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8.

창용상회 사장의 철없는 푸념

한 전통시장이 있다. 이름하여 대한시장. 한때는 크게 번창하기도 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지만 이제는 시설도 낡았고 가게들도 트렌드에 뒤떨어져서 점차 활력을 잃어가는, 뭐 그저 그런 여느 전통시장 중 하나인 곳이다. 이 전통시장에 새로운 가게를 내려면 먼저 상인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컨셉의 가게가 시장 분위기에 어울리는지, 요 상품들이 여 대한시장에서 팔리는게 적절한지 일일이 검사를 받고 허가를 받아야 장사를 할 수 있다. 아따 그거시 우리 대한상회의 전통이랑께? 죠오기 도심에서 잘 나간다는 유명 프랜차이점도, TV에도 나왔던 유명 쉐프들이나 인플루언서들도 한 번씩은 대한시장의 명성을 듣고 가게를 내려고 했지만 상인회의 까다로운 허가를 받지 못해 계획을 접어야 했다. 거 뭐라카노, 로마 오면 로마법 따르라 카더라.

게다가 대한시장에는 아름다운 전통도 내려온다. 잘 팔리는 가게들이 파리 날리는 가게들의 관리비와 월세를 모두 대신 내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낮에 반짝 열고 잠깐 앉아있다 집에 가는 베짱이 가게들이 늘어하긴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혼자 잘 되는 게 어딨어유, 다 같이 먹고 사는 게 중요하쥬. 그들의 월세까지 버느라 잘 되는 가게의 사장들은 더더욱 열심히 일하느라 골병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어찌저찌 대한시장은 안 망하고 잘 돌아가고 있다. 아니,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이 모든게 상인회가 상가들을 잘 지도편달하고 관리한 덕 아니겠는가. 그 보답으로 각 상인회들은 회비를 걷어다가 상인회에 갖다 바친다. 상인회의 임직원들을 직원으로 고용하기도 하고, 여름휴가도 보내주고 경조사도 챙기고 장사 말고도 할 것이 참 많다. 아 이게 다 우리 시장 잘 되라고 애쓰는 분들 아니던가요잉.

그렇게 잘 지내는 줄 알았던 대한시장의 요새 분위기가 이상하다. 어쩐지 옛날보다 빈 가게도 많이 보이고 시장을 찾는 손님들도 좀 줄어든 것 같다. 매출도 줄었다. 경기가 어려워 그렇겠지, 해보지만 시내 백화점과 쇼핑몰은 불황이 없단 말도 들린다. 상인들끼리도 뭔가 낌새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저기 골목에 있던 이가네 있쥬? 여기 월세가 비싸다구 시내로 나가부렀다유." "아랫목에서 가게 크게 하던 김 씨는, 여기서는 장사해먹기 힘들다꼬 문 닫아부렀다 카더라." 이대로는 안된다. 상인회는 팔을 걷어부쳤다. 그래그래, 우리가 통 크게 양보해서 신토불이 말구 요새 아들이 좋아하는 깔쌈한 카페도 허가하고! 주차장도 늘리고! 대청소도 하자카이! 다시금 대한상회의 부흥을 꿈꾸며 대대적 캠페인을 일으킨다. 자자 거 김씨. 내가 다 해결해줄라니께 자네는 내가 시키는 대루만 허랑게?” 하지만 나훈아 메들리로 가득 찬 CD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빛바랜 새마을운동 모자를 쓰고 갑질하는 상인회가 이 재래시장을 뒤바꿀 수 있을 리 없다. 상인회장은 계속 화만 낸다. "아니 시방 우리는 런던 베이글인가 뭔가 그 거시기를 못 해부는 거여??" 

상품이 거지 같으면 장사가 안 되고 음식이 맛이 없으면 손님이 끊기는 것처럼 경쟁력을 잃어가는 재래시장에도 한파가 찾아온다. 대한상회도 예외는 아니다. 듣자 하니 대한상회 상품권이 신세계 백화점 상품권의 반값에 팔린다는 흉흉한 소문도 돈다. 하. 잘나가던 우리 시장이 어쩌다 이 꼬라지가 됐는지 상인회 간부 중 하나인 창용상회 사장님이 한 말씀하신댄다. 야야 있어봐라, 가가 그래도 서울대까지 나온 우리 동네 최고 천재라 안카나? 연단에 오른 창용상회 사장이 이렇게 말했다. "그거시 그 뭐다냐 요새 아들이 쿨허다구 저기 읍내 쇼핑몰 가브러고 시내 백화점만 들락날락 허니께, 그러니께 우리 시장이 망한 거 아니여??" 상인회 간부들이 옳소를 연발하며 박수를 친다. 환호하는 사람들 앞에 기분이 한껏 들뜬 창용상회 사장의 핸드폰에는 그 집 아들들이 시내의 백화점에서 긁어 대는 신용카드의 결제 문자들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다. 
 
한국의 관치금융과 자본제도가 후져서가 아니라 외국시장이 쿨해보여서 환율이 오른다는 쿨병 창용상회 사장


2025. 12. 7.

진보는 갑자기 왜 토착왜구가 되었나

지난 며칠간 소년범 출신 배우를 옹호하는 진보 평론가들의 글을 보면, 그들의 논리가 일본 극우의 사고 구조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극우들은 과거 전범행위들이 모두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모두 처벌받았으니, 해당 사건은 이미 끝난 과거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이미 여러 차례의 사과와 보상으로 과거사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었으니, 그 시대의 범법자들이 아닌 현대의 일본인들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과거사를 되묻는 이들을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피해자들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부로 격하되어 어느덧 삭제된다. 

신기한 것은 그런 관점을 그 누구보다도 혹독하게 비난하던 진보진영이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일본 극우들의 관점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에서 대상을 일제로 바꾸어 보자. "과거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라가 국제연합의 주요 국가로 자리 잡은 것은 오히려 칭찬해야 할 일 아닌가.", "한번 전쟁범죄를 일으킨 나라는 영원히 전범국가로 살아야 하나", "이미 과거사 배상과 처벌은 다 끝났는데 이를 계속 언급하는 의도가 뭔가" 욱일기를 머리에 두르고 혐한 시위에 나선 일본의 극우들이 박수 치고 환호할 논리가 펼쳐진다. 놀랍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진보가 이와 같은 극적인 사고의 전환을 이룬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쟤, 우리 편이잖아. 초딩같은 진영논리에 따라 하루는 말이 사슴이 되고 다음 날은 사슴이 말이 되는 고무줄 논리를 펴면서도 도덕적 선민의식이 그윽한 그들의 태도란 참으로 보기 흉하다. 자신의 위선과 가식을 온갖 현학적 용어와 유려한 문체로 치장하는 것은 구차하고 추하게 보일 뿐이다. 보수 역시 진영논리에 따라 같은 편이면 계엄도 옹호하는 머저리들인데도 불구하고 내로남불이라는 단어가 유독 진보를 상징하게 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하다못해 이제는 자신들이 극렬하게 비난하던 일본 극우들의 뇌구조까지 빌려와서 침튀기며 아군 지원사격에 나선 영포티들과 쉰세대들의 태도가 괴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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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예인들에게 정치인들보다 더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대중사회의 정서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술계가 진보적 성향을 띠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예술은 원래 그런 것이다. 가슴이 차갑고 뇌가 뜨거우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많은 작가나 배우, 감독 화가들 중에서는 훨씬 더 큰 결함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 폭행, 마약, 도박, 더 나아가 싸이코패스나 살인자, 사디스트, 아동 성착취, 인종차별주의자, 여성 혐오, 파시스트 등 개인적으로 상종하고 싶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창작물이 모두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이 배우 또한 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그가 영영 은퇴하는 대신 이제 정의의 용사 코스프레를 그만두고 과거의 피해자들에게 뉘우친 뒤에 계속해서 활동하며 소년범들을 갱생하는데 좋은 롤모델이 되는 것이 우리 사회를 위해 더 나은 길이라고 믿는다. 나는 진심으로 미래에 그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보다 더 사소한 잘못으로 커리어가 박살 난 수많은 연예인들도 함께.

