 설령 그가 미쳤을지언정, 계엄의 사유로 부정선거를 들었다면 우리는 그 주장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엄격한 검증에 나서야 한다. 그 목소리를 억압할 권리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없다. 참고로 세월호 사건은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적은데도 약 9번에 걸쳐 진상조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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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치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은 오로지 나만 맞고 너희들은 모두 다 틀렸다는 광신적 믿음 때문이다. 계엄을 지지하는 사람도, 열여덟 번의 탄핵을 지지하는 사람도 모두 정상이 아니다. 좌파도 우파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우리 모두 다 그렇다. 예전에 박사모들과 문빠들이 매우 닮은 집단이라고 주장했는데(링크), 저 둘을 비난하는 다른 빠돌이/빠순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정치적 심정지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상대의 생각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계엄이 맞았을 수도 있겠지, 친북친중 세력의 공작을 막기 위해서. 어쩌면 이재명이 사람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우리 모두는 이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상대는 나라를 망치는 주적이므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는 그 편협한 생각이 모이고 쌓여 오늘 날의 비극을 낳은 것이다. 나 부터가 그러지 않았을까, 반성한다. 


2024. 12. 2.

그래, 대통령을 증원하자

그렇지 않은가? 매년 대선 후보로 10명에 가까운 후보들이 난립하지만 대통령 정원은 단 1명 뿐이다. 지대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정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게다가 대통령은 경쟁상대가 없기 때문에 폭리를 취하고 깽판을 쳐도 소비자들은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정책을 받아들여야 한다. 밀턴 프리드먼의 가르침에 따르면 대통령 정원을 늘려야 한다. 아니, 되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더 낫다는 것 아닌가.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모든 분야에 정부가 반강제적으로 정원만 늘리면 만사형통이라는 용산의 한심한 인식은 어떻고? 대통령을 증원하자는 말을 비웃기 전에 저 멍청한 관료들의 입부터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관치로 시장경제를 대체하겠다며 나대는 저들이야말로 스탈린주의자들이며 빨갱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