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박근혜의 하야나 탄핵에 반대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탄핵 절차와 새 선거 시점을 고려하면 기존의 대선 일정과 불과 7,8개월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 자리를 비워두는 비용에 비해 실익이 작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당시 박근혜의 탄핵 사유로 제시된 비리들이 전임자들에 비해 무엇이 더 심각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링크)
그리고 같은 기준으로 나는 윤석열은 탄핵되어야 할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독선적 행동으로 고립을 자초해서 정치적 뇌사상태에 빠진 정치 초보가 그 돌파구로 계엄을 선택한 어처구니없는 일은 87년 헌법 이후 최초이자 최악의 사고였고, 이런 선택을 한 그의 사고력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임기가 2년 반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탄핵이라는 결정은 불가피하다. 더욱이 계엄보다 훨씬 경미한 사유로 탄핵소추된 노무현의 탄핵에 9명 중 3명이나 찬성한 사실과, 전임자는 물론이고 후임자도 저지른 흔한 비리를 사유로 탄핵당한 박근혜의 전례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반대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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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수 유권자들은 물론이고 일부 중도층이 계엄을 비난하면서도 탄핵에 쉽사리 찬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이후에 벌어질 정치적 후폭풍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입법부를 장악해서 깽판만 쳐 온 야당 대표가 이제는 전방위적 행정 권력까지 차지하게 될 때 벌어질 일들에 대해 심지어 일부 민주당 지지층까지 우려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의 탄핵 이후 되려 여당의 지지율이 오르는 일이나, 야당 대권주자들에 대한 지지율이 오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보수 유권자들의 과표집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8년 전 탄핵 사건과 비교해서 여론의 추이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은 민심에는 정신 나간 대통령에 대한 혐오 못지 않게, 총 18번이나 탄핵 소추안을 올린 야당에 대한 불만도 함께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탄핵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다 모조리 실패한 한 얼뜨기가 자유 민주주의 시스템이 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그 시스템을 강제로 셧다운 시켰는데 그를 탄핵시키지 않고 놔둔다면 이는 현대 정치사에 아주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일이다. 나는 결코 그를 용인할 수 없다. 각 유권자들의 가치관과 지향점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에겐 공유하는 가치가 있지 않은가.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그 시스템을 공격하는 이들은 누구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반드시. 설령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이 이토록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면, 중요한 순간마다 그릇된 판단을 거듭한 윤석열이야말로 그 과업을 수행하기에 매우 부적절한 인물 아닌가. 가망이 없던 부산 엑스포가 박빙이라고 믿었던 것이나, 얻을 것도 없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 김태우를 사면한 뒤 내보낸 것, 별 목적 없이 대기업 총수들 보고 헤처모여를 시킨 일, 선거 앞두고 뜬금없이 공매도를 금지하고 비상식적 규모의 의대 정원을 증원한 것을 떠올려 보라. 어떤 장군이 군사작전을 이따위로 펼쳤다면 그의 군대는 벌써 전멸했을 것이다. 심지어 극우적 시각으로 보아도 그는 너무나 무능하다. 하필 그 시점에 계엄을 꺼낸 윤석열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이재명을 되살려내 걷게 해준 예수나 다름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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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왜 계엄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평생 오로지 검사로만 살아온 배경이 그의 이런 이 결정을 다소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검사는 일반적인 직역에 비해 피드백을 잘 받지 않는 직업이다. 이는 사회생활에서 모든 갑을 관계에서 발생하는데 갑에게 제대로 된 피드백을 전달할 을은 거의 없고, 또 이를 받아들여 개선할 압박을 느끼는 갑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율권을 보장해서 독립적으로 일하는 시스템은 이런 독불장군들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잘 모르는 사안도 잘 안다고 착각하는데 평생 그 부푼 자의식을 고쳐줄 사람도 거의 만나지 못한다. 우리 트레이더들도 정확하게 똑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단점들을 잘 알고 있다. 나부터가 이 블로그에 온갖 주제로 글을 쓰지 않는가. 하지만 적어도 트레이더들은 다른 회사들과, 또 외국의 금융기관들과 경쟁하며 실적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그나마 강제로 자기 주제를 주입당한다. 하지만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 조직은 그럴 기회조차 없다. 오만한 트레이더가 심각한 오판을 내리면 대부분의 피해는 그 자신이 보지만, 오만한 검사가 심각한 오판을 내리면 대부분의 피해는 다른 누군가가 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만능 인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자신들이 현대미술의 정의와 분류까지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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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정부의 인사권을 가지게 되면 이 검사 만능주의에 대한 괴상한 믿음이 전체 조직을 장악하게 된다. 검사에게 금융감독을 맡기고, 토목과 건설을 맡기고, 공정거래를 맡기고, 통일정책을 맡기고, 첩보와 보안을 맡기고, 국민의 권익과 인권을 맡기고, 공공기관 감사를 맡기고, 방송통신도 관여하고, 국민연금에도 가고. 또 이 모든 인사검증을 한 늙은 검사와 어린 검사가 했다. 그리고 남는 자리에는 기재부 출신들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기재부 출신들이 과학기술도 하고, 환경부도 가고, 금융위도 가고, 보건복지부도 가고, 국민연금도 가고, 농업도 하고, 해수부에도 가고, 통계도 하고, 관세도 하고, 조달도 하고, 문화체육도 하고, 공공기관 감사들로도 가고, 원내대표도 하고, 심지어 친정을 감사하는 기획재정위원도 했다. 조직관리 학자들은 하버드 출신들을 가지고도 이런 식으로 조직을 구성하면 실패하는데(
링크) 고작 아시아 변방의 국립대 출신들이 자기네들이 천하제일이라며 국정을 이렇게 운영했으니 그들이 추진하는 개혁과제들이 성공할 리가 있나. 쌍팔년도 서울대 문리대에서 진로를 정하듯 사시 성적과 행시 성적대로 인사를 했고, 그들은 21세기에 쌍팔년도에나 통하던 정책을 펴다 망했다. 이 정부가 추진하다 실패한 모든 개혁과제들은 전부 검사나 행시 관료들의 작품이지 않았나.
