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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23.

매소

처음 사에 입사해서 그저 열심히 술을 마셔야 했던 시절, 술자리는 나에게 그리 편하고 즐거운 곳은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속칭, 룸싸롱 혹은 단란주점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술을 들이 마시곤 했고,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그런 곳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 주점들은 참으로 이상한 방식으로 술을 마시는 곳이다. 남자들 끼리 와서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뜯어고친 여자들을 하나씩 데리고 앉아 엉망진창으로 술을 마신다. 게다가 내가 산 술을 나눠마시는데 그녀들에게 돈을 받는게 아니라 오히려 줘야하는 곳이다.(난 아직까지도 이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들에게도 신기한 재주가 하나 쯤은 있다. 그녀들은 아주 심각하게 재미없는 농담에도 소리내어 배꼽을 잡고 웃는다. 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들은 내가 전공서적을 읽어도 깔깔대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입사한지 한 6달이 지났을까. 그날도 또 그저그런 술자리가 이어지게 되었고 으레 그렇듯이 막내인 내가 가장 먼저 여자를 골라야 했다. 매번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얼굴을 찡그리는 일도 힘들지만, 다 똑같이 생겨서 구분하기도 힘든 여자들이 일렬로 서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고르는 일도 참 골치아픈 일이었다. 난 대충 그 중에서 가장 성형한 티가 덜 나고 적당히 나이도 들어보이는 한 친구를 선택했다.

대개 그런 곳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속칭 아가씨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막내인 나한테 영업을 해 봤자 별 도움도 안될 뿐더러, 내가 그들을 좋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대량생산된 인조인간 같은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일도 불편했고, 무엇보다 좋지도 않으면서 좋은 척 하는 그 가식적인 웃음에 넌덜머리가 났다. 그럼 그 "아가씨"들은 재빠르게 내가 자기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음에 내가 찾지 않으리란 계산에 대충 앉아있다 나간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게 편했다. 어쨌거나 난 이곳에 여자들과 놀러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그날 선택한 친구는 달랐다. 그녀는 내게 "혹시 술 잘 못해요?" 라고 묻고 나서는 내가 앞에 있던 술을 몰래 숨기거나, 혹은 그러지 못할 상황이 되면 대신 마셔주었다. 그 외에도 아직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에게 조용히 술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하면 되는지, 폭탄주의 배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해주기도 했다. 옆에 앉은 아가씨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던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평소보다 내가 파트너와 친근하게 있는 것을 보고 윗분들은 둘이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밖에서 따로 만나보라고 부추겼다. 술자리에 잘 적응하지 못하던 막내가 모처럼 긴장을 푸는 것을 보며, 내가 파트너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술자리의 흥을 깨기 싫어,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어쨌거나 그녀 덕분에 평소보다 가벼운 몸과 머리로 술자리를 마칠 수 있지 않았는가.

그 이후로도 난 회식이 있거나 아니면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그 친구에게 미리 연락해서 알리곤 했고, 그럼 그 친구는 내 파트너가 되어 대신 술을 마셔주곤 했다. 윗분들이 나를 배려 해주신 덕분에, 늘 내 파트너에게는 몇배의 팁을 주고 다른 방을 돌지 않도록 했다.(그쪽 세계에서는 이것을 "묶는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동료가 되었다. 술이 약한 나는 대신 잔을 비워주는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는 두둑한 팁을 주면서도 짖궃은 일도 시키지 않는 나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몸이 아픈 날에도 내가 술을 마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와주었고, 나는 이젠 다른 여자도 골라보라는 다른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늘 그녀를 선택했다.

휴일에 일이 없던 날, 그 친구와 밥을 먹은 적이 몇번 있었다. 내가 주말에 일을 하듯이, 그 친구도 주말에는 손님을 만난다. 그녀는 나보다 한살이 많았고 그런 술집에서 일한 경력도 몇년 되었다. 그녀는 그런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삶이 어떤지를 이야기 해주곤 했다. 부잣집 딸인데도 남자와 술이 좋아서 일하러 나오는 여자. 양아치같은 남자에게 홀려 힘들게 모은 돈을 다 날리고 자살한 여자. 귀신과 섹스를 해야 다음날 팁을 많이 받는다고 말하던 여자. 미모가 뛰어나 어느 부자의 첩으로 들어앉은 여자, 그리고 그녀를 부러워하는 수많은 여자들. 자기 역시도 술집 일을 그만두고 싶지만 이거저거 사는데 돈을 쓰다 보니 목돈이 잘 모이지 않는다, 정신차리고 목돈을 모으면 꽃집이라도 하나 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그 배경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자기의 재능 중에서 가장 비싼것을 팔고 있었고, 나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재능을 팔고 있었다. 낯선 곳에 들어선 나는 친구가 필요했고, 그녀 역시 이야기를 들어줄 또래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우린 손님과 종업원이었지만, 동시에 난장판으로 번지기 마련인 술자리에서 서로를 보호해 주던 친구였다. 우린 윗분들 몰래 '너네 마담은 성질 더럽게 생겼다.' '너네 상사가 더 그렇다'고 수근대며 둘이 킥킥거리기도 했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정상 자기 마담을 따라 옮기게 되어 이제는 그 가게에 출근하지 않게 되었고, 그리고 이 사실을 내가 알아야 할 것 같아 말해 주려고 전화했다고. 나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그 전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두번 다시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렇게 무턱대고 술을 마실 일도 없고, 가끔 술자리에 가도 예전처럼 힘들지는 않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인지라, 이제 단란주점에 가도 그닥 어색하거나 불편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아가씨들의 얼굴에는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거짓 미소를 볼 때, 때때로 나는 그녀를 생각한다. 가슴이 크고 웃음을 파는 기계들로 가득찬 화류계에서 내가 만난 유일한 인간이었던 그녀를.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그 시절, 아무리 친구가 생겼다고 해도 그런 곳에서 술을 마시는 일들이 즐겁지는 않았다. 아마 일을 해야했던 그 친구는 더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술을 대신 마셔주던 친구로 인해 술자리가 덜 괴로웠던 만큼, 그녀 역시 나로 인해 그 곳에서 일하던 시간들이 조금은 덜 괴로웠기를 바란다.

