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상법개정안이 공개되었다. 이딴걸 플랜이라고 들이밀며 자본시장의 거버넌스가 개선될 것이라며 주식을 사라는 정부와 경제관료들은 백치이거나 사기꾼들이다. 무능한 것일까, 부패한 것일까.
뭐든 당장 전부 잘라라.
새로 상법개정안이 공개되었다. 이딴걸 플랜이라고 들이밀며 자본시장의 거버넌스가 개선될 것이라며 주식을 사라는 정부와 경제관료들은 백치이거나 사기꾼들이다. 무능한 것일까, 부패한 것일까.
뭐든 당장 전부 잘라라.
돈 버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는 나는 작가였던 적도, 작가가 될 만큼의 재능을 가졌던 적도 없지만 늘 그들을 동경했다.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손익을 정리하다, 창밖 먼 곳에서 차분히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는 그런 심정으로 그들을 선망했다. 그러던 중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던지. 문득 예전에 누군가 쓴 문구가 떠올랐다, "문학 만이 나에게 구원을 준다" 동경하는 이들의 위대한 성취에 왠지 모르게 울컥하여 거듭 찬사를 보낸다. 짝짝짝.
사실 이 프로젝트의 실패는 널리 예견된 일이었다.(링크) 이미 10년 전에 실패한 계획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이 밀어붙였으니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 아닌가. 만약 당신에게 밸류업이 성공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던 금융계 지인이 있었다면 그는 아주 멍청하거나 당신의 친구가 아니니 손절하라. 지난 대선에서 시장경제를 중시한다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기가 차게도 그와 그의 경제관료들은 지난 2년간 온갖 반시장적 정책들을 밀어붙이며 투자자들과 찌질한 기싸움을 벌였으니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관치로 망가진 밸류에이션을 관치로 고치겠다는 이들의 병든 철학이 좋은 결과를 낼 가능성은 없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볼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 금융사들에게 배당을 확대하지 말라며 꼬장을 부리던 정부와 규제당국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이젠 배당을 늘리라며 윽박지르고 있고,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하겠다더니 난데없이 제품 가격을 올린 소비재 회사를 비난하며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또 언제는 은행들 보고 대출을 늘리라고 했다가, 아니 늘리지 말라고 했다가, 아니 다시 늘리라고 했다가, 도로 늘리지 말라고 했다가, 아 다시 늘리라고 했다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줄이라고 하기를 반복하지 않나. 십수 년간 멀쩡히 팔리던 ELS 상품을 난데없이 틀어막고 리스크 관리를 건전하게 해 온 은행과 보험사에게 부실 자산을 떠안으라고 강매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광적인 시장개입을 거듭하고 있다. 관치(官治)를 넘어선 광치(狂治)의 영역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기업들의 지배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자신들의 공약을 철저히 배신했다. 과거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부터 최근의 LG에너지솔루션의 물적분할까지, 이사회가 다수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며 자본시장에 큰 악영향을 끼친 사례가 명명백백히 존재하는데도 여당과 정부는 당초 약속들을 뒤집어 이런 배임행위들을 금지하는 개정안에 반대했다. 정부의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어도 여전히 재벌들은 물적분할에 나설 것이며 대다수 주주들이 가지고 있던 우량주들은 허울만 좋은 지주회사로 전락하여 밑도 끝도 없이 주가가 희석되는 것을 겪을 것이다. 되려 그들이 빨갱이라고 비난하던 야당과 한겨레 언론이 더 친시장적인 상법 개정안을 지지하는(링크) 이 기현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재벌 사회주의자들과 친북 사회주의자들 간의 웅장한 대결?
정부의 시장경제에 대한 몰이해는 엉성하게 구성된 밸류업 인덱스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많은 리포트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이 지수에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투자자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주주들의 뒤통수를 치며 주머니를 털어먹으려던 불건전한 회사들을 다수 포함했다는 것이다. 지수가 발표된 날 인덱스에 속한 주식들이 주식시장 평균보다 더 하락한 데에는 어이없는 종목 구성을 보고 투자자들이 크게 실망한 탓도 크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눈속임이고 반쯤은 사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부 스스로 자인한 셈이니까.
