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1.

모에화 된 라오콘-이윤성

1863년 에두아르 마네가 신작 [올랭피아]를 공개하자 관객들은 크게 분노했다. 기존의 회화에서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에는 대부분 신화적 인물을 통해서 성스럽게 표현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로 추정되는 여성의 누드를 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새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였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구도와 도상을 차용했으니, 대놓고 비너스를 창녀로 바꿔 그린것 아닌가. 기법 면에서도 엄격한 인체비례와 정확한 원근법을 십계명처럼 따르던 기존 회화와는 달리 비례도, 원근법도 맞지 않는 거친 붓질로 나체를 그렸으니 보수적인 기존의 관객들과 미술계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잘난 상류층 나으리들께서 한데 모여 헐벗은 여자의 그림을 점잖게 관음 하기 위해서는 누드화들이 성스럽게 표현되어야 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를 거칠게 표현했으니 그들이 어찌 찔리지 않았을까. 이 발칙한 작가는 그렇게 유산계급의 위선과 가식을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이윤성-Laocoon

오늘날 이윤성의 작품들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그는 미술학도들이 연습하고 배우던 고전미술의 소재들을 차용하면서도 이를 일본 만화의 기법들로, 또 매우 선정적으로 표현한다. 이번에 공개된 신작들의 소재 역시 그리스 신화-라오콘에서 따온 것인데,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동명의 조각이 미켈란젤로나 엘 그레코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기에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그리고 작가는 발칙하게도 본래 남성인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을 여자로 바꾸어 그렸다. 이를 모에화라고 하던가. 그뿐만 아니라 본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표현했다는 라오콘을 야하게 뒤틀다니. 이 아이콘이 미술사에서 가치는 위상을 고려하면 이 얼마나 발칙한 시도인가. 흑백으로만 묘사된 이미지와 100호를 넘어서는 커다란 크기로 인해 작품의 섹슈얼한 요소들은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를 일본 망가처럼 표현했으니, 아무리 전시장이라지만 이 그림들을 쳐다보고 있기가 왠지 부끄럽다. 그리고 그를 통해 관람객들은 자신의 가식을 깨닫는다. 비너스나 아프로디테의 누드를 실컷 보고 즐기던 작자들이 마네의 누드 앞에서 얼굴이 벌게지며 화를 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것도 같다. 

리히헨슈타인과 무라카미 다카시는 기존의 미술계가 낮추어보던 카툰이나 망가도 훌륭한 현대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하는 무수한 아류들이 뒤를 이었다. 아트페어에 가면 터줏대감처럼 늘 있는, 비슷비슷하게 쉽고 귀여운 이미지를 공장처럼 찍어내놓고 와닿지 않는 해설만 주절주절 달아둔 채 평론가들과 수집가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아양을 떠는 그림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쉽게 입고 버리는 SPA 브랜드의 옷을 팔겠다고 억지웃음을 짓는 점원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윤성의 작품은 발칙하게도 우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묻는다. 왜, 유럽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들 앞에선 셀카 찍어 인스타에 올리더니 이건 못 올리겠어? 뒤샹이 모나리자로 섹드립을 날릴 때엔 꺅꺅 거리며 멋있다고 하더니 모에화 된 라오콘은 마음에 안들어? 뭐 네 눈에 고전은 고상하고 망가는 좀 없어보여? 하지만 고만고만한 취향을 가진 부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귀여운 척 애교를 떠는 뻔한 그림들보다 도발적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품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마네의 올랭피아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이 우리는 문화계의 홍위병들이 몰려다니며 멋대로 예술을 재단하고, 밥줄이 간당간당한 예술가들이 그게 두려워 자아 검열을 펼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판 문화대혁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작가들은 얌전한 모범생이 되어 논쟁적이지 않은 작품들만 내놓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술이 그렇게 고분고분했던가. 반 고흐, 쿠르베, 세잔, 피카소, 뒤샹 등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작가들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모두 당시 미술계를 지배하던 주류에 반기를 들던 악동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특히 이윤성 같은 발칙한 작가들을 만나는 것이 반갑게 느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마네의 다른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관람객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걸어야 했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한 관객들이 자꾸 우산으로 그림을 훼손하려 했기 때문이랬던가. 그리고 아마 이윤성의 전시회에도 이처럼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의 지평을 개척하고 넓힌 것은 얌전한 모범생들이 아닌 짖궂은 악동들이었다. 거듭된 자기검열과 과도한 PC의 시대에 이윤성의 작품들은 이렇게 말하는듯 하다. 이게 불편해? 그럼 병원에 가, 미술관에 기웃거리지 말고.

좌: 이윤성의 라오콘                        우: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 

댓글 3개:

  1.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도 가식과 위선을 벗어던지고 잠깐만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악동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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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술은 반골이 핵심인데
    반골도 주류가 되면
    거기에 대한 반골이 생기네요
    정반합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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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풀밭위의 점심식사 특히 religious painting에나 맞는 거대한 캔버스에 (당시 기준에 맞는) 아름다운 몸매로 표현되지 않은 헐벗은 여자가 관람자의 눈을 피하지 않고 너는 뭐냐는 식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서 더욱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합니다. 고상한척 하는 너는 도대체 뭐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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