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9.

우리 집의 근현대사

큰할아버지가 만주로 떠나시고 차남이었던 할아버지는 교사가 되어 서울로 상경했다가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을 맞이하셨다. 현재 서울 약수동의 한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가 도보로 낙향하셨는데 당시 제2한강교는 너무 멀리 있었으니 아마 뚝섬이나  서울숲 언저리에서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시지 않았을까. 남쪽 고향 땅으로 향하던 도중 동향의 대학생 둘을 만나 짐을 나눠 지고 이동하는데 미군의 폭격을 만나 그들과 헤어지게 되셨다고 한다.
 
보름인가 한달인가를 걸려 고향에 도착하셨다고 하는데 당시의 열악한 교통 상황과 당시 돌을 갓 넘겼던 아버지를 업고 이동하셔야 했던 할머니의 이동속도를 고려해도 30일은 너무 길고 15일 정도 걸리시지 않았을까 한다. 게다가 30일이 걸렸다면 전선이 그 분들을 따라잡았을 테니 더욱 어려움이 많으셨을텐데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으신거로 보아 보름이 걸리셨을거라 추측해 본다. 고향에 도착해 보니 앞서 헤어진 두 대학생이 먼저 도착해 자신들이 들고 있던 할아버지의 봇짐 하나만 증조할아버지께 드렸고, 그 분들은 피난길에 죽은줄로만 알고 슬퍼하고 계시다 아들내외가 나타나니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군은 빠르게 남진했고 고향땅 역시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선다. 증조부는 지주 출신이었던 터라 할아버지 역시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한채 숨죽이고 계셨다고 한다. 특히 인민위원장에 예전 고조부의 노비였던 사람이 임명되자 더욱 그러셨다. 하루는 완장 찬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쳐 마당의 장작을 하나씩 손에 들고 집 주변을 에워싸자 그땐 정말 죽었구나 하셨다고 한다.
 
다행히 그분들은 가족들에게 해를 끼지시지는 않았다. 다만 사위 한분(내겐 고모할머니의 남편)이 순사 출신이었던 터라 그분이 본가로 돌아올거라고 기대하고 잡기 위해 지키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모할머니는 본가로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말씀해주시지는 않았지만 아마 자기 남편의 본가 혹은 부산으로 달아나지 않았을까.
 
노비였던 인민위원장은 다행히 증조할아버지와 그 집에 별 다른 해를 끼치지 않았다. 폐쇄적인 시골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나라가 뒤바뀐다는 것은 그냥 동네 내에서 주민간 서열이 바뀌는 정도를 의미하지 이념에 따라 서로가 꼭 죽고 죽이는 것 만은 아니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것이지 모든 동네가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6.25 전쟁이 유독 비참했던 이유는 사상자 거의 대부분이(80%) 민간인이었고 그 중 상당 비율은 같은 민간인이 저지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 등으로 인해 농경사회에 대한 환상을 다소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에는 늘 숨겨진 갈등이 있으며 특히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쳐 격동을 겪었던 시대에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과거부터 품어온 약간의 앙심이 처형으로, 아이들 간의 사소한 다툼이 일가족의 몰살로 쉬이 번지던 시기였다.
 
전쟁 당시 날짜별 전선 변화를 살펴보면 고향 땅이 북한군의 점령지에 넘어간 것은 약 7월 초중반이고 이후 전황이 뒤집어져 남한이 수복한 것은 대략 9월말-10월초로 보인다. 모든 한국인들이 그 6-7주 동안 내린 선택은 이후 60-70년의 삶을 영구히 바꿔놓았다. 다행히 고모할머니와 그 남편은 동네로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 동네에서는 인민재판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 인민위원장은 아무도 처형하지 않아도 되었고 북한군이 물러날 때 같이 도망가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고향이 비극을 피할 수 있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 인민위원장이 훌륭한 분이셔서 북한군의 감시아래 반동분자들을 색출하는 시늉만 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보호했을 수도 있고(깡촌이지만 기차역이 있기 때문에 북한군이 없었을리가 없다) 고조부나 증조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또 인간적인 친분에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리 아름다운 동기가 아니었을수도 있다. 노비출신이지만 세상 사는 머리가 발달한 인민위원장에겐 친일 경력이 있어 인민재판을 열면 누군가가 자신을 밀고할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내 증조부가 그에게 뇌물을 줬을 수도 있다. 어쨋거나 살육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의 다른 곳은 이렇게 다행스럽지 못했다. 6.25전쟁의 첫 반년은 전선이 매우 역동적으로 움직였는데 2달만에 낙동강까지 후퇴한 최전선은 그 해 10.1에 38선을 돌파해 겨울 전 두만강에 이르렀다가 다음해 1.4에 서울을 버리고 다시 후퇴한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1년 1월 4일까지 약 반년간 전선은 한반도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을 왕복달리기한 것과 같다. 군인 사상자의 네배에 달하는 민간인인 사상자 대부분은 이 과정속에서 나왔다.
 