하지만 자기와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아주 티끝만 한 잘못에도 린치를 가하고 축출하고 선거날 특정 색이 들어간 옷만 입어도 우르르 달려가 멍석말이를 할 때는 같이 낄낄거리며 웃던 인간들이 이번엔 자기편이랍시고 갑자기 정색하며 차가운 이성을 되찾는 진보 인사들의 모습이 참 싫다. 그 내로남불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만들었는지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 보라. 예술계에는 박근혜의 블랙리스트만이 있던 것이 아니다. 진보 홍위병들의 린치는 그보다 더 폭력적이었고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는 피해자 중심적 사고를 하라더니, 어라? 이번엔 우리 편이다 사격중지를 외치며 어느새 피해자는 안중에도 없이 슬그머니 빼버리는 그 이중잣대가 싫다. 그런 주제에 틈만 나면 남들을 가르치려고 드는 그들의 선민의식과 위선이 진심으로 싫을 뿐이다. 으웩.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리는 내로남불이 아니라 보편타당하다 믿는 이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너 혹시 토착왜구니?

2025. 12. 6.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V) - 인플레이션, 그리고 1965년 12월 5일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 (링크)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 (링크)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I) (링크)


반세기 전, FOMC를 앞두고 연방준비제도 의장이었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주니어가 동료들을 설득해 금리 인상을 내부적으로 결정한 며칠 뒤인 1965년 12월 5일, 대통령 린든 존슨으로부터 서늘한 초대장이 날아왔다. 존슨은 마틴을 자신의 텍사스 목장으로 불러 처음에는 환대와 미소로 맞이했지만, 목장 내 저택의 깊숙한 곳에 이르자 그의 태도는 돌변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존슨은 마틴을 벽에 몰아붙이며 격렬하게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내 병사들이 베트남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내가 필요한 돈을 찍어주지 않는다”라고 얼굴 바로 앞에 대고 외쳤다. 마틴이 간간이 중앙은행의 책무를 상기시키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존슨의 분노를 더 키웠다. 존슨은 욕설을 섞어가며 마틴을 인격적으로 몰아붙였고, 그의 격앙된 고함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키가 190cm가 넘는 대통령이 왜소한 연준 의장을 벽에 밀어붙이며 위협하던 장면은 당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해 연준은 이미 결정한 대로 금리 인상을 발표했지만 다음 해부터 통화정책은 눈에 띄게 완화 기조로 돌아섰고 1967년 5월에는 50bp 인하와 함께 기준금리가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 인플레이션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후임 의장이었던 아서 번즈가 진정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의 실패가 이미 마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어쩌면 마틴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영예로워야 할 은퇴 만찬에서 이 노쇠한 중앙은행가는 잠시 침묵을 머금은 뒤 “I've failed”이라는 문장으로 말문을 열었다고 했으니. 

후임자 아서 번즈는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전미경제연구소를 거친 그는 자타공인 경제 전문가였으며, 과거 선거에서 닉슨의 패배가 지나치게 긴축적인 통화정책 때문이었다고 대통령에게 직언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금리 인하를 바랐던 닉슨이 연준 의장 자리에 앉힌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운전대를 잡은 이 신참 중앙은행장은 자신의 책상에 놓은 여러 경제지표를 보자 지금은 금리인하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행정부는 그가 소신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이 샌님 경제학자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철학을 이러쿵 저러쿵 설교를 늘어놓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재무장관과 백악관의 보좌관들은 아주 집요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아서 번즈에게 압력과 협박을 가했고 결국 연준은 이에 굴해 금리를 크게 내렸다. 그 결과 과열된 경제는 더욱 달아올랐고, 닉슨은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것은 폭발적으로 불어난 통화량과 거센 인플레이션의 파고였다. 그 선택이 어떤 시대를 열어젖혔는지는 오늘의 역사적 평가가 분명히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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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옆에 선 연준의장 파월, 그리고 린든 존슨과 악수하는 연준의장 마틴  


1970년대의 기록적 인플레이션은 두 차례의 오일 쇼크와 여러 전쟁 같은 인상적인 사건들에 가려 마치 피할 수 없었던 우발적 비극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은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정치적 압력에 오염된 통화정책이 폭발적인 통화 팽창을 불러왔고, 파괴적 인플레이션은 그 필연의 끝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현재를 돌아보자. 지금 백악관과 연준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장면은 기이한 데자뷔를 일으키고 있다. 존슨이 마틴을 직접 텍사스 목장으로 호출한 사건과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파월을 공격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위협적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당시와 지금 사이의 닮은 점이 대통령의 190cm 장신 하나가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례마다 차이는 있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을 받을 때 이후의 인플레이션이 뚜렷하게 지속적으로 상승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50년 전 중앙은행들이 물가를 잡는 데 실패한 이유는 독립적 통화정책의 원칙을 몰랐거나 경제학적 식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틴은 전후 19년에 걸쳐 연준의 독립성을 체계화한 최장수 의장이었고, 번즈는 연준 역사상 최초의 경제학 박사 출신 의장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처절한 실패를 겪었다는 사실은,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결정적 변수는 중앙은행의 모델이나 경제학 박사들보다 백악관과 의회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는 또한 어느 한쪽 진영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연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온 민주당 역시 지난 집권기에 금리 인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유력 대선 후보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마치 당적이 달랐던 린든 존슨과 리처드 닉슨이 똑같이 연준을 몰아붙였던 것처럼. 따라서 어느 쪽이 집권하든 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고 선거를 앞둔 갈등이 극단적으로 고조된 오늘날 연준이 오롯이 중립적 데이터만을 근거로 금리를 조절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잠시 언급하지 않았나. 정치로 오염된 통화정책 뒤에 인플레이션이 따라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1970년대의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이 탄생한 1965년 12월 5일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현재 우리가 마주한 장면들은 반세기 전의 모습들과 데자뷔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맞이할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는 결국 이렇게 흘러가게 되었다. 아, 이미 헤겔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인간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고. 


2025. 10. 4.