이 프로젝트의 실패를 단순히 정부와 관료들의 무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거머리처럼 사기업의 이윤을 빨아먹는 일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신의 (잘못된) 정책을 위해 상장된 금융사들에게 부실 자산을 떠넘기거나 손실을 강제하고 있으며 그 비용들은 모두 주주들이 진다. 해마다 인사철이 되면 단 한번도 기업을 경영해 본 경험이 없는 수백 명의 낙하산들이 북한의 오물 풍선처럼 각 기업들과 협회들에 우수수 내려온다. 이 백치스러운 퇴직 관료들은 무수한 직간접적인 비용을 초래하며 그 부담은 모두 민간영역으로, 돌고 돌아 해당 섹터의 주주들 앞으로 청구된다. 그런 전관들의 거의 유일한 효용은 오로지 정부나 규제당국을 상대로 펼치는 로비에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는 부수적 효과를 낸다. 물론 그 비용은 모든 자본시장 참여자들의 몫이다. 한국의 자본시장이 빈사상태로 내몰릴 정도로 피를 빠는 거머리들의 명단에는 정부와 각료들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어떤 이유를 내세우든 정부가 새 주식 인덱스를 내놓은 것은 관이 무엇이 좋은 주식인지 찍어주겠다는 의도를 다분히 내포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회사가 우량한지 판단하는 것은 시장의 영역이지, 세종시에서 멍 때리는 관료들의 일이 아니다. 평생 이윤을 추구해 본 적이 없는 집단이 전 세계 자본들이 모두 모여 경쟁하는 시장을 가르치려고 나대는 것은, 마치 수능 6등급의 고졸 낙제생이 아이비리그 입시를 가르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은 오늘도 왜 성적이 오르지 않냐며 머리를 벅벅 긁으며 미중 갈등이 문제다, 중동전쟁이 문제다, 모 회사의 보고서가 문제다, 라며 한심한 핑계를 늘어놓지만 정작 중국보다도, 이스라엘보다도, 기술주 비중이 더 높은 대만의 주식시장보다도 더 못난 것이 바로 코스피 아닌가. 이게 다 무자격 고졸 낙제생이 오만한 태도로 금융시장을 주물럭거리다 망쳐놓은 탓이다.
경제관료들은 괴상한 망상에 빠져 있다. 야,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다, 우리가 좋은 주식들을 찍어주면 주식시장이 오르지 않을까? 아야, 너 정말 에이스구나. 오늘도 이 수능 6등급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서로 이게 정답이네 너 똑똑하네 주접을 떨지만 그들 앞에 놓인 성적표는 너무나 처참하다. 세계 꼴등. 이는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생뚱맞은 인덱스 하나 내놓는다고 주가가 오르는 일 따윈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정부의 역할은 그저 자본시장의 룰을 공정하게 세우고, 자본시장의 피를 빠는 거머리들과 도둑들만 속아내면 주가는 자연스럽게 펀더멘털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싫다면 허튼짓을 벌일 시간에 그냥 배민이나 뛰고 편의점 가서 알바나 해라. 차라리 그것이 국가 경제와 금융시장에 더 기여하는 길일 테니까.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국제사회는 이 침략국의 자산을 동결하고 대대적인 경제 제제를 가했다. 그리고 금융시장의 수많은 전문가들과 저명인사들이 러시아의 경제가 머지않아 파탄에 이르러 부도를 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너무나 자명한 일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을 때도, 심지어 유가가 마이너스로 폭락하던 코로나의 한가운데서도 이 동토의 나라는 파산하지도, 국가부도의 날을 겪지도 않았다. 모스크바는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다.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정수리를 벅벅 긁으며 머쓱해해할 무렵, 국제금융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은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로운 변동환율제 아래서 외환위기를 겪는 나라는 드물다"
반대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거나 외환시장에 무리하게 개입하던 나라들은 어김없이 위기를 겪었다. 러시아보다 더 자원이 많았던 남미의 나라들이나, 더 부유했던 선진국들도 예외는 없었다. 영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폴란드, 브라질 등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모두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 리스트의 끝자락에는 우리나라의 이름도 있다. 왜 전쟁을 겪지도, 경제 제제를 맞지도 않았던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던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같은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 IMF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끄집어내보자, 당시 경제관료들은 어떻게 나라를 파산시켰던가.
8월의 첫 주는 트레이더들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한 주였다. 월요일 장 개장 이후 니케이 지수가 버블이 터졌던 1987년 이후 최악의 폭락을 연출하더니, 바로 다음날 사상 최대 폭으로 상승하며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럴 줄 모르고 그날 하필 친척 동생과 식사를 잡았던 터라 몇 번이나 시간을 늦춘 끝에 간신히 약속 장소에 내 멍멍한 얼굴을 드리밀 수 있었다. "주식이 왜 이렇게 폭락했어요?" 금융권 진로를 희망한다던 그 똘망똘망 한 눈이 던진 그 단순한 질문에 나는 멍한 눈으로, 아 이게 엔케리라는 게 있는데 그게 청산이 되어서, 혹은 기술주 실적이 기대만큼 좋지 못해서, 라며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웅얼웅얼 읊었지만 내심 그 어느 것도 폭락의 진짜 이유라고 믿지 않았다. 우라까이를 남발하는 싸구려 경제기사와 방송에 얼굴 내밀며 젠체하기 바쁘신 저 전문가 호소인들이 지목하는 폭락의 원인들이야 많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반박할 충분한 근거들도 존재하니까.