임기 후반에 들어서며 총선에서까지 참패하자 이대로 無업적 대통령으로 남을 자신의 미래를 보며 그는 초조함이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모든 개혁이 실패할 수가 있지, 아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세상에 서울법대 나와 검사한 나보다 어떻게 저 범죄자 새끼의 지지율이 더 높을 수 있지. 거기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 나와 내 사람들이 국정운영을 무능하게 하고 있구나. 둘, 나는 옳은데 누군가가 우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있구나. 서울대 나와 고시까지 붙은 나와 내 똘마니들이 무능할 리가 결코 없기에 자연스레 답은 2번이 된다. 이 반 국가세력들이 환율을 올리고, 주식을 떨구고, 집값도 올리고, 양극화도 벌리고, 그래서 내 지지율도 떨구는 것이다. 거기에 관료들의 나쁜 버릇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관 출신들이 공적인 자리에 가면 그 직위에 딸린 권력을 자신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모시는 날이라든지, 수행의전이라든지. 관료들의 후진 조직문화가 오래 이어지는 것은 권력을 자신의 권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행사한 인사권이나 행정명령에 여론이 반발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늘 아침으로 된장찌개를 먹는 것이 오로지 나의 권리이듯, 오로지 내 입맛대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니까. 그래서 여론을 무시한다. 유권자들이 반발할수록 대통령과 그 측근 관료들은 그들을 가상의 적인 "반국가 세력"으로 묶어 무시한다. 그들은 내가 아침에 된장찌개를 먹을 정당한 권한을 억압하는 아주 나쁜 놈들이다. 놀랍게도 관료들의 세계관은 그렇게 돌아간다.
최종적으로 그가 계엄이란 선택지까지 이르게 된 것은 특수부 출신이라는 배경도 일조했을 것이다. 주로 정치인이나 대기업 오너 등, 권력자들을 수사하라는 매우 어려운 임무를 받은 특수부는 법의 테두리를 모범생처럼 지켜가면서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넘는 법을 배웠다. 수사 과정이나 절차에 대해, 혹은 그들이 적용한 법리에 대해 여러 의문이 제기됐지만, 특수부가 밝혀낸 사안들이 워낙 엄중하고 심각했기 때문에, 또 그들은 절대권력의 부패를 견제할 몇 안 되는 장치였기 때문에 여론은 특수부의 탈선을 눈감아주곤 했다. 이것이 반복적으로 겪은 검사들은 결과가 정당하다면 절차의 흠결은 용서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대통령은 국회를 멈추고 자기와 관료 똘마니들이 밀어붙이려 했던 정책들을 시행하면 대단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진심으로 믿었을 것이고 그러면 국민들이 용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계엄조차 똑바로 못하는 대통령의 정책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망상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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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대단한 실수도 아니었습니다. 가볍게 야단치고 끝날 일이었죠. 근데, 그 친구 분위기가 이상한 거예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아닐 수도 있어요. 내 착오일 수도 있는 거죠. 근데, 조직이란 게 뭡니까.....오야가 누군가에게 실수했다고 하면, 실수한 일이 없어도 실수한 사람은 나와야 하는 거죠. 간단하게 끝날 일인데, 그 친구 손목 하나가 날아갔어요. 잘나가던 한 친구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났습니다."
