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5.

당신의 지능에 관한 불편한 사실

열살무렵 수업시간에 같은 반 아이들에게 "태양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데 8분이 걸린다. 즉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전의 태양인 것이다"라는 내용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 뿐 아니라 선생님까지도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이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지와 지식의 충돌은 으례 그렇듯이 적개심과 공격으로 번졌고, 결국 지능이 높은 아이는 지능이 낮은 다수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멍청한 아이는 나이가 들면 멍청한 어른이 된다. (늙어간다고 자연스레 지능이 높아지지 않는다) 그 이후로도 나는 평생토록 나보다 지능이 낮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살아왔기에 그들을 구별하는 법을 잘 알고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95%는 그 멍청한 다수에 속하고, 그들은 여러 사회적 사안에 대해 생각할 만한 지적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출신대학이 좋거나 암기력이 뛰어나다고 자신이 지성을 갖췄다고 착각하지 마라. 행복한 IQ 120의 영재보다 컴플렉스로 가득찬 아이큐 90의 아이가 더 좋은 대학을 간다. 암기력은 일부 자폐아들이 더욱 유리하다. 어린시절 지능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키가 먼저 자란다고 가장 큰 아이가 되는것도 아니며 평범한 지능을 가진 아이들 100명을 대상으로 지능검사를 해봐도 객관식 테스트지의 한계상 25%는 영재로 나온다.

이런 호모 사피엔스의 95%를 차지하는 멍청이들의 첫번째 특징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예로 돌아가면, 선생과 아이들은 빛이라는 것도 다른 모든것들 처럼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과, 본다는 행위는 우리의 망막이 빛을 받아들이는 행위라는 '지식"을 몰랐기 때문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멍청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바로 추가 정보를 듣고나서도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스스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멍청한 것이다. 보통 인간을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적 자극이 아닌 권위, 즉 회초리가 필요하다. 3세기 전과는 달리 우리는 중력이 존재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능이 발달해서가 아니라 학교와 권위를 가진 교사들이 그게 맞다고 주입시켰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면 99.999%의 인간은 지구는 네모라고 믿고 중력의 존재를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 말에 반박하고 싶다면, 당신이 학교에서 배운 '상식'들에 대해 얼마나 의문을 던지고 검증했는지 보라. 당신은 거의 그런적이 없다. 이렇듯 비판적 사고를 펼치기엔 그대의 지능이 너무 낮다.
 
두번째 특징은 그들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사실 그 둘이 완벽하게 다른 것이라고도 볼 수는 없다. 감정은 마치 어떤 부스터처럼 특정 상황에서 뇌의 특정 기능을 강화시켜주는 진화적 장치일 뿐이니까. 원시 사회에서는 합리적 판단이 감정적 충동과 다를 일이 적었다. 두려울 때 달아나는 것이 옳았고 화가 날때 상대를 한대 치는게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진화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발달하자 감정과 이성의 괴리가 벌어진다. 수만명이 맞부딪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각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달아나서는 안되었고 다인종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본능적 혐오를 억눌러야 했다. 이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고차원의 지적활동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감정과 분리하는 것이 지능의 한 척도가 된다. 일례로 개나 침팬치가 분노라는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옳음과 그름의 명제와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정적 호불호를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수도없이 많다-'그는 선한 사람이야. 왜냐면 나한테 잘해주거든.'(나 하나한테 잘해주는 것이 왜 보편적인 선인가) '그녀는 너무 이뻐. 마치 천사같아'(당연히 성적 매력과 종교적 선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는 마치 수학 문제의 답을 이쁜 글씨체로 쓰여진 보기를 고르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지만 모두가 저지르는 일이다. 그러나 멍청한 이들은 이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일례로 여기까지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는 혹시 분노하며 내 주장을 거부하거나 반박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내 주장이 논리적으로 틀려서가 아니라 자기를 멍청하다고 부른게 기분이 나쁘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바로 그것이 당신이 멍청하단 증거다)

세번째 특징은 그들이 평범하다는 것이다. 지적 능력이야말로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분해주는 거의 유일한 기능이며 우리 몸에서 단일조직으로 가장 많은 열량을 소비하는 것은 바로 뇌다. 따라서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은 절대로 평범한 발상과 주장을 내놓을 수가 없다. 천재가 괴짜로 보이는 것은 마치 영장류들 눈에 옷을 입은 인간이 이상해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게다가 멍청한 보통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 주장과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예를 들면 "xxx은 강대국에게 정치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를까"라는 문제를 두고 xxx에 무자헤딘과 김구를 넣어보자. 당신의 국적이 한국이냐 혹은 아프가니스탄이냐에 따라 답은 사악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혹은 의로운 애국자가 되기도 한다. 즉 답을 결정하는것은 당신의 뇌와 논리가 아니라 국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남들의 답을 컴퓨터처럼 찾아 베끼는 동물일 뿐이다.

