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통독한 것은 단 한번 그것도 십여년 전 내 이십대 중반 언젠가였지만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하게 그려지는 한 장면이 있다.
냄새를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 그루누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지닌 한 소녀의 내음이 너무 탐이나 그를 빼앗고자 한다. 그녀를 죽여서라도. 이런 음모를 감지한 그녀의 아버지는 온갖 트릭을 동원하여 그녀를 도시로부터 대피시켰다. 뒤늦게 그녀의 자취를 좆아 그루누이는 성 밖에 나서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강렬한 열정을 느낀 것은 그녀가, 아니 그녀의 향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성문앞에 서서 침착하게 그녀의 행적을 가늠해본다. 모든 흔적과 증거가 그녀가 동쪽으로 향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단 하나 그의 후각을 제외하고는.
서쪽에서부터 그녀의 미세한 내음을 맡은 순간 그는 주저없이 그 방향으로 내달린다. 천가지 이정표와 만가지 증거들이 동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단 하나, 그의 코가 반대편을 가르키자 그는 주저없이 말머리를 틀었다.
* * *
그 옛날의 내가 그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기록한 부분은 전혀 다른 페이지였지만 한참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장면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만약 그루누이였다면 나는 그토록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내 커리어에서 지난 십년은 확신을 부수고 당위를 분쇄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내가 어찌 나에 대한 그런 강한 믿음을 가지겠냐만은. 내 어찌. 감히.
블로그 애독자입니다. ^^
답글삭제혹시 감명깊게 본 책 리스트를 알 수 있을지요? 저도 책은 꽤나 많이 읽는데, 어떤 책을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때그때 난잡하게 다른데 요샌 역사가 가장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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