미 통화스왑과 기재부의 오래된 그짓말

1998년 여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당시 월가의 스타였던 존 메리웨더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런 숄즈가 손잡고 세운 LTCM이라는 헤지펀드는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은 뒤 극단적인 레버리지를 활용해 최대 1조 달러 규모의 포지션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의 핵심 투자 중 하나가 바로 러시아 국채였다는 것이다. 이미 아시아 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입은 펀드는 러시아 채무 불이행으로 치명적 손실을 보고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LTCM의 포지션 규모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공포는 순식간에 미국 금융시장으로 확산되었다. 우량 회사채조차 매수자를 찾지 못해 시장이 얼어붙었고 신용경색의 조짐은 점차 뚜렷해졌다. 연준은 여러 차례 금리를 인하했지만 위기를 잠재우는 데 실패했고, 결국 주요 투자은행들을 불러들여 구제금융 참여를 압박해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연준은 신흥국 위기가 미국 금융 시스템까지 직접 위협할 수 있음을 절감했고, 이는 주로 국내 통화정책에 집중하던 연준이 EM 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한 첫 사례가 되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자, 연준은 과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겼다. 미국 금융기관들의 해외 자산 익스포저가 매우 컸기 때문에, 해외에서 달러 자금 경색이 발생하면 우량 자산의 투매가 이어지고 연쇄적인 충격으로 번질 위험이 높았다. 이에 연준은 ECB와 영란은행 등 주요 기축통화국 중앙은행과 스왑라인을 체결했고, 위기의 후반부에는 한국, 싱가포르, 브라질, 멕시코 등 신흥국 중앙은행과도 스왑라인을 열었다. 연준이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달러 유동성을 제공하는 목적과 기준은 분명했다. 첫째, 해당 국가에서 외화 자금 경색이 발생하고 있는가. 둘째, 이를 방치할 경우 미국 금융시장까지 신용경색이 확산될 위험이 있는가. 이 프로그램은 미국 내 금융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코로나19 위기가 발생하자, 연준은 기존 상설 스왑라인에 더해 9개 중앙은행과의 한시적 스왑라인을 추가로 개설했으며, 이 역시 미국계 금융기관이 글로벌 우량 자산을 무분별하게 매도하지 않도록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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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한국 정부는 이러한 통화스왑의 본질적 배경을 외면하고, 의도적으로 국내에 왜곡된 여론을 조성해왔다. 연준의 조치는 한국을 특별히 신뢰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금융 안정을 위한 조치였으며, 글로벌 달러 유동성 경색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외교적 성과로 포장하며 마치 한국이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해 쟁취한 승리인 것처럼 홍보했다. 리만 사태가 본격화하기 전, 환율주권론을 내세우던 강만수의 경제팀은 대규모 외환보유액을 이미 소진한 탓에 정작 위기가 현실화하자 대응 여력이 크게 부족했다. 당시 정부는 위기는 크지 않으며 대응 여력은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반복했지만, 여러 리서치 기관들은 한국의 외환보유고 상당 부분이 모기지 채권이나 파산 위기에 직면한 Fannie Mae·Freddie Mac 채권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제로 가용할 수 있는 외환보유액은 훨씬 적다고 지적했다. 그릇된 판단과 대응으로 신뢰를 잃고 파산 위기에 몰린 기획재정부를 구원한 것이 바로 통화스왑이었다. 이후 강만수와 경제팀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해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이것이 마치 FTA와 같은 경제외교적 성과인 양, 통화스왑을 한국 정부의 외교적 성취이자 자신의 치적으로 홍보했다. 당시 경제부 기자들 역시 해외 언론들과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정부 프레임을 그대로 확대 재생산하며 국민들에게 국가 위상이 높아졌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주입했다. 이러한 왜곡은 2020년 코로나19 위기 때도 반복되었다. 연준이 9개국과 일괄적으로 임시 스왑라인을 개설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우리의 특별한 노력으로 미국의 지원을 얻어냈다”라는 식의 홍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실제 연준의 기록이나 연준 의장들의 회고록, 혹은 국제 언론 보도에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스왑을 성사시켰다는 내용은 없었으며, 당시 연준은 동일한 조건으로 브라질·멕시코·싱가포르와 같은 신흥국들도 함께 스왑을 맺었다. 무엇보다 2008년에도 그리고 2020년에도 한국의 기재부 외 다른 나라 정부들 중 그 어느 나라도 연준과의 스왑라인을 자국의 성과로 포장해 발표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연준과의 스왑라인은 정치/외교적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재부는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성취로 포장해 대중을 기만하는 거짓말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성과 포장은 단기적으로는 조직의 위상을 높여주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국민과 정치인들에게 통화스왑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심화시켰다. 사실 이 제도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미국 금융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일 뿐인데, 한국 내부에서는 마치 경제외교적 역량에 따라 성사되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이다. 이 왜곡된 인식은 위기 때마다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과 과도한 기대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금융시장 불안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환율이 다시 1200원을 돌파하자 기재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외환보유액을 투입했지만, 이미 지나치게 낮은 수준에서 무리한 개입을 쏟아부은 탓에 환율 안정에 실패했다. 그러자 기재부는 과거와 똑같은 그짓말을 반복했다.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미국을 방문해 미 재무부 장관을 만나 “통화스왑을 논의했다”, “긍정적 대화가 있었다”와 같은 별 의미가 없는 문구를 언론 헤드라인에 올리는 데 주력한 것이다. 그러나 통화스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있었더라도 한국의 요구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미국은 물가를 잡기 위해 강도 높은 긴축을 진행 중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특정 국가에만 달러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것은 애초에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었다. 더구나 통화스왑은 연준의 권한임에도 이를 미 재무부 장관에게 요구하는 것은 연준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처사로 비칠 위험이 있었다. 하물며 당시 재무부 장관은 전직 연준 의장이던 자넷 옐런이지 않았던가. 경제전문가를 자처하던 경제관료들이 얼마나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반복하는 한국 정부를 보는 일은 괴로울 만큼 쪽팔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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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재부의 그짓말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국제 금융시장에서 미국이 과거 플라자 합의처럼 달러 약세 정책을 선호할 것이라는 기대가 제기되자, 기재부는 이를 외환보유액을 소진하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 단계에서 미국 내부 일부 논의가 있었던 정황은 보인다. 그러나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나 백악관 고위 당국자의 환율 관련 발언을 보면, 적어도 5월 이후부터는 미국 정부가 달러 약세를 정책적으로 추진할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실제로 한국 외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미국이 통화 절상을 요구한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재부는 마치 ‘플라자 합의식 환율 압박’이 존재하는 것처럼 헤드라인을 내며 시장과 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시장은 곧 이러한 언론 플레이가 근거 없는 것임을 간파했지만, 양치기 소년의 행태는 멈추지 않았다. 불과 지난 주말까지도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미국을 방문한 뒤 귀국길에서 “환율 협의를 마쳤다”라는 식의 발언을 내놓으며 어떤 기대를 부추겼지만 곧이어 공개된 합의문에는 의미 있는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기재부가 스스로 “미국 측에서 원화 절상 요구는 없었다”라고 인정하면서 자신들이 반년간 이어온 언론 플레이가 결국 값싼 기만전술에 불과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외환보유고 Flex의 원조 강만수는 한 인터뷰에서 "정부는 환율에 관해서는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세기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거짓말로 국민과 시장을 기만하는 그 그릇된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거짓말에는 대가가 따른다. 시장이 정부의 말을 믿지 않고 정책당국의 역량을 의심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무능과 부정직함을 반복적으로 드러내 왔기 때문이다. 또 연준이 함부로 통화스왑라인을 열지 않는 이유 역시 바로 이 때문이다. 과거 리만위기 때 연준이 한국에게 열어준 스왑라인이 300억 달러였는데 비해 불과 몇 년 전 정부가 개입을 시작하며 1년 반 만에 팔아버린 금액이 무려 600억 달러에 달했다. 연준이 당시 스왑라인을 열어주었다면 한국은 진작에 그 달러를 모두 끌어다 1200원대에 팔아버렸을 것이다. 그리고서도 환율이 훨씬 더 올라왔으니 그들은 스왑이 만기가 되었을때 돌려줄 상황이 아니라며 드러누웠겠지. 그뿐이겠는가, 달러 돌려줄 상황이 아니다, 근데 한도를 좀 늘려주면 안 되냐며 땡깡을 피웠을 것이다. 지금 이미 그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비상금을 평소 군것질하는데 펑펑 써버렸다 비상상황이 닥치자 손 벌리러 오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람에게 무제한으로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다. 연준은 바보가 아니다.

