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여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당시 월가의 스타였던 존 메리웨더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런 숄즈가 손잡고 세운 LTCM이라는 헤지펀드는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은 뒤 극단적인 레버리지를 활용해 최대 1조 달러 규모의 포지션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의 핵심 투자 중 하나가 바로 러시아 국채였다는 것이다. 이미 아시아 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입은 펀드는 러시아 채무 불이행으로 치명적 손실을 보고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LTCM의 포지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공포는 순식간에 미국 금융시장으로 확산되었다. 우량 회사채조차 매수자를 찾지 못해 시장이 얼어붙었고 신용경색의 조짐은 점차 뚜렷해졌다. 연준은 여러 차례 금리를 인하했지만 위기를 잠재우는 데 실패했고, 결국 주요 투자은행들을 불러들여 구제금융 참여를 압박해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연준은 신흥국 위기가 미국 금융 시스템까지 직접 위협할 수 있음을 절감했고, 이는 주로 국내 통화정책에 집중하던 연준이 EM 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한 첫 사례가 되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자, 연준은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겼다. 미국 금융기관들의 해외 자산 익스포저가 매우 컸기 때문에, 해외에서 달러 자금 경색이 발생하면 우량 자산의 투매가 이어지고 연쇄적인 충격으로 번질 위험이 높았다. 이에 연준은 ECB와 영란은행 등 주요 기축통화국 중앙은행과 스왑라인을 체결했고, 위기의 후반부에는 한국, 싱가포르, 브라질, 멕시코 등 신흥국 중앙은행과도 스왑라인을 열었다. 연준이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달러 유동성을 제공하는 목적과 기준은 분명했다. 첫째, 해당 국가에서 외화 자금 경색이 발생하고 있는가. 둘째, 이를 방치할 경우 미국 금융시장까지 신용경색이 확산될 위험이 있는가. 이 프로그램은 미국 내 금융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코로나19 위기가 발생하자, 연준은 기존 상설 스왑라인에 더해 9개 중앙은행과의 한시적 스왑라인을 추가로 개설했으며, 이 역시 미국계 금융기관이 글로벌 우량 자산을 무분별하게 매도하지 않도록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간 한국 정부는 이러한 통화스왑의 본질적 배경을 외면하고, 의도적으로 국내에 왜곡된 여론을 조성해왔다. 연준의 조치는 한국을 특별히 신뢰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금융 안정을 위한 조치였으며, 글로벌 달러 유동성 경색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외교적 성과로 포장하며 마치 한국이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해 쟁취한 승리인 것처럼 홍보했다. 리만 사태가 본격화하기 전, 환율주권론을 내세우던 강만수의 경제팀은 대규모 외환보유액을 이미 소진한 탓에 정작 위기가 현실화하자 대응 여력이 크게 부족했다. 당시 정부는 위기는 크지 않으며 대응 여력은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반복했지만, 여러 리서치 기관들은 한국의 외환보유고 상당 부분이 모기지 채권이나 파산 위기에 직면한 Fannie Mae·Freddie Mac 채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제로 가용할 수 있는 외환보유액은 훨씬 적다고 지적했다. 그릇된 판단과 대응으로 신뢰를 잃고 파산 위기에 몰린 기획재정부를 구원한 것이 바로 통화스왑이었다. 이후 강만수와 경제팀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해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이것이 마치 FTA와 같은 경제외교적 성과인 양, 통화스왑을 한국 정부의 외교적 성취이자 자신의 치적으로 홍보했다. 당시 경제부 기자들 역시 해외 언론들과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정부 프레임을 그대로 확대 재생산하며 국민들에게 국가 위상이 높아졌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주입했다. 이러한 왜곡은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도 반복되었다. 연준이 9개국과 일괄적으로 임시 스왑라인을 개설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으로 미국의 지원을 얻어냈다”라는 식의 홍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실제 연준의 기록이나 연준 의장들의 회고록, 혹은 국제 언론 보도에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스왑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은 없었으며, 당시 연준은 동일한 조건으로 브라질·멕시코·싱가포르와 같은 신흥국들도 함께 스왑을 맺었다. 무엇보다 2008년에도 그리고 2020년에도 한국의 기재부 외 다른 나라 정부들 중 그 어느 나라도 연준과의 스왑라인을 자국의 성과로 포장해 발표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연준과의 스왑라인은 정치/외교적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재부는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성취로 포장해 대중을 기만하는 거짓말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성과 포장은 단기적으로는 조직의 위상을 높여주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국민과 정치인들에게 통화스왑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심화시켰다. 사실 이 제도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미국 금융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일 뿐인데, 한국 내부에서는 마치 경제외교적 역량에 따라 성사되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이다. 이 왜곡된 인식은 위기 때마다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과 과도한 기대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금융시장 불안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환율이 다시 1200원을 돌파하자 기재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외환보유액을 투입했지만, 이미 지나치게 낮은 수준에서 무리한 개입을 쏟아부은 탓에 환율 안정에 실패했다. 그러자 기재부는 과거와 똑같은 그짓말을 반복했다.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미 재무부 장관을 만나 “통화스왑을 논의했다”, “긍정적 대화가 있었다”와 같은 별 의미가 없는 문구를 언론 헤드라인에 올리는 데 주력한 것이다. 그러나 통화스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었더라도 한국의 요구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미국은 물가를 잡기 위해 강도 높은 긴축을 진행 중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특정 국가에만 달러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것은 애초에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었다. 더구나 통화스왑은 연준의 권한임에도 이를 미 재무부 장관에게 요구하는 것은 연준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칠 위험이 있었다. 하물며 당시 재무부 장관은 전직 연준 의장이던 자넷 옐런이지 않았던가. 경제전문가를 자처하던 경제관료들이 얼마나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반복하는 한국 정부를 보는 일은 괴로울 만큼 쪽팔린 일이었다.
