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 (링크)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 (링크)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 (III) (링크)
반세기 전, FOMC를 앞두고 연방준비제도 의장이었던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주니어가 동료들을 설득해 금리 인상을 내부적으로 결정한 며칠 뒤인 1965년 12월 5일, 대통령 린든 존슨으로부터 서늘한 초대장이 날아왔다. 존슨은 마틴을 자신의 텍사스 목장으로 불러 처음에는 환대와 미소로 맞이했지만, 목장 내 저택의 깊숙한 곳에 이르자 그의 태도는 돌변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존슨은 마틴을 벽에 몰아붙이며 격렬하게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그는 “내 병사들이 베트남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내가 필요한 돈을 찍어주지 않는다”라고 얼굴 바로 앞에 대고 외쳤다. 마틴이 간간이 중앙은행의 책무를 상기시키려 했지만, 이는 오히려 존슨의 분노를 더 키웠다. 존슨은 욕설을 섞어가며 마틴을 인격적으로 몰아붙였고, 그의 격앙된 고함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키가 190cm가 넘는 대통령이 왜소한 연준 의장을 벽에 밀어붙이며 위협하던 장면은 당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얼마나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해 연준은 이미 결정한 대로 금리 인상을 발표했지만 다음 해부터 통화정책은 눈에 띄게 완화 기조로 돌아섰고 1967년 5월에는 50bp 인하와 함께 기준금리가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 인플레이션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후임 의장이었던 아서 번즈가 진정한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의 실패가 이미 마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어쩌면 마틴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영예로워야 할 은퇴 만찬에서 이 노쇠한 중앙은행가는 잠시 침묵을 머금은 뒤 “I've failed”이라는 문장으로 말문을 열었다고 했으니.
후임자 아서 번즈는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전미경제연구소를 거친 그는 자타공인 경제 전문가였으며, 과거 선거에서 닉슨의 패배가 지나치게 긴축적인 통화정책 때문이었다고 대통령에게 직언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금리 인하를 바랐던 닉슨이 연준 의장 자리에 앉힌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운전대를 잡은 이 신참 중앙은행장은 자신의 책상에 놓은 여러 경제지표를 보자 지금은 금리인하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행정부는 그가 소신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이 샌님 경제학자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철학을 이러쿵 저러쿵 설교를 늘어놓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재무장관과 백악관의 보좌관들은 아주 집요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아서 번즈에게 압력과 협박을 가했고 결국 연준은 이에 굴해 금리를 크게 내렸다. 그 결과 과열된 경제는 더욱 달아올랐고, 닉슨은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것은 폭발적으로 불어난 통화량과 거센 인플레이션의 파고였다. 그 선택이 어떤 시대를 열어젖혔는지는 오늘의 역사적 평가가 분명히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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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옆에 선 연준의장 파월, 그리고 린든 존슨과 악수하는 연준의장 마틴 |
1970년대의 기록적 인플레이션은 두 차례의 오일 쇼크와 여러 전쟁 같은 인상적인 사건들에 가려 마치 피할 수 없었던 우발적 비극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은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정치적 압력에 오염된 통화정책이 폭발적인 통화 팽창을 불러왔고, 파괴적 인플레이션은 그 필연의 끝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현재를 돌아보자. 지금 백악관과 연준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장면은 기이한 데자뷔를 일으키고 있다. 존슨이 마틴을 직접 텍사스 목장으로 호출한 사건과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파월을 공격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위협적인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당시와 지금 사이의 닮은 점이 대통령의 190cm 장신 하나가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례마다 차이는 있지만 많은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중앙은행이 정치적 압력을 받을 때 이후의 인플레이션이 뚜렷하게 지속적으로 상승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50년 전 중앙은행들이 물가를 잡는 데 실패한 이유는 독립적 통화정책의 원칙을 몰랐거나 경제학적 식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틴은 전후 19년에 걸쳐 연준의 독립성을 체계화한 최장수 의장이었고, 번즈는 연준 역사상 최초의 경제학 박사 출신 의장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처절한 실패를 겪었다는 사실은,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결정적 변수는 중앙은행의 모델이나 경제학 박사들보다 백악관과 의회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는 또한 어느 한쪽 진영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연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온 민주당 역시 지난 집권기에 금리 인하를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유력 대선 후보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마치 당적이 달랐던 린든 존슨과 리처드 닉슨이 똑같이 연준을 몰아붙였던 것처럼. 따라서 어느 쪽이 집권하든 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되고 선거를 앞둔 갈등이 극단적으로 고조된 오늘날 연준이 오롯이 중립적 데이터만을 근거로 금리를 조절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잠시 언급하지 않았나. 정치로 오염된 통화정책 뒤에 인플레이션이 따라오는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1970년대의 고통스러운 인플레이션이 탄생한 1965년 12월 5일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현재 우리가 마주한 장면들은 반세기 전의 모습들과 데자뷔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맞이할 불쾌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는 결국 이렇게 흘러가게 되었다. 아, 이미 헤겔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인간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배웠다고.

블로그 글은 진작에 다 읽고 1일 1방문 하며 선생님의 글을 기다리고 있는 애독자입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글삭제자산시장쪽은 어떻게 보십니까? 스태그플레이션의 재현이라기엔 그 때와 너무 상이하지않나요?
답글삭제물론 매우 다릅니다, 본문은 인플레를 잡는데 실패할 것 같다는 예측일 뿐인데 그게 심하게 실패하면 스테그플레이션의 형태로 오겠죠. 거기까지 가지는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삭제비트코인의 미래도 궁금해요
답글삭제비트코인에 대해 제 가장 큰 실패는 코인이 화폐인가라는 관점에 매몰된 것입니다. 코인은 화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화폐가 아닌 모든 것들의 가치가 0으로 수렴하는건 아니죠.
삭제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ㅠ
답글삭제선생님의 5년에 걸친 예측에 소름이 돋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현재가 인플레의 후반에 돌입하는 시기로 이제는 레버러지를 줄여야 하는 시기로 보시는지요
답글삭제이제 조만간 줄이거나 선별적으로 써야하는 시점에 진입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지만요. 1965년의 실패가 본격적으로 발현하는데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요
삭제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답글삭제관료들이 중앙은행 및 여러 금융회사의 팔을 비틀어서 정치인들에게 예쁨받으려는 건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ㅎㅎ
군인들이 정치하던 시절 정치인들이 국제그룹을 해체했던 때와 무엇이 다를까요? 지금은 군인들이 없으니 관료들이 왕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심합니다
삭제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통화정책에 대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혹시 관련 서적 추천해주실만한게 있을까요?
답글삭제대학에서 교과서로 쓰는 책들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삭제선생님 이번 이창용 총재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글삭제한심한 발언이죠. 공개적으로 사과해야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삭제시리즈의 첫 글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게 벌써 5년도 훌쩍 지났었군요. 향후 10년이 저의 은퇴를 결정하게 되는 시기라 투자에도 매우 조심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흘리는 10년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극과 극의 시대에도 어디 한쪽 치우치지 않고 정수만을 가지고 좋은 글 써주시는 것에 존경을 담아 감사드립니다.
답글삭제저도 기다리는 글이 오랫만에 올라와서
답글삭제너무 좋았습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관통하는 논리도 좋도 날카로운 비유도 너무 좋아합니다.
자주 올려주세요^^ 건강하세요
장기채는 앞으로도 별로 좋지않아보이네요. 이 글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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