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30.

19세기 청전철폐와 21세기 공매도금지

친정을 선포한 고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임자 대원군의 흔적들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도입했던 여러 제도를 폐지하거나 되돌리면서 명목상의 이유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이는 상투적 수사에 불과했다. 그러다 이 미욱한 왕은 큰 사고를 친다. 당시 청나라의 화폐를 수입하는 것이 직접 화폐를 주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낮았기에 대원군은 청전(淸錢)을 국내로 수입해 쓰기 시작했고 이제는 민간 거래뿐 아니라 세금 납부까지 모두 이 화폐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고의 재정 역시 대부분 청전으로 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종은 육조판서는 물론이고 의정부 정승들과의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또 아무런 유예기간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 청전의 사용을 금지한다. 난리가 난 것은 백성들 만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국고에 수납된 청전 300만 냥이 휴지가 되자 조정이 쓸 돈이 없었으니 1주일 만에 조선은 파산에 내몰렸다. 졸지에 셀프로 거지가 된 고종이 재정을 담당하던 호조판서에게 물었다. "국고에 돈이 얼마나 남았는가?" 호조판서는 김세균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급한 지출과 사용이 금지된 청전을 빼고 나면 딱 800냥이 남습니다." 500년간 이어진 조선은 이제 단 1주일 만에 파산의 위기에 내몰렸다. 어떤 멍청한 왕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의 칙령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청전철폐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조정 대신들에게 대안을 마련해 오라며 윽박질렀다. 고종은 말했다. "청나라 돈 때문에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 지탱할 수가 없다.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다. 청전은 혁파되어야 하며 모든 세금은 반드시 상평통보로 거두라" 하지만 정작 백성들에게 인플레보다도 더 큰 고통을 안긴 것은 멍청한 왕의 독선적인 개혁이었고 나라 경제가 큰 혼란에 빠진 동안 그는 여전히 비단 곤룡포를 입고 쌀밥에 12첩 반상까지 곁들여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처먹고 가베(커피)로 입가심까지 했다. 결국 대신들은 조정의 지출을 벌충하기 위해 세금을 추가로 징수하고 나라가 보유한 자산을 팔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꿀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떠 환곡까지 팔아 치우기로 결정한다. 환곡은 흉년이 들어도 다음 해 농사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백성들에게 종자나 곡식을 꿔 주는 일종의 보험이었는데 고종은 이를 털어 모자란 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영의정 이유원이 반대했다. "환곡은 예기치 못한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이를 모두 돈으로 바꾸는 것은 원대한 계책이 아닌 듯 하옵니다." 하지만 고종은 고집을 꺾고 청전폐지를 유예하는 대신 조선의 몇 안 되는 복지제도를 털어먹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뻘짓에 뻘짓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백성을 핑계로 들었다. "(청전폐지가)참으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나라 재산에 손해가 나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근데 정작 나라 재산을 거덜내고 백성에게 큰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의 급진적 조치가 아니었던가.

비슷한 사건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2023년 11월 한국의 금융당국은 불법 공매도의 폐해가 매우 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겠다는 전격적 조치를 발표했다. 금융위기가 아닌데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것은 국내에서도 전례가 없던 일이고 해외의 사례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규제 당국의 의지는 확고했다. 불법 공매도의 폐해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지만 금감원이 압수수색을 펼친 결과 적발한 사례는 그런 비상조치가 과연 필요했는지 의구심을 낳았다. 규제당국은 먼저 두 외국계 증권사의 지난 몇 년 치 거래내역을 모두 뒤져 총 540억 원의 불법 공매도 사례를 적발했는데, 국내 주식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량이 20조 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흐르는 강에 콜라 한 캔을 부은 것처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금감원은 추가로 공매도 상위기관 14곳을 조사하여 1500억여 원의 불법 공매도 사례를 적발한다. 하지만 동기간 국내 주식시장 거래량이 총 몇 경원에 달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여전히 별 의미가 없는 수치에 불과했다. 

게다가 적발된 상당수의 사례들은 단순 실수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금감원의 자체 발표에서도 입증되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례들은 시스템 미비 때문에 발생했는데, 구체적으로 입력 실수나 대차물량의 중복 계산, 혹은 수기입력 과정에서 차입수량을 잘못 입력했거나 빌린 주식의 규모가 확정되기 전에 매도 주문을 제출하는 등, 대부분이 단순 착오나 실수에 의한 것으로 시세조종이나 미공개 정보의 이용 등 불공정거래와 연계된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국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들은 이미 적발된 두 회사에 역대 최대의 과징금을 때리겠다고 예고하고 있다. 

이 비정상적인 당국의 조치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공매도 금지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추측했다. 심지어 해외통신사인 블룸버그조차 4월 총선을 목적으로 내놓은 조치라는 평가를 내렸다. 저명한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한국의 어이없는 조치를 두고, 이것이 바로 MSCI가 한국을 선진국 지수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다, 윤석열 정부가 MSCI 승격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하다 총선 전에 목표 달성이 어렵자, 갑자기 뒤통수를 쳤다고 평가했다(링크). 투자계의 구루인 짐 로저스 역시 이 조치는 명백한 실수고 아주 어리석은 짓이라며, 정부가 이런 짓을 벌이기 때문에 한국은 금융 중심지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혹평이 어디 언론뿐이겠는가. 금융시장의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발표 직후 매수 사이드카를 발동했던 주식시장은 바로 다음날 반대쪽 사이드카를 걸며 이 전대미문의 병신 놀음에 화려한 병신굿으로 화답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선진국 대열에 끼워달라고 매달리던 한국의 규제당국이 갑자기 돈키호테로 돌변하여 자살골을 넣으면서도 그들은 투자자를 보호하겠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 전수조사로 적발된 공매도의 규모는 극히 미미했고 그마저 대부분 단순 실수로 드러났다. 오히려 정부의 난데없는 조치로 출렁인 금융시장의 시가총액의 변화가 적발된 공매도의 규모보다 몇백 배가 더 컸으니 투자자들에게 고통을 안긴 것은 공매도가 아닌 바로 금융당국이나 다름없다. 마치 구한말 조선 백성에게 혼란을 안긴 것이 청전이 아니라 고종의 청전철폐 조치 그 자체였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에 빙의한 금융당국은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시장과 기싸움을 벌이며 압수수색의 범위를 크게 늘렸다.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구한말 고종만큼이나 무능하고 미개한 한국 규제당국과 정부-여당이 금융시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것.    

그리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혹독하다. MSCI는 최근 연례 시장 접근성 평가에서 플러스’(+)에서 개선이 필요한 ‘마이너스’(-)로 바꿨으니 시간의 문제라고 여겼던 선진국 지수 편입은 아예 없던 일이 된 셈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정부가 시장접근성을 보장하겠다는 신뢰를 정면으로 어겼기 때문에 차후 공매도가 재개되고 정부의 스탠스가 바뀌더라도 MSCI 측은 계속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한국을 선진국 지수에 편입하는 것을 소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2008년 처음으로 한국이 선진국 지수로의 편입을 신청한 이후 오랫동안 우리 금융인들은 우리나라의 주식시장이 선진국으로 분류되기를 기다려왔다. 그것이 실제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유입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그 역사적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기재부는 마지막 빗장이었던 외환시장의 접근성을 열어주는 전격적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떤 멍청한 아마추어 무리들이 금융계에 우우 몰려들더니 그 소망을 제멋대로 갈아다가 자신들의 비루한 정치적 야망을 위한 거름으로 썼다. 그러고서도 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으니 그 무리들은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병신들을 봤나. 이 덜떨어진 고종의 DNA를 이어받은 이들은 우리나라가 왜 후진국인지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피부로 깨닫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오히려 잘한 조치라고 항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 초 한 대담에서 연초부터 외국인들의 주식 매수 자금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공매도를 금지한 것이 잘한 조치라고 평가했는데 그 모습은 청전을 폐기한 뒤 치졸한 변명으로 일관했던 고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30년 전의 전의 조선이 그랬던 것과 똑같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금융시장을 어지럽히는 건 덜떨어진 관료들의 관치금융과 멍청한 규제들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은 일일 거래대금이 20조가 넘는 시장에서 실수로 몇백 주 어치 매도 주문을 낸 실무자들이 아니라, 바로 미개한 당신들에게 있다. 이 사태는 21세기 한국의 금융시장에서 가장 큰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금융시장의 진정한 호러는 이것이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를 즐겨 읽고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를 중시하겠다는 보수정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               *               *