그로부터 나이를 20살도 넘게 더 먹었지만 현재의 사회는 아직 10살때의 국민학교 교실과 다를바가 없다. 사람들은 여러 복잡한 사회적 사안에 대해 생각하는데에는 거의 아무런 시간도 투자하지 않으면서 앵무새처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데 시간을 쓴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이를 지켜보는건 매우 거북한 일이다. 코끼리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바이올린을 가르칠 수 없고 사슴벌레에게 운전을 연습시킬 수 없듯, 그들 모두에게 사고하는 법을 훈련시키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무지의 동굴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면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눌 한사람이 늘어나지는 않겠는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이 이성적이기를 바라는 내 소망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부분인지도 모르겠지만은.

2016. 11. 14.

트럼프, 멍청한 SNSer들을 누르다.

예상을 뒤엎는 선거결과와 함께 백인 진보층의 위선이 들어났다. 경합주, 혹은 민주당이 우세할 것으로 보였던 지역 중 진보 백인들이 주를 이룬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니아 주는 여론/통계조사와는 달리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두가지 뿐이다. 여론조사의 표본과 실제의 오차가 컷거나, 아님 그 표본이 거짓말을 했거나. 하지만 미국 대선은 가장 정교하면서도 방대한 통계와 백데이터를 기반으로 여론을 조사하기 때문에 전자의 가능성은 낮다. 따라서 나는 후자의 가능성을 높게 본다. 고학력자인 북서부 백인들은 '나는 남부 촌뜨기 카우보이들과 다르다'라고 주장하며 힐러리를 지지한다고 응답했지만 실제 투표장에 가서는 트럼프를 찍었다. 개표와 함께 들어난 그들의 민낯은 텍사스 카우보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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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나? 이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떠맡을 역할이 21세기에는 달라질 것을 암시한다. 미국은 세계 주요 국가 중 세율이 높은 편에 속하면서 가장 형편없는 복지 시스템을 가진 나라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국민의 세금을 각종 국제기구의 분담금과 군비에 쓰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국인들에게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선민의식을 심어주며 과도한 부담을 강요했으나 이제는 이 모델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인들은 세계화라는 가치를 위해 손해보며 FTA를 맺는데 이골이 낫고 더이상은 자국 군대를 해외에 파병하는데 돈을 쓰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오바마케어와 트럼프의 고립주의는 국제사회에 퍼붓는 비용을 줄이고 내국민에게 쓰겟다는 점에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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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수많은 SNSer들이 주장하던 것 처럼 트럼프의 당선은 멍청함의 승리일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멍청한 것이다. 그들은 트럼프의 공약이 무엇인지 거의 모른다.(불법이민자를 추방하고 멕시코 국경에 담장을 건설한다는 것 외에는) 트럼프 본인이 이해하고 세운 정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내세운 두 핵심 경제공약-재정지출 확대와 금융규제 철회는 지금 현대경제가 마주한 문제들에 대한 정확한 처방이다. 대선결과에 비통해하는 노벨 경제학 수상자 폴 크루그먼(직업: 민주당원. 취미: 경제학)조차도 재정지출의 확대와 통화정책 지원을 강조해왔다. 더욱 웃긴건 트럼프를 얼간이 악마로 취급하던 SNSer들은 자기가 지지하던 힐러리의 공약에 대해선 더더욱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힐러리가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다. (그리고 얼간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SNSer들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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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승리로 미국마저 극우의 나라가 되었나? 천만의 말씀. 미국은 본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국가이다. 카톨릭에서 파생한 근본주의자들이 기독교고 그중에서 더 극단적인 이들이 탄압을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은 국민의 40% 이상이 아직도 창조론을 믿고, 불과 15년전만 해도 유명 아이돌 소녀가 혼전순결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으며(물론 안지켰지만) 미국의 43대 대통령은 아프간을 침공하며 이를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했다.(그러면서도 서방세계는 십자군전쟁을 일컫는 이슬람 용어인 '지하드'라는 단어를 범죄와 동의어로 취급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든 말든 살았든 죽었든 미국인들은 본디부터 근본적 극우 극단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자신들이 세계의 경찰이라는 선민의식으로 이를 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참고로 북한, 시리아 등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힐러리보다 트럼프가 더욱 온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 트럼프의 승리가 전쟁을 불러올 것을 암시하는 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SNSer들의 무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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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대상을 한국인들로 한정해서 보면 더욱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수 있다.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 결과에 가장 분노하고 있는 세대가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투표를 안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이 정치적 3무세대(무생각/무경험/무지식)의 오지랍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바로 그 3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정치는 매우 복잡한 다차원의 방정식이다. 모든 경우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 따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가치관을 서로 재보고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후보를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2030대는 정치를 단순하게 선과 악의 대결로 바라보려한다.(왜? 생각하기 귀찮고 아는것도 없고 공부하기도 싫으니깐) 그러니 각 후보의 공약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트럼프는 악, 힐러리는 선이라는 구도를 만든 뒤, 아하 하며 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겐 미 대선의 결과가 악당이 승리한 디즈니 만화영화의 결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아들은 시청자 게시판 대신 sns를 뻘글들로 도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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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당과 미국의 민주당은 아주 다르다. 하지만 프로 SNSer들은 마치 모든 나라의 민주당은 선이요, 반대인 보수는 악마들의 집단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 통계적으로 사람은 젊어서 민주당을 지지하다 나이들어 보수로 바뀌니,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은 나이들어 악마가 된다는 말이다.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 Die young - Ke$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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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한국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나을까? 2년전 인터넷에 이자즈민 의원이 이민법을 발의한다는 잘못된 사실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잘못 퍼진 적이 있었다. 한국인들의 반응은 미국 레드넥 백인들과 정확하게 같았다. (링크) 저당시 반대서명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근 트럼프를 욕했을 것이다. 이 어리석음과 역겨운 이중잣대에 어찌 침을 뱉지 않을 것인가. 퉤!