이러한 기재부의 그짓말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국제 금융시장에서 미국이 과거 플라자 합의처럼 달러 약세 정책을 선호할 것이라는 기대가 제기되자, 기재부는 이를 외환보유액을 소진하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 미국 내부 일부 논의가 있었던 정황은 보인다. 그러나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나 백악관 고위 당국자의 환율 관련 발언을 보면, 적어도 5월 이후부터는 미국 정부가 달러 약세를 정책적으로 추진할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실제로 한국 외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미국이 통화 절상을 요구한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재부는 마치 ‘플라자 합의식 환율 압박’이 존재하는 것처럼 헤드라인을 내며 시장과 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시장은 곧 이러한 언론 플레이가 근거 없는 것임을 간파했지만, 양치기 소년의 행태는 멈추지 않았다. 불과 지난 주말까지도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미국을 방문한 뒤 귀국길에서 “환율 협의를 마쳤다”라는 식의 발언을 내놓으며 어떤 기대를 부추겼지만 곧이어 공개된 합의문에는 의미 있는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기재부가 스스로 “미국 측에서 원화 절상 요구는 없었다”라고 인정하면서 자신들이 반년간 이어온 언론 플레이가 결국 값싼 기만전술에 불과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외환보유고 Flex의 원조 강만수는 한 인터뷰에서 "정부는 환율에 관해서는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세기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거짓말로 국민과 시장을 기만하는 그 그릇된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거짓말에는 대가가 따른다. 시장이 정부의 말을 믿지 않고 정책당국의 역량을 의심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무능과 부정직함을 반복적으로 드러내 왔기 때문이다. 또 연준이 함부로 통화스왑라인을 열지 않는 이유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 리만위기 때 연준이 한국에게 열어준 스왑라인이 300억 달러였는데 비해 불과 몇 년 전 정부가 개입을 시작하며 1년 반 만에 팔아버린 금액이 무려 600억 달러에 달했다. 연준이 당시 스왑라인을 열어주었다면 한국은 진작에 그 달러를 모두 끌어다 1200원대에 팔아버렸을 것이다. 그리고서도 환율이 훨씬 더 올라왔으니 그들은 스왑이 만기가 되었을때 돌려줄 상황이 아니라며 드러누웠겠지. 그뿐이겠는가, 달러 돌려줄 상황이 아니다, 근데 한도를 좀 늘려주면 안 되냐며 땡깡을 피웠을 것이다. 지금 이미 그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비상금을 평소 군것질하는데 펑펑 써버렸다 비상상황이 닥치자 손 벌리러 오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람에게 무제한으로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다. 연준은 바보가 아니다.
미국은 관세 협상의 대가로 한국에 터무니없는 금액의 백지수표를 요구했다. 한국은 연준의 스왑라인 없이는 그 금액을 충당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연준의 독립성이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인 만큼, 이번에는 연준과의 스왑라인 체결 가능성이 열려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성격을 감안하면, 그들은 반드시 추가적인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무엇이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는 다각적인 고려가 필요하며, 그 결론은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떤 촌뜨기들이 국제 금융시장의 룰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바쁜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며, 마치 다섯 살 아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만 되풀이하는 구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재부와 경제 관료들은 과거 주먹구구식 외환정책이 거듭된 실패를 낳았고, 특히 대외환경이 급변할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대량의 외환보유고를 허비하는 실수를 저질러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스왑라인은 한국의 외교적 성과가 아니라 비상시에 작동하는 연준의 금융시장 안정책일 뿐이며, 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억지를 부린다고 얻어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과 언론에 솔직히 알려야 한다. 그것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다. 그들은 왜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선진국 대우를 받지 못하냐며 묻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온 힘을 다해 후진국스럽게 굴면서 선진국 배지가 갖고 싶다고 온종일 징징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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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R이 고작 5밖에 안되는 나라를 방문해 아무 의미 없는 사진 한 방 찍고 오신 구윤철 경제부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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