아마도 진짜 원인은 시장 전체가 과도한 자기 확신과 집단사고에 빠져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주의 실적이 과거의 페이스만큼 개선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며, 또 소비의 둔화 없이 이렇게 빠른 금리인하가 펼쳐질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하지만 시장은 그 드문 확률이 실현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단일대오를 유지하며 밀어붙이던 무리들에서 갑자기 한둘씩 이탈하기 시작하자 시장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칸나이 평원에서 한니발에게 포위당해 학살당하던 로마군처럼. 장이 열리고 닫히기까지 그 몇 시간 동안 트레이더들은 자신들이 철석같이 믿었던 여러 상관계수들이 무참하게 갈려나가는 것과 롱과 숏으로 이루어진 여러 자산군들이 통계적으로 극히 희귀한 수준까지 튀어 오르는 것을 멍하니 지켜 보다 다급하게 손절에 나섰다. 그렇게 자비를 구걸하던 투자자들의 손절이 끝나고 나자, 시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반등하고야 말았으니 손실을 낸 이는 물론이고 수익을 낸 트레이더에게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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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수의 등락에 따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반복하다 지쳐 가까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던 길이었다. 1층 엘레베이터 현관 앞 자동문이 닫히자 갑자기 파드닥 하고 바닥에서 무언가가 튀어 오르다 천장에 부딪쳐 떨어졌다. 이미 니케이에 한차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게 뭐야 그냥 매미였다. 여름이 저물어가듯, 그리고 하나의 사이클이 저물어가듯 숨이 멎어가는 매미 한 마리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생의 끝자락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안쓰러워 "땅속에서 평생을 보낸 네가 그래도 마지막은 하늘을 보며 맞아야지"라는 생각으로 후후 불어 자동문밖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웬걸. 밖에 나가자마자 이 죽어가던 매미새끼가 발악하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시 현관으로 들어와 온 힘으로 조명을 들이박고 또 바닥으로 나자빠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미련한 시키가. 나는 다시 손을 휘휘 저어 자동문을 열면서 숨을 후후 불어 매미를 밖으로 내보냈지만 이 파고다 공원 할배마냥 고집 센 매미는 또 문이 닫히기 전에 실내로 들어와 천장 조명으로 돌진하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하. 그래 내가 포기한다. 네가 이겼다. 네 맘대로 죽어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본능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는 한 가지 실험을 계획했다. 미리 섭외한 몇 명의 연기자와 피실험자 하나를 같은 방에 앉히고 그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한 뒤에 방에 연기를 흘려보냈다. 물론 섭외된 연기자들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설문지를 작성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실험자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리번대다 다른 이들이 침착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면서도 자신도 똑같이 앉아 착실히 설문지를 채워나갔다. 계속해서 스며드는 연기에 고통스러워하며 콜록거리면서도. 반면 대조군에서 혼자 방안에 있던 피실험자들은 연기가 발생하자마자 밖으로 달려나갔다고 한다. 죽어가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빛을 들이박는 것이 매미의 본능이듯, 사방에서 위험 신호가 번쩍이는데도 가장 붐비는 포지션을 택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우리 인간은 홀로 살아남기보다 함께 죽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트레이더들은 어떻게든 살아서 수익을 내야 하는 존재아닌가. 그러니 나와 당신은 계속해서 본능을 거슬러 싸워야 한다. 그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니 이 주가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휴, 그리고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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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을 선포한 고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임자 대원군의 흔적들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도입했던 여러 제도를 폐지하거나 되돌리면서 명목상의 이유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이는 상투적 수사에 불과했다. 그러다 이 미욱한 왕은 큰 사고를 친다. 당시 청나라의 화폐를 수입하는 것이 직접 화폐를 주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낮았기에 대원군은 청전(淸錢)을 국내로 수입해 쓰기 시작했고 이제는 민간 거래뿐 아니라 세금 납부까지 모두 이 화폐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고의 재정 역시 대부분 청전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종은 육조판서는 물론이고 의정부 정승들과의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또 아무런 유예기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 청전의 사용을 금지한다. 난리가 난 것은 백성들 만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국고에 수납된 청전 300만 냥이 휴지가 되자 조정이 쓸 돈이 없었으니 1주일 만에 조선은 파산에 내몰렸다. 졸지에 셀프로 거지가 된 고종이 재정을 담당하던 호조판서에게 물었다. "국고에 돈이 얼마나 남았는가?" 호조판서는 김세균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급한 지출과 사용이 금지된 청전을 빼고 나면 딱 800냥이 남습니다." 500년간 이어진 조선은 이제 단 1주일 만에 파산의 위기에 내몰렸다. 어떤 멍청한 왕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의 칙령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청전철폐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조정 대신들에게 대안을 마련해 오라며 윽박질렀다. 