결국 6월의 마지막 날까지 공매도 금지는 해제되지 않았고 MSCI는 한국의 선진국 지수 편입을 불허했다. 지난 정부에서 진보 지식인들이 추태를 부리고 자신의 밑바닥을 보이며 몰락했던 것과 같이 이번 정부에서도 우리는 여러 지식인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공개적으로 공매도 금지에 반대한 김주현 금융위원장을 제외하면 현 정부의 경제학자/금융계 출신 인사들은 모진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앉은 김소영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자신이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했던 발언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부끄러워하기를 바란다. 이복현 금융감독위원장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벗어나는 과분한 직분에 앉고서도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느라 절대로 좋은 평가를 줄 수 없었는데, 이번 사태로 또 하나의 큰 업보를 쌓았다. 그리고 김동조 대통령실 비서관. 한때 트레이더였던 그가 이 공매도 조치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부당한지 모를 리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막지도, 그렇다고 비서관 직을 사임하지도 않았다. 트레이딩보다 블로거로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Hubris라는 필명을 사용하곤 했는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의 말에 귀를 막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다 판단력을 잃게 되는 것" 그리고 이 필명은 이름값을 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마지막 회사를 그만둔 후 그는 한 포스팅에서 자신의 거시경제 전망이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자찬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트레이더가 그처럼 이른 나이에 트레이딩을 그만두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경우 뿐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던가. 그리고 그의 부끄러운 닉네임처럼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깊디깊은 Hubris의 늪에 빠져있다.

왼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고백컨대 2024년판 병신오인방이 쓰이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아직 5명을 다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모든 내용은 작성자 개인의 주관적 의견임을 밝힙니다) 


2024. 6. 8.

멸망을 이끈 대한제국의 고종, 그리고 대한민국의 세종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근대 이전부터 크게 벌어졌던 조선과 일본의 잠재력을 감안한다면 조선이 성공적으로 개혁을 이루어 독립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개화의 기회가 있었더라도 조선은 실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도자였던 고종에게는 그럴 의지도 역량도 없었으니까. 여러 대중매체들이 그를 비운의 개혁군주로 묘사하는 것과는 반대로 고종은 조선이 전쟁 한 번 없이 멸망하게 된 중요한 원인들을 제공했다. 그의 여러 실정과 잘못된 조치로 국가의 재정은 더욱 빈곤해졌고, 그는 몸소 나서서 관직을 팔며 부패를 권장했으며, 국제정세에도 어두워 외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조선이 마지막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던 마지막 기회였던 갑오개혁을 무산시키고 부패한 적폐 세력인 민씨 척족을 등용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고종 그 자신이었다. 또 근대적 의회 시스템과 헌법을 도입하자던 독립협회를 군대를 동원해 해체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체포한 것도 고종이었으며 이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사람 중에는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고종의 밀서를 받아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 중 한 명인 이위종까지도 당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동시에 이를 야기한 고종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니 더 볼 것이 있으랴. 구한말-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이끈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을 지지한 데에는 고종과 왕실에 대한 좌절에 가까운 실망이 큰 몫을 했다.

고종은 서구식 제복을 입고 미국에서 수입한 캐딜락을 타고 커피를 마시며 영국 건축가가 설계한 서구식 건물에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의식과 국가의 시스템을 개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근대화의 핵심은 권력을 분산하고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바꾸는 데에 있었지만 반대로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던 이 아둔한 군주는 무려 반세기에 걸친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온힘을 다해 전제적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의 통치제도는 되려 조선 전기보다도 크게 후퇴한 1인 전제 군주정으로 돌아갔다. 다만 나라가 그를 유지할 힘이 없었을 뿐. 미개한 시스템의 정점에 있던 고종은 어떻게 보아도 개혁의 대상이었지, 결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                    *                    *


100여 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정부와 거기에서 일하는 관료들은 늘 숨 가쁘게 이런저런 개혁안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중 대다수는 변화하는 환경과 민간의 수요를 맞추어 따르는 대신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정부와 관료들이 통제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시대 고종이 그랬듯이. 거창한 구호로 시작된 개혁안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철학으로 귀결된다. 정부가 통제를 잘 해서 발전하겠다. 그리고 그 기저에 놓인 철학만큼이나 쉰내 나는 디자인의 hwp 문서의 핵심은 거창한 포부와 그럴듯한 문구로 치장된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따라서 이런저런 규제와 지도를 강화하겠다, 그래 우리 관료들이. 관료조직이 대개 요지부동이듯 정권이 바뀌어도 이런 구태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하다. 고작 2년 밖에 안된 이번 정부에서도 자본시장 선진화 방안, 밸류업 프로그램, 금융개혁, PF 연착륙 대책 등. 이런저런 방안들이 나왔지만 그 세부내역은 필요한 개혁이나 시장경제와 질서를 강화하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정부의 감독 권한과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으로 채워져있다. 정부가 마련한 개혁안들 중 국가의 간섭을 줄이고 민간의 영역을 확대-강화하는 것이 뭐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라.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개혁이나 프로젝트의 실패 사례는 수두룩하게 많다. 최경환이 이끌었던 초이노믹스의 증시 정책은 가장 보수적인 인사들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수십 년째 동북아 금융허브를 외쳤지만 금융도시로서의 서울의 순위는 10년 전보다 되려 내려갔으며 그사이 십여 개의 외국계 금융사들이 서울에서 철수했거나 사업 규모를 크게 축소했다. 금융계는 그 주된 원인으로 글로벌 기준 어긋난 비합리적 규제들과 관료들의 조선식 갑질을 꼽는다. 여러 차례 밀어붙였던 경제자유구역과 각종 동북아 xx 중심지 정책은 모조리 다 실패해 이제는 그저 그런 신도시들 사이에서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았으며 그 가운데 엄청난 예산과 자원, 그리고 인력이 소모되었다. 비단 이것이 경제정책이나 금융에 국한된 문제랴. 산업이나 통상, 혹은 건설이나 심지어 문화 예술이나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모두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정부에 이어 이번 정부도 주택공급에 나서고 있지만 민간의 손발을 규제로 꽁꽁 묶어두고 정부가 나서서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방안은 애초에 성공할 수가 없었기에 주거안정의 골든 타임은 이미 지났다. 안타깝지만 이 외에도 21세기 들어 국가가 주도한 대형 프로젝트나 개혁안은 거의 대부분이 실패해 성공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국가가 아니면 리드할 수 없던 소수의 토목사업이나 비영리 정책을 제외하면.