미국은 관세 협상의 대가로 한국에 터무니없는 금액의 백지수표를 요구했다. 한국은 연준의 스왑라인 없이는 그 금액을 충당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연준의 독립성이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인 만큼, 이번에는 연준과의 스왑라인 체결 가능성이 열려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성격을 감안하면, 그들은 반드시 추가적인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무엇이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는 다각적인 고려가 필요하며, 그 결론은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떤 촌뜨기들이 국제 금융시장의 룰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바쁜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걸복걸하며, 마치 다섯 살 아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만 되풀이하는 구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재부와 경제 관료들은 과거 주먹구구식 외환정책이 거듭된 실패를 낳았고, 특히 대외환경이 급변할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대량의 외환보유고를 허비하는 실수를 저질러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스왑라인은 한국의 외교적 성과가 아니라 비상시에 작동하는 연준의 금융시장 안정책일 뿐이며, 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억지를 부린다고 얻어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과 언론에 솔직히 알려야 한다. 그것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다. 그들은 왜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선진국 대우를 받지 못하냐며 묻지만 나는 되묻고 싶다, 온 힘을 다해 후진국스럽게 굴면서 선진국 배지가 갖고 싶다고 온종일 징징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리냐고. 


PBR이 고작 5밖에 안되는 나라를 방문해 아무 의미 없는 사진 한 방 찍고 오신 구윤철 경제부총리

2025. 7. 9.

오징어게임3: 최악의 사이코패스 성기훈

비범한 일을 겪은 사람은 결코 이전의 평범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그가 겪었던 사건이 끔찍하다면 더더욱. 이 잔혹한 생존게임에서 살아남은 성기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 게임에서 그의 친구-상우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게임을 포기하겠다는 기훈을 막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렇게 기훈은 자신의 손으로 단 한 명조차 죽이지 않았음에도 이 잔혹한 데스매치의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깨달았다.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가 분명히 부서졌음을.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는다는 도파민의 끝을 경험한 그의 뇌는 더 이상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었다. 머리를 빨간색으로 물들여 보아도, 456억이라는 돈을 아무리 써도, 아무도 없는 호텔 방에서 소총을 난사해 보아도, 심지어 가까운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그의 뒤틀린 욕구는 도통 만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광적으로 프런트맨을 찾는 일에 집착했다. 새로 피어난 사이코패스적 욕망을 자각하지 못한 그는, 그것이 오징어게임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포장했다. 하지만 기훈은 형사처럼 섬을 수색하지도, 이 끔찍한 사건을 언론이나 유튜브에 폭로하지도 않았다. 그가 간절하게 찾던 것은 바로 지원자를 모집하던 딱지맨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변태 살인마가 되어버린 기훈이 진심으로 원했던 건, 다시 그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었으니까.

오징어게임의 세계관에서는 큰돈을 내면 죽음을 구경할 수 있다. 살인 게임을 두고 내기를 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 오징어게임을 설계하고 플레이했던 오일남조차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보는 것이 하는 것보다 재미있을 수는 없다고. 수십 회의 라운드를 거치며 그가 본 모든 극적인 살인과 자극적인 죽음들을 다 합쳐도, 단 한 번의 직접 겪어보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455개의 죽음을 직접 경험한 성기훈의 내면은 과연 얼마나 비틀려 있었을까. 그리고 그 너머에는 오일남도, 프런트맨도, 딱지맨조차도 미처 도달하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쾌락이 있었다. 그것은 단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넘어, 영혼을 파괴하는 일. 누군가가 자신을 믿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쾌감은,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쾌감에 눈을 뜬 세계관 최악의 싸패 살인마가 그 두 번째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 게임에서 그는 낯선 이들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나를 믿지 않는 이들이 랜덤하게 죽는 일은 아무런 재미가 없으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자 그는 끔찍한 욕망을 분출한다. 밤에 혈투가 벌어질 것이 뻔하니 먼저 기습하자는 오영일의 제안을 극구 말린다. 그러다 X파가 이겨서 게임이 끝나면 재미없잖아. 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부터 미궁 같은 게임장의 지리도 모르고 병력도 적고 무기도 탄약도 없던 반란파가 이길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희생자들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무모한 반란을 감행한 건, 한 번 게임을 경험했다는 기훈에게 뭔가 믿을 만한 계획이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애초에 기훈의 계획은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한 번에 몰살시키는 것이었으니까.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기훈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믿음을 샀던 것 아닌가. 타다다다탕.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끔찍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미션 완료.

모든 것이 끝난 그는 의욕을 잃었다. 이제 나를 신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나를 믿고 죽어줄 사람도 없다. 아 재미없다. 나는 고작 돈이나 벌자고 이 게임에 다시 들어온 것이 아닌데. 왜 벌써 끝났지. 힘이 빠진다. 그 와중에 눈치 빠른 대호라는 자식이 내 본심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절규한다. "그때 차라리 동그라미 새끼들이랑 싸웠으면 이길 수도 있었어.  싸움도 이기고! 투표도 이기고!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말한 그 말도 안 되는 작전 때문에 다 죽은 거야! 당신이 죽인 거야!" 

아니 어떻게 알았지. 안 그래도 화가 나는데 그를 가만둘 수 없다. 누군가를 죽여야 통과할 수 있던 네 번째 게임에서 그는 다른 타겟들은 모두 버리고 오로지 대호 만을 노린다. 뭐 여기서 이겨서 456억을 더 받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징어게임 전 시즌의 모든 참가자들이 생존을 위해, 또 상금을 늘리기 위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인을 저지를 동안 기훈은 오로지 살인 그 자체를 움직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탈락해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도.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지독한 싸패 살인마였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는 결국 목적을 달성한다.