고종은 말했다. "청나라 돈 때문에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 지탱할 수가 없다.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다. 청전은 혁파되어야 하며 모든 세금은 반드시 상평통보로 거두라" 하지만 정작 백성들에게 인플레보다도 더 큰 고통을 안긴 것은 멍청한 왕의 독선적인 개혁이었고 나라 경제가 큰 혼란에 빠진 동안 그는 여전히 비단 곤룡포를 입고 쌀밥에 12첩 반상까지 곁들여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처먹고 가베(커피)로 입가심까지 했다. 결국 대신들은 조정의 지출을 벌충하기 위해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고 나라가 보유한 자산을 팔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떠 환곡까지 팔아 치우기로 결정한다. 환곡은 흉년이 들어도 다음 해 농사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백성들에게 종자나 곡식을 꿔 주는 일종의 보험이었는데 고종은 이를 털어 모자란 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영의정 이유원이 반대했다. "환곡은 예기치 못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를 모두 돈으로 바꾸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닌 듯 하옵니다." 하지만 고종은 고집을 꺾고 청전폐지를 유예하는 대신 조선의 몇 안 되는 복지제도를 털어먹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뻘짓에 뻘짓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백성을 핑계로 들었다. "(청전폐지가)참으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나라 재산에 손해가 나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근데 정작 나라 재산을 거덜내고 백성에게 큰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의 급진적 조치가 아니었던가.
비슷한 사건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2023년 11월 한국의 금융당국은 불법 공매도의 폐해가 매우 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겠다는 전격적 조치를 발표했다. 금융위기가 아닌데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것은 국내에서도 전례가 없던 일이고 해외의 사례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규제 당국의 의지는 확고했다. 불법 공매도의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지만 금감원이 압수수색을 펼친 결과 적발한 사례는 그런 비상조치가 과연 필요했는지 의구심을 낳았다. 규제당국은 먼저 두 외국계 증권사의 지난 몇 년 치 거래내역을 모두 뒤져 총 540억 원의 불법 공매도 사례를 적발했는데, 국내 주식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량이 20조 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흐르는 강에 콜라 한 캔을 부은 것처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금감원은 추가로 공매도 상위기관 14곳을 조사하여 1500억여 원의 불법 공매도 사례를 적발한다. 하지만 동기간 국내 주식시장 거래량이 총 몇 경원에 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여전히 별 의미가 없는 수치에 불과했다.
게다가 적발된 상당수의 사례들은 단순 실수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금감원의 자체 발표에서도 입증되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례들은 시스템 미비 때문에 발생했는데, 구체적으로 입력 실수나 대차물량의 중복 계산, 혹은 수기입력 과정에서 차입수량을 잘못 입력했거나 빌린 주식의 규모가 확정되기 전에 매도 주문을 제출하는 등, 대부분이 단순 착오나 실수에 의한 것으로 시세조종이나 미공개 정보의 이용 등 불공정거래와 연계된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국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들은 이미 적발된 두 회사에 역대 최대의 과징금을 때리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이 비정상적인 당국의 조치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공매도 금지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추측했다. 심지어 해외통신사인 블룸버그조차 4월 총선을 목적으로 내놓은 조치라는 평가를 내렸다. 저명한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한국의 어이없는 조치를 두고, 이것이 바로 MSCI가 한국을 선진국 지수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다, 윤석열 정부가 MSCI 승격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하다 총선 전에 목표 달성이 어렵자, 갑자기 뒤통수를 쳤다고 평가했다(링크). 투자계의 구루인 짐 로저스 역시 이 조치는 명백한 실수고 아주 어리석은 짓이라며, 정부가 이런 짓을 벌이기 때문에 한국은 금융 중심지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혹평이 어디 언론뿐이겠는가. 금융시장의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발표 직후 매수 사이드카를 발동했던 주식시장은 바로 다음날 반대쪽 사이드카를 걸며 이 전대미문의 병신 놀음에 화려한 병신굿으로 화답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선진국 대열에 끼워달라고 매달리던 한국의 규제당국이 갑자기 돈키호테로 돌변하여 자살골을 넣으면서도 그들은 투자자를 보호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전수조사로 적발된 공매도의 규모는 극히 미미했고 그마저 대부분 단순 실수로 드러났다. 오히려 정부의 난데없는 조치로 출렁인 금융시장의 시가총액의 변화가 적발된 공매도의 규모보다 몇백 배가 더 컸으니 투자자들에게 고통을 안긴 것은 공매도가 아닌 바로 금융당국이나 다름없다. 마치 구한말 조선 백성에게 혼란을 안긴 것이 청전이 아니라 고종의 청전철폐 조치 그 자체였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에 빙의한 금융당국은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시장과 기싸움을 벌이며 압수수색의 범위를 크게 늘렸다.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구한말 고종만큼이나 무능하고 미개한 한국 규제당국과 정부-여당이 금융시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것.