이런 실패가 거듭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체급이 이제는 정부가 주도하는 계획으로 이끌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나라의 전체 GDP 규모가 20억 불 남짓하던 시절에야 소수의 유능한 관료들이 효율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기업들을 윽박질러 국가의 발전방향을 세우는 것이 가능했지만 같은 방식으로 2조 달러를 바라보는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50년 전만 해도 민간의 경쟁력이 열악했기에 가장 우수한 인력들이 정부로 모여들었으나, 이제 똑똑하고 진취적인 인재들은 더이상 행시를 보지 않는다. 오늘날의 관료조직은 두뇌를 독점하지도 못하고 민간에 비해 경쟁적이지도 않은, 뒤처진 조직이 되었다. 당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같이 일해본 관료들을 떠올려보라. 과연 그들이 민간을 이끌고 발전방향을 제시할 깊이와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인지.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통제 욕구는 더욱 강해진다. 관료조직의 전문성과 효율성이 민간에 비해 뒤처질수록 이 기관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조선 말기에 나라를 통치할 능력을 상실한 고종이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더욱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을 억눌렀던 것처럼. 심지어 관료들은 민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허용하는 것을 일종의 위협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그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가상자산이 각광을 받던 시기 법무부 장관은 거래소를 폐쇄하겠다고 겁박했고 당시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어른들이 올바른 투자를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며 어리석으면서도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같은 시기 미국의 하원이 "우리는 가상화폐의 내재가치에 논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가상화폐를 자유롭게 거래하는 일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논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자유주의적 관점과 완벽하게 대비된다. 이에 힘입어 얼마 전 SEC는 비트코인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ETF를 승인했는데, 이와 반대로 코인의 거래를 금지한 국가로는 이집트, 이라크, 중국, 카타르, 오만,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방글라데시 등이 있다. 우리나라 관료들의 평균적 의식은 OECD보다 저 아프리카 나라들에 더 가깝다. 그들의 이런 후진적이고 극단적인 통제 성향은 최근 직구 금지 사태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관료들은 미국과 EU와 같은 선진시장의 인증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한국의 인증을 별도로 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시 반입을 금지할 것이라는 규제를 내놓았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각 나라마다 배타적인 인증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과거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에 수입 공산품의 수가 적던 산업화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많은 나라들은 서로의 인증을 인정해 주는 협약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관료들은 그런 노력은 게을리하면서도, KC 인증을 찍는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규제를 만들어 나간다. 그래, 우리 관료들의 권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니까.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이런 뒤떨어진 시스템과 철학으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 장애물들을 보면 그 끝에는 꼭 관료들이 있다. 식약처, 금감원, 과기부, 정통부, 기재부, 법무부, 관세청, 국세청, 보건복지부 등 규제가 규제를 낳고 규제의 본 목적은 사라지고 이제는 규제 그 자체를 위한 규제만 남아 복지부동인 관료들이 시장과 기싸움을 벌이고 민간에 갑질하는 모습만 가득하다. 규제.규제.규제. 규제는 관료들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정부는 늘 새 규제를 도입하며 해외의 사례를 들먹이지만 그 반대의 사례는 단 한차례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직구규제를 발표하는 인상적인 표정의 이정원 국무조정실 국무2차장

대개 경제발전이 더디고 후진 나라일수록 관료들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정부와 관료들의 역할이 작다. 전자의 대표주자가 중국이고 그 반대편에는 미국이 있다. 2020년 말,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었던 마윈은 "미래의 시합은 혁신의 시합이어야지 감독 당국의 (규제) 기능 경연 시합이어서는 안된다"라며 규제당국을 거세게 비판했고 당국은 강도 높은 보복에 나섰다. 그 결과 마윈이 계획했던 사상 최대 규모의 IPO는 취소되었고 뉴욕에 상장되었던 알리바바의 주가는 폭락을 거듭했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국가 기관인 NASA가 주도하던 우주탐사를 민간 기관인 스페이스 X가 대체했다. 그 과정에서 스페이스 X는 NASA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기도 했지만, 미 정부의 관료들은 괘씸하다며 민간의 발전을 가로막거나 견제하기는커녕 제도를 개선하고 협조에 나섰다. 이런 철학의 차이 때문일까. 한동안 안정되었던 두 나라의 시가총액의 비율은 이후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고 달러 기준으로 보면 그 격차는 더욱 두드러진다. 관료의 계획경제가 이끄는 나라와 시장경제가 이끄는 나라, 어느 시스템이 더 우수한지는 이미 명확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관료들은 중국을 지향하는가, 미국의 모델을 지향하는가.

이런 논의를 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관료제를 예찬하는 사람들은(대개 공무원들이다) 우리 행정부에 얼마나 우수한 고학력 능력자들이 많은데 일부의 실패 사례로 전체를 재단하냐며 항변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부의 실패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지 일부의 문제가 아닌데다가, 관료제에서는 개개인의 능력보다 조직의 구조가 그 효율성과 아웃풋을 결정한다. 그리고 한국의 정부 조직은 공부를 잘하는 인재들을 바보로 만드는 일에 특화된 조직이다. 그래서 독특하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아래로 갈수록 효율적이고 생산적인데 반해, 직급이 올라가고 상위 조직으로 갈수록 비합리적이고 멍청하게 퇴화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당신들은 과거 산업시대 발전을 이끈 선배들보다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사명감이 더 크지도 않지 않은가. 나는 여러 번 관료들이 민도를 거론하며 관료 주도형 통제 모델을 옹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선진국과 비교하면 그들과 우리의 민도의 차이보다 관료들의 의식수준의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위직일수록. 게다가 일반 국민들의 수준과 관료들의 격차는 구한말 이래 지금이 가장 적고,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인데, 언제까지 시대착오적인 선민사상에 젖어 민간과 시장을 통제하려 들 것인가.

세종특별시는 그 이름에 걸맞게 대한민국 관료제가 처한 기형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행정에 특화된 특별시를 자처하면서도 이 도시의 구조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세종시와 가장 가까운 KTX 역은 오송역인데 여기에서 택시를 타고 아주 한참을 달려야 세종시 정부청사에 도착한다. 그 뒤에도 여러 부서를 방문하려면 발이 아프도록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어야 한다. 점심이라도 먹으려 외부로 나가려면 더욱 그렇고. 그러려면 대중교통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차로 다니기에도, 버스를 타기에도 여러모로 불편하다. 택시 숫자마저 모자르다고 한다. 게다가 이곳은 기존의 도시를 확장해서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많은 공무원들이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다시 택시를 타고) 오송역 플랫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오가고 있고 아직 때묻지 않은 젊고 능력 있는 사무관들은 이 정체된 도시에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다 함께 시나브로 침전하고 있다. 이건 실패한 도시다. 세상에 공항은 물론이고 기차역 하나 없이 고립된 수도가 있던가? 갈라파고스 세종. 그리고 도시가 고립된 만큼 거기에서 일하는 관료들도 세상과 고립되어 점차 도태되다 이제는 심지어 자신이 얼마나 뒤떨어졌는지조차 모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관료를 위한, 관료에 의한, 관료의 도시가 이렇게 비효율적인 설계로 실패했다면 그들이 그리는 한국의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 세종시가 그렇게 된 것은 정치권 때문이라고? 그래, 그런 이유도 있지. 하지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행정부가 있던가? 어공이든 늘공이든 그들이 국회와 국민들을 설득할 능력이 없다면, 그들의 권한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

오래전 이건희는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 이제 세계에서 순위를 다투는 우리나라 기업은 감히 말하건대 1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관료와 정치의 수준은 과거보다 후퇴했으니 4류와 5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부가 내놓는 개혁안이란 결국 5류의 눈치를 보는 4류가 1류를 선도하겠다고 나대는 꼴이다. 그들은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고종은 기나긴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개혁을 시도했지만 애초에 미개한 전제 군주정과 개화는 양립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세계적으로 밸류체인이 통합되고 경쟁하는 시대에 관치와 선진화는 양립할 수 없다. 중세의 제도인 과거제를 모방한 행시로 선발된 인사들로 꽉꽉 채워진 관료조직이 자신의 전근대적 권한은 강화하면서 이미 선진사회와 경쟁하는 민간을 선도하겠다는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백여 년 전 고종이 죽어야 조선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제는 세종시의 권력이 죽어야 한국이 산다.