아 이제 정말 끝이다. 아무 재미가 없다. 오징어게임 밖에서도, 또 안에서도 이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여기까지다. 모든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한 그 앞에 갑자기 새로운 사건이 펼쳐진다. 한 아이가 탄생하고 여러 사람들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한다. 한 미친 노파는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제 손으로 친아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아 이거다. 이 미친 싸이코패스의 눈이 다시 희번덕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벌떡 일어나 이 아이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아 이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를 위해 스스로 죽어줄 것인가. 히히.

그래서 그는 준희에게 헛된 희망을 준다. 혹시나 그녀가 무리해서 다리를 건너다 하찮게도 고작 사고로 죽을까 봐 그녀를 만류한다. 끝까지 자신을 믿고 거기에 남아 있으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그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발목을 다친 준희를 데리고 돌아오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진짜 간다? 내가 간다, 갈게? 참 근데 그랬다가 나도 죽으면 애는 어떻게 하지. 응? 사실상 기훈은 준희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이 싸이코패스는 그 목적을 이룬다.

기훈: 네가 거기서 다 죽이면 재미가 없잖아

마지막 고공 오징어게임에서도 그의 천연덕스러운 싸패 짓은 계속된다. 그는 100번 참가자의 도시락 제안이 답이 아니라며 이를 매몰차게 거절한다. 그럼 한 명밖에 안 죽잖아. 어차피 누군가 최소 하나는 죽어야 나머지가 사는 이 게임에서 기훈은 아득바득 분란을 일으켜 기어코 하나 대신 다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친부인 명기와 엄마를 잃은 아이. 그것이 기훈이 기획한 엔딩이었다. 근데 이런 젠장, 엄마처럼 아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어줄 줄로만 알았던 명기가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 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 아닌가. 아니 애써 극적인 마지막까지 다 준비했더니 이 쬐그만 놈이 망쳤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가만둘 수 없다. "넌 자격이 없어" 기훈은 저 아래로 그를 밀어 떨어뜨린다. 

이제 정말 다 끝났다. 이제 죽일 사람은 모두 죽었고 나를 믿고 더 죽어줄 사람도 없다. 밖으로 나가면 기다리는 건 또다시 아무 의미 없는 하루들. 공허함이 몰려온다. 차라리 아까 죽을걸. 그런 그의 눈에 VIP들의 관람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깨닫는다, 아직 그가 배반할 믿음이 하나 더 남아있음을. 타인의 믿음을 배신하며 죽음을 가져오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던 이 뇌가 망가진 사이코패스는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믿음을 배반하기로 한다. 자신을 죽여가면서까지. 절벽 아래로 뛰어들기 전 그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는 프런트맨의 질문을 떠올리며 이렇게 답한다 "(응 그리고)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죽더라)" 


*               *               *


극적인 장치와 연출, 그리고 탄탄한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시즌 3에 대한 평가는 전반적으로 박하다. 그 이유는 많은 시청자들이 성기훈의 변화된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오징어게임을 한차례 겪었던 인물이 별다른 계획도 없이 진행요원들의 본부에 무작정 침입한다거나, 순박한 얼굴로 모두를 살리겠다고 다짐하던 성기훈이 갑자기 증오에 휩싸여 대호를 추격 끝에 죽인다는 설정은, 감정선의 연속성이 너무 부족했다. 그의 반복적인 변화와 불규칙한 선택들은 시청자에게 설득력을 주기 어려웠고, 도리어 그는 세계관 최강의 변태 사이코패스라는 설정이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인물처럼 보였다.

이렇게 모순된 주인공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황동혁 감독 본인의 모순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오징어게임이라는 세계관을 통해 경쟁적 자본주의의 잔혹함과 비인간성을 비판적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미국 테크회사의 막대한 자본 덕분이었다. 황 감독은 10여 년 전부터 오징어게임의 시나리오를 구상했지만, 국내의 협소한 펀딩 환경에서는 이질적인 내용을 다룬 작품에 선뜻 투자할 이가 없었다. 결국 그 모험을 감수한 것은 자금력이 막강한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였다. 그리고 시즌 1은 성공했다. 오징어게임은 전 세계 수많은 경쟁작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며, 황 감독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마치 게임의 최종 우승자가 모든 것을 거머쥐듯이. 이제 그는 후속 시즌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도 원래 하나였던 이야기를 두 시즌으로 쪼개는 방식으로. 황 감독 본인도 인터뷰에서 인정했듯이, 그 동기는 다름 아닌 돈이었다.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했던 감독은 다시 기훈을 게임으로 밀어 넣었지만, 그의 페르소나가 반영된 주인공은 그 작품 안에서 이상주의를 호소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성기훈이라는 인물은 갈라지고 어그러진다. 자본을 비판하려는 이상과 자본을 좇는 욕망 사이에서

결국 성기훈의 혼란스러운 변화는 단지 캐릭터의 붕괴가 아니라, 창작자인 황동혁 감독 스스로가 겪고 있는 자기기만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자본을 비판하며 만들어진 이 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의 힘으로 탄생했고,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 역시 그 모순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시즌 3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오징어게임은 작품 자체로는 어색하고 파편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작품 밖 현실과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창작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파열음을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제 현실에서 VIP에 더 가까워진 이 글로벌 스타 감독은, 억지로 사회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참가자들에게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려 애쓰며, 그 간극을 지적하는 대중의 비판을 오히려 사회 탓으로 돌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그가 만들어낸 세계와 자신이 택한 현실 사이의 모순과 균열이 다음 작품에서는 과연 어떻게 정당화될지, 또 감독은 어떤 변명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2025. 7. 2.

문제는 공급이야, 멍청아 (It's gong-gub, stupid)