그리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혹독하다. MSCI는 최근 연례 시장 접근성 평가에서 플러스’(+)에서 개선이 필요한 ‘마이너스’(-)로 바꿨으니 시간의 문제라고 여겼던 선진국 지수 편입은 아예 없던 일이 된 셈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정부가 시장접근성을 보장하겠다는 신뢰를 정면으로 어겼기 때문에 차후 공매도가 재개되고 정부의 스탠스가 바뀌더라도 MSCI 측은 계속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한국을 선진국 지수에 편입하는 것을 소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008년 처음으로 한국이 선진국 지수로의 편입을 신청한 이후 오랫동안 우리 금융인들은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이 선진국으로 분류되기를 기다려왔다. 그것이 실제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유입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 역사적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재부는 마지막 빗장이었던 외환시장의 접근성을 열어주는 전격적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떤 멍청한 아마추어 무리들이 금융계에 우우 몰려들더니 그 소망을 제멋대로 갈아다가 자신들의 비루한 정치적 야망을 위한 거름으로 썼다. 그러고서도 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으니 그 무리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병신들을 봤나. 이 덜떨어진 고종의 DNA를 이어받은 이들은 우리나라가 왜 후진국인지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피부로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오히려 잘한 조치라고 항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 초 한 대담에서 연초부터 외국인들의 주식 매수 자금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공매도를 금지한 것이 잘한 조치라고 평가했는데 그 모습은 청전을 폐기한 뒤 치졸한 변명으로 일관했던 고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30년 전의 전의 조선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금융시장을 어지럽히는 건 덜떨어진 관료들의 관치금융과 멍청한 규제들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은 일일 거래대금이 20조가 넘는 시장에서 실수로 몇백 주 어치 매도 주문을 낸 실무자들이 아니라, 바로 미개한 당신들에게 있다. 이 사태는 21세기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금융시장의 진정한 호러는 이것이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를 즐겨 읽고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를 중시하겠다는 보수정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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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6월의 마지막 날까지 공매도 금지는 해제되지 않았고 MSCI는 한국의 선진국 지수 편입을 불허했다. 지난 정부에서 진보 지식인들이 추태를 부리고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며 몰락했던 것과 같이 이번 정부에서도 우리는 여러 지식인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공개적으로 공매도 금지에 반대한 김주현 금융위원장을 제외하면 현 정부의 경제학자/금융계 출신 인사들은 모진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앉은 김소영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자신이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했던 발언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기를 바란다. 이복현 금융감독위원장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벗어나는 과분한 직분에 앉고서도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느라 절대로 좋은 평가를 줄 수 없었는데, 이번 사태로 또 하나의 큰 업보를 쌓았다. 그리고 김동조 대통령실 비서관. 한때 트레이더였던 그가 이 공매도 조치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지 모를 리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막지도, 그렇다고 비서관 직을 사임하지도 않았다. 트레이딩보다 블로거로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Hubris라는 필명을 사용하곤 했는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 그리고 이 필명은 이름값을 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마지막 회사를 그만둔 후 그는 한 포스팅에서 자신의 거시경제 전망이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자찬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트레이더가 그처럼 이른 나이에 트레이딩을 그만두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경우 뿐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던가. 그리고 그의 부끄러운 닉네임처럼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깊디깊은 Hubris의 늪에 빠져있다.
