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5.

착한 건물주, 못된 정부 그리고 빵구난 지준

착한 시리즈가 유행이다. 우한코로나 때문에 경기가 나빠지자 정부가 앞장서서 임대료를 인하하는 착한 건물주 운동을 선도하더니, 이제는 또 사지도 않은 물건의 대금을 미리 납입하라는 착한 소비자 운동을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정부는 4월 건보료를 예정대로 걷었고 6월 1일 기준으로 부과될 종부세의 공시지가를 십여년만의 최고치로 올렸으며 공기업/공무원들의 임금을 줄이거나 그러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타 경제 주체들에게 착해질 것을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은 반대로 행동하다니. 임대료를 내리는 건물주가 착하다면, 기회를 틈타 세금을 더 올리는 정부는 못된 정부인가.

윤리적으로 무차별한 경제활동에 착하다는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지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걱정해야할 것이 있다. 바로 연달아 빵구나는 지준이다. 지준이란 지급준비금의 약자로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예치해야하는 지급준비금적립액의 적수를 의미한다. 모든 은행은 고객 예금의 일정 부분을 중앙은행에 예치해서 자신들이 고객의 예금인출에 대비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하는데, 간단히 말해 모든 은행은 매달 특정 날짜에 중앙은행에 특정 금액을 예금해야한다. 만약 이를 못 맞추면? 우리 세련된 금융인들은 이를 전문용어로 빵구났다고 하는데 자금부에 오래 계신 분들이라면 이 용어를 듣자마자 문득 조인트가 얼얼해지는, 그런 트라우마를 불러 일으키는 마술적 단어라고나 할까.

아마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금융시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이 시스템이 어떻게 운용되고 돌아가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지준이 금융시장의 주목을 받은 적이 두번이나 있다. 올해 1월에 사상최대의 지준적수가 대량으로 발생했으며 이어 4월에 다시 한번 빵구가 났다. 상세한 내용을 공개된 자리에 쓰기엔 적절하지 못하지만(과거 경제전망을 맞췄다는 이유로 미네르바를 색출해 기소한 무시무시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길), 아마 각각의 날짜로 기사를 검색해보면 대충의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뒤의 실상은 기사에 설명된 것 보다 더 심각했다고 생각하길. 그러나 그 원인은 분명하다. 정부의 실패. 2020년이 시작한 지 고작 4달밖에 안되었는데 그 중 지준이 빵구난게 벌써 두 달이다. 그리고 두번 모두 정부가 시장에서 대규모로 자금을 환수하거나 지급일정을 바꾸며 벌어진 일이다. 열심히 일하는 기재부/한은 사무관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는 순전히 그들의 잘못이다. 또 그런 일이 벌어진 배경은 블로그에 쓸 수 없으니 지인들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시라.

작년 미국에서 9월 그리고 12월에 일어난 대규모 단기자금시장과 비슷한 일이 올해 1월 4월에 한국에서 벌어졌지만, 그 배경은 판이하게 다르다. 정부의 정책실패로 인한 이 지준부족사태는 현재 한국경제에서 벌어지는 일의 축소판이다. 정부는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으며, 정책이 필요한 순간에도 가장 멍청한 방법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빵구난 지준처럼 올해는 세수도 빵구나고 정부보조금도 틀어지는 등 각종 정책이 빵구나는 해가 될 것이지만 관료주의와 정치에 가려, 그 실수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일이 바로 5월의 지준일이다. 또다시 지준이 빵구나는 일도, 또 정부가 못된 짓을 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경제주체들에겐 착하기를 강요하는 것도 보지 않기를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합리적인 나라에 살고 있지 않다.



댓글 21개:

  1. 청와대 꼴통들 보면 하나같이 내로남불의 극치인데 (ex).꾸기,흑석겸) 당연한거 아닌가요? 하루에 새로고침 4번 이상씩 하면서 보고있는데 좋은 글 너무 감사드립니다.(ps.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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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하루에 한번씩 북마크 확인하는 2人 ㅠㅠ 오늘 글 보고 심장 멎을 뻔 했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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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치떄문에 선생님 글에 입문하게됬습니다 피터린치의 책을 읽고있는 주린이인데 선생님의 인사이트를 얻으려면 얼만큼 읽어야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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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만큼 나이 먹으면 자연스레 쌓이지 않을까요. 다들 귀찮아서 글로 옮기지 않을 뿐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이정도 인사이트는 다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저야 우연히 그게 금융이라 다양한 분들의 관심을 받는것 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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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선생님 연령대 여쭈어봐도 되요?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선생님같은 식견이 갖추어지는건지 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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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https://hugin00munin.blogspot.com/2018/12/2002-2-m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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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선생님! 정부가 지급하는 재난지원금 100% vs 70% 논쟁에서 네이버 여론을 보면 재정건전성을 위해서 70% 맞다고 고수하는 홍남기 부총리를 옹호하는 댓글이 많은데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재정적자를 보더라도 빠르게 유동성을 늘리고 수요 심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다른 예산 삭감 없이 100%를 주는게 맞지 않나요?? 왜 우리나라는 국방비와 공무원 월급을 깎아서 만든 돈을 재난지원금으로 꾸역꾸역 만들고 심지어 기부문화 장려라는 우스꽝스러운 캠페인을 벌이는지 이해가 안가는데.... 선생님은 재난지원금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민주당의 말이 맞는 건가요?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는 홍남기 부총리의 그래도 70%는 옳다가 맞나요 아니면 둘 다 황당한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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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은 재정을 늘리는게 악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30% 안 준다고 재정이 크게 절약되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부자라고 재난을 피해가는 것도 아닌데 100%를 주는것이 목적에도 부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재정건정성은 장기적으로 도달해야할 문제이지, 코로나로 심각한 경기위축이 예상될 때 꺼낼 말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부모님이 협심증으로 쓰러졌는데 병원에서 수술하자는 의사의 말에, "수술비 내고 나면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제 신용등급이 떨어질것 같은데요" 이러는 꼴이죠. 평소엔 뭐 하다가 이 시국에 건전성 운운하나요.

      재정건전성은 이럴때 쓰라고 관리하는겁니다. 코스피가 다시 2400 가고 GDP성장률이 크게 반등하면 모를까, 현재 시점에선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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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1&aid=0011591049

    이걸로 서울 주택 공급시장에 영향이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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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건 되려 공급을 막는건데요.. 당근 조금 줄테니 50%이상을 임대로 하라니 미쳤나요. 용산 정비창은 새로운 뉴스도 아닐 뿐더러, 저거 헐값에 분양하는건 코레일 부채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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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하나은행인가 지준율 체크가 20년동안 안돼서
    추가 납입 + 벌금 조금 쇼킹한 뉴스였어요...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이라는데, 1900년 초부터
    나라의 부를 쌓은 일본과 그저 30년 바짝 벌었던
    우리나라의 차이는 얼마나 날지 궁금하네요.
    일본 따라간다는게 칭찬이면 칭찬이지...
    참 막막한 실정입니다. 이민율 사상최대라는데....
    아무튼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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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 하나 말씀드리면 일본은 17세기부터 국제무역에 가담해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이 무슨 메이지 유신 30년 먼저 해서 선진국 된 것처럼 착각하던데 한국과 일본의 국제화 수준 차이는 300년이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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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 무역의 바탕이 된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은 제련술 덕분이였죠.. 그 기술을 막아버린 조선과
      기술자들을 대접한 막부가 지금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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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그 핵심을 경쟁이라고 봅니다. 천황과 막부라는 중앙기구가 있지만 사실상 봉건시대였던 일본은 서로가 격렬하게 전쟁을 벌여가며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격렬한 생존의 문제 앞에 상업과 기술을 천시하는 문화 따위는 자리잡을 수 없었겠죠. 아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주소복사가 안된다면 블로그 내에서 연은분리법을 검색해보세요.

      https://hugin00munin.blogspot.com/2015/07/blog-po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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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예전에 연은분리법과 관련된 역사적 이슈를
      기사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debt is money we owe to ourselves
      칼럼 잘 읽었습니다.
      어떤이는 폴 크루구먼을
      혜안을 잃어버린 경제학자라 평하지만
      저는 제 지평을 넓혀주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폴과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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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트럼프때문에 정치적 칼럼을 너무 쓰는게 문제지 아직도 좋은 글 많이 쓰시는데요. 권위에 기대는 걸 수 있지만 노벨상 수상자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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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네 감사합니다... 저 여쭤보고 싶은게 있는데
      제가 금융경제쪽으로 관심이 많아서 예전에는
      cpa나 cfa 준비해서 연차 쌓고 난 후 트레이딩 파트에
      들어가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제 막 재무관리 공부 중인 학생이라
      선생님께서 조언 해주신다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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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조금 건방진 말일 순 있겠지만 금융권 선배들이라고
      말들을 들어보면 대부분 텔러를 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애널이나 리스크 분석쪽으로 가고 싶은데
      주변 선배 대부분이 공사 공무원 준비 중이라
      마땅히 물어볼 데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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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제 생각엔 cpa나 cfa보다 영어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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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생각만 해놓은, 일주일에 외국 경제 기사
      3개 정도 스크랩 5W1H 정리 시작하겠습니다.
      밀린 Blomberg/Forbes/FT 읽으러 가겠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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