*                    *                    *


나의 가까운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세종시의 여러 부처에서 관료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가족들 중 몇 분도 경제 부처나 규제에 관련된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하다 퇴직하셨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히 일하던 인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현실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며, 또 관료제와 조직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그들 개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오도되어 사기를 더욱 낮춘다는 점도 알고 있다. 민간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수, 걸핏하면 들어오는 비난의 여론, 적체된 승진에다가 암울한 지방근무까지. 물론 관료조직을 개혁하는 일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개혁하는 일도 포함해야 한다. 

개혁의 방향은 관료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처벌은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 처우를 대폭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관료들에겐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지나치게 적은 보수가 주어지는데, 이러면 관료들이 정치인이나 이권을 제공하는 집단/단체/회사에게 회유될 가능성이 커지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들이 남는다. 이는 국민 모두에게 크게 해가 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관료제의 개혁은 그들의 연봉부터 대폭 상향하는 것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24. 4. 21.

모에화 된 라오콘-이윤성

1863년 에두아르 마네가 신작 [올랭피아]를 공개하자 관객들은 크게 분노했다. 기존의 회화에서 여성의 누드를 그릴 때에는 대부분 신화적 인물을 통해서 성스럽게 표현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로 추정되는 여성의 누드를 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새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였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구도와 도상을 차용했으니, 대놓고 비너스를 창녀로 바꿔 그린것 아닌가. 기법 면에서도 엄격한 인체비례와 정확한 원근법을 십계명처럼 따르던 기존 회화와는 달리 비례도, 원근법도 맞지 않는 거친 붓질로 나체를 그렸으니 보수적인 기존의 관객들과 미술계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잘난 상류층 나으리들께서 한데 모여 헐벗은 여자의 그림을 점잖게 관음 하기 위해서는 누드화들이 성스럽게 표현되어야 했는데 마네는 대놓고 창녀를 거칠게 표현했으니 그들이 어찌 찔리지 않았을까. 이 발칙한 작가는 그렇게 유산계급의 위선과 가식을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이윤성-Laocoon

오늘날 이윤성의 작품들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던 그는 미술학도들이 연습하고 배우던 고전미술의 소재들을 차용하면서도 이를 일본 만화의 기법들로, 또 매우 선정적으로 표현한다. 이번에 공개된 신작들의 소재 역시 그리스 신화-라오콘에서 따온 것인데,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동명의 조각이 미켈란젤로나 엘 그레코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기에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그리고 작가는 발칙하게도 본래 남성인 라오콘과 그 두 아들을 여자로 바꾸어 그렸다. 이를 모에화라고 하던가. 그뿐만 아니라 본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표현했다는 라오콘을 야하게 뒤틀다니. 이 아이콘이 미술사에서 가치는 위상을 고려하면 이 얼마나 발칙한 시도인가. 흑백으로만 묘사된 이미지와 100호를 넘어서는 커다란 크기로 인해 작품의 섹슈얼한 요소들은 한층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를 일본 망가처럼 표현했으니, 아무리 전시장이라지만 이 그림들을 쳐다보고 있기가 왠지 부끄럽다. 그리고 그를 통해 관람객들은 자신의 가식을 깨닫는다. 비너스나 아프로디테의 누드를 실컷 보고 즐기던 작자들이 마네의 누드 앞에서 얼굴이 벌게지며 화를 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 것도 같다. 

리히헨슈타인과 무라카미 다카시는 기존의 미술계가 낮추어보던 카툰이나 망가도 훌륭한 현대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하는 무수한 아류들이 뒤를 이었다. 아트페어에 가면 터줏대감처럼 늘 있는, 비슷비슷하게 쉽고 귀여운 이미지를 공장처럼 찍어내놓고 와닿지 않는 해설만 주절주절 달아둔 채 평론가들과 수집가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아양을 떠는 그림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쉽게 입고 버리는 SPA 브랜드의 옷을 팔겠다고 억지웃음을 짓는 점원들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윤성의 작품은 발칙하게도 우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되묻는다. 왜, 유럽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들 앞에선 셀카 찍어 인스타에 올리더니 이건 못 올리겠어? 뒤샹이 모나리자로 섹드립을 날릴 때엔 꺅꺅 거리며 멋있다고 하더니 모에화 된 라오콘은 마음에 안들어? 뭐 네 눈에 고전은 고상하고 망가는 좀 없어보여? 하지만 고만고만한 취향을 가진 부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귀여운 척 애교를 떠는 뻔한 그림들보다 도발적 질문을 던지는 그의 작품이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마네의 올랭피아가 그랬던 것처럼.

더욱이 우리는 문화계의 홍위병들이 몰려다니며 멋대로 예술을 재단하고, 밥줄이 간당간당한 예술가들이 그게 두려워 자아 검열을 펼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판 문화대혁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작가들은 얌전한 모범생이 되어 논쟁적이지 않은 작품들만 내놓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술이 그렇게 고분고분했던가. 반 고흐, 쿠르베, 세잔, 피카소, 뒤샹 등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많은 작가들이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들은 모두 당시 미술계를 지배하던 주류에 반기를 들던 악동들이었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특히 이윤성 같은 발칙한 작가들을 만나는 것이 반갑게 느껴진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마네의 다른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관람객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걸어야 했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한 관객들이 자꾸 우산으로 그림을 훼손하려 했기 때문이랬던가. 그리고 아마 이윤성의 전시회에도 이처럼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의 지평을 개척하고 넓힌 것은 얌전한 모범생들이 아닌 짖궂은 악동들이었다. 거듭된 자기검열과 과도한 PC의 시대에 이윤성의 작품들은 이렇게 말하는듯 하다. 이게 불편해? 그럼 병원에 가, 미술관에 기웃거리지 말고.

좌: 이윤성의 라오콘                        우: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 

2024. 4. 13.

레임덕과 데드덕의 경계에서

얼마 전 학창시절 가까웠던 친구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친구가 연신 술을 들이켜며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연구원으로 일하는 친구가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현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던 친구들이었다. 나 역시 덩달아 이 정부의 금융정책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따지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런 우리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조용히 잘 익은 고기를 착착 집어먹던 변호사 친구가 다음의 한 마디로 대화를 정리했다. "거봐 내가 말했잖아, 검사 애들이 그렇다니까" 

*               *               *

지난 대선은 음주운전자와 초보운전자가 맞붙은 선거였다. 그리고 국민들은 고심 끝에 아무런 정치 경험이 없던 초보운전자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버스의 핸들을 꼬옥 잡아 쥔 이 초보운전자는 혹시 자신이 운전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착각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마음대로 밟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은 그의 보좌관들도 맞다, 운전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연신 박수를 쳤다. 물론 그들 역시 운전 경험은커녕 면허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초보운전자는 좌회전을 했다 우회전을 했다 길을 잘못 들어 유턴을 하기를 반복했고 조수들은 전방이나 내비게이션, 혹은 승객들을 바라보는 대신 운전자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급가속과 급정거를 반복하는 이 초보운전자의 서툰 운전 덕에 승객들은 멀미를 하기 시작했고 기사에게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사와 그 보좌관들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를 쳤다. "야 인마, 꼬우면 네가 기사해"

대통령실은 이런 묘사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 임하는 유권자들이 느꼈던 감정은 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 대 108, 임기가 불과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여당이 선거에서 참패한 이유는 그만큼 야당의 후보들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실의 현실 인식과 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행정부는 입법이나 사법부보다도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삼권분립이라고 하지만 한 쪽이 나머지 두 쪽보다 월등하게 큰 비대칭적 구조라고 할까. 중간선거가 대통령에 대한 찬반투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배경에는 이런 역학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1번을 찍은 이유는 야당과 진보진영의 철학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이런 행정부의 독선에 브레이크를 밟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몇몇 평론가들은 몇몇 형편없는 야당의 후보들이나 조국의 부상을 두고 정치지형의 한계나 유권자들의 수준을 논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은 그저 대통령의 오만함과 독선을 막고 싶었을 뿐이다. 그 브레이크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고. 

