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지난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미국 주택시장의 버블을 지목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적으로 버블로 지목받은 자산은 그 거품이 꺼진 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이전의 고점을 회복했다. 1929년의 대공황 이후 미 증시가 같은 수준으로 돌아오는데에 29년이 걸렸고 2001 IT버블은 급격한 기술력과 생산성 향상에도 불구하고 15년이나 걸렀다. 일본 증시는 거의 30년이 지나도록 2/3수준으로도 반등하지 못했고 세계에서 가장 큰 GDP 성장세를 보이는 중국의 증시도 십수년이 걸려야 이전의 고점을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18세기 툴립구근처럼 영영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버블자산들도 많다. 하지만 미국 부동산은 단 10년만에 모든 손실을 회복하고 고점을 경신하고 있다. 이로 보아 2007년의 미국 부동산이 고평가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금융위기를 불러올 버블이었냐는 질문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럼 과연 무엇이 버블이었는가? 아마도 시장에 팽배했던 서구 금융시스템에 대한 이성적 믿음이 아닐까 싶다. 완전히 이성적인 시장에서는 가격이 아주 높거나 낮다면 항상 팔거나 사고싶어하는 사람이 존재해야하니 유동성에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패닉장에서는 대개 유동성이 사라지는 liquidity cruch가 종종 일어난다. 신흥시장의 자산을 거래하는 투자자는 이 위험을 늘 감안하기 마련인데, 현대문명을 발달시킨 서구의 금융시장과 자산을 거래하는 투자자들은 이런 패닉의 가능성에 눈을 감아버렸던 것이다. 누구도 입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높은 교육수준과 합리적 시스템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는 서구의 시장에서 미개한 신흥국에서나 벌어질만한 일이 터지리라곤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흔한 베어마켓이 패닉을 동반한 폭락으로 번졌던 것이다. 물론 거기엔 자신의 금융모델을 과신했던 서구의 오만함이 있었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고.
위기가 번지기 시작한 그 시점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크게 변화했다. 죽어가던 월가는 재무부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자금에도 의존해야 했고 리만의 인수를 검토하고 메릴린치 지분을 늘린 한국의 자금도 시장안정에 일부 기여했다. 이제 금융 시장은 더이상 유럽과 미국의 헤드라인 뿐 아니라 중국의 시장동향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으며 월가에서도 이제 아시아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인간승리의 아이콘 대신 마땅히 있어야 할 구성원들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시장 너머에서도 감지된다. 새로 늘어나는 GDP의 60%는 아시아 지역에서 나오고 있으며 2015년에 개봉한 쥐라기공원 4를 보면 공원의 오너와 개발팀장도, 그리고 수많은 관객들도 아시아 유색인종들이다. 20여년 전에 개봉한 1편에 비하면 얼마나 큰 변화인가.
흔히 역사학자들은 100년을 아우르는 가장 커다란 변화를 야기한 사건을 그 세기의 시작으로 정의한다. 현재의 사람들은 21세기는 911테러로 시작됐다고 하지만 , 이번 세기에 벌어진 가장 인상깊은 일이 기독교의 몰락이나 테러의 보편화가 아니라 서구의 헤게모니가 세계를 독점하는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이라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번 세기의 시작을 2008년 리만의 파산으로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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