한국의 부동산이 저평가되어 있다고 분석한 것이 10년 전의 일이다(링크). 그리고 진보 정부가 각종 세금과 규제로 공급을 막아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불과 5년 전의 일이다(링크). 그리고 이후 서울의 평균 아파트 매매가격은 5년 마다 두 배씩 뛰어올라 이제는 10억을 훌쩍 넘어간 지 오래다. 올해 들어 다시금 부동산 가격은 무섭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정부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강력한 대출 규제를 들이밀었다. 자, 규제는 하늘로 치솟은 집값을 끌어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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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인류가 마실 식수가 가까운 미래에 크게 오염될 위험이 크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장 미래에 자신들이 마실 물을 사재기할 것이다. 당장 오늘의 물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 물의 공급이 끊길지 모르기에 모두들 비싼 값에 물을 사서 저장하기 시작한다. 패닉바잉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을 모두 물을 사 모으는데 쓸 뿐 아니라, 대출까지 내서 물뿐 아니라 대형 물통과 저장탱크를 사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TV에서 갑자기 몇몇 저수지의 물이 마시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더욱 패닉 할 것이다. 사람들을 다른 소비와 투자를 줄이더라도 더 많은 물을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병당 300원밖에 하지 않던 생수의 가격은 열 배로 크게 뛰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래의 소득을 영끌 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생수를 확보하려고 들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생수부 장관 김 씨가 등장해서 아무 근거 없이 미래의 물이 부족하지 않다고 백날 우겨봤자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할 뿐이다. 그녀는 결국 비참하게 경질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전문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다리 짧고 관종기 가득한 인간이 장관으로 와서 손놓고 놀다 정작 식수가 부족하기 시작하니 재빨리 사퇴하고 도망가고 말았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점점 짙어진다. 거기에 뜬금없이 금융당국이 등장한다. "아, 미래 식수가 모자랄지 말지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물값이 폭등한 것은 투기적 수요 때문이야"라며 국민들이 당장 마시지 않을 물을 미리 사들일 경우 페널티를 주기로 했다. 뒤이어 징벌적 물 보유세가 등장했다. 금융권에서 인기 있던 물 담보대출을 금지하기로 했다. 얼굴에 기름기 낀 장차관들이 대국민 담화에서 근엄한 얼굴로 미래의 소득을 끌어당겨 과도하게 물을 사들이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라며 일침을 가한다. 올바른 거시건전성을 위해 이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훈시를 늘어놓는다. 그런데 얼마 못가 고위 공직자들이 뒤로 수백 톤의 물을 쟁여놓고 있었다는 폭로가 등장한다. 정부 예산으로 세종시 생수 특공이라는 혜택이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에 그들은 자신들이 쟁여 놓은 물은 실수요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리고서 되려 눈을 부라리며 요새 애들이 물을 너무 많이 쓴다, 오염됐다는 그 물 마셔도 안 죽는다 그냥 마셔라, 라며 국민 탓을 한다. 그렇게 언론이 시끌벅적하게 난리를 피우지만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각종 대출을 막은 탓에 미래가 창창한 사회 초년생들만 미래에 마실 물을 확보하지 못해 불안할 뿐이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과도하게 오른 물값을 낮추는 가장 올바른 정책은 앞으로도 식수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를 주는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주택시장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에 양질의 신축 아파트가 부족해 가격이 치솟는 상황이라면, 이를 안정시키는 유일한 해법은 공급을 늘리는 것이다. 그 외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결국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예고했던 대로 공급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고, 이제는 일반 수요자들조차도 주택 공급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의견이 갈리는 지점은 이 공급 부족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판단, 그 차이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서울시 아파트의 공급 부족은 이제 극단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서울시 주택 인허가 수

왜 서울시의 공급은 막혀버렸을까. 일반적인 시장 환경에서는 공급이 막힐 이유가 없다. 모두가 살고 싶어 한다는 강남의 신축 아파트 가격은 이제 평당 1억 5천만 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아파트 공사비는 아무리 고급 사양으로 지어도 평당 1천만 원을 겨우 넘기는 수준에 불과하다. 용적률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구축 단지도 많기 때문에, 재건축이나 재개발은 일단 추진만 해도 조합이 수백억 원을 벌 수 있는 수익성 높은 사업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각종 인허가권을 무기로 그 수익을 적극적으로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초과이익이 생기면 환수하고, 기부채납을 요구하고,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수많은 규제를 덧붙인다. 분양가는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하고, 공공시설도 함께 지으라고 한다. 심지어 정부가 세금으로 책임져야 할 취약계층의 주거 복지까지 조합에 떠넘기며, 너희 돈으로 지어서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다. 국토부와 서울시는 공사비 상승이 공급 부진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강남 신축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에 비하면 건축비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규제와 기부채납으로 뜯기는 금액이 건축비보다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이런 공급 절벽에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규제를 바꾸거나 완화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의 권력은 이 인허가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장경제가 수요공급을 이끌면 우리 관료들은 뭘 먹고살겠는가, 누가 우리의 눈치를 보겠는가. 그래서 규제는 늘어나기만 할 뿐,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 문제를 규제완화 대신 완전히 빈 땅에 정부가 대규모 신축을 지어 해결했다. 수많은 신도시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이제 이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먼저 이제는 서울시 요지에 빈 대규모 택지가 거의 없고, 과거처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지 않아 새로 만든 신도시에 인프라를 구축하기 어려울뿐더러, 무엇보다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커지면서, 경기도 외곽에 살며 출퇴근에 수 시간을 들이는 비용이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의 한국을 발전시킨 관 주도의 성장 공식이 21세기에 먹히지 않는 것처럼 과거의 주거난 해소법이 21세기에 더 이상 먹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자신들의 실책을 인정할 생각이 없다."서울에 신축 아파트가 없으면 빌라에 살면 되지 않나?"라고 말하지만, 정작 빌라 공급도 줄어들고 있다. "경기도 외곽엔 빈 아파트가 많다"고 하지만, 그 말은 인생에서 총 5년을 통째로 빨간 버스 안에서 보내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역세권 재건축을 장려하겠다"고는 하지만, 세대당 수억 원씩 정부에 바치라는 조건이 붙는다. 이처럼 현실과 괴리된 방안들만 쏟아내는 사이, 주택시장의 수급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시장이 자신들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정부는, 급기야 망가진 공급에 맞춰 수요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야 인마, 침대가 너무 짧으면 손님의 다리를 자르면 되는 거 아니냐 이 말이야." 이번에 발표된 6.27 부동산 대책은 정부가 지난 10년 동안 발표했던 수많은 수요 억제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어벙한 정치인들이 설계한 수많은 대책이 그랬듯이, 그리고 윤석열 정권에서 무능한 관료들이 내놓은 수많은 대책이 그랬듯이, 그들은 또다시 당신들의 다리를 슥삭슥삭 자르러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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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책은 대통령실이 아닌 금융위원회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부동산 시장이 아니라 늘어나는 가계부채를 억제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하지만 최근 늘어난 가계부채의 대부분은 부동산과 연관되어 있고, 가계가 무리해서 집을 사는 이유는 미래의 공급이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 그건 내 소관이 아니고, 난 가계부채만 때려잡으면 돼"라고 주장하는 금융위의 모습은 침몰하기 시작하는 배에서 도망쳐 나오는 학생들을 후드려 패며 복도에서 뛰지 말랬지! 라며 외치는 학주의 모습처럼 기괴하고 사악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말만 믿고 따랐던 순진한 학생들은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건 선장의 책임이고, 나는 교칙대로 복도에서 뛰는 애들만 처벌하면 된다"라고 말하는 선생이 있다면, 그 모습은 얼마나 혐오스럽겠는가. 앞서 든 비유처럼, 빚을 못 내게 막는다고 해서 생수 사재기를 유발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소비와 투자를 줄이면서라도 식수를 사 모을 것이다. 지난 3년간 윤석열 정부 아래서 소비와 투자가 망가진 것은 기재부나 금융위 같은 재경직 부처들이 공급 부족이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대신 가계부채의 폭증이라는 현상만 때려잡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의 정책 실패의 원인을 되려 피해자인 국민들에게 돌리는 것으로 비열하고 무책임한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발표된, 공급에 맞춰 수요자의 다리를 자르는 강도의 칼이 무척이나 날카로운 것은 사실이다. 다리가 잘린 시장은 잠시 동안은 안정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손님은 끊임없이 올 텐데, 언제까지 침대에 맞춰 국민들의 다리를 잘라댈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고 당신들 역시 이 게임을 이미 해봤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면, 네 다리부터 잘라라. 금융위를 미분양 주택이 넘쳐나는 지방으로 이전하자. 이제 필요 없을 테니 수도권의 집 팔 기회도 드리겠다. 거기에 딸려 있는 대출도 다 상환하시라. 당신의 대출도 엄연히 가계대출의 일부다. 부당하다고? 그렇다. 부당하지. 그런데 당신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짓은 왜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가계부채가 심각한데 그럼 어쩌냐고 되묻는 당신들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문제는 공급이야, 멍청아.  