왼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고백컨대 2024년판 병신오인방이 쓰이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아직 5명을 다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모든 내용은 작성자 개인의 주관적 의견임을 밝힙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근대 이전부터 크게 벌어졌던 조선과 일본의 잠재력을 감안한다면 조선이 성공적으로 개혁을 이루어 독립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개화의 기회가 있었더라도 조선은 실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도자였던 고종에게는 그럴 의지도 역량도 없었으니까. 여러 대중매체들이 그를 비운의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것과는 반대로 고종은 조선이 전쟁 한 번 없이 멸망하게 된 중요한 원인들을 제공했다. 그의 여러 실정과 잘못된 조치로 국가의 재정은 더욱 빈곤해졌고, 그는 몸소 나서서 관직을 팔며 부패를 권장했으며, 국제정세에도 어두워 외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조선이 마지막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던 갑오개혁을 무산시키고 부패한 적폐 세력인 민씨 척족을 등용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고종 그 자신이었다. 또 근대적 의회 시스템과 헌법을 도입하자던 독립협회를 군대를 동원해 해체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체포한 것도 고종이었으며 이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사람 중에는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고종의 밀서를 받아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 중 한 명인 이위종까지도 당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동시에 이를 야기한 고종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니 더 볼 것이 있으랴. 구한말-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이끈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을 지지한 데에는 고종과 왕실에 대한 좌절에 가까운 실망이 큰 몫을 했다.
고종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미국에서 수입한 캐딜락을 타고 커피를 마시며 영국 건축가가 설계한 서구식 건물에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의식과 국가의 시스템을 개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근대화의 핵심은 권력을 분산하고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바꾸는 데에 있었지만 반대로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던 이 아둔한 군주는 무려 반세기에 걸친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온힘을 다해 전제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의 통치제도는 되려 조선 전기보다도 크게 후퇴한 1인 전제 군주정으로 돌아갔다. 다만 나라가 그를 유지할 힘이 없었을 뿐. 미개한 시스템의 정점에 있던 고종은 어떻게 보아도 개혁의 대상이었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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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정부와 거기에서 일하는 관료들은 늘 숨 가쁘게 이런저런 개혁안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중 대다수는 변화하는 환경과 민간의 수요를 맞추어 따르는 대신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정부와 관료들이 통제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시대 고종이 그랬듯이. 거창한 구호로 시작된 개혁안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철학으로 귀결된다. 정부가 통제를 잘 해서 발전하겠다. 그리고 그 기저에 놓인 철학만큼이나 쉰내 나는 디자인의 hwp 문서의 핵심은 거창한 포부와 그럴듯한 문구로 치장된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따라서 이런저런 규제와 지도를 강화하겠다, 그래 우리 관료들이. 관료조직이 대개 요지부동이듯 정권이 바뀌어도 이런 구태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하다. 고작 2년 밖에 안된 이번 정부에서도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 밸류업 프로그램, 금융개혁, PF 연착륙 대책 등. 이런저런 방안들이 나왔지만 그 세부내역은 필요한 개혁이나 시장경제와 질서를 강화하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정부의 감독 권한과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으로 채워져있다. 정부가 마련한 개혁안들 중 국가의 간섭을 줄이고 민간의 영역을 확대-강화하는 것이 뭐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라.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개혁이나 프로젝트의 실패 사례는 수두룩하게 많다. 최경환이 이끌었던 초이노믹스의 증시 정책은 가장 보수적인 인사들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수십 년째 동북아 금융허브를 외쳤지만 금융도시로서의 서울의 순위는 10년 전보다 되려 내려갔으며 그사이 십여 개의 외국계 금융사들이 서울에서 철수했거나 사업 규모를 크게 축소했다. 금융계는 그 주된 원인으로 글로벌 기준 어긋난 비합리적 규제들과 관료들의 조선식 갑질을 꼽는다. 여러 차례 밀어붙였던 경제자유구역과 각종 동북아 xx 중심지 정책은 모조리 다 실패해 이제는 그저 그런 신도시들 사이에서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았으며 그 가운데 엄청난 예산과 자원, 그리고 인력이 소모되었다. 비단 이것이 경제정책이나 금융에 국한된 문제랴. 산업이나 통상, 혹은 건설이나 심지어 문화 예술이나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모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정부에 이어 이번 정부도 주택공급에 나서고 있지만 민간의 손발을 규제로 꽁꽁 묶어두고 정부가 나서서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방안은 애초에 성공할 수가 없었기에 주거안정의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났다. 안타깝지만 이 외에도 21세기 들어 국가가 주도한 대형 프로젝트나 개혁안은 거의 대부분이 실패해 성공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국가가 아니면 리드할 수 없던 소수의 토목사업이나 비영리 정책을 제외하면.