이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이 철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시나브로 지워졌지만 그의 첫 국정운영 방향은 이권 카르텔의 혁파로부터 출발했다. 그래서 그는 민간의 분야를 하나하나 조지기 시작한다. 교육부터 시작했다. 대통령께서 개혁을 명하셨으니 잘못한 일이 없어도 잘못한 사람은 나와야 한다. 그래서 사교육 카르텔이 등장한다. 그리고 검찰과 국세청을 동원해서 조진다. 그렇게 개혁은 완료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교육시스템과 수능이 뭐가 개선되었나. 다음은 과학기술계의 차례다. R&D 예산을 줄이자 과학계가 반발한다. 나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카르텔이다, 반국가 세력이다. 과기부와 교육부를 동원해서 R&D 카르텔을 적발해서 조진다. 다음은 은행들의 차례다. 기준금리가 올라갔다고 대출금리를 올려 돈을 버는 것은 카르텔이다, 이건 갑질이다, 소상공인 보고 종노릇을 시키는 것이다. 각하께서 노하셨다. 자, 이제 은행을 조진다. 검사와 금감원을 동원해 은행들의 팔을 꺾고 비틀며 관치금융의 진수를 보여준다. 뜬금없이 지방은행 하나를 시중은행으로 격상도 시켜준다. 이야. 각하께서 금융 카르텔도 해결하셨도다. 자, 다음은 의료 카르텔이다. 선거도 있고 하니 인상적인 숫자로 나도 표 좀 빨아보자. 하지만 반발이 강하다. 지지율이 오르기는커녕 빠지고 있다. 포퓰리즘 하나도 똑바로 못하는 우리 검사 대통령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필수의료 인력을 조지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미용시장으로 빠진다. 허.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내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적폐고 카르텔이고 반국가 세력이기 때문이다. 하. 이것들을 반드시 조져야 하는데. 계엄령 포고문 5항 전공의 처단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대든 의료인들에게 조직을 관리하는 오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나한테 반대하면 반국가 세력이라는 그 사고의 이면에는 내가 곧 국가라는 오만함이 가득 차 있다. 그러니 내 반대편에 앉은 과학기술계, 은행들, 금융시장, 교육계, 의사들의 이야기 따윈 들을 필요가 없다. 대화도 하지 않는다. 내가 곧 국가고 내 맘대로 하라고 대통령선거도 이겼는데 뭐. 선거에서 0.7%로 간신히 이긴 주제에 17세기 태양왕에 빙의한 이 오만한 대통령은 지금도 자신의 처지가 개혁을 추진하다 암살당한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와도 같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보수층들은 윤석열 탄핵안이 기각되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저렇게 믿는 사람이 다시 대통령 자리로 돌아온다면 어떤 짓을 벌이겠는가. 그는 반성하고 얌전히 있을 사람이 결코 아니다. 만약 기각된다면 그것이 보수 종말의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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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통령이 믿는 부정선거의 가능성도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여러 증거 중에서 일부는 대법원에서 해명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언뜻 보면 납득되지 않는 현상들이 많다. 하지만 그 이유는 우리가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전체 사실관계를 파악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전국적으로 수천만 표를 두고 조작하면서 걸리지 않으려면 그 계획은 매우 치밀해야 하는데, 이제까지 선관위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저런 조직력과 저런 일 처리로는 부정선거를 할 능력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음모론을 믿는 모든 유권자들을 무시해야 할까.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동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음모론 믿고, 어떤 사람들은 광우병을 믿었다. 음모론에 빠지지 않는 합리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코로나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한 만 65세 뇌과학자 유 씨(경제학 전공)께서는 미국이 달에 간 적이 없고 천안함 음모론을 믿는 것까지 모두 합리적 의심이라고 하시지 않았나(
링크). 나의 음모론은 합리적 의심이고 너희의 음모론은 무지몽매한 소리이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이다. 어떤 테마주가 버블이라는 주장과, 그 테마주의 거래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다른 주장이다. 우리가 모든 음모론을 검증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나라의 수장이, 설령 그가 미쳤을지언정, 계엄의 사유로 부정선거를 들었다면 우리는 그 주장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엄격한 검증에 나서야 한다. 그 목소리를 억압할 권리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없다. 참고로 세월호 사건은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적은데도 약 9번에 걸쳐 진상조사에 나섰다.
우리나라 정치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은 오로지 나만 맞고 너희들은 모두 다 틀렸다는 광신적 믿음 때문이다. 계엄을 지지하는 사람도, 열여덟 번의 탄핵을 지지하는 사람도 모두 정상이 아니다. 좌파도 우파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우리 모두 다 그렇다. 예전에 박사모들과 문빠들이 매우 닮은 집단이라고 주장했는데(
링크), 저 둘을 비난하는 다른 빠돌이/빠순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정치적 심정지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상대의 생각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계엄이 맞았을 수도 있겠지, 친북친중 세력의 공작을 막기 위해서. 어쩌면 이재명이 사람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우리 모두는 이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단지 그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상대는 나라를 망치는 주적이므로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오로지 이것 밖에 없다는 그 편협한 생각이 모이고 쌓여 오늘 날의 비극을 낳은 것이다. 나 부터가 그러지 않았을까,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