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23.

위기를 아기다리 고기다리 는 사람들에게

망하지 않는 나라경제를 배아프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바로 현금보유자들. 그들은 경제가 안좋은데 집값이 오르는게 말이되냐, 미국도 버블이다, 곧 꺼진다, 다 망할거다. 그 때가 되면 내 모아둔 이 현금다발로 자산을 마구 사들여 부자가 되겠노라며 세계와 경제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나는 이들에게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에 대해 각기 분석이 다를 수 있고 만약 그들이 맞다면 경제가 붕괴할 때 매수자로 나서 시장의 고통을 줄여줄 것이니까.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 저런 사람이 많은 것은 아마도 IMF의 기억 때문일 것이고, 또 그 경험이 얼마나 처절했고 고통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비관론자들에겐 미안하지만 적어도 향후 5년간 우리나라 경제에 IMF같은 위기가 다시 찾아올 가능성은 없다. 위기가 오더라도 다른 방식과 형태로 올 것이다.

일례로 2008년과 2011-13년 그리고 2019년을 비교해 보자. 세 시기 모두 한국 경제가 각기 다른 이유로 위기를 겪었지만 여러 자산가격의 움직임은 IMF 때와 확연히 달랐고 심지어 서로도 달랐다. 먼저 외환위기는 국내에 달러가 모자라니 정부가 외화를 조달하기 위해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원화금리를 올려 국내 기업들이 원화를 조달하지 못해 도산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모든 자산들의 가격이 엇비슷하게폭락했다, 위기가 진정되자 곧 반등했다. 반면 2008년에는 위기의 진원지가 미국이었던 터라 우리나라엔 제한적 영향만을 미쳤고(어디까지나 미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특히나 외국 자본의 비중이 미미했던 주택시장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하지만 그 이후 공급부담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1-13년에는 계속된 금융규제로 통화량 증가량이 명확히 디플레에 빠진 일본 수준으로 곤두박질치며 광복이래 처음으로 디플레를 겪느라 주식과 주택시장이 모두 저점을 찍다, 이후 경제부총리 최경환의 이름을 딴 초이노믹스로 반등했다. 2018년 말부터 우리가 현재까지는 정부가 괴상한 정책으로 기업의 생산성을 박살내면서도 통화정책과 재정확대로 성장률을 뒷받침하느라 주식과 주택이 정확하게 정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1998년 이후 겪은 모든 슬럼프는 결코 똑같지 않았다.

하지만 1998년의 악몽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투자자는 모든 위기가 IMF사태와 똑같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그 기억에 의존해서 투자했던 이들은 모두 상처를 입어야 했다. 2008년에 서울 주택을 산 사람은 98년 과는 달리 금융위기가 진정되고도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손실을 겪어야 했고 2013년 혹은 2019년에 주식을 산 사람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이는 마치 심장마비를 혹독하게 겪은 환자가 심장약을 잔뜩 쌓아두고 이후 몸이 안좋을 때마다 원인과 상관없이 심장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독감에 걸려도, 저혈압이 와도, 간경화가 오거나 차에 치여도 심장약만 집어먹는데 효과가 있을리가 있나. 군의관이 아픈 환자에게 빨간약만 줄창 처방하듯 저들 역시 모든 위기에 한가지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수익이 왜 나지 않는지 갸우뚱하고 있다.


현금 보유자들이 기대하던 팡파레가 터지려면 자산들의 가격이 폭락하면서 금리가 급등해야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이런 현상은 자주 벌어지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예는 708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스테그플레이션이나 우리나라가 겪었던 외환위기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가 no inflation을 수년째 겪는데 스테그플레이션은 환상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고 리만의 붕괴 이래로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이 경제가 나빠지자 공격적으로 금리를 인하하는 것을 최소 세번, 똥개훈련하듯 경험했으니 앞으로도 네번 다섯번 여섯번, 혹은 그 이상도 벌어질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최소한 liquidity crunch라는 단어는 구글트렌드 20위 안에 들지 않을 것이다. 주식이 50% 이상 폭락하고 GDP 성장률이 연간 마이너스를 찍는 것을 경기 사이클의 종료라고 본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긴 사이클에 놓여있다. 뭐 이미 최장기록을 경신하기 직전이지만.

보병에게 최악의 지옥을 선사했던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인들은 독일인들이 쳐들어왔던 진격로에 거대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인류가 구축한 역사상 최강의 방어선은 이를 주도한 국방장관의 이름을 본 따 마지노 요새라고 불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은 그 선을 우회해서 5주 만에 파리를 점령했고 결국 땅굴 에 짱박혀 있던 정예 80만의 프랑스 제2집단군은 아무것도 못한채 항복하고 말았다. "지난 번에 독일군이 여기로 왔으니 또 이곳으로 오겠지, 오기만 해봐라"며 중얼거리던 그들에게서 또 한번의 외환위기를 기다리는 현금 보유자들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역사는 늘 반복되지만 항상 똑같은 얼굴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쟁 시작하자마자 한달여만에 파리가 털릴동안
지하에서 포커나 치다 항복하러 나온 80만 명의 프랑스 제2집단군

댓글 4개:

  1. 아니 이런 명문에 왜 댓글이 없죠.

    요새 보면 자꾸 정부가
    집값도 안정시키고 양질의 일자리도 만들어주고 이런 멘트 치다보니까 진짜 정부가 하려고 하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경제적 하위권인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누군가는 하위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자꾸 적폐탓, 다주택자 탓을 하기
    시작하고 징징대니까 정치인들도
    무조건 잘해주겠다고 하잖아요.

    보편적 복지가 되는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지
    하위권 탈출및 급간상향을 어떻게 보편적으로 시켜줍니까!! 학생에게 해줄수 있는 보편적 복지는
    급식에 고기반찬 하나 더 넣어주는거지
    모두 상위권 대학 보내줄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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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늘 좋은 글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오늘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대책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고견 여쭙고 싶습니다.. 서울살이가 절실한 신혼부부인데 혼란스러운 마음만 자꾸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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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약 이번 조치로 조정이 온다면 당장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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