2025. 6. 7.

한국 보수는 어째서 무능해졌는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에게 묻다

계엄이 없었더라도 지난 보수 정권은 재집권에 실패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경제적 성과가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숫자만 보더라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윤석열 정부 임기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을 크게 밑돌았고, 최근 4개 분기 동안은 무성장 혹은 역성장을 기록했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세계 주식지수와 비교했을 때, 코스피는 IMF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을 냈다. 환율은 무려 220원이나 급등하며, 외환시장 자유화 이후 전례 없는 불안정을 보여줬다. 이전 정부는 그 원인을 외부 변수 탓으로 돌리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윤석열 대통령 집권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지난 3년간 글로벌 경제를 흔들만한 사건들은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9.11 테러, 북한의 첫 핵실험, 혹은 리먼 브라더스 사태에 필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단 하나, 본인들이 자초한 ‘계엄’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게다가 2024년은 세계 경제가 견고한 성장세를 보였고, AI 열풍의 영향으로 글로벌 수출이 호조를 이뤘다. 한국 역시 사상 최대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지만, 그 와중에도 한국 경제 성장률과 주식시장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경제는 보수”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주리를 틀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한국 보수는 무능해졌다. 단순히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내부 대립을 중재해 정치적 해법을 도출하는 능력마저 상실했다. 이제는 전통적인 보수 지지층조차, 보수 정치인들이 더 유능하거나 탁월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김영삼과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과거 보수는 눈부신 경제 성장과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주도했던 DNA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유산은 온데간데없다. 그렇다면, 이 보수의 몰락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때마침 보수가 폭주하던 해에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들(대런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A. 로빈슨)의 주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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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국가의 경제적 성공과 번영이 인종이나 지리적 요인보다, 법과 제도 같은 사회 시스템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류 역사 전반에 걸친 방대한 사례 분석을 통해 밝혀냈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처럼 인종과 지리적 조건이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차이로 인해 경제적 성과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경제 주체들이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그 성과를 정당하게 분배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때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양한 실증 사례를 통해 강조한다. 더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일수록 경제적 번영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이들의 일관된 결론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일부 경제적으로 낙후된 국가는 오히려 강력한 독재 체제 아래서 초기 산업화를 빠르게 달성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이들은 ‘착취적 제도의 초기 효율성’이라 설명한다. 기존 사회에서 생산요소가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배분되어 있을 경우, 권위주의적 체제가 단기적으로 높은 집중력으로 자원을 재배치해 급속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대부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며 제도적 개혁과 정치적 포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장은 정체되고 사회 불안정이 증폭된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대표적 사례다. 내전 이전 러시아는 낮은 부가가치의 농업 중심 구조였으나, 공산당은 폭압적으로 자원을 중공업으로 이동시켜 단기적으로는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요소의 배분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성장을 이룬 이후에는 곧 구조적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이러한 역사는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다. 과거 군사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형식적으로 소련의 계획경제와 유사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 제국은 1930년대 대공황의 충격을 극복하고 전시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면밀히 분석했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공업 중심의 계획경제적 요소를 전략적으로 도입하여 만주국을 실험무대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만주국에서 군사 및 행정 경험을 쌓은 박정희는 이러한 국가 주도 개발 체제의 작동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자, 이러한 방식은 한국의 산업화 전략으로 이어졌고, 강력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보수가 이상화하는 과거 한국의 고도성장은 서구의 자유시장경제보다, 소련식 계획경제와 이를 기술적으로 흡수한 일제의 국가통제 시스템에서 비롯되었다.

다행히 한국은 소련이나 일제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빠른 성장 이후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를 요구했고, 미국 역시 군사독재에 제동을 걸며 민주화를 압박했다. 내외부의 압력 속에서 한국은 점진적으로 더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치 체제로 이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환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민주 정부 아래서도 여전히 정부는 권위적인 태도로 시장에 개입했으며 생산과 소비 분배를 전반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와 관료 사회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경제성장을 저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국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면서도 중앙 정부의 관료가 신축 아파트 분양가부터 수천가지 의료행위의 값을 정하고, 택시비도 정하고, 전기값도 정하고, 누구한테 돈을 빌려주고 누구는 빌려주지 말지도 정해주고, 뭐 이것도 정해주고 저것도 정해주는 경제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본질적으로 스탈린식 계획경제와 닮아 있다. 앞서 언급한 노벨 경제학 수상자들이 경고했듯, 이러한 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계에 봉착한다. 계획경제는 실시간 수요·공급 변화가 시장가격에 반영되지 않아 자원 배분이 왜곡되며, 과잉생산이나 물자 부족이 반복된다. 이는 중앙에서 복잡한 경제를 계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획경제는 유인의 결여로 인해 구조적 비효율을 초래한다. 고시공부 외에는 아무런 실무 경험이 없는 세종시 어진동의 사무관들이 가격과 생산요소의 배분을 통제하는 방식은, 현장의 성과를 과장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이는 곧 생산성 저하와 보고 체계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결국 스탈린식 계획경제는 단기적 산업화에는 일정 부분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과 기술 혁신, 복잡한 자원 배분이 요구되는 현대 경제 체제에는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다수 경제학자들의 일관된 평가다.

