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4.

유시민의 타인을 고문할 자유

 전 방송인 유시민(63세)은 김어준이 TBS에서 하차한 배경을 두고 "현 정부는 자기 자유만 자유라고 하면서 반대 진영 사람들의 자유는 없앤다"라고 비판했다. 뒤이어 그는 이제 기존의 언론은 이해집단의 일부가 되어 공론장이 아닌 자기 이해를 관철하는 정보 유통기업이 되었고 따라서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정보를 해설해 주는 방송이 필요하다며 김어준의 유튜브 채널에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람 설정을 부탁한다고 했다. 

언론인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공영방송에서 쫓아내는 것은 분명히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다. 하지만 김어준이 어디 그런 언론인인가. 그가 진행한 뉴스공장은 지난 보궐선거를 앞두고 오세훈이 (땅투기의 목적으로) 내곡동의 생태탕 집을 방문했다고 주장했고, 대선에 앞서 당시 야당 후보의 배우자를 유흥주점에서 봤다는 주장을 검증 없이 내보냈다가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두 사건 모두 명백한 허위사실이었고 또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던 사건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태원 사고에 대해서도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제재를 받지 않았나. 거기에 저널리즘이나 언론인의 사명, 혹은 윤리의식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이 일이 자유를 억압한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렇다면 그가 옹호하는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중에게 거짓말을 할 자유, 정치적 중립성을 왜곡할 자유, 범죄가 들통나 자살한 성범죄자를 옹호할 자유, 야당후보의 배우자를 술집 접대부라고 모욕할 자유, 뇌물을 받을 자유, 남의 자식은 못 가게 막으면서 내 자녀들만 특목고에 보낼 자유, 그리고 이 모든 행위가 들통나도 사과하지 않을 자유. 그가 외치는 자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그 길고 긴 리스트 중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타인을 고문할 자유 아닐까. 

1984년 가을,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네 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붙잡아 학생회관에 감금하여 폭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피해자들의 옷을 벗겨 속옷만 입힌 채 폭행을 가해 온몸에 멍이 들었으며 순번을 정해 교대로 폭행에 나서는 등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피해자들을 여자화장실로 데려가 세면대에 물을 가득 채우고 얼굴을 물속에 처넣기도 했는데 한 피해자는 이때 이가 심각하게 부러져 한동안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또 한 피해자는 지나치게 심한 폭행으로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자 응급실로 실려갔으며 이후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피해자 중 하나였던 전기동 씨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은 프락치가 아니고 법대 교수님을 뵙기 위해 캠퍼스에 방문했던 지라 가해자들에게 이 사실을 교수님께 직접 확인해 보라고 했지만 그들은 전 씨의 증언이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도 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전 씨는 오히려 자신이 프락치가 아니면 그들의 고문행위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폭행과 협박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증언했다. 당시 핵심 수뇌부 중 하나였던 유시민은 스스로 "감금에 찬동했으며 폭행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직접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대하는 유시민의 태도는 놀랄 만큼 전두환과 닮아 있다. 그는 78학번으로 당시 고학번인데다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을 거쳐 복학생 협의회의 대표를 맡아 운동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자신은 직접 폭행을 하거나 지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마치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던 전두환의 비겁한 모습처럼. 또 무고한 시민들을 감금하고 끔찍하게 고문을 가한 배경을 두고 독재에 항거하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그 독재야말로 북한과의 군사적 대립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핑계로부터 탄생한 것 아닌가. 물론 몇 명의 시민을 물고문한 것과 수백 명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은 결코 같지 않다. 하지만 수백만을 죽인 북한과 맞섰다고 수백 명을 죽인 죄가 없던 일이 될 수 없듯, 신군부에게 저항한다는 핑계로 무고한 시민을 고문해 인생을 망가뜨린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한국 현대사의 끔찍한 과거 중 일부인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자신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일했던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그가 고문했던 피해자들 중에는 진짜 간첩이나 반국가단체 소속의 인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두환의 독재에 반대했던 사람들, 혹은 아예 무고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범죄자로 기억하지 애국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1984년 관악산 캠퍼스의 학생회관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피해자 중 정부의 프락치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은 가해자들과 똑같은 일반 시민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곧 정의라고 믿던 학생들은 이근안이 남영동에서 가하던 것과 똑같은 고문을, 또 훗날 동지 박종철 군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과 똑같은 고문을 스스럼없이 가했다.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날의 가해자들 중에서 가장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만이 남아 금배지를 달고 여의도를 오가는 동안 피해자들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여 빈곤한 생계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실형을 살았던 유시민은 젠체하는 태도로 우리들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치려고 들고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래디컬 자유주의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수많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그렇듯 대개 래디컬리스트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마치 믿음 소망 사랑을 외치던 예수의 이름 아래 이교도의 목을 자르고 몸통을 말뚝에 박아 죽이던 십자군이 그랬듯이. 마찬가지로 노무현이라는 신을 믿는 한 비뚤어진 근본주의자 노친네가 주장하는 자유는 분명 우리가 이해하는, 또 대한민국 헌법에 기록된 자유와 매우 다르다. 앞서 언급한 민간인 고문 사건 이후 실형을 선고받은 유시민은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는데 그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법과 양심을 모두 지킬 수 없다. 이 경우 양심을 따라야 하기에 나는 반독재운동을 지켜가기 위해 언제라도 기꺼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연행 및 감금 조사를 하겠다" 그리고 유시민은 여전히 현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또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서슴지 않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모략하고, 스스로 궤변임을 알면서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그의 양심은 찔리지 않는다. 1984년의 학생회관에서 고문당하던 피해자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마치 그때처럼. 그러니까 지금 이 육십 넘은 노인이 주장하는 자유란, 내뜻대로 타인을 고문할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그가 폭행에 직접 가담했거나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피해자 전기동 씨는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 중 가장 연장자로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