그 대통령실이 어떤 태도로 국정을 꾸려나갔는지 돌아보자. 정치경력이 전혀 없었던 대통령은 자신이 잘 알던 검사들을 등용했고 그렇게 각 요직은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내가 거듭해서 비판했던 금감원장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추진하던 정책들은 완전히 잘못된 현실 인식에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윤석열은 은행들의 독과점이 서민 이자 부담의 원인이라며 카르텔을 혁파할 것을 주문했지만 지방은행과 저축은행 등 사실상 100개가 넘는 금융기관들이 경쟁하는 여수신 시장에서 독과점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또 대통령실은 높은 사교육비의 원인이 교육 카르텔에 있다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 엄정한 수사를 주문했지만 실제 적발된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균형재정을 위해 R&D 예산을 줄였다고 발표하자 과학계가 반발했는데, 정부는 여기에도 카르텔이 있다며 칼을 빼들었다.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도 경험도 없던 이 선무당들은 각 업종을 넘나들며 사람을 잡기에 바빴다. 한 대통령실 인사는 검사 시절 해당 분야를 수사해 본 적이 있기에 전문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전과자가 자신이 검찰수사를 받아보았으니 형사법 변호사 일도 할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착각이다. 이렇게 용산 선무당들은 우우 몰려다니며 오늘은 여의도, 내일은 대치동을 돌아다니며 생사람 잡기를 반복했는데, 그리고서도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사실 수사를 해보니 네가 나쁜 사람이기에 잡았다라는 태도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이런 초보운전자들에게 정무감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대통령은 유죄판결을 받은 지 3달도 채 되지 않은 김태우를 사면한 뒤 곧장 보궐선거에 내보냈다. 총선을 불과 반년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별 가망도 없어 보이는 구청장 한 석을 노려보기 위해 전국구 지지율을 통째로 희생시키는 얼토당토 없는 베팅이 실패하자 대통령실은 무리한 승부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한국을 MSCI 선진국 지수에 넣어달라고 떼를 쓰던 금융당국은 편입이 불발되자 놀랍게도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다는 조치를 들고나왔다. 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 사상 초유의 사태를 놓고 대내외 금융기관에서는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시장에서는 하루 만에 매수 사이드카가 걸렸다 바로 다음날 매도 사이드카가 걸리는 촌극이 이어졌다. 십수 년간 애쓴 시장의 신뢰와 선진국 지수 편입 가능성을 깨끗하게 날려버리고도 대통령실은 주가와 지지율을 올리는데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꺼낸 의대 증원이라는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정부는 갑자기 당장 내년부터 의대 정원을 65%나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2천 명이라는 수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출되었는지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반발하여 전공의들과 대형병원 의사들이 파업에 나섰는데도 정부는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고 겁박만 거듭했을 뿐 파업에 대비한 효과적인 백업 플랜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 것은 다름 아닌 정부 자신이었고 그 뒷배경에는 대통령실이 있었다. 더욱 비참한 점은 그 비용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지지율은 오르기는커녕, 되려 크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아마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 치자, 그렇다고 우리가 저런 범죄자들보다 우리가 못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현재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지 이재명이나 조국이 아니다. 국민들은 이재명이나 조국을 택한 것이 아니라, 무능한데다 오만한 당신들에게 제동을 거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당신들이야말로 그들을 닮아가지 않는가. 현 정부에서 계속해서 여러 인사 문제가 논란이 되었는데, 거기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인사비서관 이원모와 법률비서관 주진우는 뻔뻔하게도 텃밭인 강남과 해운대에 공천 신청을 했다. 지지율을 열심히 갉아먹은 장본인들이, 나머지 지역구들이 망하든 말든 나만 금배지 달면 된다는 당신들과 대선에서 패배하고도 정치적 책임을 지기는커녕 계양에 출마한 이재명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게다가 대통령은 배우자에 대한 의혹을 해명할 기회를 걷어차며 자신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정치적 자산을 불태웠다. 영부인이 당선 후에도 명품백을 선물로 받은 일이 드러난 뒤에도 그는 사과하기를 거부했으며 제2 부속실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도 않았다. 이후 계속해서 이 사건의 본질은 불법 촬영과 정치공작이라며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대통령실의 모습은 비리 의혹이 드러난 후에도 아직 법적 결론이 나지 않은 사안이라 법무부 장관을 사퇴하지 않겠다며, 되려 검찰개혁을 강하게 외치던 조국의 모습처럼 치졸하고도 초라했다. 과거 이를 두고 한동훈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국민이 볼 때 공정한 척이라도 하고 그러려면 일단 걸리면 가야 되는 것이지, 걸리고서도 "아니 그럴 수 도 있지" 하고 성내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것이라고.


*               *               *


예일대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좀처럼 반론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위험성이 있다" 그 대표적 케이스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하버드를 졸업한 엘리트들로 구성된 케네디 행정부가 설계한 피그스만 작전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와 뛰어난 에이스들이 설계한 이 작전은 과도한 낙관론을 바탕으로 불가능한 작전목표를 구상했기에 시작과 동시에 삐걱거리다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윤석열과 대통령실의 인적 구성은 어빙 교수가 언급한 집단사고에 빠질 전제조건에 부합한다. 

나는 여전히 이 정부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 사실 우리는 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정부의 성공을 바라야 한다. 설령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정부여도. 이번 총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레임덕과 데드덕의 경계를 오가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총선의 패배가 대통령실에게 있는 것은 아는지 선거 직후 총리와 대통령 비서실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유권자들은 대통령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 셈이나 다름없다. "이 길이 맞아 인마 꼬우면 너가 기사 해" 라고 외치던 검사 윤석열에게 국민은 대통령 윤석열이 될 마지막 기회를 허락한 것이다. 대통령실이 그 서늘한 함의를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2024. 2. 13.

Adarashi Fantasy-최경태

구글 검색창을 열고 최경태 작가를 검색해 보자. 아, 그전에 성인인증부터.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이나 사무실이라면 화면을 가릴 것을 강력히 권한다. 변태로 매장당하고 싶지 않다면. 20세기에 마광수가 있었다면 21세기에는 최경태가 있다고 할까.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지, 그의 그림 앞에서는 마광수조차도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일 지경이니까. 그가 표현했던 소재들은 사회적 통념이나 규범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오죽하면 표현의 자유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미술계에서도 찬반 여론이 첨예하게 대립했을까.  