특히 개성과 평택 사이의 주민들은 반년간 정부가 반년 사이 세번에서 네번이나 바뀌는 것을 겪어야 했고 첫번째 두번째에는 비극을 피했던 동네도 세번째 네번째에 살육과 폭력, 그리고 보복이 이따랐다. 만약 전선이 평택에서 더 남쪽까지 후퇴했다면 북한군은 자신들을 따라 후퇴하지 않은 기존 인민위원장을 처형하고 새로운 사람을 앉혔을수 있고 새 권력자는 증조부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을 지 모른다. 인간사의 대부분의 비극이 그랬던 것 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선량한 피해자와 학살자를 가른 것은 그저 우연한 우연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무남독녀셨고 할아버지 역시 큰할아버지가 만주로 떠나 생사가 불투명해진 이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두 집안에서는 부부가 다시 상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외증조부는 집과 땅을 주며 고향 땅에 정착하라고 했고 서울에서 피난의 고통을 겪은 할아버지는 상당히 고민했다고 한다. 퇴사하지 않고도 고향에 집을 지으셨던 것을 보면 서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짓던 그 집은 아직 주소지가 없어 복귀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행방불명 된 사람들이 남한에 있는 지는 물론이고 생사여부조차 파악되지 않던 시절이라 학교는 미복귀자 모두를 일괄 퇴직시켰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평생 떠나고자 했던 고향 마을에 다시 정착하셨다. 살아계실 적 할아버지는 대청마루에 앉아 "내가 이집 짓느라 서울을 못갔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이후 평생을 그 집에 사시며 팔남매를 길러내셨고 마을 내 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은퇴하셨다.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려야겠어요" cf가 유행하던 시절 아궁이를 보일러로 고쳤던 그 집은 반세기 넘게 아버지 뿐 아니라 나와 사촌들의 기억에도 남아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철거되었다. 지금은 그 지난 세기의 기억위에 신식 주택이 들어서 있다.
 
인민위원장이었던 그분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계속 같은 동네서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동네에 애착이 있었으니 자신의 팔에 완장이 채워지고 손에 장작이 쥐어져도 이웃사촌의 머리를 후려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몇번 처가를 오갔던 큰고모할머니의 남편도 자신을 해치려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순경이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복수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정부에 이웃을 빨갱이라며 밀고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주와 친일부역자들을 인민재판에 세우지 않았던 것 처럼. 아마 인민위원장의 아들딸들은 할아버지의 학교에 다녔을 것이고 그의 손자들은 우리 아버지와 같이 자랐을 것이다. 족보와 가족관계도를 되짚어보면 개중엔 혼인으로 맺어진 이들도 있을 지 모른다.
 
20세기 최악의 전장으로 흔히 스탈린그라드를 뽑는다. 약 5개월 간 진행된 그 전투해서 독일과 소련 양측은 각각 약 백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전쟁의 첫 반년의 참상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상자 중 군인/민간인의 비율이 반대였을 뿐. 요동치던 전선 덕에 한반도에는 수도 없는 스탈린그라드가 존재했고 그 가난한 나라의 내전에서 사람들은 쇠가 없으면 죽창이나 각목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 가운데서도 마치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처럼 큰 비극으로 번지지 않았던 우리 마을같은 곳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동네 사람들이나 어른들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일제시대, 패망과 해방 그리고 내전과 같은 격변의 시기를 겪은 그분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쟁통에서는 남을 죽일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 뿐이지 히틀러나 스탈린, 도죠 히테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1.4후퇴때 전선이 평택 방어선에서 멈췄기 때문에 우리 마을은 북한군의 재점령을 피했던 터라 우연히 비극을 피했던 것이지 동네 사람들이 유난히 도덕적이거나 우애가 깊어서는 아니었다고. 해방한국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스탈린그라드, 아니면 동막골로 나뉜 것은, 군 수뇌부들이 작전지도에 임의로 그은 선 하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결국 그저 그런 우연에 불과했다는 것을.
 
개개인의 기억이 모이면 역사가 된다.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관용어구처럼 되풀이하지만 정작 각자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역사는 모르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러니 빨갱이의 후손이 김씨일가를 욕하고 친일순사의 아들이 반일을 외치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유시민이 딸에게 일제시대 공무원으로 출세하려고 애쓰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 것 처럼 나 역시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사에 무엇이 숨겨져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남은 흔적들을 하나하나 기록해보려고 한다. 더 없어져 정말 잊혀지기 전에.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다들 그랬다. 그래서 옆동네의 지주들을 찾아가서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더라"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동막골은 그저 신화적 환상일 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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