이런 비효율은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서울은 집이 부족해 집값이 폭등하는데도 공급은 이뤄지지 않고, 수요가 없는 지방엔 과잉 공급으로 건설사들이 파산한다. 필수 의료 분야의 공급은 줄고, 피부과는 넘쳐난다. 출퇴근 시간에 택시는 안 잡히는데, 기사들은 저임금에 시달린다. 에너지 가격이 올라 한전은 수십조의 적자를 내지만, 인스타 핫플 카페는 창문을 열고 에어컨을 튼다. 부도 위험이 높은 소상공인 대출은 권장되면서도, 담보가 충분한 부동산 대출은 막힌다. 그 차이는 결국 재정으로 메워지고 있다. 정부가 개입하는 분야마다 자원과 자본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있으며, 이는 전반적인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구소련을 무너뜨린 계획경제의 비효율이, 그 정도만 다를 뿐 지금 한국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계획경제의 비효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경제 시스템 아래에서, 민간 경제 주체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략은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지 않고, 관의 의중이 좌우한다면, 기업은 당연히 로비에 자원을 투입한다. 이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존재하는 일이지만, 계획경제에 가까울수록 관료의 힘이 더 크기에, 로비는 투자보다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기업들은 퇴직 관료에게 억대 연봉을 내밀며 임원으로 영입하고, 그렇게 들어온 그들은 충실한 로비스트가 되어 법인카드를 들고 후배 관료들을 찾아간다. 그렇게 전체주의적 경제 체제에서는 늘 카르텔이 자라난다. 독일에서는 융커들이, 일제 아래에서는 자이바쓰가, 그리고 한국에서는 관피아와 재벌이 그렇게 등장했다. 이제 많은 재벌 가문에게는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는 것보다 정부 정책을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더 효율적인 선택이 되었고, 실제로 보수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전직 관료 출신 사외이사의 비중은 증가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보수 정권이 자본시장 정상화를 외쳤음에도 결국 상법 개정을 포기한 배경에는 이런 비대칭적 권력 구조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결국 오늘날 한국 보수가 무능해진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이 경험한 경제성장은 반세기 전 박정희 시대에나 효과가 있었던 스탈린식 계획경제 덕분이었고, 이제 그 모델은 더 이상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다. 중앙정부 관료들이 공급과 수요, 그리고 가격을 결정하는 모델은 오늘날처럼 고도화된 경제에서는 비효율만 키울 뿐이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 모델은 더욱 비현실적이 된다. 나라에 축적된 자본이 없던 초기에는 창업주가 곧 회사였다. 마치 일론 머스크와 테슬라의 관계처럼. 그런 시절에 정부와 재벌의 편의를 봐주던 것은 기업 활동에 다소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재벌 3세로 태어나 개차반으로 살다 아빠 돈으로 비싼 로열티 주고 외국 햄버거 브랜드나 가져오는 무능한 경영인을 정부가 싸고도는 것은 기업가치에 해를 끼치는 일이고 국내 자본시장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보수가 가진 성장에 대한 기억과 경험은 대부분 1인당 GDP가 1,0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의 유산이며, 그 유효 기간은 이미 끝났다. 보수가 지지율에 개의치 않는 대통령을 만나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본 결과, 경제가 철저히 무너졌다는 사실은 바로 이 역사적 배경과 철학적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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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이 계획경제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정부가 민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이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폭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스탈린이 시인이 되고 싶었던 미하엘을 군수공장으로 내몰고, 도조 히데키가 자전거를 사고 싶었던 다카시에게 대신 전쟁 국채를 강매했듯, 한국 보수가 안전한 부동산 담보대출에 집중하려던 신한은행에 대신 위험한 큰 소상공인 대출을 늘리도록 강제하려면, 정부와 관료가 강력한 권력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명령을 거스르면 처벌할 힘을 가져야 한다. 계획경제는 늘 민간의 자유, 그리고 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더 많은 법, 더 복잡한 규제, 그리고 더 강력한 처벌을 들고나온다.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적 가치관은 민주주의적 시스템과 양립할 수 없기에 경제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갈등을 더욱 확산한다. 초등학교 입학연령 하향 시도에서부터 계임계 검열, 나무위키 차단, 생필품 가격통제, 수능카르텔 척결, R&D 지원, 그리고 의대정원 갈등까지. 정부의 온 부처와 관료들은 민간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마치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의 성범죄자처럼 사방으로 분출하며 갈등을 더욱 키웠다. 타협은 없다. 민간과 일일이 얘기하고 설득하면서 어떻게 중앙정부가 국가 경제를 "계획"하겠는가. 바빠 죽겠는데. 관료 출신이자 가장 K-보수적 이념에 심취한 대통령이 계엄이라는 희대의 광기를 분출한 그 배경에는, 민간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보수의 이념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대런 애쓰모글루가 지적한 대로 민간의 자율성과 정치적 포용성이 약화되는 것과 성장의 지속 가능성이 훼손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 결과 국가는 장기적 침체의 수렁에 빠진다. 이는 단지 경제적 후퇴에 그치지 않고, 표현의 자유와 지식의 확산, 창의성의 발현까지 억제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활력을 잃게 만든다. 지난 보수 정부의 일련의 정책과 태도는 이러한 경고를 현실로 옮기고 있으며, 마치 구시대적 국가사회주의의 유령이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 위를 떠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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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는 너무나 성공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이뤄냈기에, 과거의 방식을 지나치게 신뢰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개발독재 시절의 국가 주도 성장 모델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때 육사 출신들이 사회경제 전반을 독점하던 시대가 있었다. 대통령, 장관, 시장은 물론이고, 공기업의 감사나 대표, 심지어 민간 기업의 사장 자리까지 군 출신들이 점령했다. 그것이 효율적이던 때도 있었다. 1960년대의 한국은 매우 가난했고, 행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교육받은 엘리트도 거의 없었다. 당시에는 군의 행정력과 인재 풀이 민간보다 훨씬 우수했고, 실제로 사회 전반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군 출신이 사회를 주도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정치와 경제·사회 전반에서 물러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 시절을 이상적으로 기억하는 보수 이념만은 그대로 남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군대와 유사한 조직을 새롭게 찾았다. 바로 관료 조직이다. 엘리트주의, 수직적 조직문화, 강한 권력 지향성과 집단주의 등은 과거 군부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다. 관료 집단은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를 그리워하는 보수 세력과 궁합이 잘 맞았다 .그 결과, 과거 군인들이 차지하던 자리에는 이제 관료 출신들이 낙하산처럼 내려앉았다. 과거 군 출신들이 민간으로 내려가 낙후된 군대 문화를 퍼뜨려 조직을 병들게 했듯, 관료 출신들 역시 어진동의 후진 관료 문화를 민간에 전이시켜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끊임없이 터진 인사 참사들은 다수가 이 구조적 병폐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처럼 한국 보수는 철학과 현실이 완전히 괴리된 집단으로 전락했다. 겉으로는 친미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미국과 정반대인 스탈린식 계획경제를 추진한다. 자본주의를 주창하지만, 자본시장 질서를 해치는 재벌들의 편을 든다.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반자유적인 정책을 도입하며 환호한다. 심지어 계엄령까지 시도했다. 반미 보수, 반자본 보수, 반자유 보수.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들을 보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쯤 되면 그들의 극단적인 언어를 빌려 "너희야말로 빨갱이 아닌가?"라는 말이 나올 법 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들이 예고했던 대로 그들이 도입한 이 빨갱이식 시스템은 경제를 좌초시켰다. 이것이 오늘날 보수가 처한 위기의 핵심이다. 한국 보수는 철학적으로 파산 상태에 있으며, 스스로 그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 보수가 신봉하는 성장 모델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을 가장 빠르게 발전시킨 방식이기도 하다. 이 모델은 여전히 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유효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성적이 바닥이던 학생을 두들겨 패서 대학에 보내는 스파르타식 교사의 방식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 학생이 박사학위를 따고 세계적 연구자가 되어 노벨상을 받으려면 전혀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한국 보수는 슬럼프에 빠진 이 과학자에게 맞으면 연구가 잘 돼서 노벨상도 가능하다며,  어디서 새롭게 구해온 무식한 선생에게 몽둥이를 쥐여주고 연구실로 밀어넣은 셈이다. 왕년에 이게 얼마나 잘 먹혔는데! 라고 외치면서. 올해 대선에서 많은 유권자들은 여러 잡음과 논란이 있었음에도 야당 대표 이재명에게 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의 당선 이후 주요 시장 지표들은 한국 경제의 향후 회복 가능성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유권자와 시장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야당 대표의 처참한 도덕성보다, 보수의 끔찍한 무능이 나라경제에 더 해롭다는 것이다. 남 탓만 하며 어정쩡한 표정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한국 보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이런 구시대의 왜곡된 철학은 이제 퇴장할 때가 되었음을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다.

그 경고를 들을 귀가 아직 남아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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