이런 실패가 거듭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체급이 이제는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으로 이끌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나라의 전체 GDP 규모가 20억 불 남짓하던 시절에야 소수의 유능한 관료들이 효율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기업들을 윽박질러 국가의 발전방향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지만 같은 방식으로 2조 달러를 바라보는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50년 전만 해도 민간의 경쟁력이 열악했기에 가장 우수한 인력들이 정부로 모여들었으나, 이제 똑똑하고 진취적인 인재들은 더이상 행시를 보지 않는다. 오늘날의 관료조직은 두뇌를 독점하지도 못하고 민간에 비해 경쟁적이지도 않은, 뒤처진 조직이 되었다. 당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같이 일해본 관료들을 떠올려보라. 과연 그들이 민간을 이끌고 발전방향을 제시할 깊이와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인지.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통제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관료조직의 전문성과 효율성이 민간에 비해 뒤처질수록 이 기관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조선 말기에 나라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한 고종이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더욱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억눌렀던 것처럼. 심지어 관료들은 민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허용하는 것을 일종의 위협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그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가상자산이 각광을 받던 시기 법무부 장관은 거래소를 폐쇄하겠다고 겁박했고 당시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어른들이 올바른 투자를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며 어리석으면서도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같은 시기 미국의 하원이 "우리는 가상화폐의 내재가치에 논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가상화폐를 자유롭게 거래하는 일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논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자유주의적 관점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이에 힘입어 얼마 전 SEC는 비트코인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ETF를 승인했는데, 이와 반대로 코인의 거래를 금지한 국가로는 이집트, 이라크, 중국, 카타르, 오만,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방글라데시 등이 있다. 우리나라 관료들의 평균적 의식은 OECD보다 저 아프리카 나라들에 더 가깝다. 그들의 이런 후진적이고 극단적인 통제 성향은 최근 직구 금지 사태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관료들은 미국과 EU와 같은 선진시장의 인증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한국의 인증을 별도로 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시 반입을 금지할 것이라는 규제를 내놓았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각 나라마다 배타적인 인증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과거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에 수입 공산품의 수가 적던 산업화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많은 나라들은 서로의 인증을 인정해 주는 협약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들은 그런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KC 인증을 찍는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규제를 만들어 나간다. 그래, 우리 관료들의 권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니까.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이런 뒤떨어진 시스템과 철학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장애물들을 보면 그 끝에는 꼭 관료들이 있다. 식약처, 금감원, 과기부, 정통부, 기재부, 법무부, 관세청, 국세청, 보건복지부 등 규제가 규제를 낳고 규제의 본 목적은 사라지고 이제는 규제 그 자체를 위한 규제만 남아 복지부동인 관료들이 시장과 기싸움을 벌이고 민간에 갑질하는 모습만 가득하다. 규제.규제.규제. 규제는 관료들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정부는 늘 새 규제를 도입하며 해외의 사례를 들먹이지만 그 반대의 사례는 단 한차례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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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구규제를 발표하는 인상적인 표정의 이정원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 |
대개 경제발전이 더디고 후진 나라일수록 관료들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정부와 관료들의 역할이 작다. 전자의 대표주자가 중국이고 그 반대편에는 미국이 있다. 2020년 말,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마윈은 "미래의 시합은 혁신의 시합이어야지 감독 당국의 (규제) 기능 경연 시합이어서는 안된다"라며 규제당국을 거세게 비판했고 당국은 강도 높은 보복에 나섰다. 그 결과 마윈이 계획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IPO는 취소되었고 뉴욕에 상장되었던 알리바바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했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국가 기관인 NASA가 주도하던 우주탐사를 민간 기관인 스페이스 X가 대체했다. 그 과정에서 스페이스 X는 NASA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기도 했지만, 미 정부의 관료들은 괘씸하다며 민간의 발전을 가로막거나 견제하기는커녕 제도를 개선하고 협조에 나섰다. 이런 철학의 차이 때문일까. 한동안 안정되었던 두 나라의 시가총액의 비율은 이후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고 달러 기준으로 보면 그 격차는 더욱 두드러진다. 관료의 계획경제가 이끄는 나라와 시장경제가 이끄는 나라, 어느 시스템이 더 우수한지는 이미 명확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중국을 지향하는가, 미국의 모델을 지향하는가.