2016. 11. 6.

박근혜와 멍청한 대중들

최순실과 그 관련자들은 엄정한 수사를 받아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고 박근혜는 그에 따른 도덕적/법적 책임을 져야한다. 그리고 처벌은 여기에 그쳐야한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에 반대한다.

박근혜의 하야를 외치는 대중들은 현 정치시스템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멍청이들이거나 그녀를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잘못된 결정보다 더 나쁜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인데,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된다는 것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앉히는 것 보다 더 나쁘다. 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교체될때도 인수위를 만들어 국정운영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준비하는 마당에 지금 대통령이 사임하면 향후 몇달간 행정적 외교적 공백은 피할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마치 TV 드라마에서 마음에 안드는 출연자를 하차시키는 문제를 대하듯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고 있다.

대충들은 이제껏 정치적 사안에 무관심하고 공부도 안했으며 고민도 안하다 난데없이 길거리로 나와 민주주의에 관한 아름다운 문구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가리려 한다. 드라마와 뉴스를 구별 못하는 이 멍청이들은 박대통령이 하야하여 TV에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면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최종결정권자가 없어진 대한민국 국정운영 시스템이 떠안아아 하는 것은 더 심각한 정치적 패닉 뿐이다.

이 바보들에게 상기시켜주자면, 이제까지 단 한번도 대통령의 측근이 비리와 권력남용 및 국정개입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군사정권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화 투사인 두 김씨 대통령의 아들들은 약속이나 한듯 나란히 수백억대의 돈을 받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는 봉하대군이라고 불리며 동생의 임기 내내 뇌물을 받고 대통령의 특사에도 개입하다가 걸려 감옥에 갔고,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돈 받은 자신의 형을 옹호하고 힘없는 사장을 비난하여 자살시켰다. 이명박은 노무현과 정치적으로 정반대지만 그 비리는 닮아있다. 이명박의 형 이상득씨도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있었고 이명박 본인 역시 BBK 내곡동 사저 등 온갖 정치적 개인적 비리에 휘말렸다.

그러나 양 김의 아들들은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친노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비리는 쏙 빼놓고 그를 아름다운 기억들로 포장한 영화를 내놓기도 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뇌가 녹는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외치며 광화문으로 몰려들던 대중은 이명박의 혐의에 대한 검찰수사가 허무맹랑하게 종결되었을땐 집에서 방바닥이나 긁으며 뒹굴다가 얼마 안가 박근혜를 찍었다. 그렇게 모든 대통령의 측근 비리에 대해 사실상의 면죄부를 줘 놓고서 어떻게 이런 일이 다시 터지지 않을것을 기대했는가.

물론 이번 사건의 경우 비리의 주인공이 무지렁이 여성이고 사이비 종교와 성적 추문이 연결되어 있어 참신한 충격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해서 비리와 국정개입이 용납되는건 아니며,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청와대에서 굿을 하든 기도를 하든 별 차이는 없다.(샤머니즘은 미개하고 기독교는 합리적이란 말인가) 그리고 헌법이 성적 자주권을 보장하는 한 미혼인 대통령이 과거에 어떤 성적 관계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이성적으로 내용만을 두고 보면 과거에 지겹도록 반복된 비리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 과거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무관심했던 국민들이 이런 구조적 문제를 박근혜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최순실 핑계를 대듯, 지금 국민들은 자신의 무관심과 멍청함으로 초래된 국정비리의 모든 책임을 박근혜 하나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 아래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와같은 재발할 것이며 여당이 아니라 다른 당이 집권해도 또 비리를 저지를 것이고 실제로 그래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자면 최순실, 우병우 등 처벌받아야 할 사람들이 엄정히 처벌 받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측근비리/전횡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것은 거리의 시위대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목표가 박근혜의 하야에 맞춰 혼란을 자초하면서 또다시 검찰이 권력층에게 면죄부를 남발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이번 사태는 주인공만 바꾼 채 다시 재연될 것이다.

분노는 파괴적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 파괴의 힘이 필요한 적도 있었고 앞으로도 필요할 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대통령 측근의 전횡을 막는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할 때고, 분노만으로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냉철히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