1957년에 태어나 뒤늦게 미대를 졸업한 그가 민중화가로 제대로 활동해 보기도 전에 군부정권은 무너졌고 운동권의 시대 역시 막을 내렸다. 동시에 함께 연대하며 투쟁했던 사람들은 시나브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민주화 운동 경력을 스펙으로 삼아 출세 가도에 나섰고 어떤 이들은 일상으로 돌아가 집과 차를 샀다, 그리고 민중화가 노선의 막차를 탄 그만 덩그러니 남아 붓을 들었다 조각칼을 들었다 하며 방황하다 칩거를 시작했다. 그렇게 4년간 웅크려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세상으로 다시 뛰쳐나왔다. 헐벗은 소녀들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세이셔널 한 포르노그래피 작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민중예술에서 포르노그래피로 급격히 전향한 그 배경을 두고 많은 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을 덧붙였지만 그는 자신의 변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나라에서 화가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김일성을 그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포르노를 그리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전자의 시대가 끝났기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고. 작가는 "그래, 나는 포르노가 좋다"라고 외치며 엄청나게 센세이셔널한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고 있노라면 마광수 따위는 수줍은 새색시같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을. 그러면서도 그는 사회와 정치를 향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김영삼이 3당 합당으로 대통령선거에 나서자 그는 김영삼의 선거 포스터와 포르노 사진들을 합성해 색정시대라는 작품을 내놓았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던 해에는 하체를 노출한 채 다리를 벌린 여성을 작게 그려 넣고 큰 글씨로 "씹새끼들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라고 적은 작품을 그렸다. 또 다른 작품에선 개 목걸이를 목에 걸고 팔걸이의자에 교복 차림으로 앉은 여학생의 이미지 위에 "우파 정당 한나라당은 자폭하라"라는 구호를 크게 적어 넣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공권력이 일일히 정해주던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 포르노그래피란 나는 내가 꼴리는 대로 살겠다는 정치적 반항과 저항의 도구와도 같았다.

그는 결국 2001년 개인전을 연 후 음화전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항소를 거쳐 대법원까지 간 끝에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 31점이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당시 그의 전시회 타이틀이 "여고생-포르노그라피2"였으니, 입버릇처럼 표현의 자유를 외치던 미술계와 평론가들조차도 둘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일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덕분에 최경태 작가는 가장 유명한 포르노그래피 작가가 되었고 이후에도 그는 서정적이면서도 폭력적이고, 도발적이며 변태라고 불릴만큼 센세이셔널한 그 작품세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 동료 작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한결같이 개기는 건 (최)경태 뿐이야"

최경태 작가가 유죄판결을 받은 지 대략 20년이 지났다. 마지막 군사정권의 수장도 죽었고 공권력의 검열과 탄압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더욱 자유롭고 관대하게 변했을까. 잊힌 이 작가의 옛 작품들을 다시금 둘러보고 있노라면 불편한 현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자를 들고 치마 길이를 재는 경찰은 없지만 익명성 뒤에 숨어 남의 옷차림을 재단하고 린치를 가하는 인터넷 자경단의 숫자와 영향력은 전례 없이 커졌다. 국민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주입하던 이들은 모두 죽고 없지만 이제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핑계로 서로가 서로를 단속하고 검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거기에 위화감을 한가득 끼얹은 것은 한때 작가와 연대하며 공권력에 대항하던 운동권 정치인들의 오늘날 모습일 것이다. 작가가 21세기에도 숨가쁘게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공권력에 뻐큐를 날리는 동안 586, 아니 이제 686 정치인들은 권위주의로 무장하고 자신들이 몰아냈던 권력자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안을 지지하고 사회적 린치를 조장하며 성적 폭력을 묵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작가는 억압당하는 민중을 강간당한 여성들로 표현했는데, 그 작가를 지지한다면서 동시에 실제로 어린 여성들의 속옷 안에 손을 쑤셔 넣기에 바빴던 정치/문화계 진보 인사들의 민낯들은 이 아이러니의 표상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자칭 진보적이라 자처하던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잡아 더욱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었던 그 시점에 작가는 창작의 의욕을 잃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꼴려야 그릴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토로했다. 2021년 2월 어느 날, 곡기를 끊고 막걸리만으로 연명하던 그는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고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그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누구고 또 그 경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 온갖 질문들을 던지고 억압자들에게 꼴리는 대로 뻐큐를 날리던, 가장 센세이셔널 했던 작가 최경태는 그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기자: 포르노가 더 이상 불법이 아니고 성적인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작가님은 더 이상 (여고생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작가: 예, 그리지 않을 겁니다.


2008년 Adarashi Fantasy전시 작 중에서. 
(그나마 덜 센세이셔널한 작품)


2024. 2. 9.

청진기와 6펜스, 그리고 아비트라지

병에 걸린 한 남자가 신에게 애원하며 이렇게 빌었다고 한다. '하나님 이 병에서 낫게 해주신다면 집을 팔아 그 돈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얼마 안 가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그는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가 아까워졌다. 못된 생각을 하면서도 신의 벌을 받기가 두려웠던 그는 다음과 같은 꾀를 내었다. 바로 매수자에게 그 집을 시세의 1/100에 불과한 금화 한 닢에 파는 대신, 기르던 고양이 한 마리를 금화 99개에 사야 한다는 조건을 다는 것. 매수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기괴한 소리를 꺼내는 집 주인과 거래하는 것이 꺼림직했지만 그래도 원하던 집을 시세보다 약간 싸게 사는지라 이 계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을 판 그 남자는 신이 나 교회로 달려가 금화 한 닢을 바치고 이렇게 말했다. '전 약속대로 집 판 돈을 모두 바쳤습니다 하나님' 

트레이더라면 여기서 훌륭한 아비트라지의 기회를 포착할 것이다. 고양이와 집의 가격은 반드시 왜곡될 것이니까.* 그런데 우리 현실에도 이런 기괴한 거래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대한민국의 의료시장. 우리나라의 병원에서 필수의료는 바로 집이 되고, 반복된 보험진료나 비보험 항목은 고양이가 된다. 이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보험과 비보험이 어떻게 다른지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시스템은 모든 의료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보험과 비보험. 필수적인 의료 서비스는 보험으로 분류하여 나라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정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인 미용/성형 등은 비보험으로 분류하여 병원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 보험으로 분류된 의료 서비스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그 비용을 부담하는데 대략 70-80%를 보험에서 부담하고, 치료를 받은 개인은 나머지 20-30%를 낸다. 이 비율은 몇몇 항목의 경우 10% 미만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엄격한 고정가격제를 도입하는 여느 시장이 그렇듯이 의료시장에서도 가격의 왜곡으로 인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보험 진료는 복지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개인이 부담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데, 심지어 그 가격조차도 비용의 대부분을 지불하는 정부가 정하므로** 보험 진료의 수가는 늘 과도하게 낮다. 따라서 필수적인 진료를 보는 병원은 다음 두 가지 행위로 손실을 보전해야 한다. 하나는 추가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보험 진료를 대량으로 하거나, 임의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비보험 진료를 끼워 파는 것. 집을 싸게 팔면서 망하지 않으려면 고양이도 비싸게 팔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환자도 이 시스템에 만족했다. 다른 나라였다면 약 10-15만 원어치 청구서를 받았을 진료를 단돈 만 원으로 받을 수 있으니 안 갈 이유가 없다. 목이 칼칼해서, 콧물이 나서, 그냥 회사가 가기 싫어서, 등 오만가지 이유로 한국인들은 병원으로 달려간다. 안 가는 것이 바보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2017년 이전 시장에서 결정된 MRI 촬영의 비급여 가격은 대략 60-70만 원 선이었다. 하지만 2018년 MRI를 보험 진료로 포함하자 심평원은 해당 진료행위의 가격을 약 27-29만 원으로 고정했고, 그중 환자가 직접 내는 금액을 그 절반도 되지 않는 8-17만 원으로 책정했다.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량은 증가한다. 2017년 140만 건에 불과하던 MRI 촬영 건수는 코로나로 병원 이용이 어려운 2020년에도 무려 354만 건으로 폭증했고 이에 따라 MRI‧초음파 검사 진료비 역시 2018년 1,891억 원에서 2021년 1조 8,476억 원 10배 가까이 뛰었다.

