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4.

맘충, 사이코패스, 그리고 타인은 지옥이다.

  • 맘충이라는 단어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던 때가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남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자기 자식을 이기적으로 챙기느라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도 뻔뻔한 그들. 맘충. 하지만 그들이 원래부터 그런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배려심 넘치는 여자들이라도 아이가 생기고 나면 맘충으로 변한다. 다소간의 차이만 있을 뿐.
  • 진화생물학 차원에서 보면 그들이 맘충으로 돌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자손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를 돕는 호르몬이 있다.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은 상대에게 감정적 유대를 느끼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생물학시간에 이 호르몬은 흔히 임신한 여성에게서 분비된다고 배웠는데, 단순히 그 뿐 아니라 사랑에 빠졌을 때, 심지어 가벼운 친밀감을 느낄 때에도 분비된다고 한다. 그리고 옥시토신의 분비는 상대(혹은 집단)에 대한 희생적 행동을 유발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 더 나아가 가족, 친구 등과 같은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경우, 모두 이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흔히 이를 사랑의 호르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얼핏 들으면 옥시토신은 마치 이타심을 강화시키는 마법의 물질 같지만 근래에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이 호르몬에도 숨겨진 그림자가 있다. 바로 옥시토신의 농도가 높을땐 이질적 개체나 집단에 대한 공격성이 증가한다는 것. 심지어 옥시토신이 활발하게 분비된 남성의 경우 새로운 여성을 보았을때 성욕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따라서 옥시토신 농도가 가장 높게 분비된, 육아기의 맘(mom)들은 내 아이의 편의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나와 내 아이가 아닌 존재에겐 철저한 무관심을 보이고, 더 나아가 과도한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맘충이 되는 것은 교양이 아닌 본능의 문제다.
  • 논의의 범위를 확대하면 이는 역사의 가장 어두운 면과도 연관되어 있다. 인간에게 자기희생이 가장 필요할 때는 언제일까. 바로 육아와 전쟁이다. 한 개인이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는 경우는 대부분 그 둘로 축약되지 않는가. 단지 후자의 경우 그 대상이 종교냐, 사상이냐, 혹은 민족이나 국가이냐로 달라질 뿐. 그 좋은 사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관동군과 나치의 SS부대를 떠올려 보라. 그 둘 모두 국가나 민족을 위해 개인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지는 극한의 이타심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타인종을 가장 끔찍하게, 죄책감 없이 살육한 범죄 집단이기도 하다. 의학적으로 조사해 본 바는 없지만 그들의 옥시토신 농도가 일반인 평균보다 높았으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옥시토신이 과도하게 분비된 사람을 보며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내리게 된다. 만약 우리 편이라면 그는 성자가 될 것이고 적이라면 사이코패스로 보일 것이다.
  • 대중은 유영철이나 이영학같은 사이코패스들을 보며 저런 짐승만도 못한, 악마같은 놈이라며 우리와 다른 존재로 그들을 구분짓는다. 따라서 그들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것이 당연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와 다르다'는 그 유대감의 결여야말로 사이코패스들의 가장 큰 특징이지 않은가.*  그리고 앞서 설명한 옥시토신은 멀쩡한 일반인도 "나와 다르다"라는 사실 하나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지 알려주고 있다.
  • 웹툰 원작의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사이코패스들이 우연히 한 고시원에 모여 살게 되며 펼쳐지는 극한 스릴러. 듣기에도 소름돋는 이 제목은 샤르트르의 희곡의 대사 중 일부를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의 작용을 이해한다면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타인에게는 내가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마침 추석이니 굳이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자면, 우리 모두 역시 어머니가 타인에게 맘충이 되어서까지 나를 지킨 덕분에 오늘날 까지 존재할 수 있던, 그 수혜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를 보고 연휴라 오래간만에 본가의 어머니를 뵙고 와서 쓴 글]



*이는 다른 곳에서 약간 변형하여 인용한 내용임을 이미 밝힌다. 물론 나 혼자 하는 사색 중에서도 순수하게 스스로 창작해낸 내용이 얼마나 되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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