2015. 5. 22.

커피. 정상. 성공적

1. 에리히 프롬은 정신적으로 정상적, 혹은 건강하다는 말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사회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무리없이 완수할 때 '그는 정상적 인간이다'라고 정의한다. 둘째로 개인적인 입장에서 한 사람의 심리상태가 자신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을때도 우리는 그가 정신적으로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사회의 구조가 개인의 행복을 최대화 하는데 맞춰져 있다면 "정상"에 대한 두 정의는 일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회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어느정도 지원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 과 '개인의 충분한 발전'이라는 두 목표 간에는 어긋남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정신적 건강에 관한 두 개의 개념 사이에서 날카로운 분열을 조장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할수 있다. 주변의 많은 사례들을 보면 프롬의 주장을 부정하기 어렵다. 성공한 의사들이 결벽증을 지닌 경우가 있으며, 신문엔 강박증에 시달리는 스포츠 스타들과 영화배우들의 이야기가 보도된다. 마찬가지로 노벨상 수상자들중에서도 이혼한 사람들이 많다. 역대 수상자 중 가장 유명한 아인슈타인도 노벨상 상금 전액을 전부인에게 위자료로 지급했고, '힉스입자'를 발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피터 힉스도 과거 연구부담으로 이혼했다고 고백했으며,  95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루카스 교수 역시 상금 절반을 전 부인 리타에게 위자료로 줘야 했다. 이렇듯 해당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인 노벨상 수상자들 중 이혼자가 하도 많다 보니, 학자들 사이에서 '노벨상 수상의 필수경력은 바로 이혼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너무나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행복이 동일한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해 질 것이라 믿고, 직장인들은 연봉이 올라가거나 승진하게 되면 삶이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기대는 종종 배신당하기 마련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은 이제 좋은 직장에 입사하기 위해 경쟁하며, 승진한 직장인들은 다음 승진을 바라보고 다시 뛰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개인의 행복과 정신적 건강은 종종 무시되곤 한다.



2. LA Times는 영화 위플래쉬가 유독 한국에서 크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밤늦게까지 혼자 연습할 정도로 드럼을 좋아하던 주인공 앤드류는 마초적이고 히스테리적인 플레처 교수를 만나 점차 변모하게 된다. 교수에게 시달리던 그는 좋아하던 드럼을 주먹으로 내리쳐 찢고 손가락에 피가 나는데도 계속해서 강박적으로 연습을 반복하며,  결국 더욱 연습에 매진하기 위해 좋아하던 여자까지 차버리고 만다. 이 과정은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날카로운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LA Times 기사가 언급했듯이 우리가 위플래쉬에 열광하는 이유는, 경쟁적인 사회에서 자란 한국인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앤드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인적 측면에서 정신적 건강을 잃은 사람은 좀처럼 스스로 회복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드럼을 포기했던 앤드류가 마지막에 다시 교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매달리듯, 경쟁에서 한번이라도 승리한 사람은 그 마약같은 쾌감을 잊지 못하고 끝도 없는 싸움에 다시 뛰어든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방식을 긍정하기 마련이므로, 스스로를 치유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상태가 고착화되고 나면 (플래쳐 교수처럼) 자신이 가진 개인적 비정상을, 사회적 정상으로 포장하여 남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다들 개인적으로 비정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정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3. 작년에는 전혀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요샌 하루에 4,5잔씩 마시곤 한다. 줄여보려고도 했지만 퇴근하기 전 데스크 앞을 보면 실패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다.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이는 강박과 자기파괴적 행위에 가깝다. 이를 인정하는 대신, 적당히 포장하는 것이 더 고상하고 멋있어 보이겠지만, 그와 같은 자만과 기만이말로 우리를 "날카로운 분열"로 밀어넣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P.S: 2017년 6월, 내 몸은 그 날카로운 분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