그렇게 병원과 환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수요공급 곡선은 새로운 평형점에 도달했다. 한국인들의 연간 진료 횟수가 OCED 평균 대비 약 2.5배에 달하는 수준에서. 그렇다면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고 있을까? 바로 건강보험료였다. 공공기금이 고양이를 비싸게 사주니 집을 싸게 파는 의사도 집을 싸게 사는 환자도 모두가 만족하며 미소 짓는 것이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찌어찌 해서 어영부영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이 기형적 시스템이 갑자기 붕괴하기 시작했다. 문재인케어로 보험의 영역이 급속히 확장되자 흑자를 기록하던 건강보험이 갑자기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조차도 정부가 물가 상승률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로 건강보험률을 올린 결과다. 이렇게 막대한 지출에도 불과하고 시민들은 병원을 이용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언제부턴가 대학병원 응급실은 환자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고, 엄마들은 백화점의 샤넬 매장 대신 소아과를 향해 오픈런을 뛰기 시작했으며, 동네에선 미용이 아닌 진짜 피부과 진료를 하는 병원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참고로 동기간 경제활동 인구가 계속 증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령화로 인한 영향은 이에 본격적으로 반영되지도 않았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은 잘못되어 있다

정부와 대중들은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그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 물론 한국의 국민당 의사 수는 OECD 평균보다 낮으니 다소 늘어나야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수치는 10년 전에 비하면 다른 나라들보다 빠르게 개선되고 있고, 특히 서울의 경우 의사들의 수는 OECD 평균보다도 훨씬 높은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느끼는 의료 서비스의 질은 과거보다 악화되었으며 그 추세는 서울이라고 다르지 않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의 수가 부족하기보다 그 배분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2024년 의료수가 인상률
첫 번째로 의료 수가의 왜곡이 커졌다. 이전부터 한국의 의료 수가는 다른 나라들보다 크게 낮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지속적으로 물가 상승률, 혹은 병원을 운용하는데 필수적인 월세나 최저임금이 오르는 속도에 비해 수가는 현격하게 천천히 인상되었고 이 불균형은 매해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특히 2021년 이후 기록적인 물가 상승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의료 수가를 낮게 유지해 이 왜곡은 더더욱 커졌다. 따라서 의료시장의 참가자들은 필수진료의 수익성이 개선되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될 것이라 예측했을 것이고, 따라서 병원의 경영진은 응급실이나 외과와 같은 필수의료에 대한 투자를 줄였을 것이다. 이런 그들의 결정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고양이를 끼워파는 집의 가격이 적정 가격보다 낮을수록 고양이는 반드시 비싸져야 하고, 그를 비싸게 사는 기금은 더욱 빠르게 고갈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괴리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고양이를 거래하지, 집을 거래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미용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들 수 있다. 미용시장의 수요는 국내뿐 아니라 관광객을 통해 국외에서도 빠르게 유입되고 있어 기존 시장의 의료 인력을 빠르게 빨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미용시장의 경우 대부분의 진료가 시장가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고양이 문제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그 결과 지난 몇 년간 필수진료과에서 이탈하는 의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 이제 약 1/4에 달하는 의사들이 미용 혹은 연관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의료시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두 가지 사안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첫 번째 문제는 의료 수가를 시장가격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고, 두 번째 문제의 경우 미용시장을 의사 외 다른 의료인들에게 일부 개방하면 된다. 의사들은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미용기기를 다룰 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부작용을 우려하지만, 지금처럼 필수의료과에서 의사가 급격히 유출될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 더 크지 않은가. 따라서 다른 나라들처럼 미용시장을 일부 개방하는 것이 적은 사회적 비용으로 더 큰 부작용을 방지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빨라야 10년 후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 방안들은 즉각적으로 의료시장의 구멍을 보완할 것이다.


*               *               *


왜곡된 수가를 방치하면서 급격히 성장하는 미용 의사의 수요를 일반 의사의 공급으로 대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양이/미용 의사와 필수의료 의사 간의 격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추가로 공급되는 의사는 대부분 고양이/미용 의사로 빠진다. 이는 순수 필수의료만 담당하는 대학병원의 응급의학과 전공의 모집률이 매년 빠르게 하락하는 현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고양이 의사가 더 이상 빼 먹을 것이 없거나, 혹은 미용시장의 공급이 포화되어 비급여 수가가 빠르게 하락하는 시점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건보재정의 파탄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 미용시장의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좀처럼 포화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필수의료 서비스의 수가와 자가 부담률을 높이고 낮은 난이도의 미용시술의 의사가 아닌 의료진에게 개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현재의 시스템에서 단순히 의사만 늘린다고 의료 서비스의 소비자들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증적 증거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서울의 인구 천 명당 의사의 수는 3.6명으로 OECD 평균을 상회하고 여기에 한의사까지 포함할 경우 4.1명으로 OCED 내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게 된다. 여기에 인구밀도까지 고려하면 서울의 의료접근성은 가장 높은 수준임을 시사하는데, 이는 별다른 예약 없이도 대부분의 진료과에서 예약 없이 병원을 찾아갈 수 있다는 우리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서울시민들은 의사의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그렇지 않다. 의대 증원을 지지하는 서울시민들의 비율은 84.1%로 전국 평균 84.3%과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인구 천 명당 의사 수가 가장 부족한 충청이나 세종, 강원이나 제주보다도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 명당 의사의 수는 OECD 평균 보다 빠르게 증가하는데 반해(+13% vs +8%) 같은 기간 의사의 수를 늘려야 한다는 여론은 낮아지기는커녕 되려 크게 높아졌다.(84% vs 69%) 이는 시민들이 느끼는 의료 시스템의 공백이 단순히 의사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빠르게 늘린 의사들의 수가 지방의 의료공백을 메워 전국 모든 지자체의 의사 수가 서울과 비슷해진다고 해도 국민들은 여전히 의료 서비스의 불만을 가질 것이다. 지금 서울 시민들이 그렇듯이.


*               *               *


나는 의대 증원을 반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의료인의 수가 좀 더 늘어나는 것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당장 정원의 2/3을 늘려야 할 정도로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그 부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과들은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아주 소수의 과를 제외하고는 예약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 응급한 상황에서 의료 서비스를 찾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그 부족을 느낀다. 응급실에서, 대학병원에서, 그리고 수술실에서. 정상적인 시장 상황이라면 우리는 얼굴에 울쎄라 써마지를 받을 때보다 응급실이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때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설계한 이 의료시스템은 정확하게 반대로 작동한다. 이 경우를 우리 금융인들은 시장이 왜곡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대개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된 시장에서 나타난다.

인위적인 가격통제로 인해 경제주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비슷한 사례로 한국전력을 들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전력 생산단가는 급격히 상승했지만 공급가격이 통제되어 있어 한전은 매년 기록적인 수준의 적자를 내야 했다. 이 구조에서 양적완화를 한다고 해서 한전의 시총이 삼성전자만큼 커지지 않는다, 전력회사의 숫자를 늘린다고 적자가 해소되는 일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이 회사의 주가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왜곡된 가격을 바로잡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매일 퇴행하는 의료시스템의 저변에는 왜곡된 의료수가가 있다. 이 왜곡된 가격이 존재하는 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의사들은 필수의료 대신 피부미용과 고양이를 파는 의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의사의 수를 늘린다고 해서 그 격차는 결코 줄어들 수 없다. 