이런 논의를 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관료제를 예찬하는 사람들은(대개 공무원들이다) 우리 행정부에 얼마나 우수한 고학력 능력자들이 많은데 일부의 실패 사례로 전체를 재단하냐며 항변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부의 실패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지 일부의 문제가 아닌데다가, 관료제에서는 개개인의 능력보다 조직의 구조가 그 효율성과 아웃풋을 결정한다. 그리고 한국의 정부 조직은 공부를 잘하는 인재들을 바보로 만드는 일에 특화된 조직이다. 그래서 독특하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아래로 갈수록 효율적이고 생산적인데 반해, 직급이 올라가고 상위 조직으로 갈수록 비합리적이고 멍청하게 퇴화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당신들은 과거 산업시대 발전을 이끈 선배들보다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사명감이 더 크지도 않지 않은가. 나는 여러 번 관료들이 민도를 거론하며 관료 주도형 통제 모델을 옹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선진국과 비교하면 그들과 우리의 민도의 차이보다 관료들의 의식수준의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위직일수록. 게다가 일반 국민들의 수준과 관료들의 격차는 구한말 이래 지금이 가장 적고,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인데, 언제까지 시대착오적인 선민사상에 젖어 민간과 시장을 통제하려 들 것인가.
세종특별시는 그 이름에 걸맞게 대한민국 관료제가 처한 기형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행정에 특화된 특별시를 자처하면서도 이 도시의 구조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세종시와 가장 가까운 KTX 역은 오송역인데 여기에서 택시를 타고 아주 한참을 달려야 세종시 정부청사에 도착한다. 그 뒤에도 여러 부서를 방문하려면 발이 아프도록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어야 한다. 점심이라도 먹으려 외부로 나가려면 더욱 그렇고. 그러려면 대중교통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차로 다니기에도, 버스를 타기에도 여러모로 불편하다. 택시 숫자마저 모자르다고 한다. 게다가 이곳은 기존의 도시를 확장해서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공무원들이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다시 택시를 타고) 오송역 플랫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오가고 있고 아직 때묻지 않은 젊고 능력 있는 사무관들은 이 정체된 도시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다 함께 시나브로 침전하고 있다. 이건 실패한 도시다. 세상에 공항은 물론이고 기차역 하나 없이 고립된 수도가 있던가? 갈라파고스 세종. 그리고 도시가 고립된 만큼 거기에서 일하는 관료들도 세상과 고립되어 점차 도태되다 이제는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지조차 모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관료를 위한, 관료에 의한, 관료의 도시가 이렇게 비효율적인 설계로 실패했다면 그들이 그리는 한국의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 세종시가 그렇게 된 것은 정치권 때문이라고? 그래, 그런 이유도 있지. 하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행정부가 있던가? 어공이든 늘공이든 그들이 국회와 국민들을 설득할 능력이 없다면, 그들의 권한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
오래전 이건희는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 이제 세계에서 순위를 다투는 우리나라 기업은 감히 말하건대 1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관료와 정치의 수준은 과거보다 후퇴했으니 4류와 5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부가 내놓는 개혁안이란 결국 5류의 눈치를 보는 4류가 1류를 선도하겠다고 나대는 꼴이다. 그들은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고종은 기나긴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개혁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미개한 전제 군주정과 개화는 양립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적으로 밸류체인이 통합되고 경쟁하는 시대에 관치와 선진화는 양립할 수 없다. 중세의 제도인 과거제를 모방한 행시로 선발된 인사들로 꽉꽉 채워진 관료조직이 자신의 전근대적 권한은 강화하면서 이미 선진사회와 경쟁하는 민간을 선도하겠다는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백여 년 전 고종이 죽어야 조선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제는 세종시의 권력이 죽어야 한국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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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까운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세종시의 여러 부처에서 관료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가족들 중 몇 분도 경제 부처나 규제에 관련된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퇴직하셨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히 일하던 인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현실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며, 또 관료제와 조직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그들 개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오도되어 사기를 더욱 낮춘다는 점도 알고 있다. 민간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수, 걸핏하면 들어오는 비난의 여론, 적체된 승진에다가 암울한 지방근무까지. 물론 관료조직을 개혁하는 일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개혁하는 일도 포함해야 한다.
개혁의 방향은 관료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처벌은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 처우를 대폭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관료들에겐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지나치게 적은 보수가 주어지는데, 이러면 관료들이 정치인이나 이권을 제공하는 집단/단체/회사에게 회유될 가능성이 커지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들이 남는다. 이는 국민 모두에게 크게 해가 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관료제의 개혁은 그들의 연봉부터 대폭 상향하는 것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