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3.

한국영화부도의 날(국가부도의날 후기)

최근 충무로가 왜 망작들로 가득한지 그 이유 중 하나를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사례.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나는 국가부도의 날을 보면서 한국영화부도의 날을 예감했다.

먼저 이 영화의 왜곡을 파악하려면 실제 IMF사태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이 영화는 외환위기와 국내신용위기를 혼용하지만 그 둘은 다르다. 외환위기는 달러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고, 국내 신용위기는 원화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 후자의 문제는 정부가 원화를 발행하고 지급보증을 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달러부족 문제는 독자적으로 해결이 힘들다. 특히나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고정환율제 아래서는 모든 나라가 주기적으로 외환위기를 겪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같이 큰 나라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미국도 금태환을 고집하던 시절 동일한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한국이 외환위기를 처음 겪은 것도 아니다. 그 전엔 미 재무부 도움으로 연명했던 것 뿐이지.

따라서 외환위기는 당시 고정환율제를 펴던 한국이 반드시 겪었을 문제고, 그 핵심은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에서 달러가 모자라 수입 결제대금과 외채를 갚을 달러가 없어 생긴 문제다. 물론 그것이 국내 신용위기를 부르긴 했지만 엄연히 그 둘은 다르다. 따라서 해결책도 다르다.

태국과 말레이시아 필리핀 같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홍콩처럼 금융선진국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한국이 자체적으로 달러를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그러니 위기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IMF라는 조직이 존재한다. 이 구원투수는 위기에 등판해 필요한 달러를 제공해주는데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도로 탕진할텐데. 매주 20억달러씩 소모하는 나라에 550억달러를 빌려줘봤자 반년이면 똑같은 위기에 똑같이 처한다. 그래서 IMF 골목식당의 백종원처럼 근본적 솔루션도 같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그들이 준 솔루션의 목적은 단 하나다. 한국이 자발적으로 해외자본을 끌어들일수 있게 국내시장을 개방하고 제도를 선진화하는 것이다.

대중은 당시 IMF의 조치가 가혹하고 불공평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바보같은 소리다. 앞서 말했듯 550억 달러로는 불과 27.5주, 즉 반년밖에 버티지 못하니 그동안 한국의 외환수급을 정상화하기 위해선 급진적인 대책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더 빌려줘야하는 것이고 IMF의 한정된 자본으로 많은 나라를 구제하는데에 반하는 일이다. 물론 그에는 충격이 따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급박한 상황이라 IMF를 부른 것 아닌가. 누구한테 돈 맡겨둔것도 아니고 다른 해결방안도 없었으면서 너네가 돈 더 빌려주고 더 천천히 개혁했다면 더 편했겠지 않냐는 것은 홍탁집 아들이 백종원보고 한 1년쯤 가게영업 도와주면서 솔루션 달라는 것 만큼이나 멍청하고 뻔뻔한 요구다.

영화의 역사왜곡은 이를 부정하면서 출발한다. 한국은행의 수장은 총재인데 영화 시작부터 총재를 총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나리오가 최소 아마추어 수준의 리뷰냐 조언도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개봉 후 인터뷰에서는 실명 거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총장이라고 했다지만 경제수석 재경부 차관 한은 팀장 IMF 미재무부 차관 등 이외 모든 공식 직책과 회사명은 변경없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백퍼 뻥이다) 게다가 한팀장이 속한 통화정책팀은 외환과 거의 무관한 부서라 외환보유고가 언제 동나고 롤오버가 얼마나 되는지 정보가 전무한 부서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사실을 틀린 것을 넘어 영화 후반부로 가면 본격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IMF는 답이 아니라며 유럽 중앙은행들에게 돈을 빌리자는데, 유럽 중앙은행들은 자국 은행에 돈 빌려주는 곳이지 외국에 돈 빌려주는데가 아니다. 당장 베트남이 한은에 돈좀 달라고 하면 한팀장(김혜수 역)은 빌려 줄건가. (한은이 일반 회사에 실사 나가는 것도 웃겼지만) 일반 종금사와 건설사들 대차대조표와 자산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속속들이 봐 놓고서 부실을 덮어놓자(파산시키지 말자)는 말은 괴랄한 논리다. 그건 부실기업의 부채를 정부가 떠안고 강제로 은행권에 전가시키자는 소리와 똑같은 말인데. 그래놓고 본인은 정부는 파산(모라토리움)하자고 주장하는 대목에서 실제 웃음이 나왔다. 한번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 역사에 남아 잊혀질때까지 수십년간 국가와 모든 기업이 해외채권을 발행할 때 높은 가산금리를 내게 된다. 우리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가산금리에 해외채를 발행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IMF 당시에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은의 핵심부서인 통화정책팀장은 이를 모를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 부서가 모라토리움을 논의할 자리도 아니지만 그런 오류는 너무 많아 생략한다.

특히 IMF실사단 뒤에 따라오는 미 재무부 차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한팀장이 마치 비밀을 발견한 듯 극적으로 연출하는 신에서는 쪽팔릴 경이었다. 당시 재무부 차관은 IMF외 다른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러 왔을 뿐더러, 달러를 빌리면서 왜 미국이 껴 있냐니 MS워드를 왜 마이크로 소프트사에게서 사서 쓰냐는 이은재 의원이랑 뭐가 다른가. 에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IMF 구제금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IMF는 (미국의)사익을 위해 한국에 불리한 조건을 내건거라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음모론은 필부들이 술잔을 나누며 안주거리로 삼을 잡설에 불과한데, 그걸 돈내고 2시간동안 들으러 극장에 갈 관객들이 뭐 얼마나 있었겠나. 이 영화는 헐리웃의 Big Short을 모방해서 만든 것 같은데 그 영화가 수작으로 뽑히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던, 실제 금융시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쉽게 객관적으로 풀어내서 그런 것이지 필부의 뇌피셜을 영화로 만들어서 뜬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과거 국가부도의 과정을 본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영화가 어떻게 부도를 내고 있는지를 본 것 같다. 흔한 클리셰와 플롯의 반복, 나팔바지만큼이나 촌스런 평면적 캐릭터들, 관객 피곤하게 만드는 감정선의 강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적 시각의 부재.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500년 1000년 전의 역사가 아닌 불과 19년 전의 대한민국 역사다. 당시 IMF를 겪고 극복한 금융관료들이 모두 살아있고 그 시절을 겪은 수많은 금융인들이 존재하지 않나. 감독이 고증에 힘써야 했던 부분은 한국은행 사무실과 로비와 같은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우리가 왜 IMF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다. 감독이 영화적 소재로 사용한 IMF의 경험은 모든 국민들이 공유하는 처절한 기억이고 역설적으로 소중한 공공재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경험을 영화로 사유화할 때는 최소한 객관적 팩트를 전달해야한다는 윤리적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 하지만 그는 공공자산을 가져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극장수입을 올리는데 유용했다. 사실상 국민 전체에 대한 배임이고 우리 아픈 기억을 통째로 횡령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 못하는 감독이 계속 영화를 배설하는 이상 한국영화계는 부도의 날을 맞이할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