서머셋 몸은 고갱을 모티프로 하여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썼다. 여기에서 달은 이상의 세계를 의미하고 6펜스는 세속의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소설에서 한때 주식 브로커였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6펜스를 버리고 달을 찾아 타히티까지 찾아갔지만 거기에서 나병에 걸렸다. 죽어가는 삶의 마지막 기간 동안 그는 영혼을 쏟아부어서 최후의 걸작을 그리지만, 완성된 그림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잿더미로 사라지고 만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필수 의료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에게 스트릭랜드 처럼 6펜스 따위는 잊어버리고 달을 쫓아 청진기를 들고 타히티만큼 외진 바이탈과 수술실로 향하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스트릭랜드 같은 괴짜나 슈바이처 같이 고결한 사람은 몇 없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6펜스를 찾아 고양이와 미용의 세계로 떠났다. 일부 사람들은 왜 의료계에는 청진기를 들고 달을 바라보는 스트릭랜드가 없냐며 의사들의 도덕성을 비난한다. 하지만 내 눈에 그들의 도덕성에는 별문제가 없다. 마치 아비트라지 기회를 포착한 트레이더들이 최대한의 수익을 내기 위한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의 경제적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만약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70만 원짜리 MRI를 남의 돈으로 공짜로 찍는 시스템을 박수 치고 찬성하는 일반 대중의 도덕성 역시 지탄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환자를 살리는 의료 행위에 낮은 수가를 책정한 이 시스템이야 말로 가장 사악한 악마라는 것이다. 



*집을 팔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양이를 구해야 한다,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늘 고양이를 팔고 싶어한다. 따라서 둘이 지불하는 고양이의 가격은 반드시 벌어지게 된다. 이 때 집을 팔려는 사람과 집을 사려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고양이를 사고파는 계약을 맺는다면 그는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가격을 부담하는 것은 건강보험공단이고 가격을 정하는 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지만 둘 다 정부의 일부인 보건복지부의 관할이다.




2024. 2. 5.

신과 함께, 그리고 정의와 함께

태초로부터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물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최초의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등장한 이후 몇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의를 선과 악이라는 절대적이고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구별해왔다. 선한 존재가 행하는 것이 곧 정의이며, 또 그 존재는 정의를 행하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 따라서 정의를 논하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신의 뜻에 더 맞는지를 논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태고의 철학은 종교와 가까이 맞닿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과 그의 대리인들이 다스리던 세계가 붕괴한 이후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문명의 주류로 자리 잡자 사람들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관념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선악의 개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편리와 행복을 정의의 기준을 삼기 시작했다. 이렇게 퍼지기 시작한 공리주의는 구성원들의 행복의 합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의 기준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18세기 말 당시 퍼지기 시작하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도 대체로 일치했기에 서구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은 서구사회의 한계를 경험했고 동시에 공리주의가 온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문제점 역시 깨달았다. 가장 유명한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의 경우 사회 전체의 행복을 개선하기 위해 소수의 불량배나 부랑아들을 가둘 수용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회시스템은 가장 극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나치였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그들은 한 명의 장애인을 보조하는데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지출되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는 것이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독일이 지배하던 유럽 전역의 소각로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 동성애자들이 불타며 비누와 카펫, 그리고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번역: 한 명의 유전병 환자를 위해 국가는 매일 5,50마르크의 비용을 지불한다
/ 그 5,50마르크는 한 건강한 가족이 하루를 살 수 있는 돈

전후 정의에 대한 논쟁은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부터 출발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존 롤스는 해묵고 비틀린 공리주의 파편 위에 몇 가지 원칙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정의론을 완성했다. 그는 정의의 개념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도입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천국에서 한데 모여 회의를 연다고 가정하자, 그들은 자신이 부자로 태어날지 혹은 가난한 구두공의 아들로, 아니면 자폐인으로 태어날지 알 지 못한다. 어떤 사회적 지위나 배경을 가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의롭다는 것이다. 그의 정의론을 대입한다면 공리주의적 관점으로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의 사회시스템은 정의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태어나기 전 무지의 베일 상태에 있었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학살당할 수도 있는 그 시스템에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이론이 아닌,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잣대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신이라는 존재를 창조하기도 전에 영장류들은 흑과 백, 선과 악, 아와 비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철학자들이 공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기 전부터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규범을 마련했다. 롤스가 태어나기 전에도 인간은 공감능력을 발휘해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장애를 가진 개체들을 돌보고 먹여 살렸다.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정의 내리기 한참 전부터 이 잣대들은 우리의 본능에 내재되어 있던 셈이다. 


*               *               *


최근 장애인 자식을 가진 한 유명인이 촉발시킨 논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정의의 기준과 그의 해명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해당 사건을 철저하게 흑백의 관점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상대가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나쁜 사람이며, 따라서 내가 행하는 것은 정의롭다. 선 혹은 악 만이 존재할 수 있는 이진법의 세계에서 나의 정당함을 입증하는 것은 곧 상대의 불의를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유명인이 선고가 나온 바로 그날 대중에서 자신의 입장을 공개한 것은 해당 교사의 유죄판결이 곧 자신의 무죄판결과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의 세상은 0과 1로만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 둘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유명인은 언어폭력을 저지른 교사를 교육계에서 퇴출시켰기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믿겠지만 동시에 그는 여러 장애우들과 그 부모들에게서 헌신적인 태도로 일하던 유능한 교사를 앗아갔다. 그는 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들을 일반 학급에 편입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 결과 다수의 아이들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더 큰 자폐아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이런 일은 새 학교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공리주의적 본능은 그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도 이 불편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설령 우리의 아이가 자폐아로 태어난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쩡한 아이들이 그에게 지속적으로 얻어맞거나 노출된 성기를 보고 트라우마를 가지는 시스템에 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설령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그런 제도는 옳지 못한 것이다. 그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학교와 사회 전체에게 무제한적인 이해와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무제한의 인내는 부모조차도 보여줄 수 없다. 입장을 바꾸어 아들이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고, 더 힘이 세고, 더 자폐가 심한 학우들과 같은 반이 되어 폭행을 당할 때에도 그들은 자녀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런 요구는 매우 이기적이고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그가 창작한 등장인물들은 매우 단순했다. 나쁜 놈은 나쁘고 착한 놈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결국 착하게 끝난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이 복잡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안으로 얽힌 이 문제를 자꾸 선악이라는 이진법적 시각으로 접근한다. 상대는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고 그를 상대하는 나는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물론 나는 발달장애를 겪는 아들을 가진 그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한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보다 덩치가 큰 자폐아에게 맞아야 했던 아이들과, 그 성기를 보고 놀랐을 여자아이들과, 소송에 시달리며 폭력 교사라는 자괴감에 시달렸을 선생과, 따르던 선생님을 잃고 덩그러니 놓인 다른 장애우들과 또 그들을 눈물로 보살피며 탄원서를 쓰던 다른 부모들에게도 공감한다. 그렇기에 나는 안타까운 그의 결정과 행동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부모에게는 신일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세상 모두가 야훼에게서 등을 돌려도 아브라함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신과 함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신은 정의롭지 않다. 더욱이 그 아이가 상처입히고 괴롭히는 이들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신 아니었던가. 자식을 신처럼 여기며 편들어 주겠다는 아비의 부정을 누가 뭐라 하겠나, 다만 정의까지도 알뜰살뜰 챙기겠다는 그의 무모한 이기심과 과도한 욕심에 혀를 끌끌 찰 뿐이지.